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8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렘브란트, 요셉의 꿈.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셨지만, 이를 받아들인 요셉의 순명도 뒤따랐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양들을 흩어 버리고 당신도 저버린 목자들을 엄하게 질책하신 다음 당신께서 직접 내려오시어 양들을 다시 모아들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전에 살던 곳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예레 23,1-4 참조).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날이 온다! …….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성탄에 땅을 진정으로 다스리고 정의와 공정을 이룰 “싹”을 세상에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아이로, 참으로 외부의 힘이나 인간의 현세적 특성에 좌우되지 않는 “싹”으로 나타납니다. 이 싹은 무한한 사랑에 힘을 두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주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시게 하고, 당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인도합니다.오늘 복음에서는 예레미야가 행한 예언의 완성을 봅니다. 오래전부터 예언된 탄생 사건은 요셉의 개인적이고 매우 고통스러운 인생과 함께합니다. 하느님의 큰 선물은 일반적으로 큰 시련이 따릅니다. 요셉은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과 모든 이를 위한 특별한 은총, 곧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동시에 내적 기쁨과 완전한 정절을 통하여 마리아와 영적으로 결합하는 삶을 준비합니다. 요셉의 강한 마음과 부드러움에 탄복합니다. 의로운 사람인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면 그녀가 수치를 겪게 될 것이므로, 남몰래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남모르게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요셉의 강한 마음의 표지이지만 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의 부드러움입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하는 소식에 갇혀 있지 않고 희생할 준비를 하며,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이 열려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큰 약속을 드러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의 뒷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앞모습을 보지 않으니 괜히 마음이 짠해지더라는 것이었지요. 그때부터 남편의 다른 모습을 보려 했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주위 사람들로부터 잉꼬부부 소리를 듣고 있답니다. 이분이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앞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뒷모습도 바라봐야 했어요. 다른 모습을 보니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다른 모습을 봐야 믿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작용조차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떠올려 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상세한 과정을 우리가 무슨 수로 그려 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 놀라움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요셉 성인께서는 어떠하셨을까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졌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소명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나타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꿈에서 보고 들었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꿈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꿈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아마 ‘개꿈 꿨다.’라면서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의 꿈의 내용을 받아들여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셉 성인이 꿈이나 믿는 미신에 현혹되는 사람이었습니까?
세상의 눈과 다르게 보았기에 자신을 늘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하느님 사랑을 믿었고, 더불어 자신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니다. 그 수용의 믿음이 하느님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으로 이끌어줍니다.


1722년 이스터섬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고립된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에서, 현대적 기술도 없고 주변에 나무도 없는 환경에서, 높이가 20m에 이르고 무게가 90t에 달하는 정교한 거석상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아이’라고 불리는 거석상은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최고의 예술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거석상이 나무 하나 없는 곳에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이 석상을 만들어서 운반하기 위해서는 통나무를 이용해야 했고 따라서 계속 나무를 베어내다 보니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숲이 사라지면서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없어지고 거석상만 남았습니다.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이 거석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이 시대에도 중요하다면서 다른 것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돈, 지위를 위해 사람과의 사랑 관계를 희생하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멀리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께 합당하려면 말구유처럼 되라
-전삼용신부-
옛날에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으며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혼인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가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들을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고, 둘째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인간관계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귀찮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여전히 셋째 딸만은 부잣집의 며느리로 들어가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버릇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절대 행복한 며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쓸 수 있어야 ‘의로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그분 덕분으로 죄를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웃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의로운 요셉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의로움이 곧 사랑이기에 의로운 사람에게만 사랑 자체이신 분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놓인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말구유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당신께 합당한 사람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구유가 어떤 요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말구유만큼 아기가 놓이기에 비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인간에게 머물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이 겸손이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당연히 성가를 부르지만, 당시 시대상을 담은 ‘민중가요’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 작은 연못, 광야에서,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이 오면’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은 그런 노래를 부르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오늘은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멜로디가 서정적이었고, 가사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날은 왔습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와 평화의 날, 정의와 공정이 펼쳐지는 날은 아직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지만, 예전에는 학교에 가서 확인했습니다. 신학교에 지원했고, 합격자 발표일을 기다렸습니다. 신학교 건물에 합격자 명단이 벽보로 붙어 있었습니다. 아! 합격자 명단에 저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날의 기쁨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던 날입니다. 약간 어두컴컴한 내무반에서 선임병들이 저를 보고 있었고, 목청껏 신고했던 날이 생각납니다. 두렵고, 떨리고, 긴장했던 날입니다. 서품식 날입니다. 교우들이 ‘성인 호칭 기도’를 함께 불러주셨고, 저는 바닥에 엎드려서 눈물 흘렸습니다. 신학교 생활이 스쳐 지나갔고,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날이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유배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날을 만드는 걸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지혜롭고 친절하며, 성숙한 인간미를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시키는 사람!
