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오 21,23-27)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approached him as he was teaching and said,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영을 입은 발라암은 이스라엘에서 별 하나가 솟고 왕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수석 사제와 원로들에게 그들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당신의 말씀을 왜곡할 것임을 확인하시고 대답하지 않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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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언자인 이방인 점쟁이, 발라암의 신탁을 들려줍니다. 발라암은 모압의 임금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메시아의 축복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영에 이끌려, 야곱에서 나온 임금이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교회 전통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예언이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그리고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을 일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권한을 조용히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였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마 강의할 때 나쁜 짓을 많이 하라고, 자신을 바꿀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시간 가는 대로 대충 살라고 말하겠습니까?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주님 마음에 드는 삶에 대한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힘이 담기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부담감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배 신부님께 이런 부담감을 이야기했더니, “그러면 하지 마!”라고 쉽게 말씀하십니다.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때는 신부님 말씀처럼 강의를 더는 하지 않을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편하고 쉬운 길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강의를 통해 변화되는 나 자신을 보면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쓰시려는 것을 나의 편함만을 생각하면서 막아서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투정 부리지 말고 긍정적 효과를 바라보면서 더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안 하면 쉬운 일, 반대로 하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는 용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위대한 기적이라 불러도 좋은 일들을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기적을 많이 보고, 또 많은 대화를 했어도 주님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구원할 예수님이 앞에 있어도 눈을 감고 있고, 그분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기에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길은 절대로 쉽지도 또 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 자신에게 필요한 길이고, 가장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에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한 방송국에서 방청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제작진은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과 함께 20대와 4~50대 방청객 각 100명을 스튜디오에 초대해서 소문 전파 실험을 했습니다. 심리학 강의를 들으러 온 줄로만 아는 방청객들에게 따로 사전고지 없이 ‘어느 연예인이 자살했다’라는 부정적인 소문과 ‘어느 연예인이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했다’라는 긍정적인 소문을 전달하고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를 지켜보았습니다.
실험 결과, 20대는 구성원 81%가 소문을 들었고 86%가 소문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소문은 구성원 중 18%만 들었다고 대답했고, 이 소문을 전달한 이들도 4%에 불과했습니다. 4~50대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나쁜 소문 84%, 좋은 소문 16%의 비율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이 더 빨리, 더 멀리, 더 넓게 퍼져 나갑니다. 인터넷에 소위 ‘가짜 뉴스’라는 것은 다 나쁜 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쉽게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을 전달하는 사람이 될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의적인 소문은 한 번에 3명을 죽일 수 있다. 소문을 내는 사람, 소문을 듣는 사람, 소문에 오른 사람이다.”

가죽옷을 원한다면 두렁이를 벗어라
-전삼용신부-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입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려했던 대로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무사히 강도들 틈을 빠져나와 한숨을 쉴 때 바지춤에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했는데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받으십시오.”
강도에게 숨겼던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주면서 엎드리더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비록 강도일지라도 진실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묻습니다. 올바른 대답을 들으면 수긍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해는 마음의 뜻 다음에 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올바른 말을 들어도 절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물으면서도 그분의 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이미 변화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 두렁이를 입은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자기를 가리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말은 칼과 같이 자신을 찌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패와 칼을 들고는 대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느님께 내 자신이 솔직해지는 방법은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그분도 솔직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기댄 요한에게만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가리옷 유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모두에게 알려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장해제하고 당신께 더욱 깊이 안기는 사람에게만 당신의 진리를 들려주십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죽옷을 바란다면 나를 가리는 나뭇잎부터 떼어내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생활하면서 비밀번호를 만들게 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은행 업무에서도 필요합니다. 회사나, 집으로 들어갈 때도 비밀번호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기억하지만 어쩌다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 난감합니다. 분명 내 공간이고, 나의 자리인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려운 세대는 난감합니다. 저도 그런 편입니다. 인증번호를 보낸다고 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한다고 하고,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하라고 하고, 특수문자를 꼭 넣어야 한다고 합니다. 남들은 5분도 걸리지 않는 일이, 1시간씩 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도용을 막고, 나의 정보를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비밀번호입니다.
1985년의 기억입니다. 저는 신학생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여름 행사를 위해서 천마산으로 답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기려면 짐을 다시 정리해야 하고, 번거로웠습니다. 그냥 머물면 편하기는 하지만 자칫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모든 교사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머물 것인지, 이동할 것인지 저에게 결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산행을 많이 했던 경험이 있어서 제게 결정하도록 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신학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제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머물렀는지, 자리를 옮겼는지 지금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결정을 내렸고, 교사들은 저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권한보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 주었습니다.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도록 하였습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운다고 하였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말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이 한 일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율법이라는 잣대로 자신들은 지고 가지 않는 짐을 타인에게 지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망과 재물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편협된 교리와 율법의 ‘틀’로 가두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거대한 권력의 비리와 부패를 눈감아 주었고, 오히려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나라는 비밀번호를 누르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고수(高手)와 하수(下手)의 차이!
