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3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12. 12. 19:49

2019년 12월 13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치아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동정을 결심하고 있던 루치아는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에 따라 그녀는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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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오 11,16-19)

 

 “To what shall I compare this generation? 
It is like children who sit in marketplaces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mour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명을 지켜 얻을 수 있는 생명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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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백성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하면서 주님을 쉽게 멀리하는 세상 안에 주님의 현존을 상기시킵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삶은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슬프고 폭력적인 삶으로 변합니다. 우리 시선을 들어 올려 우리를 위하시는 주님과 그분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절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 방식과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주님과 그분 사랑을 잊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아갈 때 의미 없는 암울한 삶으로 끌려가기 쉽습니다. 주님만이 평화의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올바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백성이 계속해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하십니다.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오시든 주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맞이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존을 통하여 우리를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하시어 당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해 주십니다.우리는 어쩌면 혼인 잔치에서 ‘기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장례식에서도 ‘슬프지 않다.’라고 말하는 장터에 앉아 있는 변덕스러운 아이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비판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좋은 것만을 바라보게 하는 열려 있는 태도와 인자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계산해보았습니다. 만 팔천 일이 넘었더군요. 그러면서 이 많은 날 중에서 기억에 남는 날은 며칠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 삶을 바꿔 놓은 날로 규정할만한 특별한 날을 따져보니 며칠에 불과합니다.

또 한 가지, 지금 휴대전화 주소록에 있는 번호는 천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이 중에서 영향을 받고 또 제가 주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조금 더 넓혀서 지금까지 수만 명의 사람을 만났을 텐데 그중에서 잊지 못하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많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날을 살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과 특별한 사람을 만들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사람이 없다고 또 기회가 없었다면서 한탄합니다. 원망과 함께 자신의 운이 없음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분명 기회는 있었고, 나 자신이 기회를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연구소에서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응답자의 81%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가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의 날들을 특별한 날로, 또 나의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행과 회개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행의 삶을 살도록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췄던 것처럼 춤추라고 피리를 불어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회개하라고 곡을 해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요한과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옳다는 것이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어떠한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온전히 드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선행과 회개의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지혜가 내 안에서도 온전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지속해서 행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이 성공적인 인물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브라이언 트레이시).



두려움

어느 사람이 여행 중에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괴물이야!!”를 외치며 도망치는 것입니다. 이 여행객이 ‘뭔가?’하고 보니, 괴물이라고 한 것은 커다란 수박이었습니다. 수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두려워서 도망친 것입니다.

이 여행객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서는 괴물을 없애주겠다며 수박을 잘라서 먹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람들은 수박보다 이 여행객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들고서 위협하며 쫓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괴물을 잡아먹듯 우리를 잡아먹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서워하지 마!”, “별것도 아닌 것을 왜 무서워해?”라면서 어리석게 여기면서 무시하는 예도 있고, 또 그 무서움을 없애주겠다며 과도한 간섭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함께해야 합니다.

이 모습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셨고, 그 모범을 따라서 우리 역시 두려워하며 힘들어하는 이와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셔서 무서움을 씻어내고 대신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냄새는 못 속인다

-전삼용신부-


저는 군생활을 수송부에서 했습니다. 운전병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갓 자대로 들어온 신병들에게 선임 서열을 외우게 했습니다. 운전병은 선임들이 운전병인지 정비병인지, 운전병이면 몇 호를 운전하는지까지 외워야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서열을 외울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열이 적힌 쪽지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 외워야했습니다. 저녁때면 무서운 일병 주임이 시험을 보기 때문에 긴장하며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심히 외우고 돌아오면 선임들은 코를 막았습니다. 선임들은 뭐 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냄새로 다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속여도 냄새는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감기와 가난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말을 쓰는데 미국 사람이라 여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언어와 몸에 배인 습관 등은 어디서 자랐고 누구에게 자랐는지 알게 만듭니다. 네 발로 걷고 짐승처럼 행동하는데도 사람에게 키워졌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생선 포장용 종이에서 꽃향기가 날 수는 없습니다. 냄새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 행동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냄새만 맡아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늘에서 온 분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변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못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알아보기 싫어서입니다.

      인간에게 참 아버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목청이 터져라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알아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그리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려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들은 이래도 저래도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을 싼 종이는 꽃 향기가 나고 생선을 쌌던 종이는 생선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인간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증언이 없더라도 못 알아볼 수 없습니다. 냄새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냄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향기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큰 사랑을 보고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타인의 죄를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대신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심지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어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아주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향기는 하느님만이 풍기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도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믿지 않는 것은 그냥 믿기 싫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은 음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춤추기 싫어서이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것은 전혀 슬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냄새를 먼저 맡아봅시다. 저는 저 자신을 이기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 한 끼만 먹으며 4시간만 잤습니다. 그렇게 살이 20kg이상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나를 이길 수 없구나.’

