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2. 16. 19:38

2019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마태오 1,1-17)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her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the Christ.



예수그리스도의 족보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유다에게서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한다(제1독서). 신약 성경의 첫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메시아이심을 말하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야곱의 축복’ 가운데 일부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인간이 신뢰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으로 나타내는 생명의 연속성을 표현합니다. 축복해 주시는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신뢰하는 이들을 당신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야곱, 곧 이스라엘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하고, 메시아가 올 유다의 미래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유다는 통치와 왕권이 맡겨진 지파로 제시됩니다. “유다는 어린 사자. ……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유다는 바로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 태어날 지파입니다.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시고 시간의 충만함 속에 보내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놀라운 ‘충만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던 시기에 평범한 고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법적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 가문에 속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매우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분이시고, 모두가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였을 때 당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족보에서는 어떤 우연이나 운명의 결실이 아니라, 구원사의 완성을 남자들과 여자들을 통하여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드러내시고 바라시는 역사의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 구원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를 읽고 이해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역사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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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까지의 거리는 멀까요? 아니면 가까울까요?

종종 갑곶성지에서 강화읍내까지 걸어갑니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고 또 많이 걸으면 건강에 좋으니까요, 그런데 걸어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성지에서 읍내까지 너무 멀기 때문에 걸어서 다녀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멀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깝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길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입니다. 수로를 따라 논길을 걷다 보면 지루하지 않게 읍내에 다녀올 수가 있습니다. 길을 잘 알다 보니 멀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을 잘 모르면 막연하게 멀다고만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에 대해 잘 알고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 길을 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막연하게 멀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가 보이게 되면 이 목적지를 향해서 더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보이지 않으면 지금 힘들고 어렵다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당연히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주는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족보라는 것은 그 집안사람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인간이심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는 인간 역사에 고유한 시간과 변천에 관한 이야기와 기록이 옛 선조들의 이름과 더불어 나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셔서 구세주임을 선포했다면 사람들과의 간격은 너무나 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족보까지 가지고 있는 참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기에 우리와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이 가까움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노력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 혹은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른다(헬렌켈러).



인간의 머리.

신부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고 난 뒤에 간단히 술 한 잔 하자며 어느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이 가게에는 다양한 안주가 있더군요. 한 신부가 “뭐 먹을까? 안주는 뭐가 좋겠어?”라고 말하자,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거나.”

그래서 “그러면 이거 먹을까?” 하며 어떤 메뉴를 가리키며 묻자, 또 다른 신부가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다른 것 시켜.”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것을 가리키자, “얘들이나 좋아하는 거잖아. 다른 것 시켜.”라고 말합니다.

안주 하나 고르는데 10분 이상 걸린 것 같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머리로 스마트폰도 만들고, 도시도 계획하고, 놀라운 예술까지도 펼치는데…. 우리 머리는 10분 이상을 써도 안주 하나 못 고르는구나.”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머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완벽하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법칙에는 창조자가 있다.

-전삼용신부=


독일의 담스타트라는 곳에 바슐리에 슐링크라는 분이 만든 집단 자급자족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며 심리학 박사로서 이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약 200명의 식구들을 자급자족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쓰며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너희들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끼어도 내버려두니 자연히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모이니 농사가 잘 되고 결과적으로는 농사가 잘 돼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200여명이 건강하게 사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하느님은 보너스까지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메마른 곳으로 버려진 땅이었는데 농장 한 가운데서 샘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샘을 ‘기적의 샘’이라 하여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갈 정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어떠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연이라는 시스템이 잘 유지되려면 그 자연 안에 사는 사람들이 그 법칙을 잘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작동을 잘 하게 됩니다.