-양승국신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눈을 크게 거슬리게 하는 광경이 있었으니,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과 강도들의 소굴이 된 것이었습니다. 대축제를 앞두고 순례차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 연중 가장 큰 대목에 크게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은 성전 구내까지 들어와서 상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분노로 가득찬 예수님께서는 그간의 온유하고 다정다감했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상인들을 쫓아내셨고,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하고 속화된 성전을 본래의 장소, 기도하는 집, 주님의 집, 구원의 장소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군중들은 박수를 쳤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에 큰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운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 복음 21장 23절)
고수(高手)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내를 알아 차리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크게 당황시키는 명질문을 한 가지 던집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날카로운 질문 앞에 하수(下手)인 그들은 무척이나 당황해 합니다. 서둘러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합니다. 다들 고개를 맞대고 수군수군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혼자이시지만, 다들 당대 내놓으라 할만한 지도자들과 석학들 여러명에 당당히 맞서십니다. 예수님의 공격앞에 쩔쩔 매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통쾌합니다. 예수님의 깊은 내공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운명은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 모르겠소.”(마태오 복음 21장 27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것이라면 예수님의 권위 역시 하늘로부터 온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존재의 신비와 당신 권위의 원천에 대해서 적대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것인데, 미리 그들에게 알려주는 일 자체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탁’하고 놓으신 결정적 묘수(妙手) 앞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하수 적대자들의 동요와는 달리, 여지를 남겨 두시는 여유있는 고수(高手),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돋보입니다.
적대자들은 분명 예수님의 권한이 사탄에게서 유출되었으리라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에게 요한 세례의 유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가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적대자들이 스스로 물러나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지혜와 경륜으로 가득한 예수님은 당신 특유의 대화방식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고 말씀하시며 행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눈에 들어야한다
-반영억신부-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답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보고,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 안에서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도 똑같이 하셨다.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2).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시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 23)
-한상우신부-
기다림은 사랑을
동반하지만
교만은 언제나
착각을 동반합니다.
기다림을
사라지게 하는
한결같은 착각과
교만입니다.
우리를
더욱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하느님께
함부로 어색한 권한을
언급합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요한 세례자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높입니다.
이와같이
소중한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관계는 없습니다.
참된 권한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권한의 진위
여부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이
더 소중합니다.
기다림도
권한도 세례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권한은
끊어진 길을
여기에서 다시
이어줍니다.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오시는 분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파견되셨는가?' 하는 물음을 대면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말하자면 '자격' 논쟁이지요. 한낱 떠돌이 설교가인 목수 출신 가난뱅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인 성전에서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물음일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레위 지파나 아론 가문이 아니십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시지요.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도, 어느 계보를 잇거나 소속이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흔한 타이틀조차 없으시지요. 이런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마도 무자격자에 가깝겠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요한에게 해당하는 답이 곧 예수님께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나 예수님 모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존재들이기에 모든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권한"을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제도화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세속화하고 권력화해서 거머쥔, 곧 사유화한 "권한"에 줄을 대지 않은 모든 행위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매한 민중을 교란시킬 수 있는 도전일 뿐입니다.
"모르겠소"(마태 21,27).
사실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모르겠습니다"라는 인간의 고백은 피조물로서 참으로 솔직하고 진실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종교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만큼 겸허하거나 진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답을 모르지 않는 그들이 모른다는 답을 택합니다. 답을 고르다 보니 자기들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걸 안 게지요. 그래서 불리한 답을 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민수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신 것만을 전하십니다. 그 말씀이 당신께 해가 되어 돌아온다 해도 굽히지 않으시지요.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모른다"고 발뺌하는 종교 지도자나 원로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모든 권한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용서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입니다. 사실 세상에 마련된 제도와 조직, 소속과 권한은 세상의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니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신적 질서와 맞닿아 있다면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목도(目睹)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격부터 따지는 모습은 영역 다툼이나 밥그릇 싸움처럼 치졸해보여 낯뜨겁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를 제 식대로 조작할 때, 하느님 말씀에 자기 본위를 섞을 때 권한은 힘과 빛을 잃습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대하는 사람들이 다 느끼지요. 그럴수록 인간적인 힘과 제도를 보완하고 치장하며 권한을 강화하려 해도 "하느님의 영"(민수 24,2)이 퇴색된 권한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뜻을 점점 더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선포하고 이루시는 "어질고 바른"(화답송)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나요? 혹 성당에서나 그 권한과 질서를 믿고 따르다가, 집과 직장과 모임과 관계 안에서는 철저히 세상 이치를 추구하는, 분열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다가 혹 오시는 주님 앞에서 누구들처럼 "모르겠소" 하고 발뺌하게 되지는 않을런지요...
성탄을 향해 더 깊고 진하게 무르익어가는 이 기다림의 시기에 권한 논쟁이 던지는 화두에 진솔하게 머무르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이사 24,16)는 복되다.

열린눈과 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902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 21,23-27)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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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민수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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