      그때의 이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알아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내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나의 냄새입니다. 나의 냄새가 인간의 냄새였습니다. 인간의 냄새를 알게 되니 하늘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지만 하늘의 냄새를 풍기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나라의 향기가 납니다.


-조재형신부-


걷는 걸 좋아하고, 걷는 게 취미입니다. 걸으면서 앙상해진 나뭇가지를 봅니다. 걸으면서 땅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봅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걸으면서 인문학 강의도 듣고, 걸으면서 하늘의 구름도 봅니다. 빨리 걷지는 않지만, 꾸준히 걷고 있습니다. 신발을 하나 새로 마련했습니다. 신발도, 저의 발도 처음에는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발이 꽉 껴서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신발이 편해집니다. 신발이 조금 늘어나고, 부드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발이 아프다고 큰 신을 신으면 나중엔 걷기가 불편합니다. 발이 아프다고 신발을 신지 않으면 신발은 신발장에 있게 됩니다.

 

신발이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더 많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발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맞추기보다는 상대방이 맞춰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살펴보지 않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보좌 신부, 수도자, 교우들과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는 본당 신부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살펴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였습니다. 갈등이 있는 본당 신부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이 해 주길 바라기 전에, 상대방이 원하는 걸 먼저 해 주는 가정은 웃음이 그치지 않고, 사랑이 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대의 변화와 표징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씻어 주었던 여인이 있습니다. 자비를 청하였던 소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자캐오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마련하십니다. 예언자를 보내 주셨고,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타인의 성공에서 배우고, 타인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타인의 성공을 배 아파하고, 타인의 실패를 보고 웃는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우주의 모든 것을 보아도 불평과 불만 거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해의 끝에 와 있습니다. 올 한해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회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들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제 슬픔과 눈물의 시대는 지나가고 기쁨과 축제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양승국신부-

 

한 인간 존재가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때 까지 여러 호칭이나 애칭, 별칭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붙는 것 같습니다.

 

 저같은 어린 시절에는 우량아를 넘어 과도 비만이다 보니, 돼지라는 별명을 늘 달고다녔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첫서원을 하고 나서는 수사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나니 갑자기 다들 신부님! 신부님! 하고 부르니, 한동안 적응이 안되 혼났습니다. 그뒤에도 호칭은 자꾸 추가되었습니다. 시설장, 원장, 관구장.

 

 얼마전 다 읽고나서 그 허접함과 허무맹랑함에 기가 차지도 않았던 반일종족주의의 공저자들 이름 뒤에 붙은 호칭을 보고나서는 쓴웃음이 저절로 지어졌습니다. 전 ××대학교 교수 ㅋㅋㅋ 본인의 이름만 걸어도 되는데, 현직에 있지도 않으면서, 굳이 전 대학교 교수라고 밝혀, 현직에 있는 교수들이나 동문들, 재학생들의 큰 수치심을 유발시키는걸 보면서 참으로 웃겼습니다.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나 수식어가 제대로 살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는 큰 모욕이요 수치가 될수도 있기에, 심사숙고해서 붙여야 하며, 칭호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붙는 칭호나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메시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어린 양, 주님 나의 주님, 착한 목자, 스승님, 랍비, 선생님...

 

 대체로 예수님이란 존재에 걸맞는 영예로운 호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일부 유다 지도층 인사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그분께 아주 부정적인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먹보요 술꾼, 창녀들과 죄인들의 친구!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오 복음 11장 19절)

 

 오히려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 이름 앞에 붙였던 부정적인 칭호가 제게는 더 큰 호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분께서 당대 잘나가던 왕족이나 귀족들, 세력가들이나 지역 유지의 친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주님께서는 나처럼 흠많고 허물투성이인 사람에게도 친구맺기 하자고 다가오실 것이니, 이 얼마나 은혜롭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아주 엄격한 금욕과 속죄의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산해진미 앞에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식했으며, 최고급 포도주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향긋한 포도주 앞에만 서면 급격히 작아지는 저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하게도 자신을 통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다음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잔치집에 가면 ‘이게 웬떡이냐?’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사정없이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포도주가 나오면 서둘러 코르크 마개를 따셨고, 제자들과 함께 건배도 하시며, 원없이 드셨습니다. 얼마나 잘 드시고 잘 마시셨으면,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먹보요 술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과 이방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기쁨의 때, 축제의 순간, 완성의 시기가 도래했으므로 더 이상 단식이나 금욕은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이 순간의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삶이 비록 고통과 슬픔, 눈물과 상처로 가득한 나날이라 할지라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매일 삶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암담하고 착찹할지라도 부단히 우리 삶을 긍정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매사를 언제나 좋게, 너그럽게, 관대하게 생각하고 낙천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제 슬픔과 눈물의 시대는 지나가고 기쁨과 축제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하겠습니까?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져 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 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영근신부-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시는데,

우리도 하느님이 피리를 부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으로 말씀을 듣게 된다면, 우리에게서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오늘 성령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내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소서.

