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0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었을 때 이사야 예언자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며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촉구한다(제1독서).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있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강생의 핵심, 곧 하느님의 무상 계획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무상 계획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반항자들에게 취하시는 계획도 다룹니다.주님께서 아하즈 임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지만, 그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변명하면서 청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악한 태도가 드러나는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표징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은 구원의 핵심 내용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활동이며 모든 인간 행위보다 먼저 이루어집니다.이런 측면은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하고 마리아를 부르는 오늘 복음에도 있습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를 은총으로 채워 주시면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위하여 어머니를 준비하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 계획은 온전히 하느님의 일이고 마리아는 당신의 종으로 소개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만하지 않습니다. 표징을 청하지 않겠다는 아하즈처럼 대꾸하지 않고, 겸손하게 듣고 어떤 개인적인 변명도 하지 않으며 그저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입니다. 성탄으로 시작되는 기쁨과 희망을 받아들이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로 오신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보험도 그렇지 않습니까? 상상했던 ‘만약’에 대한 준비로 보험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100% 분명히 일어날 일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준비하는 것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문제는 이번 기말고사 때 꼭 나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당신의 말에 대해 늘 책임을 지는 분임을 잘 알기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이 부분을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분명히 이 문제가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조해서 말씀하셨고, 심지어 숫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문제가 나왔음에도 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100%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었던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복음의 장면을 두고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선조들처럼 성모님께서도 의심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고, 모든 실례를 능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지요.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계획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지만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을 통해 제재를 받았던 다른 선조들과 달리,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100% 이루어집니다. 어떠한 의심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 또한 이의 완성을 위한 우리의 준비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우리 역시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이 아니라 하늘의 불이 그를 낳습니다. 흠 없는 처녀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잉태하여 성령께서 그 태 안에서 숨 쉬십니다.
이 탄생의 신비가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오, 성령으로 한 처녀가 결혼했지만 그 몸에 아무 흠이 없었고, 배 속의 아이나 바깥의 손길에 그의 순결이 더렵혀지지 않고 오히려 그 순수한 토양에서 빛났으며, 어머니면서 처녀요, 남자를 모르는 어머니셨다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다져 줍니다.
의심하는 자여, 어째서 어리석은 머리를 가로젓는가? 천사가 거룩한 입으로 이를 알려 준다.
그대는 천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양인가? 동정녀께서는 하늘의 눈부신 전령을 찬양하고 그를 믿었기에 당신 몸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오시고 믿음과 경배를 망설이는 자들은 내치십니다.
곧바로 믿은 처는 그리스도를 당신 태에 모시어 그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지키셨습니다.
교부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줍니다. 어머니이시며 동정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곁에 오실 주님과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그 사람의 마음에 하느님 뜻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살펴라
-전삼용신부-
“만약 내가 돈이 없는 아주 가난한 여자여도 나랑 결혼 할 수 있나요?”
유지연이라고 하는 준재벌집의 외동딸의 이야기입니다. TV에서 보는 재벌 딸은 예쁘고 날씬하지만 그녀는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습니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집의 재산을 노리고 옵니다. 그래서 지연씨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맞선을 봅니다.
신준호라고 하는 한 남자가 집의 재산에 대하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귀여운 상이라며 호감을 나타냈습니다. 며칠을 만나고 “만약 내가 돈이 없는 아주 가난한 여자여도 나랑 결혼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대답합니다.
“당연하죠, 돈이 얼마나 많으신지 모르지만 난 지연씨를 사랑하는 거예요. 돈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게요.”
둘은 결혼에 골인을 합니다. 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당에서 혼인을 했습니다.
