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마태오 . 1,18-24)
Behold,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한다(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당신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하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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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제안합니다. 제안도 주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을 청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임금의 폐쇄적인 태도 앞에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표징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 은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복음에서는 이 약속된 표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일을 두고 무척 고민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아기 탄생을 앞두고 요셉이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시련은 마리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주님께서 그에게 혼인과 사랑과 행복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보여 주고자 개입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민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동정 잉태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태어난 그 아들,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은 인간과 친교를 맺고 당신 현존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이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획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함께 계시다
-김혜순수녀-
누군가의 모습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그저 마음의 우상처럼 여기고 살고 싶다면 먼 거리가 필요하겠지만, 삶의 매 순간을 함께 하며 진정성 있는 도전과 기쁨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다면 가까이 다가가려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제 대림(待臨)의 절정에 도달한 교회는 멀리 계시던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큼 가까이 다가오심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대림 4주일의 성경 본문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는지 그 민감하고도 신비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지극히 높이, 그렇게 멀리에 계시던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다는 내용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 다윗의 후손이신 분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마태 1,19) 율법에 성실한 이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신명 22,23-27) 한 남성과 약혼한 여성이 부적절한 관계로 임신하였을 때 이를 불륜으로 간주하고 해당 여성과 남성에게 투석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었기에(신명 23,13-21; 미쉬나 소타 1.1,5) 요셉은 고뇌 끝에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결심합니다. 공개적으로 처리하여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20절)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두려워하다’는 ‘포베오마이’로서 ‘두려워하다, 겁을 먹다, 섬뜩해서 놀라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공포를 느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를 ‘꿈’이나 ‘초월적 중재자’를 통하여 전달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적용됩니다.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20절) 마리아의 임신이 윤리적으로 부정한 사건이 아님을 밝히고 두려워하고 있던 요셉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은 이 사건이 하느님의 주도면밀한 구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위대한 역사임을 믿게 되고 이후 자신의 사명을 과감하게 실행합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마리아에게 전달된 루카복음과는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천사의 메시지가 요셉에게 주어지는데,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사야에게 주어졌던 신탁의 실현임을 명시합니다. 이때 인용된 예언서 본문은 이사야서 7,14의 칠십인역이며 히브리어 본문의 ‘알마’(젊은 여성)가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동정녀)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로는 ‘베툴라’와 ‘알마’가 있는데 ‘베툴라’는 그야말로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동정녀를 의미하고 ‘알마’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젊은 아가씨를 지칭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젊은 여인’으로 되어 있던 단어가 굳이 ‘동정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진정한 ‘인간’이셨지만 동시에 동정잉태라는 신비로운 사건을 통해 태어나신 진정한 ‘하느님’이심을 강조합니다.
■ 임마누엘이신 분
복음이 제시하는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탄생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장엄히 선언한 내용이었습니다.(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는 남하(南下)하는 아시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동맹을 맺고 남 유다 역시 여기에 동참할 것을 강요받던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왕 아하즈는 이 난국을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동맹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이때 예언자는 동맹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과 믿음’임을 역설합니다.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예루살렘이지만 결코 멸망당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으라는 것인데,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느님의 승리를 약속하는 이 신탁을 믿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허술한 신앙을 살짝 겉꾸며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라는 말로 하느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자기기만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부족을 교묘히 포장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려 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아하즈의 이러한 행동이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13절) 이때 ‘성가시게 하다’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아’이며, ‘지치게 하다, 무력하게 하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아하즈의 겉꾸민 충성심은 충분히 하느님을 지치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구한 관용과 인내로 계획하신 표징을 변함없이 내려 주십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14절) 낳을 것이라는 표징입니다.
