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Margaret K 2019. 12. 14. 20:43

2019 12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2-11)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look for an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이 시온에 모여 기쁨과 즐거움으로 환호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였지만(요한 1,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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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기쁨을 주시고자 하신다고 합니다.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광야는 비옥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 슬픈 땅입니다. 그러한 광야도 기뻐하라고 초대를 받습니다. 기쁨은 인간의 긍정적인 변화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기뻐하라고 초대하시며 참된 기쁨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주십니다.제2독서에서는 언제나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인내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오시지만, 결정적으로는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큰 희망을 품고 주님의 재림을 기쁜 마음으로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복음은 기쁨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사야가 전한 표징들이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에서 완성되지 못한 표징을 제시하십니다.“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바로 가난한 이들, 곧 기쁨과는 거리가 먼 이들에게 전해집니다. 주님께서는 군중이 요한의 역할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분이 전한 메시지와 그분의 인격에 충실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표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이고,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구원자, 참된 메시아의 길을 직접 준비한 가장 위대한 예언자입니다.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큽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입니까?

-임상만 신부-


얼마 전 여행 중에 부산 자갈치시장을 들른 적이 있다. 번잡하지만 꽤 깨끗한 시장 좌판에 일행이 자리하자 인심 좋게 음식을 건네주는 주인아주머니 손가락에 묵주반지가 끼워져 있다. 반가운 마음으로 “아주머니 어느 성당 다니세요?” 하고 물으니 “무신, 지금은 성당 안 다녀요. 시누이 따라서 한동안 열심히 다녀봤는데 예수님과 나는 잘 안 맞나 봅디다. 예수 믿고부터 장사도 더 안되고, 몸까지 아프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매우 당황스러워 “그러면 그 묵주반지는 왜 아직도 끼고 있으세요?” 물으니 “이게 금반지라서 그러지요. 그리고 이걸 버리면 더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라며 말을 흐렸지만, 그 눈빛에는 한동안 예수님께 가졌던 기대와 실망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복음에 옥에 갇힌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메시아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묻는 대목이 나온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요한 세례자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기에 이제는 신음하는 백성을 구해내기 위해 모종의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가관이었다. “우리는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 금식하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매일 먹고, 마시면서 정치적인 움직임은커녕 쓸모없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만 상대하고 더욱이 세리와 창녀들과도 노닥거리며 사는데 그가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의 활동은 이방 민족을 심판하시고 영광스러운 다윗 왕조를 온 세계 위에 세우심으로써 그 나라의 모든 병자가 치유되고 희년이 선포되며 낙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로마의 속국이며 이를 전하는 자신은 오히려 감옥에 갇혀 있으니 마땅히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권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의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이미 그 나라가 왔으니 의심하여 넘어지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행하신 일을 보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자가 진정한 복된 자라고 격려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실망과 비난으로 바뀐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믿고 교회에 올인하고 있는데 나의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시지 못하는 예수를 계속 믿어야 하나?’ 하고 불만을 토로하며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진정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고, 예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수용의 문제는 결국 자기가 넘어서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예수님께 대한 실망감으로 혹은 체념으로 넘어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바람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도, 하느님의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대와 기도에 모조리 응답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지금 예수님과 멀리 있다고 여겨지면 요한 세례자처럼 예수님께 직접 질문해 보는 게 어떨까 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행합일(知行合一). 

-서강휘신부-


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명나라 때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일치돼 있다’라고 풀이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때 참다운 앎을 진지(眞知)라고도 하고 왕양명은 그것을 양지(良知)라고도 불렀다. 호랑이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멧돼지의 갈비뼈를 부서뜨릴 만큼 강한 이빨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그는 그저 신기해 할 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깊숙한 산중에서 호랑이를 한 번이라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해지며 사지가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진정으로 호랑이를 아는 사람이다. 행동이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문제는 윤리적인 앎은 우리들의 체험적인 앎처럼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누지 못한다. 양명의 관점에 의하면 결국 우리는 용서와 나눔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명의 답은 간단하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나누라.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이미 해야 할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이나 나약함 때문에 행동을 미루거나 마음의 흡족함을 이유로 망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천하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앎을 증거 한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을 말한 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이 많은 지식이나 완벽한 앎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주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앎이 이뤄진 이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종신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양명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것에 있어서 고도로 예민한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되는지, 혹은 내 마음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여기에는 많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외적으로 다 갖춰진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완벽한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코넬리우스 갈레 더 영거의 ‘감옥 안의 요한 세례자’.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을 만난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줬으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마르 1,7; 루카 3,16)이라고 고백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제자들을 시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한다.