  자동차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도 그 설계도에 맞게 조립되어야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벽돌을 중간에 몇 개 빼놓고 지으면 무너집니다. 공동체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도 법칙이 필요합니다. 국가도 법이 있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각자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분열되고 와해됩니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어떠한 시스템을 만들어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시스템이 있으면 법칙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을 만든 창조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어떠한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법칙을 만든 창조자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보더라도 각자의 시스템대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벌들도 각자의 역할이 있고 벌집의 모양도 6각형이 수없이 쌓여진 형태입니다. 누군가 잘 만들어진 벌집을 보면서 저절로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규칙이 있으면 창조자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연법칙의 총합인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을 운전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벌집보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법칙입니다. 이 법칙이 와해되면 그런 지구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게 됩니다. 자연의 시스템은 인간이 감히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에서만은 다 어떠한 법칙을 발견하면 만든 창조자를 생각하는데 지구와 우주의 더 엄청난 법칙들을 보면서는 그냥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조자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자 없이 그 규칙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이 이용하는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핏 보면 참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누가 책을 쓸 때 가장 앞에 의미 없는 이야기부터 꺼낼까요? 누구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제일 앞에 놓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그러나 다윗까지는 떠돌이 생활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참 왕국으로 만들어준 것은 다윗입니다. 그렇지만 바빌론 유배부터 또한 남의 나라에 지배만 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또 다른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고 그 족보상 새로운 다윗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며 유다인들을 설득하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가 아닐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려고만 하고 머리를 조금만 쓰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마태오의 이런 노력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들을 보면서도 그 창조자가 있어야만 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전철을 되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개입한다면 분명 역사를 통해서도 창조자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자연 안에서도, 사람 사는 법칙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법칙 안에 창조자의 손길이 배어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처음 만나는 분들과 대화 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 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 살았는지 묻습니다.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어디에 있었는지 이야기를 합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점이 있고, 서로 같이 아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고, 취미가 같기도 합니다. 음악, 미술, 문학에 관한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통점을 찾다 보면 공감대가 생깁니다.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미국 생활의 기쁨, 어려움을 듣게 됩니다. 저도 제가 이곳에 왜 왔는지, 이곳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일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수난, 부활을 이야기하는 복음서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활동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걸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복음서가 처음 전하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이 조금 단순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길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와서 그 길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였고,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존경받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으며,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간결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라합도 있습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룻이 있습니다.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한 다윗 왕이 있고, 지혜의 왕인 솔로몬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뼈대 있는 가문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루가 복음서도 족보이야기를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면 루가 복음은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혈통은 단순히 아브라함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마리아의 노래와 즈카리야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멋진 그림이 떠오릅니다. 어린 예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도 이야기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을 넘어서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는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민족, 한 국가, 지구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3살 먹은 아이도, 70이 넘은 노인도 모두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합니다. 우주 150억 년의 시간에 비하면 70살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합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루가 복음서의 시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음서의 시작 이야기를 좋아하시는지요? 저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이야길 하고 싶으신지요?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다립니다.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혜 만물을 힘차고 아름답게 가꾸시는 분, 어서 오소서. 저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치소서.” 


허물투성이의 죄인인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한 따뜻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양승국신부-

 

선친(先親)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두툼하고 큼지막한 족보책을 발견했습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하고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요즘 와서는 족보가 구닥다리, 애물단지 취급 받지만, 과거 어르신들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면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족보부터 챙길 정도였습니다. 가문의 기원이자 역사가 담긴 책이니, 그리도 중요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도 족보는 엄청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여는 마태오 복음 그 첫자리에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는데, 꽤나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일일이 열거되고 있어, 복음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을 큰 지루함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족보에 나열된 인물 한명 한명은 다 나름대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 한명 한명의 역사가 구세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읽어내려가다보면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족보, 즉 조상들의 세대는 14세대씩 세부분으로 구분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14라는 숫자는 다윗왕(Dawid)의 이름에 기인한 듯 합니다. 당대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 숫자 대신 자신들의 언어 자음을 숫자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D(4)+w(6)+4(d)=14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를 통해 마태오 복음사가는 나자렛 예수님께서 족보상 다윗 왕가에 소속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름은 주로 남성들입니다. 예외적으로 다섯명의 여성 이름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특이한 것은 순수 혈통주의를 중요시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보였습니다. 더구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였습니다. 이런 고귀한 족보에 세명이나 되는 이방인 여인, 다말 라합, 룻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분과 혈육의 정통성을 목숨보다 중요시여기는 유다인들에게 있어 엄청난 수치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런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아무런 가감도 없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솔직함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참 진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다른 자서전이나 소설과는 달리, 성경은 등장 인물들의 치부나 상처, 어둠과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들의 이름조차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족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더 나아가 온 세상 만민의 하느님이라는 진리 잘 파악할수 있습니다.