■ 다윗의 후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
제2독서의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로마 1,1) 받아 복음을 전한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2-3절)이며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4절)라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한 ‘인간’이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증명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의 어둠과 악을 없애시려 홀연히 인간이 되어 우리 안에 오신 분, 이 주체적 다가옴이야말로 성탄이 주는 진정한 선물이며 우리가 고이 간직해야 할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단단히 구축하시고자 우리들 가운데 오신 성탄은 그 어떤 불행이나 위악(僞惡)도 방해하지 못할 완벽하고 일관되며 두려움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맞아드려라
-이일환신부-
먼지가 뽀얗게 앉은 체중계에 오랜만에 올라갔습니다. 너무 오래 내버려 둬서 그런지 망가졌나 봅니다. 75라는 숫자가 나와야 하는데 95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웃옷을 벗고 허리띠와 시계도 풀어봤습니다만 94.9입니다. 이럴 리 없다고 ‘부정’하며 이집 저집 의 체중계에 올라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짜게 먹으면 살찐다고 해서 순댓국에 새우젓도 넣지 않았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족발은 꼭 상추에 싸서 먹었는데도 이러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나 잠시 후 하느님과 ‘타협’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날씬하게 해주시면 겸손하고 착 한 목자가 되겠다고 말이지요.(이왕 흥정하는 김에 키도 딱 10cm만 더 크게 해주십사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에 그만 ‘우울’해졌습니다. 옛 사진을 보니 더 속상해 양념 통닭의 맛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젠 훌륭한 소화기관을 주심에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다 ‘수용’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지요. 그런데 ‘포기’한 것은 아닌지 저 자신이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너그럽고 자애로우며 아름다운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난 뒤, 서로 같이 살기로 한 날만 기다렸던 요셉에게 엄청난 일이 생겼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요? 아마 처음엔 부정했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의로웠던 그는 마 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타협합니다. 하지 만 막상 파혼하기까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우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 용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받아 들임과 내어드림입니다. ‘순명’하고 ‘봉헌’하는 이 모습은 요셉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 의 존경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의 단계를 겪는 우리, 마지막 단계는 ‘포기’입니까? ‘순명과 봉헌’ 입니까?

예수님은 임마뉴엘
-이성억신부-
언제부턴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애완견’이라고 부르다가 ‘반려견’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애완견이 반려견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강아지를 인생의 짝이 되는 친 구 또는 가족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의 배신, 가족의 무관심, 사회적 허탈감으로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로움이나 허전함을 달 래기 위해 반려견을 기르고 있습니다. 나의 슬픔과 기쁨을 항상 함께 나누는 반려자 가 있다면 인생은 즐겁습니다.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가 있다면 외로움과 허전한 마음 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고독과 외로움, 슬픔과 절망,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 님을 보내셨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과 협력으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요셉은 주님의 천 사가 지시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어떤 번민이나 망설임,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탄 생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신 그분이 평범한 한 사람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님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때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 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생의 고통, 절망, 슬픔, 행복, 기쁨에 언제나 함께하 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저 멀리 천상에서 홀로 계시면서 자족하시 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알고 우리의 절망과 슬픔을 느끼고 우리의 눈물과 울부짖음 보고 듣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나의 인생 전체, 더 나아가서 나의 죽음까지도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라는 사실을 믿는다 면, 우리의 삶은 비록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살 만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귀도 예수님 없이 혼자 있는 영혼, 특히 하느님 없이 외로움과 허전한 마음을 가진 혼자 있는 영혼을 노리고 유혹합니다. 그 러나 우리는 다행히도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 언제나 찬미와 영광 받으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멘.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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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순간, 어떤 한 분이 교육장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분 역시 교육생이었지요. 그런데 이분이 오자마자 어색한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인사를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분 덕분에 서로 인사도 나누게 되었고, 강의 전에 교육생 모두는 낯섦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교육시간이 되어 나타난 강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번 기수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다른데요? 가장 뛰어난 모범 기수가 되겠어요.”
한 사람으로 인해 공간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라는 말은 해도, 자신이 그렇게 바꿔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분위기는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가정이라는 공간, 일터의 공간, 신앙의 공간 등을 기쁨과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공간을 우리가 잘 꾸려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닌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의 역할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나의 역할이 있는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 소식,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메시지. 모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의 활동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과 예측을 모두 뛰어넘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각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역할, 요셉의 역할, 천사의 역할. 그들 각자가 자기 자리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지금의 내게도 주어집니다. 내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나요?


우리나라에서 경치 좋은 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요? 호텔, 카페, 골프장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책을 보니, 이탈리아에서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장애인 시설이나 어린이 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그러한 경치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지역 주민들이 들고일어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떠올려 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디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느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즉, 약자에 더 관심을 두느냐, 강자에 더 관심을 두느냐의 차이는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약자에 대해 우선적 관심을 두셨고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자에 관해 관심도 없고 약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다했다며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이 연말에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약자에 관심을 기울여 보셨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이다.