준호는 열심히 일을 해보지만 잘 안된다며 사업을 해보겠다고 지연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지연은 부모에게 청해 사업자금을 얻어주었습니다. 여러 차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준호의 사업은 계속 망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가 터져 지연 부모의 사업도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다음 날 저녁 준호는 ‘이혼서류’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놀란 지연씨에게 준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집 부자라며? 나 사실 널 사랑한 적 한 번도 없어. 씨름 선수 같은 너를 진짜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지연의 아빠, 엄마가 안방에서 듣고 있다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부도가 났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준호는 처음부터 지연의 가족을 알고 그 집 재산을 노렸던 것입니다. 돈을 도박과 술로 탕진한다는 소식을 접한 지연의 부모가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연은 미련이 남는지 “정말 단 한 번도 날 사랑한적 없나요?”라고 묻습니다.
[참조: ‘단 한 번도 널 사랑한 적 없어’, 유쾌한 공주, 다음 카페]
어떻게 속지 않고 참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헤어지더라도 “나 너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자신이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그 사랑이 진심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본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주체가 자신인 사람은 상대를 이용해 무언가 자신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만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처음엔 자신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사라졌을 때 ‘아, 난 저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가진 것을 사랑했던 거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나 당신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라고 솔직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라 믿는 사람은 진실한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모기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웃을 볼 때 이용하려고만 하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사랑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그 사랑을 배운 첫 번째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 뜻을 향한 ‘아멘!’이 세상에 구원을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분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세상에 구원을 불러올 수 있도록 하느님 뜻에 항상 마음이 열려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원죄의 티까지도 없으신 성모 마리아만이 당신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만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보여진 가장 큰 사랑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사랑의 힘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데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포함해 모든 관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는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맺어진 관계는 싸우더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사랑은 곧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겐 이용당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임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고 소명입니다. 하느님 뜻이라고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지만 내 힘으로 하는 모든 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고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됩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라고 믿으면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보스턴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선배 신부님이 오셨고, 보스턴 한인 성당 신부님도 만날 겸해서 다녀왔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보스턴 시내를 다녔습니다. 혼자 다니면 잘 모르는 길인데, 봉사자 한 분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습니다. 강 이름, 길 이름, 성당, 정원,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역사를 들었습니다. 역시 설명을 들으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음에는 며칠 동안 안내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공원에 안내 표시판을 설치했고, 겨울철을 대비해서 사다리를 갖다 놓았습니다. 안내 표시판에는 공원에서 지켜야 할 내용과 공원에서 하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개는 목줄을 하고 다니고, 배설물은 가져가야 한다고 합니다. 술은 마시면 안 되고, 불을 피워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겨울에 얼음이 깨져서 위험하면 사다리를 내려서 도와주라고 합니다. 안내 표시판을 읽으니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러 가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사는 지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온 우주에 우리가 머무는 지구처럼 아름다운 별은 없습니다. 불, 땅, 공기, 물은 아름다운 자연에 생기를 넣어줍니다. 구름, 꽃, 새, 나무, 강, 바다, 산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술가들은 노래, 미술, 건축, 연극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빛이 여울지는 걸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산들바람에 단풍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아이가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은 도와주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문의 내용을 보시고 많은 분이 후원해 주십니다. 지금 힘들고, 아프고, 외로운 이들의 이웃이 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어서 향기를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좋지만, 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고 받아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양심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종교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지구별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뒤를 따라가니 길이 되었습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조금씩 동이 트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스름하지만 칠흑 같은 밤은 지나가고, 여명이 시작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젠 이정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명은 사라지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천지 만물이 환하게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드디어 복음(福音)의 시대가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참된 자유,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마리아의 응답으로 현실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업적, 재능, 권력, 재물, 명예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마리아처럼 우리가 응답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다윗의 열쇠, 영원한 나라의 문을 여시는 분, 어서 오소서. 어두운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이끌어주소서.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양승국신부-
길을 가다가 한 주점 앞에 걸린 큰 입간판 문구를 보고 혼자 한참 웃었습니다. ‘낮술 환영!’ 마음이 허전할 때, 그래서 술이 당길 때, 주야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오라는 사장님의 너그러운 초대 앞에,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까지 따뜻해졌습니다.
