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12. 18. 19:57

2019년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루카 1,5-25)


“Do not be afraid, Zechariah,
because your prayer has been hear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shall name him John. 
And you will have joy and gladness,
and many will rejoice at his birth,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나지르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지르인’이란 ‘하느님께서 성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제1독서). 즈카르야는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할 때 천사를 통하여 아기의 탄생 소식을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삼손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에 남편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의 탄생을 전합니다.삼손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사람이므로 관련법에(민수 6장 참조) 따라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그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먼저 관련 규정을 지키고 이어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부모의 청원은 받아들여집니다.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통하여 신앙과 연관된 희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삶의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그 시련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였지만,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그때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천사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고 말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믿음이나 믿음 없는 희망이 사라진 즈카르야는 새 시련을 맞이합니다. 말씀이 실현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는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진 희망을 돌려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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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형제님을 만났는데,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가까운 백반집에 함께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에 식사가 나왔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식사하면서 밥에서 콩을 하나하나 골라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다고 느꼈는지, “제 어머니께서 콩을 싫어하셨거든요.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콩을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저도 싫더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제게 식성이 참 좋다고 합니다. 도대체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신부님 어머니께서 음식을 골고루 해 주셨나 봐요. 그러니 편식을 전혀 하지 않으시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드시지 않는 음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고, 그래서 편식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마약중독자인 아버지를 둔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마약에 찌들어 있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훌륭한 법조인이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마약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자신도 마약중독자가 되었다면서 아버지를 탓합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마약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아서 마약을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 탓, 환경 탓은 스스로 못났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어려울 때 더 많이 성장하는 반면, 누구는 그 순간에 좌절하면서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라, 레베카와 같은 많은 거룩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사랑한 라헬도 아이를 낳지 못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역시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커다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하느님의 손길을 봐야 하지만, 우리는 즈카르야처럼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또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부끄러워 다섯 달 동안 숨어지낸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늘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의심과 부끄러움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꼼짝하지 않고 바람을 기다리는 배와 같다(아르센 우세).



불안의 이유

많은 이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1)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해서.
2) 열심히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3)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게 보고 있어서.
4) 자신의 마음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기에.
5) 집중할 게 없거나 싫어하는 것만 하게 되어서, 내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불안의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유를 없앨 방법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불안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 안에 늘 머무르길 바랍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말씀이 믿어진다

-전삼용신부-


부자가 될 것을 원하고 무언가를 원하면 꼭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만 한다면 꼭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성공을 위한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내용은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원하기만 하고 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믿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을 방해하는 요인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만장자 시크릿’의 저자 하브 에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모두가 “당연히 되고 싶죠.”라고 대답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적어보라고 하면 또한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적는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적는 것들을 예로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부자는 탐욕스럽잖아요.” “돈이 전부는 아니죠.” “벌었다가 다 잃게 되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하죠?” “내가 돈을 많이 갖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가 가진 돈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고소득자로 등록되면 나라에 엄청난 세금을 내야해요.”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뼈 빠지게 일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고생해서 돈을 벌었는데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하죠?” “내가 부자가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여기저기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달려들어 귀찮을 거예요.” “강도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 자녀가 유괴범들에게 납치될 수도 있어요.” “책임질 게 너무 많아져요. 그 돈을 다 어떻게 관리하겠습니까? 어휴, 골치 아파.” 그 외에도 줄줄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만 바란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 안에서는 그 믿음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그 바람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며 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고는 싶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갈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을 생산하며 삽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오는 이유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데 자기 자신은 항상 생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선 고생은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면 생존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더 큰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에이, 몰라!”라며 생각이 주는 메시지를 끊어야합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가 될 즈카르야 사제가 등장합니다. 천사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라고 말하듯 즈카르야는 무언가 끊임없이 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원했을까요? 자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어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라고 말해줍니다. 이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와 같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을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는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발 자아와 대화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어린이들은 우울증이 없을까요? 부모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하니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는 사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자녀들이 생각이 다시 많아지고 그것은 부모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춘기를 기쁘게 보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새로운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춘기는 지속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새로운 부모인 하느님을 믿어 그분의 소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기쁨은 벙어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상급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벙어리가 되는 길은 하느님께 수다쟁이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하느님과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와의 대화가 끊깁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아와 굳이 오랜 시간 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벙어리가 되어야만 말씀이 믿어집니다.


-조재형신부-


외신 기자 협회에 등록되어 있어서, 가끔 문화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습니다. 카네기 홀에서 세종 솔리스트(Sejong Soloists)’ 공연이 있었습니다.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곡은 여민락(與民樂)’이었습니다. 작곡가인 이신우의 작품이었습니다. 여민락의 의미는 백성과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백성과 함께 즐기는 마음으로 여민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구름만 많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반영억신부-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의 다가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 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미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 되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됩니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20,29).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한 주간의 사제직무를 끝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표징을 간직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 ‘밀운불우’(=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게 끼어 있을 뿐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건이 조성되어 징조는 나타나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하고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오늘 이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4-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도 역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2,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오늘 <복음>의 장소인 성전의 두 제단은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7)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기뻐하며 자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관한 묘사는 그들은 구약성경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잇는 후예라는 것을 암시한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게다가 둘 다 아이를 낳기에 너무 늙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라와 레베카, 라헬, 한나에게 그러셨듯이,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의 발현은 참된 사제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리는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암시한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에 대한 이름에 대한 예고를 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고 한다. 요한의 경우에는 그의 생부인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반면, 예수의 경우에는 요셉에게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찾아온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의 선포를 나타냈다. 이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신 분이다. 어머니 배 속에서 뛰어 놀아 주님의 오심을 미리 알렸다.(루카 1,44 참조)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두 사람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17)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으나 요한을 갖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 14)

-한상우신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출생이길
기도드립니다.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하나로
끌어 안게하는
신앙의 탄생이
있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삶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삶을 바꾸어 놓는
생명이 있습니다.

