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10일 중 제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2. 9. 20:27

2020년 2월 10일 중 제5주간 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초대 원장이었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 6,53-56)

 

Whatever villages or towns or countryside he entered,
they laid the sick in the marketplaces
and begged him that they might touch

only the tassel on his cloak;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솔로몬은 주님께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웅장한 집을 지었다고 말한다(제1독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라도 손이 닿기를 청하였으며, 손을 댄 이들은 모두 치유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들의 행동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군중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는 병자들이 낫기를 간절히 청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어떤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겨 호기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 계산대에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놀란 부인이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팔고 계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답니다.”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시 뒤에 말을 쏟아 냅니다.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사랑과 평화도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주셔요.” 그러더니 또 덧붙입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 이웃을 위해서도 사고 싶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고 있답니다.”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바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필사적인 간절함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만나려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자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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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한 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 밑의 설명을 보니, 우리나라 민화 ‘파초도’라고 합니다. 소위 풀 나무라고도 불리는 ‘파초’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민화라 그런지 나무인지, 열대 정글을 그린 것인지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이 파초도를 보고서 뭐라고 말할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각양각색의 대답입니다.

그림 하나만으로도 각양각색의 답을 얻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떨까요? 더군다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거짓말쟁이나 정신적으로 아픈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할 때는 늘 겸손의 모습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겸손보다는 교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참 많이 하지요.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때로는 협박의 말도 합니다. ‘이거 해 주지 않으면, 저 이제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이 사장님께 요구사항만 계속 말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습관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 조만간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오라고 명령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찾아갑니다. 또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하곤 합니다. 전혀 찾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의심을 하면서 오히려 주님 곁을 떠납니다.

주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님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늘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시간이 더 이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릴지, 아니면 오늘을 시작하는 날로 삼을지는 우리의 선택이다(파울로 코엘료).



인간 관계.

어느 곳에 강의하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 들려서 강의 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카페는 특이하게도 현금을 받지 않더군요. 투명한 회계 처리를 위한 것인가보다 하며 신용카드로 계산했습니다. 잠시 뒤에 주문했던 커피를 들고서 창가에 앉아 노트북의 화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카페 안이 시끌벅적해지는 것입니다. 어르신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내 돈을 안 받겠다는 거야? 이거 돈 맞다고!!”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현금으로 계산을 하려 했고, 카페 직원은 신용카드 외에는 결제할 수 없다고 하니 화가 나신 것입니다. 어르신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돈인데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잘못 아닐까요?

직원은 명령받은 대로만 할 뿐이겠지요. 여기에 한 직원이 어르신의 화를 더 불러일으켰습니다. 글쎄 소란을 피우면 신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르신은 더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어르신, 여기 규칙이 이런가 봐요. 제가 어르신께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드로 계산하려고 할 때, 어르신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뭔데? 나 돈 많아!”

이렇게 말씀하시고 화를 내시며 나가셨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섰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나 봅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도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만날수록 삶은 더 긍정이 된다

-전삼용신부-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학기 초에 ‘우수한’ 아이들로 편성된 학급이 ‘열등한’ 학급으로, ‘열등한’ 학급은 ‘우수한’ 학급으로 컴퓨터에 잘못 입력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는 5개월이 지난 뒤 학사관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황한 학교측은 컴퓨터의 오류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결과가 놀랍게 나왔습니다.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열등하고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둔한 학급의 점수는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단히 우수한 아이들로 여기고 교육하였고,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본인 안에서 샘솟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믿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으로 그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을 쓴 울리히 슈나벨은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삶의 결과는 자기 확신이 자아내는 생각을 증명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애인과 해어졌다면 그는 이미 생각으로 자신은 애인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애인과 해어지며 ‘거봐, 결국 내 생각이 맞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일면 맞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게 세상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든 이들을 데려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그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은 이들은 정말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큰 긍정입니다. 더 큰 믿음입니다. 작은 것을 들어주시면 큰 것도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되게 하신 데에는 그들의 희망을 꺾지 않아서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희망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가까이하며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고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롱펠로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도 롱펠로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산보를 하면서 후진하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운전자가 내려와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물도 주고,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별 탈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운전자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길에서 쓰러졌고, 걱정되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길가다가 넘어진 사람이 되었고, 운전자는 엄청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지만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고 정든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제사와 율법과 예배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겁니다. 비록 성전이 없어도, 나라가 없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자녀임을 잊지 않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시비를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인과응보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필귀정의 자연법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이던 할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엘 갔습니다. 할아버지를 진찰한 의사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잠시 후에 깨어났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내말도 안 듣더니 이제 의사 말도 안 듣네. 의사 선생님이 죽었다고 하잖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하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할머니와 비슷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 되셨습니다. 놀라운 표징과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지금 이 순간순간들이 모두 놀라운 표징이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반영억신부-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당신은 이미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끝부분에 있는,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계시고,
사람들이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서 병이 나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옷자락 술’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면서,
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옷자락 술’은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져서 병이 나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을 안 믿고 ‘옷자락 술’만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만일에 그 ‘옷자락 술’을 신격화하고 섬긴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병자들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어떤 성물 같은 것에 의지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미신이다.” 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내용’이나 ‘믿음의 수준’이 어떤지 판단하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은 그냥 주님께 맡겨두고,
우리는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올바르게 주님을 믿고 있는 ‘참 신앙’인가?
아니면 ‘옷자락 술’을 믿는 것에서 그치는 ‘미신’인가?”