일찌감치 귀농해서 시골에 자리잡고 사는 한 소꿉친구의 초대를 받고는 얼마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릅니다. “친구야! 바쁘지? 아무리 바빠도 한번 내려오길! 걸죽한 동동주도 담궈 놓았고, 몸에 좋은 약술도 종류대로 다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유형의 초대를 받습니다. 돌아오는 주말 결혼식에 초대받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동창회 초대, 돌잔치 초대, 장례식 초대...마음 설레는 초대, 마음이 껄끄러워지는 초대, 당장 달려가고 싶은 초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운 초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루카복음 1장 26절 이하에는 아주 특별한 초대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나자렛의 마리아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복음 1장 30~32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초대는 너무나 엄청난 초대이고, 끔찍할 정도로 부담이 되는 초대입니다. 그렇게 하겠노라는 응답으로 인해 다가올 고초가 만만치 않음이 분명한 초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이걸 줄여서 우리는 Fiat!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말로, 더 줄여서 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Fiat은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성모님은 또 다른 도전, 또 다른 부르심, 또 다른 난감한 상황 앞에 서셨는데, 그때 마다 계속해서 Fiat! 이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저는 수태고지 장면을 곰곰히 묵상해봤습니다.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아직 10대였습니다. 천사의 가브리엘의 엄청난 초대 앞에 마리아의 최초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님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을까요?
절대 아니었을 것입니다. 10대 소녀가 어떻게 태연했겠습니까? 참으로 두려웠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습니다. 우선 마리아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이 난감한 사실을 약혼자 요셉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요셉이 이 사실을 믿을 것인가? 요셉이 과연 끝까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혹시라도 요셉이 이 일 때문에 내게 앙심을 품고 딴 생각을 한다면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천사의 제안을 수락할 경우 마리아 앞에 펼쳐질 상황은 암담하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나자렛의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의 입방아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한 가냘픈 소녀가 불러오는 배를 주체 못하고, 또 그것에 대해 똑 부러지게 변명 할 수도 없게 될 상황, 그것이 바로 마리아 앞에 펼쳐질 미래였습니다.
성모님의 Fiat은 그 길이 분명 고통스러운 길,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뻔한 것을 알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길 떠나겠다는 의미에서의 Fiat입니다.
끊임없는 피앗, 평생에 걸친 피앗의 결과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바꿔 말하면 성모님의 얼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삶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믿음이 계속 성장해나갔다는 것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믿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있는 희미한 상태에서도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맡겨라
-반영억신부-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사실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하셨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18,13-14). 그리고 마리아의 그에 대한 대답도 확실 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진정으로 당신께 온전히 봉헌하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우리야).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 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도구로 쓰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그제 <마태오복음>을 통해 요셉에게 전해 준 예수님의 탄생예고를 들었고, 오늘은 <루카복음>을 통해 전해 주는 마리아에게 전해 준 예수님의 탄생예고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탄생예고는 어제 들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와는 사뭇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긴 성전 ‘성소’에서 전해졌지만, 우리 주님의 탄생예고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또한 천사의 인사말대로, 마리아는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도록 열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요, 그분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일이요,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인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바로 사람입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가!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
주님!
당신 말씀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당신 사랑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그 말씀에서 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사랑에서 제 생명이 솟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는 당신이 진정, 저의 은총입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앞에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루카 1, 38)
-한상우신부-
말씀의 여정이
대림의 여정이며
성탄의 시작입니다.
우리를 위한
말씀의 시간입니다.
오고가는 말씀으로
우리를 깨어나게합니다.
말씀으로 태어나는
성탄의 시간입니다.
소중한 생명은
소중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기에
우리의 생명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절실한 것은
주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말씀은
하나의 길을
걸어갑니다.
말씀이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생명이 있듯
소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과 말씀은
불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서
삶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사랑을 향합니다.
말씀과 함께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
은총과 진리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놓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세상적인
성탄이 아닌
말씀으로 태어나는
말씀의 성탄입니다.