요한 세례자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무엇인가를 더 발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셨을 뿐이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마태 11,5)

그들이 ‘보고 들을’ 만한, 그래서 그들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새로운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진 것을 이미 봤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것이란 결국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음성과 확신에 찬 신적인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말과 행위, 앎과 실천이 하나 된 하느님의 얼굴이다.

요한 세례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데 있었지만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보다도 작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확신을 구하려는 의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하늘나라의 존재와 인간이 구분되는 분기점이다. 여전히 ‘알아야’ 더 잘 믿고 행할 수 있다는 나약한 인간의 두려움이 그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동시에 자선 주일이다. 우리의 나약함은 자선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혹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자선을 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나의 이 자선이 일시적인 동정심은 아닌가 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이유로 나눔과 베풂을 유보한다. 차라리 그것이 자신에게 더 솔직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충족될 때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평생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 삼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믿음에 찬 실천을 시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이사 35,1)

물기 하나 없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스스로 기뻐할 수 없으며 사막은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광야이며 메마른 땅이며 사막이다. 기뻐하거나 꽃을 피울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우선 기뻐하고 꽃을 피우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행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의 신앙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고, 이 기다림은 메마른 우리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작은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천과 앎이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행이 지속되지 못할 수도, 그 이후에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믿고, 희망해 실천하라. 기쁨과 꽃을 피우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대림(待臨).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란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척박함에 꽃을 피우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아닐까.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기다림은 현실로

-허규신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종 살이에서 어렵게 탈출한 후 하느님께서 알려준 땅에 정착하 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번을 누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두 나라로 분열합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침략을 받아 멸 망하고 맙니다. 또 그들에게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성 전 역시 파괴됩니다. 나라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 들이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아야 했던 유배의 시간은 이스 라엘 민족에게 고통의 시간이자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는 참회의 시간이었습니다. 유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여전히 일부의 사람들은 외국에 남아 있었고 돌아온 이들은 무너진 성전을 복구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힘겨운 시 간을 보냅니다. 이런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 한 것은 흩어진 백성을 한데 모으는 것이었고, 하느님이 주 신 땅에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희망은 종교 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구원에 대한 희망 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흩어진 백성을 모아 하느님 의 정의를 실현할 하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습니 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 구원자에 대한 기다림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현실이 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준 비하던 요한은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우리에게, 복음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 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분이 고, 그분은 이제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통해 구원이 이 루어진다고 말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 음을 듣는다.” 구약성경에서 예고된 이 모든 이들이 예수 님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은 사람들의 기다림이 성취되었다 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다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 다.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그것을 명확하 게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오심을, 종말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원한 생명을 기다 립니다. 물론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지만, 그 완성 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매년 대림 시기를 통해 준비하고 기 억하는 예수님의 탄생은 기다림이 단지 이상이 아니라 현 실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처럼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보증인 셈입니다. 이제 대림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이 현실이 되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안에 오시는 주님을 희 망 안에서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 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위로와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 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보답받지 않는 자선은 가능하다