 

 몌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들과 멀리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허물투성이의 죄인인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한 따뜻한 인간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따뜻해져옵니다. 부담스럽거나 거북스런 존재가 아니라 다정하고 친밀한 한 인간이셨던 메시아 예수님께 두고 두고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반영억신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혈연, 지연, 학연에 목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타마르,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라합은 예리코를 정탐하러 갔을 때에 여호수아가 보낸 심부름꾼들을 그 여자가 살려 주었기에 그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그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주었습니다(여호6,23-25).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를 갈며 싫어했던 이방인을 보아즈는 아내로 삼았습니다.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야라는 병사의 아내를 취하여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한 다음,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렇게 빼앗은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서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우리는 회개한 사랑받는 죄인이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그분은 구원역사를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성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됩니다.

시간이 다가오면 성탄은 저절로 오겠지만,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는 이에게는 그 기쁨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하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그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줍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송영진신부-


1)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고,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대로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왜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그렇게 태어나셨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 탄생의 장소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 해, 그 날에 태어나셨는지는 모릅니다.
(그 해, 그 날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 즉 가장 적절한 때였을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각 개인의 출생도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에페 1,4-5).
어쩌다가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 이 가문에서
나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깨닫는 것은 각자의 숙제입니다.

2)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다윗의 자손’이다.”
라는 것을, 즉 “예수님은 ‘메시아’다.”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족보가 이러니까 예수님은 메시아다.” 라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라고 말하기 위한 족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족보 때문이 아닙니다.
족보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가르침 등을,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등을 전해 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언을 듣고서 믿는 것입니다.
족보는 우리 믿음을 확인해 주는 보조 재료 같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이 각자 자유의지로
만들어가는 역사이지만, 그래도 그 역사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이 전부 다 성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름들을 보면, 범죄자도 있고, 우상숭배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죄는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걸림돌들을 모두 극복하시고,
당신의 계획을 하나씩, 하나씩, 실현시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셨다.’ 라는 말은,
“어떤 시나리오를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고,
그 시나리오대로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뜻대로 되지만,
세부적인 과정들을 보면, 일이 잘못되기도 하고 틀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생겨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좌절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악한 일에서도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역사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보통 ‘하느님의 섭리’ 라는 말은,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중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깨닫게 되는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계획”으로 풀이합니다.
어떤 일에 하느님의 섭리가 언제 어떻게 작용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 그게 그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각 개인의 인생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기도 하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일들마저도 다 이용하셔서
우리 인생을 하나의 방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로마 8,28).
그것이 바로 개인의 인생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이고, 자비입니다.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하느님께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데, 고난이나 시련이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생겨도 우리가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4) 마태오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서 끝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첫 번째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서 아담을 거쳐서 하느님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족보는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는 길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중간에 있는 이름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무사히 도달하는 것만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다시 올라가신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은 다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5)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에서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된 족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뒤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족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생명의 책’을 신앙인의 족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예수님의 족보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고, 생명의 책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사람들, 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책은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기록하는 현재와 미래의 책입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고, 앞으로도 끝까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름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변절하면,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지워질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육에 따라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남아 계시면서, 하느님이시기를 그치지 않으신 채로 사람이 되셨다. 마태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음을 밝히고 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손이 뛰어난또는 사랑받는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전투에서 뛰어났고 힘이 넘쳤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낳으셨지만, 요셉을 마리아와의 혼인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이유로 마리아와의 혼인관계를 파기하지 않았다. 또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이다. 아들을 입양했어도,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은 아니라도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14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에,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때문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한상우신부-

사람이 다닌
길위로 사람의
아들이
탄생하십니다.

받아들이고
감사드려야 할
우리의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의
모든 여정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때로는 맵고
때로는 쓴 시간을
우리모두는
지나왔습니다.

이 길을 걸어온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정체성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정체성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은
모든 순간순간이
하느님과 함께 한
은총의 순간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이와같이
멈춘 적이 없습니다.

우리모두는
구원에 신비에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끝내 우리모두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여정 안에는
이러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가장 가까운
우리의 역사안에서
만나는 은총의
시간되십시오.