호의로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이 되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 부르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송영진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이 말씀은, 회개하지도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살 길’을 알려주어도 듣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던 길을 계속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죽을병’을 고칠 수 있는 특효약을 주었는데도, 그 약을 먹지 않고
그냥 죽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 또는 자기는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약이 필요 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철없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철이 들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만과 위선에 빠져서 철없는 아이들처럼 사는 것은 잘못이고,
회개도 거부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하거나
장례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라는 말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말은,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요한의 극기고행의 생활을 문제 삼으면서 “미친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
듣지 않겠다.” 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은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음을 감추고서 요한 탓만 한 자들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의 생활을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했다면,
그들은 또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생활을
문제 삼으면서 “예수는 예언자답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 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감추고서
예수님 탓만 한 자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시지 않고, 세례자 요한처럼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하셨다면, 그들은 ‘그게 무슨 기쁜 소식이냐?’ 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과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모두 ‘하느님의 일’인데,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혜’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뜻하고,
‘옳은 일’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옳다는 것”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한 것은,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일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극기고행을 한 것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신 것은 ‘구원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지혜가 이룬 일”이라는 말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해성사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회개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내 죄를 고백하는 형식을
거쳐야 하나?” 라고 말하면서 고해성사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잘못 배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해성사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지 않은 채로 세례를 받은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교리는 다 믿으면서도 성사에 관한 교리는 안 믿고,
그런 채로 그냥 세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회개 자체를 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속마음을 감추고서,
성사에 관한 교리가 이해가 안 된다고 교리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가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을 핑계 대면서
회개를 거부한 사람들과 같은 경우입니다.
교리를 잘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교리를 다시
잘 가르쳐 주면 되지만, 회개 자체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더 고해성사 보기를 원합니다.
자기 입으로 “나는 이미 회개했다.”고 말하면서 고해성사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백퍼센트 위선자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고해성사 보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면,
“나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기가 싫어서 고해성사를 안 보고, 고해성사를 안 본 상태에서
영성체를 하기는 왠지 두렵고, 그래서 결국, 성당에 열심히 다니기는 하는데,
고해성사도 안 보고 영성체도 안 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자가 아닌데,
실제로는 냉담 중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의도와 목적으로 세례를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복을 빌기 위한 기복신앙을 버리지 않은 채로 입교하고
세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고 있었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사 8,18)이라고 한 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장터, 곧 광장에 앉아 있었다. 그 장터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으며 시끄러운 곳이다. 또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을 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너희는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터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 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 하늘 나라에 저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을 찢으려 한다. 그러나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 19)

-한상우신부-

이 세대에
필요한 것은
참된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는
이와같이
겸손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길을 찾는
참된 공감입니다.

지혜가 끝내
옳은 것은
모두를 살게하는
참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심장처럼 뜨거운
지혜는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시어 우리의
높은 장벽과
차가운 경계를
자연스레
허무십니다.

참된 지혜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참된 지혜입니다.

지혜는 먹보요
술꾼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지혜는 우리를
참된 회개로
이끄십니다.

지혜의 본질은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지혜가 이룬 일은
용서이며 구원의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예수님이라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쁨을
친히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가 계십니다.

이와같이
참된 지혜는
사랑할 순간순간들을
감사해야 할
순간순간들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사랑의 놀라운
지혜의 일이었습니다.

지혜예
감사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이 읽힙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예수님께서 상대방에게 전혀 호응을 해주지 않는 당시 이스라엘 세대의 태도를 장터 아이들 놀이에 비유하십니다. 기쁨에 기쁨으로 슬픔에 슬픔으로 감응하지 않고, 어떤 판이 벌어져도 거부할 태세를 갖춘 모습이지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기는 했지만 가급적 자기들 구미에 맞는 존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벗어나는 듯하면 거짓 예언자나 선동가, 죄인으로 몰아 생명까지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은 제도의 힘을 빌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은 친구다"(마태 11,19).