-이명호신부-


최근 우리 가톨릭 사회복지의 화두는 ‘희생적인 사랑, 조건 없는 선행, 보답받지 않는 자선은 가능 한가?’입니다. 사회복지 이론이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고 결과 중심적으로 흘러가며, 정부의 정책 및 규정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더라도 그 결과는 즉시 좋은 성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우 타당성이 있는 정책과 이론입니다만, 가난한 사람의 상태와 그 어려운 상황이 갑자기 쉽게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결과 중심주의에 치우치다 보면 성과를 얻는 오랜 과정은 무시되기 마련입니다. 가끔 우리 사회복지회 사무실에 멀쩡한 차림의 어른이 찾아와서는 ‘식사비 좀 주시오~, 차비 좀 주 시오~’하고 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많은 성당의 사무실에서도 이런 사람을 만나보았을 것입 니다. 처음 몇 번은 달라는 대로 주곤 합니다. 그러다 계속 찾아오면 어느 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이유 로 거절합니다. ‘매번 주면 버릇이 나빠진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를 댑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성과없는 선행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 그럴지 라도 이럴 땐 주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루카 14,13-1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 들에게서 보답받으려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요, 때론 보답받지 못 하여 쉽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시설을, 이 사 람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내게 보답해주는 것이 이것뿐이야?’하는 회의감에 젖은 사회복지사를 만나 곤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은 잘못하고 있는 것만 확대하여 지적한다고 말합니다. 당장에 성과 없는 결과물로 무한책임을 강요당하여 힘겹다고 합니다. 이럴 때 위로가 될 인간적인 말이 별로 없습 니다. ‘합리적인 판단, 이성적인 생각’이 멈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엄연한 한계를 갖고 있나 봅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보답은 자연 순리를 뛰어넘는 하느님다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보답이나 결과는 ‘인간적인’,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는 “당파적인 전략 에서 벗어나,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곳에서 온전히 헌신하는 선행을 하라.”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항)고 하십니다. ‘희생적인 사랑, 조건 없는 선행, 보답받지 않는 자선’은 영성적인 것이요,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도 가톨릭 사회복지 안에서 이런 영성은 유효합니다. 이 영성 은 언젠가 하느님 안에서 보답받을 것이라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회복지 현 장에서 더욱 힘차게 봉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내가 가야 할 길"

-김원일 신부-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시 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고 듣는 대로 요한에게 전하라며,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 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분이 오시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라고 예언한 바로 “그분”이 당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 일들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일깨워 주시며,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지?’에 대한 관 심은 크게 갖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서는 예 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야 하고, 세상을 살아가 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능률과 효율을 기준으로 삼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기준은 그 일이 얼마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가?”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 법적 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 때로 비능률적이 고 손해를 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는 것. 그렇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무언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통 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일상생활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따라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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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쁘게 산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저 역시 학교 다닐 때는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고, 아침에도 8시까지 등교를 해야만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 그리고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5일제, 주 40시간의 근무 일시를 지키는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에게만은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언젠가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학교 졸업 후에는 어느 대학에 갈 거니?”라고 물으니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1년 동안 일을 할 거예요.”

공부도 때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부를 통한 견문보다 돈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1년 동안 번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할 거예요. 그리고 이 시간 동안 앞으로 제가 해보고 싶은 것을 찾을 겁니다.”

“남들 다 대학생인데 혼자 늦어지는 것 같지 않을까?”라고 물으니, “각자 가는 길이 다른 건데요. 뭐. 저도 필요하다면 대학에 갈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명한 가치관을 통해 자기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이 학생은 어떤 상황도 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따르고 있으니까요.

분명한 가치관은 자기 삶의 질을 더욱더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가치관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향해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닦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제자들 역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요한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고 물은 것은 그가 몰라서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던 세례자 요한이 아닙니까? 따라서 이 부분은 제자들을 그분께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의 제자가 직접 보고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시지요. 여기서 의심은 요한의 의심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의심입니다. 이 의심을 버리고 주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에 기초한 가치관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은 모두 이미 누군가가 차지했다(오스카 와일드).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변화시키는 방법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청년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강의를 잘하시는데 혹시 지금까지 했던 강의 중에서 망친 적은 없었습니까?”

“왜 없어요? 저도 강의 망친 적이 많습니다.”

“언제요?”

“.......”

강의에서 실수를 많이 해서 망친 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잘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강의했을 때, 너무나 긴장을 해서 어떻게 마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붉혔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었나?’ 싶습니다.