자기 자신의 믿음이 ‘참 신앙’인지 ‘미신’인지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1) 단순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다.”
라고 믿으면 ‘참 신앙’이고,
“‘옷자락 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미신’입니다.
(‘참 신앙’의 수준에서는 어떤 성물이 없어도 믿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신’의 수준에서는
자기가 믿는 그 성물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2) 소원이 이루어지든지 안 이루어지든지 간에
모든 결과를 주님의 뜻에 맡길 수 있는가?
맡길 수 있다면 ‘참 신앙’이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해 달라고 고집부리면, 그것은 많이 미숙한 신앙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3)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의 모습도 식별 기준이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충실하게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참 신앙’이고,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주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끝나버린 다음에도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참 신앙’이고,
실망하고 좌절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참 신앙’으로 주님께 간청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이나 ‘믿음의 내용’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딱한 사정만 보셨고,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믿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도 아니고,
고쳐 주신 다음에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베풀어 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병자만 고쳐 주셨는데(마르 6,5-6), 그것은 ‘믿음을 먼저 가져라.’ 라고
요구하신 일과 같지 않은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을 안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 주려고 해도 청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병을 고친 몇 명의 병자는 예수님을 믿었고,
믿었으니 청했고, 청했으니까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고, 청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의 ‘자비 실천’도 예수님의 자비와 같아야 합니다.
만일에 ‘불우이웃 돕기’를 하면서 그 대상을 신자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또 비신자들을 대상에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예비신자로 등록할 것을 조건으로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자비 실천’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무런 조건도, 제한도 없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들이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으면서도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한상우신부-

아픔의 자리가
끝내 만남의
자리가 됩니다.

상처의 기쁨이
만남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나자신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봉헌합니다.

봉헌은 주님과의
진실한 접촉입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나의 상처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빛나게 하십니다.

서로의 상처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상처에서 길을
만납니다.

상처가 끝내
거룩한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상처에서 시작되는
치유이며 믿음입니다.

어쩔 수 없는
제 아픔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상처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강렬하게 체험합니다.

"그들(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마르 6,54).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일행과 함께 배에서 내리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육화의 신비이니,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오늘 이때는 매우 구체적인 육화의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마르 6,54).
누군가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건, 보는 이 내면에 이미 상대의 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거나 소문을 들었거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분을 접한 이들이지요. 그냥 스쳐지나거나 망각 속에 우겨넣지 않고 기억 안에 그분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알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을 자기 존재 안에 모시고 있었던 것이지요.

"뛰어다니며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6,55).
그들의 앎이 매우 역동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연민을 가졌던 지방 곳곳의 병든 이웃들에게 지금 누구보다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부치고 발 벗고 나서서 구원이 필요한 이와 구원자의 만남, 접촉을 주선합니다.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 청하였다"(마르 6,56).
그들은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알아본 그분께 직접 청을 드립니다. 자기 이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들고 아프고 고통 겪는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주님께 간청을 드리는 겁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결과가 참 아름답지요! 그들의 관심과 수고로운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제 일처럼 감응하며 희생을 바친 그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알아본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이들로 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더욱 빛납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 안팎에 존재하십니다. 실제로 그 지방에 오셔서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을 알아볼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한 그들은 분주히 봉사하는 "외적 활동"과, 주님께 청하는 "기도"로 세상의 고통과 예수님의 현존을 잇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떤 신분이건 이 자체가 거룩한 직무 수행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주님의 계약 궤를 성전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에 모시는 장엄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1열왕 8,12-13).
솔로몬이 사랑과 경외심으로 가득차 주님께 아룁니다. 인간이 아무리 엄청난 성전을 짓는다 한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걸맞을 수야 없을 테니,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닌 솔로몬이 지금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생색내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영광에 맞갖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만큼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께 감사하다고, 그래서 당신께 제 깜냥을 다해 거처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고 아뢰는 것이지요.

