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14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12. 13. 19:38

2019년 12월 14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The coming of Elija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엘리야 예언자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느님께 올라갔는데, 이것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제자들에게 알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엘리야가 칭찬을 받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바알 신을 믿는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물질적인 번영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백성이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앙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백성은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을 고집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립니다.” 가뭄은 하느님 진노의 표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성경은 다른 이유, 곧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기” 위함이라고 제시합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와 사랑을 되찾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엘리야의 목소리는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 귀에 새로 울려 퍼지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오늘 복음에서는 변모하신 다음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께서 엘리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시대의 전통은 메시아 이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기에 주님께 맞서려는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성경을 인용하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그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세례자 요한이 전한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엘리야가 돌아왔음을 깨달으며, 곧 요한이 새로운 엘리야였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이었지요.

“성장하는 동안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수감자들의 90%가 공통으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너 같은 녀석은 결국 교도소에 갈 거야.”라는 소리였습니다.

말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의 저자인 괴테의 말에서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더 큰 사람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멈추지 말고, 그 이면까지 바라보고 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늘 겉모습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닫혀 있는 시선으로 변화도 만들 수 없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멈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또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마음만 품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미리 온다는 것을 예언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요.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왔고, 그 후에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벗어나지 못한다면 절대로 주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을 열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어디를 여행했는지,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멀리 갈수록 대개 더 나쁘다. 그보다는 당신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어떻게 풀지 모르겠다면, 푸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 뒤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를 힘들게 한 일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 3가지 좋은 경우를 만나게 된다.

싫어하는 것만 계속 바라보며 싫은 것에 대한 싫은 생각의 크기가 계속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나 싫은 것을 다시 봤기 때문에 싫어하는 크기가 작아져 있고, 그게 아니라면 싫어하는 시간을 버티면서 ‘좋아하는 걸’ 생각하면서 얼른 스트레스를 풀러 가야지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작가 글배우의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많은 이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서 싫어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반복입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전삼용신부-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굴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킬로미터이지만, 그는 약 24,000킬로미터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 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 받는 콜럼부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성서는 엘리야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엘리야 예언자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면, 엘리야는 거짓된 신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오늘은 저도 엘리야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엘리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수도 많았고, 힘도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 의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언자는 불의한 시대에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다시 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다시 일어난다.’라는 의미입니다. 부활은 반대하여 일어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둘째,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아합왕은 욕심이 과해서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아합왕의 권세와 힘을 두려워했던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당당하게 나봇의 피를 핥던 개가 아합왕의 피를 핥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왕의 잘못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승하고, 불의에 야합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은 결코 엘리야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시대에, 군사 독재의 시대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엘리야이고, 세례자 요한이고, 예언자입니다.

 

셋째, 엘리야는 힘든 시기에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호렙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산입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불기둥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고, 새로운 임무를 받았습니다.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강의가 있어서 성당엘 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고, 제 앞에 강의하실 신부님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당 옆에는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쉬려고 불가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우나에서 저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급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 앞에 강의하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저를 기억하였고, 저를 찾아서 성모상 앞, 사제관, 성체조배 방을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저는 없었고, 불가마에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강의를 마치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던 곳에 저는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곁에, 고통 중에 있는 이 곁에, 아파 병상에 있는 이 곁에, 주님이 계시는 성체 앞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가는 곳에, 저를 즐겁게 하는 이들 곁에, 제가 기뻐하는 일에 주로 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물이 맑으면 달이 머물고, 나무를 심으면 새들이 머문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화 교육은 계속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메시아 오심과 관련해서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믿음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반드시 그분이 오심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준비시키는 전령이요 선구자로서 엘리야를 먼저 보내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믿음은 말라키 예언서 마지막 부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키 3장 23-24절)

 

 대림 특강 시즌을 맞아 본당으로 강의를 가면, 나름 작은 절차가 있더군요. 본당 교육 분과장님께서 먼저 마이크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강사를 소개하고 강론대로 모십니다. 소개도 안했는데 불쑥 제가 나가서 강의를 시작하면 좀 쌩뚱맞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몇년 전 한 본당 교육분과장님께서 저를 소개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교육분과장님이 개그콘서트를 자주 보시는 분 같았습니다. “오늘 강의해주실 분은 살레시오회 양상국 스테파노 신부님이십니다^^”

 