어느 정도 만족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실수나 실패가 잘 떠올려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나를 있게끔 해 주는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실수 하나하나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담아서 비난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잘 살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래야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고 싶어 할 때 빛이 보인다

-전삼용신부-


‘백만장자 시크릿’을 쓴 하브 에커의 세미나에 조지라는 한 여성 간호사가 참석했습니다. 조지는 상당히 고소득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항상 돈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그녀는 11살 때 엄마, 아빠, 언니와 함께 중국 음식점에 갔던 일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때 엄마와 아빠는 돈 문제로 심하게 싸웠고, 아빠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치며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테이블을 쾅쾅 두들기더니,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학교 대표 수영선수로 훈련받던 중이어서 심폐소생술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 이후, 조지의 마음에는 돈과 고통이 함께 엮이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는 싶었지만 돈이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돈을 원망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그녀에게 붙어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녀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아버지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돈의 탓도 자신의 탓도 아닙니다.

      하브 에커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돈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긍정하는 것만 나에게 모이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조지는 고소득을 보장하는 수술실 간호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재무 설계사로 직업을 변경하였습니다. 고객들에게 경제적 삶을 수월하게 해 주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참조: ‘백만장자 시크릿; 제1부 생각이 미래의 부를 결정한다’, 하브 에커, 알에이치코리아]


      오늘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목만 보아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은 ‘강론에서 무슨 돈 이야기야?’라고 하실 것입니다. 돈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종교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의 시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돈을 싫어하셨을까요? 가난을 사랑하셨지만 돈까지 싫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돈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돈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당신 제자 중에 가리옷 유다에게 돈을 맡겨서 관리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돈이 싫으셨다면 지니지 말았어야 합니다. 돈은 우리 몸을 흐르는 피처럼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집니다. 누가 돈을 싫어하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릴 때의 돈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자신도 모르게 돈을 싫어하게 만든 것입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처럼 자신을 싫어하는 느낌이 들면 그 사람에게는 가지 않습니다. 마치 개를 잡아먹으려고 부르면서 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렇게 쪼들리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브 에커가 한 가지를 깨닫고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돈과 부자에 대한 시각의 변화였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브 에커도 자신도 모르게 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돈이 부족할 때 성격이 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하브 에커의 아버지는 건설업자였는데 빚을 내서 집을 지을 때에는 아버지 성격이 매우 가혹하게 변했습니다. 다 지은 건물을 팔 때는 또 천사처럼 변해서 자상하게 “용돈 줄까?”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브 에커는 돈 때문에 무서웠다 자상했다 급변하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그도 독립하여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가지 다른 사업들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을 조금 벌었다 싶어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세상 꼭대기에 앉으리라 호언장담하며 또 다른 사업에 뛰어들어 보지만 1년 뒤에는 또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오르락내리락하던 패턴이 근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잘못된 사업 선택이나 동업자나 직원, 혹은 경제상황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백만장자 시크릿’을 알게 된 이후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 삶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만장자 시크릿은 그냥 돈을 긍정하는 마음입니다. 그 새로운 빛으로 보니 돈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싸우는 원인이었고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지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돈을 탓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불러들이려고 하니 돈은 그에게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돈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돈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돈과 연결된 모든 기억들을 감사로 전환했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더 이상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이웃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감사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각이 바뀌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의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빛이십니다. ‘겨울왕국 2’에서 올라프가 한 걸음도 걸을 힘이 없는 동굴에 갇힌 안나에게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 방향을 향해 한 발짝만 걸으라고 합니다.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비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도시의 삶에서 빠져나와 광야에 서면 모든 것이 밝아 보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보는 모든 것은 다 긍정이고 감사이기에 그리스도의 빛으로 보는 모든 것은 다 긍정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돈도 감사고 죄도 긍정적이며 미움과 멸시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시각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만이 그래서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돈은 나쁜 것이고 부자는 다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직 과거의 부정적인 시각과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먼저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떠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애벌레가 이전 습성을 버리려하지 않는다면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 속에 머물러 고통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변화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변화시키러 오시는 분이 보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지겨워야 하느님의 자녀라고 외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야 긍정의 빛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받게 됩니다. 광야는 지금의 삶에 지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향하는 곳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고 싶어 해야 빛이 보입니다. 나는 과거의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빛을 만날 것입니다.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신부-