탄생의 길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역사를
받아들이는 사랑이
진정한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기 위한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족보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그냥 세상에 툭 떨어지 듯 어느날 갑작스레 출현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조건을 그 시작부터 몸소 겪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생물학적, 혈연적 원천과 유대가 필요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준비로 무수한 민족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또 무수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유다 지파를 택하시어 미리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이로써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오리라고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게 되지요(이사 11,1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족보는, 엄밀히 말하자면 성자 예수님의 족보라기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양아버지 요셉의 족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족보에서 육에 근거하는 인간 제도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겸손을 만납니다. 어느 족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족보 안에서도 그리 정당하거나 반듯할 것 없는 인간사가 얽히고섥힌 가문의 민낯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그들 중에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그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창녀도 있고, 창녀로 가장해 목적을 이룬 이도 있습니다 과부 신세에서 새 보호자를 얻은 이도 있고, 본의 아니게 남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이도 있습니다. 약혼자의 호의로 처녀 임신이 초래할 죽음을 면한 이도 있고요.

짠~하지 않습니까? 사회적 약자인 여인의 몸으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구획 지은 틀에서 곁길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닥뜨린 이들이니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살아보려고,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함으로써 가문을 잇는 소명을 다하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 몸부림친 자취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들의 역사는 단지 메시아 가문의 역사를 넘어서, 인류의 역사이고 우리와 우리 이웃의 역사입니다.

제1독서는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을 모아놓고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유다에게서 통치권을 지닌 임금이 나오리라는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정통성을 이미 고대 이스라엘 시기부터 선조의 입을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원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 이후에도 하느님은 이처럼 세상을 위한 구원의 계획에서 손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곧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하늘아 즐거워하여라. 땅아 기뻐하여라. 우리 주님이 오시어 가련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리라"(입당송).

보통 사람들은 족보에서 뭔가 특출나고 위대한 인물을 찾아 내세우려고 합니다. 동일한 유전적 요소가 실제로 몇 퍼센트나 일치할지 몰라도 그 피가 섞였다는, 그런 이들과 한 가문, 한 집안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의 족보는 오늘 본 예수님의 족보처럼, 극소수의 뛰어난 인물과, 다수의 평범한 이들, 그리고 수면 아래로 감추어진 "가련한 이들"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며 축복 가운데 거니는 것이 어쩌면 우리 역사 안에 "숨은 가련한 이들"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가 오늘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정상 범주라고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치열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자기 소명을 채워가는 이들,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받은 생명을 지켜내는 이들, 족보에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부족하고 뒤쳐지고 무너진 이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나는 우리 집안 족보에서 그저 평범한 구성원입니까? 자랑거리나 오명거리입니까? 평범하건 자랑이건 오명이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낸 모든 자취는 세상 눈에 어떻게 보이든 주님께는 안쓰럽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 가문에 속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족보에 담긴 얘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921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2015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오 1,1-17)


세상에서 어떠한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법칙을 만든 창조자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보더라도 각자의 시스템대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벌들도 각자의 역할이 있고 벌집의 모양도 6각형이 수없이 쌓여진 형태입니다. 누군가 잘 만들어진 벌집을 보면서 저절로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규칙이 있으면 창조자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연법칙의 총합인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을 운전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핏 보면 참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누가 책을 쓸 때 가장 앞에 의미 없는 이야기부터 꺼낼까요? 누구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제일 앞에 놓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그들은 또 다른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고 그 족보상 새로운 다윗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며 유다인들을 설득하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가 아닐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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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서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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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서 끝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첫 번째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서 아담을 거쳐서 하느님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족보는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는 길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고, 생명의 책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사람들, 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책은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기록하는 현재와 미래의 책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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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족보에서 육에 근거하는 인간 제도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겸손을 만납니다. 어느 족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족보 안에서도 그리 정당하거나 반듯할 것 없는 인간사가 얽히고섥힌 가문의 민낯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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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은 인간의 족보 얘기는 아예 없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있고

요한 복음도 족보 얘기는 없고 ,한 청ㅁ.부터 계셨던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족보를 전하는데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시작하는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요셉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유치한 아전인수인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아주 못되게 해석하면 마태오 사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족보에 가두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고

루캌 사가는 이런 마태오의 민족주의적인 해석에 

못마땅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얘기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얘기 이고

그래서 이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얘시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