세례자 요한이 행한 절제와 극기는 거룩한 덕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포용력과 친화력 역시 아름다운 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덕들도 자기 프레임에 갇힌 굳은 마음으로 보면 마귀짓일 뿐이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일찌감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의 탄식이 들립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 48,18).

이스라엘에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던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배반은 뼈 아픈 슬픔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강물같은 평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의로움,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 길이 기억될 이름"(이사 48,18-19 참조)을 마련하고 기다리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대를 벗어났고 하느님의 축복은 유예 상태로 묶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요.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발 붙이지 못하게 밀쳐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다 엄밀히 말해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 종교 기득권층은 어쩌면 자기들 이익에 도움이 될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하느님을 밀쳐낸 것이지요. 무수한 예언자의 죽음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제거한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그러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명쾌한 자기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지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시고, 진리 자체시기에 그르침이 없으시지요. 그분이 세상에서 이루신 사랑의 기적들로 지혜의 옳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만 가리워져 있는 선입니다. 예수님은 세대의 약함과 악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이사 48,17).

하느님께서 마음을 다해 피력하신 이 자기소개는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따사로운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하지만, 현세적 성공과 자기본위적 이득을 보장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믿음을 보류하고 사랑마저 묶어둔 굳은 마음에게는 스며들지 않겠지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묻습니다.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은 그분과 함께 춤추고 그분과 함께 가슴 치며 울 수 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게 열린 마음 안으로 쏟아질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감능력입니다.

 어리석음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 
-김찬선신부-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가 이룬 일들로 드러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얼핏 생각하기에 어리석은 경우는 그 결과가 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어리석음은 그릇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지혜가 옳다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다가 어리석은 짓의 결과를 보고서
그때에야 지혜가 옳다는 것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엄마가 있을 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다가
죽고나면 소중함을 깨닫고,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건강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 이치를 알기에 미리부터 엄마를 소중히 여기고
건강을 건강할 때부터 잘 챙기는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어리석은 짓을 하고,
그래서 망한 뒤에야 그 지혜를 얻게 됩니다.

사실 많은 지혜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난 뒤에야 얻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어리석음 때문에 실패를 하고 난 뒤에 그 대가로 얻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난 뒤에 얻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혜를 얻는 순서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어리석은 짓의 결과로 실패를 하거나 망하게 되고,
실패를 하거나 망하고 난 뒤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닫고 난 뒤에야 지혜를 얻는 그런 순서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우화들이 많은데
사람이 어리석으면 인생 망치게 된다는 것이 그 골자입니다.

하나의 예로 달콤한 욕망에 속아 인생을 망치는 사람의 우화가 소개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아귀들이 들끓고 있는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는데
요행이 밧줄을 잡아 나락에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려고 위를 보니 위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거였고,
그 물을 혀로 받아 먹으니 너무도 달아서 어리석은 사람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물을 계속 받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중에도 생쥐는 밧줄을 갉아먹고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단물만 받아먹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이 우화를 들려주며 불교는 생쥐가 밧줄을 다 갉아먹기 전에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줄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지혜를 깨닫기 위한
노력/수행을 게을리하지 말고 성불하라고/부처가 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깨달음과 지혜가 인간의 수행을 통해서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우리 그리스도교는 지혜의 원천은 하느님이고
이 지헤를 깨닫는 것은 계시에 의해 가능하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계시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도 없고,
아버지께 갈 수도 없는 것인데 다행히 그 계시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생명의 지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당대 사람들이 철부지 어린애처럼 어리석게
세례자 요한은 안 먹어서 문제라고 하고 주님은 먹어서 문제라고 하지만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계시이고 그 계시가 드러났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 우리는 지혜를 어리석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이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되기를 갈망해야겠습니다. 


2017년 묵상 글 : 장단은 사랑이고 목적은 구원인 하느님이 장단  http://www.ofmkorea.org/11549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11,16-19)


사람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감기와 가난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냄새만 맡아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늘에서 온 분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변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못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알아보기 싫어서입니다.

      인간에게 참 아버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목청이 터져라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알아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인간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증언이 없더라도 못 알아볼 수 없습니다. 냄새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냄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향기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큰 사랑을 보고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타인의 죄를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대신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심지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어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아주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향기는 하느님만이 풍기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냄새를 먼저 맡아봅시다. 저는 저 자신을 이기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 한 끼만 먹으며 4시간만 잤습니다. 그렇게 살이 20kg이상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나를 이길 수 없구나.’

      그때의 이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알아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내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나의 냄새입니다. 나의 냄새가 인간의 냄새였습니다. 인간의 냄새를 알게 되니 하늘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지만 하늘의 냄새를 풍기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나라의 향기가 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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