199910월에 저는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몰랐는데 본당신부가 되니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평일미사에는 10명 정도 참석했고, 주일미사에는 100여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주일헌금이 20만 원 정도 나왔습니다. 가난한 흥부의 집에는 자식까지 많았다고 하듯이, 본당에는 공소도 있었습니다. 겨울은 길었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있으면서 재정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양봉하는 교우에게 꿀을 얻어서 몇몇 선배 신부에게 찾아갔습니다. 꿀단지를 드리니, 웃으면서 뭘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큰 도움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매월 조금씩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매월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고, 3년 동안 본당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되로 주었는데 말로 받는 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25인승 버스가 필요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지구사제회의를 본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회의를 준비했고, 맛있는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점심 값을 내면 좋겠다고 하면서 회의에 참석한 신부님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각자 점심 값을 종이에 적으라고 하였고, 지구장 신부님은 5백만 원을 적겠다고 하였습니다. 점심 값으로 25인승 버스를 마련하였고, 남는 점심 값으로 옆 본당을 도와주었습니다.

 

성당 마당은 넓었고,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청년들이 농촌 봉사활동을 오기도 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이 캠프를 오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신자들이 몰고 온 트럭을 타고 오이, 인삼, 포도밭으로 갔습니다. 학생들은 트럭 타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오후에는 강가에서 수박을 먹고 물놀이를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았지만 신부님들은 넉넉하게 후원금을 주고 가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면 주님께서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 대림 제 3주일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주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590년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모든 소망을 다 이루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3,10). 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메시아를“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3,12) 심판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11,5-6). 결국, 무슨 말씀이냐 하면 1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수백 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예고 소식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응답하고 그 무렵에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1,45). 성모님은 복되신 분입니다.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왜 복됩니까?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으셨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복되십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믿지 않고 의심하여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루카1,18-20.)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다가가다가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마태14,29-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했을 때 놀랍고 무서워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루카 24,36-38)고 나무라셨습니다. 의심을 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굽어보입니다. 주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6,47)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 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으십시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 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가지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주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모두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하느님의 삶으로 바뀌길 기대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 맞는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송영진신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라는 질문은,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이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답변하시는데,
“그렇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가 예수님 답변의 뜻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구절들은,
메시아 시대가 되면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처럼
보이는데, 처음부터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했던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고 의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었는데,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믿으라고 시킨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나를 믿는 사람은 복되다.”,
즉 “나를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7-10)”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데,
이 말씀의 진짜 뜻은, “내가 바로 메시아다.”입니다.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고 믿어라.”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라는 말씀의 뜻은,
“신앙생활은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채우려고 하는 생활이 아니다.”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여기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허망한 일’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을,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다.”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시간이 남을 때나 하는 취미생활처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절실함도 없고, 정성도 없습니다.
하고 싶을 때에만 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안 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부자가 되고 싶어서, 또는 출세하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도하면서 그런 것만 빌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아주 간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미신을 믿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생떼를 쓰는 일이고, 허무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 물론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좋은 일(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그 이기심도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 병이 낫고 건강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해진 다음에,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남들보다 더 부유해지고 남들보다 더 출세하는 것만 바랄 것인가?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러나 시련과 고난을 다 없애 달라고 무턱대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행복만 행복인 것이 아니고,
지금 이쪽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 행복은 시련과 고난이 하나도 없을 때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 때에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질문들을 성탄절에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왜 성탄절을 준비하느냐? 무엇을 바라고 대림절을 지내느냐?”
성탄절 전례를 준비하고, 성가 연습을 하고, 구유와 트리를 설치하고,
그날 해야 할 여러 가지 행사들을 준비하고, 선물들을 준비하고......
이 모든 일들을 왜 하는가? 무엇을 바라고서 하는 일인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또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정말로 기뻐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단순히 해마다 때가 되면 맞이하는 명절이기 때문에,
늘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어쩔 수 없이 그냥 하는 일인가?
그저 하루 잘 놀고, 잘 즐기고 싶어서 하는 일인가? 


-조욱현신부-


대림 제3주일에는 성탄이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있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이사 35,4). 이 기쁨은 피상적인 단순히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악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그 기쁨은 내가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1독서: 이사 35,1-6a.10: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 성도 예루살렘이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고 있다. 그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되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환희기쁨을 준다. 유배지로부터 해방된 이들’(10)만이 아니라, 변화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포함되고 있다.