-양승국신부-
수도회 입회 전의 제 모습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면 스스로 깜짝 놀라곤 합니다. 당시 저는 너무 말이 없어, 과묵하다 못해 목석(木石)같은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어린 시절 제 성적표 학교 생활란에는 언제나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탐.’이란 담임 선생님들의 의견이 계속되었습니다.
회사 출근하면 말 한마디 없이 일만했습니다. 말을 안하다보니 더 말수가 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직무상 한 시간 두 시간씩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으니, 제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 역시 깜짝 놀라곤 합니다.
예수님의 양부 역시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며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안에서 각각 다른 한명의 요셉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고,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꾸준히 실천하고 완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옛 요셉이 백성을 죽음에서 구해낸 하느님의 도구였듯이, 새 요셉 역시 잔학한 헤로데 임금으로부터 예수님을 구해내는 하느님의 종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약혼 연령은 깜짝 놀랄 정도로 낮았습니다. 남성의 경우 18~24세, 여성의 경우 12~13세 약혼을 했습니다. 약 1년 후 신랑은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거나,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으며,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사회 안에서 의인(義人)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이란 지혜롭고 친절하며, 성숙한 인간미를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고,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에 딱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삽을 뜰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
-반영억신부-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 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 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 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본기도>에서는 “다시 맞는 성자의 탄생으로 예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다시 맞을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1독서>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그리고 <화답송>은 어제와 똑같이 반복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그리고 <복음>에서는 그분을 모셔 들인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는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두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은 요셉의 믿음에 찬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높은 법, 곧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거룩한 신비를 알려주고 깨우쳐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는 단지 예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으로 요셉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렇게 그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곧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마태 1,22).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여,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쫒아 “의로움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송영진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여기서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마태오복음에서는 첫 번째 ‘복음 선포’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요셉이 첫 번째로 복음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라면 예언자에게 그 일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요셉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임무를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아기의 이름을 지으셨지만,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아기의 이름은 예수” 라고 말하는 일은 아버지로서 요셉이 하게 될 일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예수’ 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구세주로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설명해 준 말이기도 하고,
‘예수’ 라는 이름을 풀이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맞아들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즉 구세주의 어머니를
맞아들이라는 뜻이고, 구세주를 아들로 맞이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응답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응답을 하거나 안 하는 것은 요셉이 자유롭게 선택할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즈카르야와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요셉에게도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즉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서는 왜 요셉에게는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알려 주셨을까?
혹시 요셉을 차별 대우 하신 것은 아닐까?”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루카 1,27).
이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따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동시에 부르심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더라도,
즉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각각 부르심을 받았더라도,
부르심을 함께 받고 응답도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오복음에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없고 요셉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요셉의 이야기는 없고 마리아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을(같은 이야기를) 두 복음서 저자가 각각 다른 각도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왜 요셉에게는 잉태 후에 알려 주셨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잉태 전에 미리 요셉에게 알려 주셨더라도, ‘예고 - 번민 - 응답’이라는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일의 결과도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요셉이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자칫 잘못되었다면,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에
큰 차질이 생길 뻔 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보면서,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하면,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요셉의 의로움’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요셉이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약혼녀 마리아를 신뢰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음을 요셉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마리아를 안 믿었다면,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냈을 것이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니라,
파혼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어떤 비난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일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자라야만
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남편 없이 혼자서 아기를 키워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아내와 아들을 버린 요셉이 모든 비난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모든 비난을 자기가 받더라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에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천사가 나타나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고, 그 소식을 들은 요셉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기꺼이 수행하겠다고 응답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하시는 일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그 일에 협력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일은 항상 사람들 자신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 구원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에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요셉을 묵상하자.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 20)
-한상우신부-
먼저 하느님께서
다윗의 자손
요셉을 받아들이듯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받아들여야
깨닫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맞아들여야
서로를 알게되는
삶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같이
받아들임과
맞아들임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도
맞아들임에서
시작합니다.
맞아들임이
맡기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시작은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이와같이
하느님의 뜻안에
내어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를 지켜주는
맞아들임이
가장 아름다운
돌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나갈 길또한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맞아들이는
공동체의 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구원 역사의 과정이 차분히 풀려나갑니다. 한 사람의 관대하고 선한 순종으로 풀려가는 이 순행이 우리를 흐뭇하게 만들어 줍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약혼녀의 임신이 분명 충격이었을텐데 요셉은 격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자기를 내맡기기보다 이성과 신의를 다해 숙고합니다. 만일 마리아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떠나보내주기로 한 겁니다. 파혼으로써 마리아가 보다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물러서 주는 것이지요. 그만큼 마리아를 사랑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마태 1,20).