"짙은 구름"
그렇습니다. 성경 저자들이 곧잘 주님의 현존을 구름으로 묘사해 왔듯이 주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십니다. 그분은 좀 알 것 같다가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 중에 누가 감히 그분을 선명히 보았다고,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드러나실 분이면 하느님이 아니시지요...

그런데 짙은 구름 속에 계시는 분이 피와 살을 취해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게다가 누추하고 초라한 우리 내면에까지 개의치않고 들어오셔서 머무르시고 거처를 삼으십니다. 솔로몬이 외친 "웅장한 집"은 못되어도 이미 친밀하고 정감 넘치는 "현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기쁨에 뛰어다니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모으고, 또 그분께 제 일보다 더 간절히 청원을 넣습니다. 주님을 모시는 일에 꼭 장엄한 예식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랑, 주님을 향해 불타는 사랑이면 족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도 솔로몬처럼 주님께 외칩시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에 넣을 단어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참으로 자기다운 말들이 저마다의 삶의 지향을 담아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박한, 순수한, 거룩한, 정결한, 따사로운, 진실된, 아름다운, 귀여운, 정갈한, 소중한, 귀한, 깨끗한, 튼튼한, 굳건한, 예쁜...

그 집이 어떤 집이든 주님께서 기꺼이 들어오십니다. 현존에 대한 갈망은 우리보다 그분이 더 크시니까요. 주님을 모신 행복한 하루, 주님 현존을 전하는 보람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호들갑이 아닌 구원행위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데
이 모습을 상상하니 뛰어다닌다는 것보다는
날뛴다는 표현이 나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날뛴다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인데 제가 왜 이런 표현을 쓸까요?
너무 거칠고 무례한 표현이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병의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긍정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태도가 있기 때문이지요.

병이 났을 때 발병에 대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양 너무 당황해하고 호들갑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낫기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내게도 올 것이 이제 왔다는 마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은 당황해하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리저리 뛰어다닌 사람은 환자 본인이 아님은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는 요즘으로 치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염될까봐 몸을 사리는데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의료진과 같은 사람이거나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라
남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인 것이고,
그 결과로 병자들이 구원받게 한 사람인 거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병자들이 치유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구원받았다는 것은 종합적인 치유입니다.
일개 병이 아니라 마귀 병에서 치유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인적인 치유지요.
제가 자주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병과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몸 차원, 마음 차원, 정신 차원, 영혼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병자가 와서 육신의 병만 나았다면
그것은 구원체험에까지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용한 의사를 만나 운 좋게 병이 나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래서 인생이 바뀌는 그런 것입니다.
병이 벌이 아니고 구원이 되려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며칠 전 젊은이들과 함께 지방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요즘 우한 폐렴으로 온 나라가 난리이니 자연 그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중 한 젊은이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 폐렴에 걸릴까봐 걱정하거나 호들갑 떨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무모하거나 광신적인 거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제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은 것은 그가 과거 자기가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런 구원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병자들이 병만 마주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그런 구원이 일어나는 것말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5일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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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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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옷자락 술’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면서,
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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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다니며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6,55).
그들의 앎이 매우 역동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연민을 가졌던 지방 곳곳의 병든 이웃들에게 지금 누구보다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부치고 발 벗고 나서서 구원이 필요한 이와 구원자의 만남, 접촉을 주선합니다.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 청하였다"(마르 6,56).
그들은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알아본 그분께 직접 청을 드립니다. 자기 이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들고 아프고 고통 겪는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주님께 간청을 드리는 겁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결과가 참 아름답지요! 그들의 관심과 수고로운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제 일처럼 감응하며 희생을 바친 그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알아본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이들로 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더욱 빛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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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병자들이 치유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병과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몸 차원, 마음 차원, 정신 차원, 영혼 차원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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