-전삼용신부-
아프리카 원주민을 대상으로 34년째 선교하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 박상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신앙이 없을 때 결혼하여 아기를 임신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국비 장학생으로 독일에 1년 동안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 가 있던 중 남편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목사가 되겠다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줄 알고 영국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계속 반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말라위라는 나라에서 남편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곳으로 오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떠난 해에 태어난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 선교사는 가족이 함께 살아야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남편이 가족을 위해 처음으로 자기 돈을 써서 보낸 비행기 표는 가장 싸구려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갖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말라위는 남편의 편지에서처럼 아프리카의 알프스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박 선교사의 남편은 가난한 원주민들을 불러와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먹였습니다. 자기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려 가는데 원주민들만 생각하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아이에게 계란 하나도 먹이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에 대해 박 선교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일 싸움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절대로 목사는 되지 말라고 말했고 아들도 동의하였습니다.
피골이 상접하는 어려운 삶을 살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커지다보니 박 선교사는 황달과 말라리아 병이 심하게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을 받습니다. 박 선교사는 죽어도 좋으니 몸은 한국에 묻어달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엔 죽어서도 묻히기 싫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너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남편을 흔들어 깨웠는데 남편은 피곤하여 그냥 짧게 기도해주고 잠을 푹 자면 나을 것이란 말만 하고는 자러 갔습니다. 열불이 터져 밖으로 뛰쳐나와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 저 너무 아파요.”라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처음엔 누가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느낌이 이상하여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고 불러보았습니다.
“그래,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지금까지 박 선교사는 하느님은 남편만 사랑하고 남편만 아프리카로 불러주셨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프리카에 온 것은 재수 없이 결혼을 잘못해서 온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눈물이 한없이 솟구쳤습니다.
“그래,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 그러나 너는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과 함께 수많은 자신이 한 지도 모르는 잘못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먹어버려 아들 밥이 없을까봐 몰래 밥을 떠서 감추어두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남편이 한 끼 먹을 쌀만 사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프리카 아이들과 놀 때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빵을 얇게 썰어주고 자신의 아들에게는 두껍게 썰어주던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너는 네 아들을 사랑해서 밥도 감추어두고 빵도 두껍게 썰어주었지만 나는 너희를 먹이기 위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야만 했다.”
기절할 정도로 용서해 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주님께서 뽑아 파견한 남편을 계속 대적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왜 그러느냐며 어깨를 잡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박 선교사는 자신은 더러운 몸이니 몸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발에 얼굴을 대고 지금까지 너무 악한 아내였던 것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 이후 남편과 함께 부르심 받은 선교사로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습니다.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조: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박상원 선교사, 2019 다니엘기도회 말씀, 유튜브]
개신교 선교사지만 참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것 같아 좀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자기만큼 큰 죄인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의 박 선교사는 오늘 복음의 요셉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요셉은 성모 마리아의 소명을 이해할 수 없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속으로 얼마나 혼자 임신하고 돌아온 성모 마리아를 판단했겠습니까?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말하자 요셉은 바로 눈물로 회개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아버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명’을 주심과 동시에 만나주십니다. 그러니 소명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면 하느님을 만나 뵈올 준비도 안 된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인지, 아닌지를 알려고만 한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그 대답을 주십니다. 박상원 선교사도 자신이 부르심이 있어 아프리카로 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소명을 알려주시러 다가오십니다. 그 소명을 받아들임이 곧 하느님을 뵈옵는 길입니다.
저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문을 가질 때마다 주님께서 만나주신 기억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 일상에서도 작은 것들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여길 때 작게나마 하느님을 매번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면서 살고 싶거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아닐까?’를 끊임없이 물어보아야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 안에 당신을 감추시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운전면허 시험은 필기와 도로 주행으로 이루어집니다. 필기시험은 컴퓨터 앞에서 문제를 풀면 됩니다. 20문제 중에서 14문제만 맞추면 합격입니다. 도로 주행을 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예상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기시험 전에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는 문제가 나왔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모든 시험은 어렵고, 합격한 모든 시험은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탄생이 다가옵니다. 지난 대림 4주간을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미리 밝혀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소중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지려면 하느님께 따져야 했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은 야곱에게 14년 동안 노동을 시켰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작은딸 라헬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7년 동안 일한 야곱은 결혼식에 큰딸 레아를 아내로 얻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억울했지만,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의 집에서 7년 더 일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부하는 전쟁터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습니다. 자신들은 더 좋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어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대림 제3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이들을 돌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양승국신부-
또 다시 주님 성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번 대림절도 속절없이 보내 버렸구나! 오시는 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 못했구나!’하며 울적해 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복음의 위로가 참으로 큽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오 복음 1장 23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몸소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인데, 그뜻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다.’랍니다.