삶은 삶을
바꿉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꿉니다.

삶의 첫시작인
출생 안에
하느님의 기쁨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생명을 통한
기쁨의 참된
방식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기쁨은 우리의
마음을 닦아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이
가장 행복한
기쁨입니다.

하느님께 맡겨야
기쁠 수 있고
새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으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두 쌍의 부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차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주 특별한 아들을 갖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우리는 먼저 아이 못 낳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여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납니다. 자손의 수가 곧 재산이고 힘이던 시대에 생산자 역할에서 소외된 여성의 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지요. 그 기다림이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가련했던 그 손으로 아기를 안게 되지요.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그녀들이 누린 이 기쁨과 환희가 곧 성탄의 전조일 겁니다.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판관 13,23).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온 아기들이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아들은 나지르인, 즉 주님께 봉헌된 존재이고 또 이스라엘 구원에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미래의 판관인 이 아기가 바로 삼손이지요. 사랑과 배신 등 극적인 요소가 듬뿍 담긴 삼손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쉽게 회자될만큼 유명합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판관 13,24).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하신 아기는 '봉헌된 이'로서 주님께서 내리신 복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에서 판관으로 일하며 필리스타인들과 거친 싸움을 벌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줍니다.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십 년간의 구원과 평화를 누리지요.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5).

복음에서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잉태를 전하는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아기의 부모 역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루카 1,6)이라고 소개했지요. 사실 사람들 눈에 큰 인물로 보이기보다 주님 앞에 큰 인물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해 보이는 이면의 약함을 잘 모르지만 주님은 모든 걸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평생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절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임에도 즈카르야는 이미 늙어버린 나이를 이유로 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시적이나마 혀가 묶이게 되지요.

사실 믿지 않는 이는 침묵해야 옳습니다. 그의 불안한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적 동요가 하느님의 단순한 진리를 가리거나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혀가 묶이는 침묵은 자신에게는 정화의 기회가 되고 타인에게는 두려움을 일깨웁니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아이 못 낳는 여인의 출산'이라는 구약의 기적이 '처녀의 잉태와 출산'이라는 신약 초입의 기적으로 이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여인들이 겪어온 개인적인 기다림은 마리아에게서 민족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구원의 기다림으로 건너갑니다. 그 통로의 끝에 진정한 구세주께서 태어나십니다.

꼭 생물학적으로 출산의 능력을 받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성체를 영하는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서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에게서 탄생하신 말씀께서는 나의 미소와 격려, 사랑과 배려, 용서와 동행의 발걸음으로 육화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 구원의 파장은 개인과 이웃, 친지와 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에 작은 빛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마노아의 아내이고 엘리사벳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나의 청이 주님께 가납되길 바란다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959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9일

 2015년 12월 19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1,5-25)


사라, 레베카와 같은 많은 거룩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사랑한 라헬도 아이를 낳지 못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역시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커다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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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을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는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발 자아와 대화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어린이들은 우울증이 없을까요? 부모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하니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는 사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자녀들이 생각이 다시 많아지고 그것은 부모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춘기를 기쁘게 보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새로운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춘기는 지속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새로운 부모인 하느님을 믿어 그분의 소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기쁨은 벙어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상급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벙어리가 되는 길은 하느님께 수다쟁이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하느님과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와의 대화가 끊깁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아와 굳이 오랜 시간 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벙어리가 되어야만 말씀이 믿어집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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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백성과 함께 즐기는 마음으로 여민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민락의 의미는 백성과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용기를 주었습니다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초는 자신을 태울 때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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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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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두 쌍의 부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차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주 특별한 아들을 갖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우리는 먼저 아이 못 낳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여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납니다. 자손의 수가 곧 재산이고 힘이던 시대에 생산자 역할에서 소외된 여성의 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지요. 그 기다림이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가련했던 그 손으로 아기를 안게 되지요.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그녀들이 누린 이 기쁨과 환희가 곧 성탄의 전조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미래의 판관인 이 아기가 바로 삼손이지요. 사랑과 배신 등 극적인 요소가 듬뿍 담긴 삼손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쉽게 회자될만큼 유명합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판관 13,24).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5).
복음에서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잉태를 전하는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꼭 생물학적으로 출산의 능력을 받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성체를 영하는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서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에게서 탄생하신 말씀께서는 나의 미소와 격려, 사랑과 배려, 용서와 동행의 발걸음으로 육화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 구원의 파장은 개인과 이웃, 친지와 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에 작은 빛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마노아의 아내이고 엘리사벳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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