 사실 이름이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똑같은 역할을 하신 분이 예수님에 앞서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군중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라고 소개하신 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만 달랐지 엘리야 예언자의 화신이자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러 이 땅에 온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몰라본 유다인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다인, 결국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간 유다인들을 크게 질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복음 17장 12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동급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며, 당신께도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언하십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7잘 12절)

 

 세례자 요한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헤로데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방조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백성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에 대한 외침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역시 세례자 요한의 운명과 동일한 길을 걷게 됩니다. 두분은 동일한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결코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사악한 헤로데의 경솔한 행동이나 헤로디아의 증오로 인한 희생물이었다고만 볼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반영억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 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 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처럼,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특히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더 이상은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13)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아멘


오늘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 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구하자.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한상우신부-

의로운 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마음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보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합니다.

이 대림시기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조금씩만이라도
주님을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성탄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서로를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것에
기쁘고 편안한
대림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꼽는 대표적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이후 산을 내려오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은 방금 엘리야와 모세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지요. 엘리야의 출현으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소명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집회서의 대목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 중 "불"이란 말씀이 다섯 차례나 등장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집회 48,1).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집회 48,9).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9).

엘리야의 표상인 "불"은 정화와 열정, 사랑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습을 태우고 살라 버려 정화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님을 향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그 자신이 곧 "불"인 엘리야의 사명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집회 48,10)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인 바알 숭배자 이제벨의 손아귀를 벗어나 불마차에 태워져 승천한 것과 달리(1열왕 17장 -2열왕 2장 참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취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부추김과 그 딸의 춤값으로 목이 베어져 순교하지요(마태 14,1-12 참조).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요!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에 앞서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알아보지는(관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에 대해 아무리 증언하고 선포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이 열릴 수 없었지요.

마침 오늘은 주님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일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세 개의 불덩이를 한 자리에서 만났네요. 하느님께서 때에 맞춰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고 열정을 되찾아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께 뛰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 불꽃입니다.

대림 제3주일을 앞두고 다시금 사랑의 불을 지피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불타는 사랑으로 불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의 불길로 함께 타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나를 바로잡아줄 사람은 누구? 
-김찬선신부-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오늘 제자들은 율법학자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주님께 묻는데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독서 집회서에 근거한 것일 겁니다.

오늘 집회서의 끝부분을 보면 "엘리야가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아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있지요.

집회서는 예수님 이전에 쓰여진 거기에 엘리야가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엘리야의 재림을 집회서가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시어 잘못되어 있는 이스라엘 집안을 보고 분노를
터트리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율법학자들은 말하는 것이고
이에대해 주님은 다시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인데
그가 엘리야인줄 모르고 죽였다고 하시는 것이고,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바로잡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그것을 저는 오늘 묵상 주제로 잡았습니다
. 그리고 저는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소명을 받은 프란치스코와 우리들이 그 바로잡는 존재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지금 무너져 있는데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집이란 교회건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동체지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느님의 집안답지 않은 점이 있으면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제게 자주 떠오르는 것이 바로 시선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시선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잘못되어있는 시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선이 어떻게 잘못되어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하느님께로 향해 있어야 하는데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현중에 시선이 뺏긴다는 말이 있는데
능동적으로 시선을 어디에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의해 시선이 뺏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뺏는 것들이라면 다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왜 시선을 뺏기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다 선들이고 아름다운 것들인데
좋고 아름답기에 하느님께로 가야 할 시선을 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선 강탈보다 더 나쁜 강탈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을 뺏는 것 곧, 마음 강탈입니다.
시선 강탈이 단지 호기심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라면
마음 강탈은 욕심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사로잡히게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 강탈은 눈의 외도보다도 더 나쁘게 눈을 멀게 하고,
더 나아가 마음을 사로잡히게 하기때문에 시선 강탈보다 나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마음 강탈은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욕심 때문에 우리 눈이 멀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근심걱정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사로잡혀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분을 상담했는데 그분 안에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한 번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느님도 소용없습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두려워할 것도 근심걱정할 것도 없는데
베드로가 앞의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옆의 풍랑을 보다 물에 빠지듯
하느님을 보지 않아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지요.

이럴 때 나를 바로잡아줄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은 우리 주변에 누구일까요?
그리고 바로잡아줄 때 나는 그를 죽이지 않고 고맙다고 할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17,10-13)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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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힘든 시기에 호렙산으로 갔습니다호렙산은 모세가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호렙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산입니다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하느님은 불기둥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엘리야는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고새로운 임무를 받았습니다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지혜를 주십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