네 개의 초가 모두 환하게 밝혀진 대림환을 바라보며,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하던지요. 하느님께서 더 이상 멀리 계시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신답니다. 하느님께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 멀고먼 예루살렘 성지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내 안에 현존하신답니다.
또 다시 맞이한 이번 성탄,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찬미하면서, 그저 탄복하면서, 아기 예수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그분의 지극한 겸손, 극도의 자기 낮춤을 내 생활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도 혼자로구나. 주님께서는 내게서 너무 멀리 계시는구나. 나는 철저한 외톨이,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큰 착각입니다. 우리의 영적 식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우리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 밀착 동반하고 계십니다. 세상살이에 바쁜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성령께서 우리 삶의 매 순간 안에 충만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근심걱정으로 인해 우리 시야가 가려져서 그렇지,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 앞서 걸으시며 길잡이가 되어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하늘을 찌르는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올해 대림특강을 가는 곳 마다 교우분들께 시 한편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김종삼 시인(1921~1984)의 어부입니다.
과감한 생략을 통한 여백의 미를 강조한 60년대 대표 시인이십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와 음악과 술이 전부였던 시인께서 극도로 남루하고 누추한 삶속에서 건져낸 시라서 그런지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지만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날마다 출렁입니다. 풍랑에 뒤집히는 날도 있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날을 찬찬히 짚어보니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는 않습니다. 견디다보면 언제 그랬내냐는듯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푹풍우가 지나갑니다. 기다리다보니 기적처럼 화창한 봄날도 찾아옵니다.
임마누엘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 안에 머무를때, 어떠한 처지에서든 우리네 인생을 화창한 봄날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 주님, 그리고 우리 성모님 꼭 붙들고, 그분들 은총과 도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대림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내 등뒤에 주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도구삼아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몸통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송영진신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그 계획대로 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과정에서의 일들을 가리킵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 7장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을
메시아 강생 예언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예언으로 해석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설명되어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신 적은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사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입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느님”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임마누엘’이라는 말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분”(콜로 1,15)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에 대해서,
“그러면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떨어져 계셨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쪽에서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창세 3,8).
그 두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한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을 보면, 백성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그러면서 백성들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 혼자서만 하느님께 다가갑니다(탈출 20,21).
백성들이 하느님을 무서워하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인간들이 두려움 없이 하느님께 다가가려면 우선 먼저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으로 인간들 대신에 죗값을 치러서
인간들의 죄를 없애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렇다면 인간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는 예수님께서 없애 주십니다.
인간들이 할 일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다가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고집부리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왜 나에게 오시지 않는가?” 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함께 계시는데도, 자기 자신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으로 “나는 죄가 없다. 그래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은 교만한 위선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성모님 한 분만
예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도 ‘회개의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21,3-4).”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묵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사는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은 세례를 받을 때 시작되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크게 누리다가,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회개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행복을 체험하기는커녕 죄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막 살면서,
“내 마음은 편하고 즐겁다.” 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가엾은 하루살이의 허무한 즐거움일 뿐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개입하시고,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항상 ‘흔적’을 남기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놀라운 일’ 또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제1독서: 이사 7,10-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사야 예언자는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하였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이사 7,9)고 하면서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어떤 ‘징조’를 청하라고 한다(11절). 그러나 아하즈는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그 징조는 그 왕이 신앙이 없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할 징조이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3-14절).
그러나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이어주신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을 저버리심이 없이 인간의 계산과 계획을 뒤집어 놓으시고, 오직 인간들이 당신의 ‘길’을 따라 걷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더 믿으라고 하신다.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동정녀’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 복음에(1,22-23) 따르면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사실 마리아는 이사야서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마리아의 모성은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그 아들은 그녀가 이름지어줄 만큼 그녀에게 속해있고, ‘임마누엘’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상 어떤 인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그 도구 역할을 실현시킨 사람은 없다.