 

이사야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 더 형상화하기 위해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고 한다.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6).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 신체와 지체 사이에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균형을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은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 예언의 말씀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 역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음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

 

예수의 이 말씀들은 이사야서에서 몇몇 대목들(26,19; 29,18; 61,1)과 관련이 있으며, 그 중 한 대목이 1독서에 나타난다(이사 35,5-6). 여기서 볼 때,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 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의심할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7-11).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에서 출애굽기(23,20)와 말라기 예언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전자에서는 야훼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11). 그러나 그렇다고 요한의 기쁨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2독서: 야고 5,7-10: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하고, 표징의 의미가 약화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운 기다림이어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2독서에서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운명적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끈기 있게 협력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접근시키고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 3)

-한상우신부-

기다림은
실천입니다.

기쁨과 인내라는
실천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반영합니다.

기다림도
사람을 향하고
자선도 사람을
향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향해야합니다.

메마를 이땅을
메마른 이마음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꾸어놓는
생명의 자선입니다.

자선을 통해
무엇을 위한
우리의 삶인지를
반성하게됩니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희망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듯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는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실천의 삶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믿는 것을
믿음으로 기쁘게
실천한 사람입니다.

신앙이란
메마른 광야에서
희망을 뜨겁게 만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끈기와 기다림의
이 길을 걸으십니다.

우리의 길은
어떠합니까?

원망과 심판의
길이 아닌
기도와 기쁨의
길이길 기도드립니다.

굳세어 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아파하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상선신부-


우리의 기다림이 삼 주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분홍색 초에 불을 붙이며, 교회는 기다림으로 잦아드는 우리에게 잠시 숨을 돌리고 그날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라고 다독입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입당송).

미사를 여는 입당송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권유나 조언을 넘어 거의 명령에 가깝게 들립니다. 기쁨이 그저 출렁이는 감정에 불과하다면 누구도 기쁨을 권고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기쁨은 단지 외부 자극에 좌우되는 '기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하느님 현존 상태 안에 있다는 표지이고, 믿음의 아우라이며, 선택 가능한 덕입니다. 곧 성령의 열매지요.

제1독서에서는 기쁨이 넘실댑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이사 35,1).

하느님께서 죽은 땅처럼 척박하고 황폐한 광야와 사막에게도 기쁨을 명합니다. 바로 그날, 맥 풀리고 무릎 꺾이고 불안한 이들, 눈멀고 귀먹고 다리절고 말못하는 이들이 자신을 옭죄던 사슬에서 풀려나는 해방의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이사35,10).

기쁨과 즐거움은 메시아 시대의 표징입니다. 가장 약하고 가난하고 뒤쳐진 이들이 기쁘고 즐겁다면 그 나라는 좋은 나라이고 통치자 역시 성공한 군주입니다.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는 이를 지향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손수 만드신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청사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다소 당혹스런 물음을 접합니다. 이제껏 예수님을 알리고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뚱딴지같은 질문입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것 같았던 요한이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요... 이 질문의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요한 자신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선포했는데(마태 3,12 참조) 예수님의 행적은 용서와 관용 일색이니, 어서 당신의 일을 하시라는 촉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일생을 걸고 선포한 바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지요. 또 감옥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그가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요한 자신이 실제로 예수님을 의심했건 다른 의도를 가졌건, 우리는 이 물음에 의연히 답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휘청했던 마음에 균형을 회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와 용서와 해방의 활동은 이사야서에 미래형으로 기록된 "그날"의 희망이 실현되는 장입니다.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지리라고 예언된 일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오신 분이 메시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예언서가 실현되는 현장에서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가 권고한 대로 지금 기쁘고 즐거울 겁니다. 환성을 지르고 환호할만큼 몹시 행복할 겁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9.11).

그런데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 저 질문이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당신의 길을 닦아 놓을 사자(使者)"(말라 3,1 참조)이며 구약과 신약의 경계에 서 있는 가장 훌륭한 인물임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마태 11,11).

이 말씀은 결코 세례자 요한을 비하(卑下)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지요. 또 진정 중요한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달을 보라'는 의미기도 할 겁니다. 중개역할을 하는 인물의 위대함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에 주목하고, 아울러 그 앞에 선 우리 각자의 가치 또한 인정하라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야고 5,10).