요셉의 결정은 아직 하느님의 계획을 모르는 인간으로서 최선의 지혜요 희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윤리, 도적적 경계를 초월합니다. 아무리 의롭고 신실한 인간이라도 하느님의 뜻은 그의 고뇌보다 심오하고 신비롭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예언서에 기록된 '동정녀 잉태와 아들의 출산'(이사 7,14 참조)이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인 동시에, 말씀이신 분이 육을 이루어 세상에 오시리라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지혜와 정의를 이 세상에 이루시리라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들에서는 메시아 도래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첫째,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입니다.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온 죄악은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사이를 갈라놓고 무너뜨렸습니다. 끊임없이 분화되고 확산되는 어둠의 힘이 인간의 마음을 물들이고 희망을 앗아가는 동안 인류는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지요. 오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지고 죄가 되어 죽음으로 들어가시면서 말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세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선사받습니다. 함께함.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을 솟게 해주는 단어인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리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느닷없이 닥치는 삶의 복병들 앞에서는 두려움과 근원적인 고독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지상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셋째 목적은 제1독서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대목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돋아나게 하실 "새로운 싹"(예레 23,5)에 대해 예언합니다. 그 "싹"은 메시아를 가리키지요. 여리고 약한 싹이 자라나 세상에 슬기와 공정, 정의를 이룰 것입니다.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 "새로운 싹"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탈출은 신앙의 원체험입니다. 그들은 대대손손 그 사건을 전하고 기억하며 하느님 백성인 자기들의 정체성을 이어가지요. 그런데 오늘 예언서 저자는 그들이 더 이상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신 하느님을 부르지 않고, 유배와 귀양살이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님께 맹세하리라고 예언합니다(예레 23,7-8). 주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것은 그들 뼛속 깊이 새겨진 원체험의 중심을 이동시킬만큼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예레 23,8).
메시아 도래의 셋째 목적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와 유배를 거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곧 존재의 기반이고 안식처입니다. 그곳으로의 무사 귀환은 생명의 뿌리를 되찾아, 풍요와 번영과 안식을 누리려는 그들의 절박한 바람이 성취되는 순간이지요.
메시아, 곧 구원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고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존재의 본향으로 데려가 안착시켜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 주시고 그리로 들어가도록 이끄실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곧 길이 되어 주셨지요. 창조 이전에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온전한 사랑의 상태가 곧 우리 그리움이 달아드는 최종 목적지요 영원한 본향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 하느님과 함께 살며,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온 인류와 믿는 모든 이들에게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은 우리 각자의 실존을 파고듭니다. 각자가 '지금 여기'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 도전과 약함, 갈망과 실패 등에 따라 그리스도께 희망하는 바가 다를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나에게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나는 구원이 어떤 얼굴로 다가오길 바라나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내게 구원이 될 그 자리에 나의 뿌리와 소명과 완성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분이 내게 오시겠답니다. 마라나타! 어서 오십시오, 나의 주님! 나의 구원이시여! 아멘.
구원을 이루는 의로운 싹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937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놓인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말구유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당신께 합당한 사람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구유가 어떤 요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말구유만큼 아기가 놓이기에 비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인간에게 머물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이 겸손이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전삼용신부-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조재형신부-
---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반영억신부
---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요셉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임무를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루카 1,27).
이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없고 요셉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요셉의 이야기는 없고 마리아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을(같은 이야기를) 두 복음서 저자가 각각 다른 각도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왜 요셉에게는 잉태 후에 알려 주셨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잉태 전에 미리 요셉에게 알려 주셨더라도, ‘예고 - 번민 - 응답’이라는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일의 결과도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요셉이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송영진신부-
---
먼저 하느님께서
다윗의 자손
요셉을 받아들이듯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받아들여야
깨닫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맞아들여야
서로를 알게되는
삶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같이
받아들임과
맞아들임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도
맞아들임에서
시작합니다.
맞아들임이
맡기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시작은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한상우신부-
---
오늘 독서 예례미아서는 의로운 싹에 대해 얘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요셉의 의로움이 처음에는 인간적인 의로움이었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만나면서
한 민족을 구하는 의로움을 넘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싹이 된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12월 20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0) | 2019.12.19 |
---|---|
2019년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0) | 2019.12.18 |
2019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0) | 2019.12.16 |
2019년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0) | 2019.12.15 |
2019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0) | 2019.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