-오상선신부-
우리는 성탄의 신비에 점점 더 깊숙이 다가가는 중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나자렛의 평범한 처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이런 인사를 듣습니다. 이 짧은 인사말에 얼마나 많은 축복이 들어있는지요! 충만한 은총, 기쁨, 주님의 현존은 주님과 일치를 꿈꾸는 모든 신앙인의 바람입니다. 바로 성 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니까요. 마리아는 이 인사말에 곰곰이 머무릅니다.
혹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전 아니에요."라고 짐짓 겸손한 태도로 물러날까요? 아니면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은총은 무슨 은총... 기쁨은 무슨..." 하며 억울해할까요? 아니면 "맞아요 전 이미 주님과 함께 은총 가득한 삶을 누리고 있어요 그래서 기쁘고 감사해요"라고 호응할까요?
"두려워하지 마라 ...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천사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통상적으로 "총애"란 유달리 특별하게 받는 사랑을 의미하니, 나자렛의 평범한 소녀가 받아들이기엔 과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총애라니, 이 사랑은 숨막히는 환희와 더불어 두려움까지 몰고 옵니다. 사실 그 총애는 보통의 인간이 감당하기엔 벅차고 버거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이사 7,14).
이는 제1독서에서 선포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로 복음서의 천사의 말을 요약합니다. 물론 마리아에게 당장은 당혹스럽게 들리지만, 사실 예언서를 듣고 자란 이스라엘 소녀라면 모르지 않았을 메시아 도래의 내용이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임신과 출산의 생물학적 원리를 들어 의아해하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답합니다. 이 한 마디면 사실 모든 의문은 끝이 납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걱정과 불안, 의혹은 대부분 이를 믿지 못해서 일어나는 내적 소요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얼마나 깔끔하고 간명한 답변인지요! 순결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단순하고 용기있는 고백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주님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믿고 사랑하니 따르겠다는 의미지요. 마리아는 자기 앞날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이 답변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개의치 않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무지를 견인해 성큼 하느님 심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도 성큼 그녀 안에 들어가십니다.
"주님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이시다"(화답송).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겸손되이 한 소녀에게 청하시고, 떨리는 마음으로 답을 들으시고, 마침내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안을 거처 삼아 들어가십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믿음과 용기로 담대히 협력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
제1독서에서 표징을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하즈가 답변합니다. 짐짓 겸손한 답변 같지만, 사실은 겸손을 가장해 자기 뜻을 내세우고 있지요. 하느님은 이미 표징을 준비하고 계셨고 어느 경로든 누구의 협력이든 그 표징은 드러날 것입니다. 중요한 건 믿음과 용기로 촉발된 순종입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인간적 논리로는 얼토당토 않은 일을 제안하시기도 합니다. 삶의 도전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시달리느라 미처 경청하지 못해 흘려보내기도 하고, 아하즈처럼 겸손 뒤로 숨어 거부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처럼 단순하고 진솔하게 용기내어 순종하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른다면, 그 믿음이 용기로, 그 용기가 순종으로 이어질 겁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누구를 통해서 오든, 깨어 기다리며 우리 안에 거하려 들어오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프로포즈를 놓치지 맙시다. "Fiat"의 순간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꼭 그리 될 겁니다. 아멘.

마리아의 두려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987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사람은 본래 모기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웃을 볼 때 이용하려고만 하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사랑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그 사랑을 배운 첫 번째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 뜻을 향한 ‘아멘!’이 세상에 구원을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분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세상에 구원을 불러올 수 있도록 하느님 뜻에 항상 마음이 열려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맺어진 관계는 싸우더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사랑은 곧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겐 이용당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임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고 소명입니다. 하느님 뜻이라고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지만 내 힘으로 하는 모든 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고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됩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라고 믿으면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긴 성전 ‘성소’에서 전해졌지만, 우리 주님의 탄생예고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또한 천사의 인사말대로, 마리아는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이영근신부-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0) | 2019.12.21 |
---|---|
2019년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0) | 2019.12.20 |
2019년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0) | 2019.12.18 |
2019년 12월 18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0) | 2019.12.17 |
2019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0) | 2019.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