제2독서의 저자는 예언자들의 인내에 비추어 우리의 기다림을 독려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감상적인 정감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기다림은 고요하나 치열한 투쟁입니다. 결사적으로 믿음을 견지하는 적극적인 투쟁이고, 설령 고통과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도 어느 한 순간도 방향성과 의미를 놓지 않는 충실한 투쟁입니다.

믿는다면 기다릴 수 있지요. 또 믿고 기다린다면 기쁩니다. 반드시 오겠다고 약속한 사랑하는 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향해 다가옴을 영혼과 마음이 감지한다면,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이미 설레임이 가득 차오르겠지요. 한마디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기쁨은 참고 기다리는 인내와 끈기의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무조건 기뻐하며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자선(慈善) 주일을 지내는 교회와 함께, 주님을 기다리는 이 기쁨을 가난하고 약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나누는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김찬선신부-


기쁨과 희망의 하느님 
-김찬선신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대림 제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가곡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가 아니라
기다리는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란 무엇이고,
누가 기뻐하는 것입니까?

기쁨이란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 오는 만족감이고
그래서 소유적인 만족감이고 목표성취적인 만족감입니다.

예를 들어 갖고싶던 것을 갖게 되고 사고싶던 것을 사게 되었을 때나
요즘같이 대학입학철이 되었을 때 가고싶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거나
원하던 자녀를 얻게 되고 보고싶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기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원하고, 어떤 사람이 더 원하고 간절히 원할까요?
그것은 배부른 사람이 밥을 먹고싶지 않고 음식을 원치 않듯이
이미 소유한 사람은 원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 원하며,
가지지 못한 가난과 고통의 기간이 긴 사람이 더 원하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돈이나 집이 없어서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한 사람,
가방 끈이 짧아서 많이 위축되고 서러웠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가 없어서 늘 외로웠던 사람이
그런 것들이 없어도 전혀 고생스럽지도 서럽지도 외롭지도
않은 사람보다 더 원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에서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 기뻐하고
환호성을 올리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인 거지요.
광야나 사막은 정말 메마르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고 참으로 가난하잖아요?

이런 면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이래저래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실로 요즘 애들이나 젊은이들은 기쁨이 없고 기뻐할 줄 모릅니다.

어렸을 때는 원하기도 전에 부모가 미리 사줘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성취하는 법도 성취했을 때의 기쁨도 맛볼 수 없었고,
커서는 삶의 환경이 정반대가 되어 그러니까 너무 치열한 경쟁 사회가 되어
여간해서는 원하는 직장을 가질 수 없고 그러니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고,
혹 결혼을 해도 애를 가질 수 없어 기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요즘 젊은이들에 비해 어른들은 어렸을 때 워낙 가난하고 원하는 것이
많았기에 원하는 것을 갖고자 무진 고생을 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얻는 법도 알고, 원하는 것이 주어졌을 때의 기쁨도 알고 그 기쁨이 컸지요.

아무튼 기쁨은 원하는 것을 갖기까지의 고통과 비례합니다.
3년의 고생 없이 대학 입학의 기쁨이 없습니다.
고통이 크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길수록 기쁨이 큽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얻고자 하면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기쁨의 때가 오지 않고 고통스런 나날이 계속될까 불안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우리를 격려합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하느님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기쁨을 내다보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것은
기쁨과 희망의 하느님을 보지 않고 나와 내가 처한 상황만 보기 때문입니다.

나만 보면 절망이고 내가 처한 상황을 보면 더 절망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와 내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기에
구원자 하느님이 필요하고 기쁨과 희망의 하느님이 오시길 고대하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13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2-11)


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명나라 때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일치돼 있다’라고 풀이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을 말한 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이 많은 지식이나 완벽한 앎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주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앎이 이뤄진 이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종신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양명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것에 있어서 고도로 예민한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되는지, 혹은 내 마음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여기에는 많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외적으로 다 갖춰진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완벽한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것이란 결국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음성과 확신에 찬 신적인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말과 행위, 앎과 실천이 하나 된 하느님의 얼굴이다.

-서강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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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권력명예라는 을 벗어버리고 나눔희생사랑이라는 새로운 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