또한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살과 피’로써 실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잉태와 탄생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징조’의 신비스러운 면이 드러난다. 한 동정녀가 있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 아들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사심 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그 가문을 이어주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간적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둘째 신앙의 요소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말로 여호수아(Jehoshu'a) 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말의 번역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구원하실 백성은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 18,15-18) 교회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명칭은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고 번역하고 있다. 이 명칭은 예수보다 더 명확하게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시키지 않고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셋째 신앙의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기에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러나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잉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요셉(19-20절)의 눈에까지도 부정한 여인, 거짓된 여인으로 비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혹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믿는 이들 모두의 용기 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이 진정 ‘임마누엘’을 실현시키고 그분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협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 20)
진실된 감사의
시간입니다.
대림은 성탄을
향해 너무나 빨리
지나갑니다.
사랑하기에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요셉이 있어
마리아가 있고
마리아가 있어
요셉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사랑하는 법을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안에서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버릴 수 없는
구구절절한
하나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탄생은 하느님의
뜻이며 맞아들임은
은총을 향한 진실된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탄생은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통과하는 부서짐에서
더욱 눈부십니다.
자아의 뜻을
하느님 뜻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대림초 네 개에 불이 모두 켜졌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거의 다 차오른 것이지요. 이와 함께 우리의 기다림도 보름달처럼 충만해집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아무것이나 청하여라"(이사 7,11).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징이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아무것이나"이란 말씀에는 "무엇이라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것이 진리와 선, 정의에 입각한 바람이라면, 우리 안에 떠오르는 것은 곧 주님께서 떠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우리가 원하고 청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안에 사는 영혼은 자신의 바람이 곧 하느님의 바람임을 감지하고 겸손히 순종합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참조;마태 1,23; 복음 환호송, 영성체송).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 무려 네 차례나 이 구절이 등장합니다. 반복은 강조와 집중의 의미를 지니지요. 육화와 강생의 신비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연한 표징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이처럼 성탄에 가까워질수록 전례는 우리를 더 단순하고 집약된 말씀으로 초대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의 여정을 꾸준히 걸어온 이들이 말씀의 본질을 꿰뚫고 더 깊이 심오한 신비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이사 7,14).
아하즈는 짐짓 겸손을 가장해 표징 요청을 거부했지만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아니, 주님께서 몸소 표징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 친히 동정녀 몸에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임마누엘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로마 1,1) 받았음을 밝힘으로써, 사도인 자신의 정체성을 복음에서 찾습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 1,2-3).
즉 복음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인데,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약속으로 성경에 기록된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갈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상징하고 준비시키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능통했던 이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 사제들이 왜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참 안타깝습니다만, 이 역시 이사야 예언서에 이미 예견된 미래였습니다(이사 6,9-10 참조). 말씀이신 분은 사람의 자기중심적이고 얕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씀의 완성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셔야 하니까요.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경위를 서술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 결심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염려, 호의에 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꿈에 천사를 보내신 주님의 개입으로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요셉의 새로운 결단은 마리아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씀"에 대한 그의 경외심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경건한 이에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약속입니다. 다윗 자손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요셉에게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요셉은 '동정녀 잉태와 그의 아들 임마누엘' 예언이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자신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았던 것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이 결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또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두 다 예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경외심과 순종, 충직함과 성실함을 울타리 삼아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시리라고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남모르게"(마태 1,19).
요셉의 이 마음은 마리아와의 혼인 전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평생 지속될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 단 한 마디도 목소리를 내비치지 않는 요셉은, 자신의 선의와 희생 모두를 침묵으로 덮고 충직한 순종과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모자를 끝까지 지켜낼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그대로 행함으로써’ 그가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계획을 서슴없이 따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거절한 아하즈와는 달리, 요셉은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긴밀한 협조자가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 모두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한 분들이지요. 말씀을 경외하는 이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감정조차도 믿음과 의지 안에서 흐릅니다. 어쩌면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변화무쌍하고 치외법권적인 감정과 감성의 영역마저 하느님의 뜻에 내어맡기는 중에 꼴을 갖추고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믿어 복된 이들이 되고, 요셉처럼 말씀에 순종해 하느님을 얻은 이들이 되기를 두손 모아 기원하는 오늘입니다.

빈구유 만들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036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마태오 . 1,18-24)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김혜순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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