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12. 22. 19:08

2019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루가 1,57-66)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말라키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하느님의 섭리에 의심을 품었던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고 난 뒤에 혀가 풀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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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성지 사무실에 화난 얼굴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서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다 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까요? 정말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또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막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제게 이런 말을 했던 형제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약간 아프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 아파서 했던 말일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잘 아는 사이라 해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한다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그 말을 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좋게 생각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기분이 나쁘지만,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잘 살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이 형제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살아야 합니다. ‘이만하면 되었어.’가 아니라 ‘아직도 멀었어.’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입니다. 할례식 때에는 그의 이름을 결정하는 명명식도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이 모습에 우리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늘 부족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늘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와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보다 소중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토니 모리슨).



숙제

초등학생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방학을 마치고 개학하기 며칠 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순간이지만 저의 경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로 방학 숙제 때문입니다.

방학 시작할 때는 미리미리 하겠다며 하루 일과표를 꼼꼼하게 그려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는 것에 익숙해지고 숙제는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개학을 며칠 앞두고서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숙제하지 않았으니까요…….

미리 조금씩 숙제를 했으면 충분히 다할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몰아서 하려고 하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 되고 말았지요. 시험공부 때문에 밤을 새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방학 숙제하느라 밤샌 적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준비도 이렇지 않을까요? 늘 ‘나중에’만을 외치다 보면 아예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준비한다면 편한 이 세상을 살면서도 기쁘게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신 이 세상 안에서의 사랑 실천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지금 얼마큼의 숙제를 하셨습니까?                  

마지막에 기쁘게 끝났다면 하느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전삼용신부-


제가 어렸을 때 밤에 청사과를 먹었는데 심하게 체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소화가 안 되었던지 밤새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다 따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안 나아서 아침에 구토를 하였는데 그 청사과즙만 시퍼렇게 신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청사과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몸은 아마도 자신을 아프게 한 것을 더 이상 먹지 말라고 그 마지막 맛만을 기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평생 청사과 맛은 고통으로 남아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술을 엄청 많이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굉장히 힘들어서 고통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전날 얼마나 즐겁게 마셨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즐겁게 마셨더라도 마지막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 마지막 안 좋은 기분이 즐거웠던 기분마저 잡아먹게 됩니다.

      왜 어떤 때는 마지막에 기분이 안 좋을까요? 대부분은 끝에 어떠한 감정이 올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만족을 위해 끝나고 나서의 기분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과자만 먹으며 TV를 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감정으로 끝나게 될지 생각한다면 우리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마지막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즈카르야의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만은 전통을 어기려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고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항상 끝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뜻에 휩쓸리면 처음엔 기뻐도 마지막엔 항상 기분 나쁘게 끝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분이 아주 오래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려면 항상 ‘마지막 기분’에 집중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의 맛은 처음엔 쓰고 마지막엔 답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은 처음엔 달고 마지막엔 씁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어떻게 끝나고 싶으냐에 따라 어떤 뜻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어떤 정치가가 연말에 어느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광원들의 얼굴은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가는 눈만 반짝이는 광원들이 불쌍하게 여겨져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날마다 이 굴 속에서 석탄을 캐는 단조로운 일을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그러자 한 광원이 석탄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캐는 이 석탄이 빛이 되고 동력이 되고 열이 되어 가정과 공장, 사회와 국가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제 일이 즐겁습니다.”

      성공해야만 뒤끝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 믿으면 기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순교성인들도 그렇게 끝을 맺으신 분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여기지만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왠지 허무함만 느낍니다. 마지막 기분은 하느님의 뜻이 주는 의미에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 전반에 흐르게 하여 나의 모든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합니다. 소금처럼 모든 일에 양념으로 넣어야합니다. 그러면 일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항상 기쁨으로 뒤끝 좋게 끝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하느님의 뜻을 결합시켜봅시다. 일과는 좀 더 고되어 질지라도, 결국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기타를 배울 때입니다. 코드를 외우고, 박자를 맞추고, 리듬을 맞추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음을 맞추는 거였습니다. ‘음을 정하고, 다른 줄에서도 같은 음이 나올 수 있도록 줄을 조절하는 겁니다. 줄을 너무 느슨하게 조절하면 소리가 나지 않았고, 줄을 너무 조이면 끊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줄을 맞추는 건 연습도 필요하지만, 음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자주 들으면 음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운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너무 긴장하면 경직되고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급정거하기도 하고,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면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교통 신호를 무시하기도 하고, 무리하게 추월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안전하게 운전하면 좋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잠시 기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들으면 차 안은 아늑한 쉼터가 됩니다.

 

4개의 대림초에 불이 모두 켜졌습니다. 오늘은 대림초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초는 깨어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깨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리야가 깨어 있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깨어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주님의 오심을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초는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신분, 이념, 혈연, 계층,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늑대가 손을 잡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세상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초는 자비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그렇게 따뜻하게 해 드렸으니,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네 번째 초는 강생의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십니다.

 

2019년 성탄은 제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서 미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문제작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제 마음의 줄을 잘 가다듬으려고 합니다. 너무 느슨하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 마련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기쁘게 지내려 합니다. 여러분에게 2019년 성탄은 어떤 의미인가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성령의 바람, 성령의 계획은 자유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계획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양승국신부-

 

엘리사벳의 출산은 아인카림 온 동네의 큰 이슈요 관심거리였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할 연세에 도달한 엘리사벳, 요즘으로 치면 마을 경로당에서 민화투를 치고 계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은 다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친척들의 눈길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저 연세에 과연 정상적인 출산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혹시라도 출산 중에 산모가 위험한 것은 아닌가? 아기는 과연 정상아로 태어날 것인가?

 

 그러나 엘리사벳은 보란듯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산모의 건강도 양호했습니다. 호기심반 걱정반 엘리사벳의 출산을 지켜보고 있던 이웃들과 친척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에 따라 아기를 안고 할례식에 갔습니다.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기 17장 12절)

 

 당시 남아들은 할례를 받는 동시에 이름까지 받았습니다.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권한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례식에 참석한 친척들도 아기의 이름을 짓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토빗이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려진 것처럼 아기에게 아버지 즈카르야로 이름을 붙여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잠깐 스톱!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복음 1장 60절)

 

 그러나 둘러서 있던 친지들 역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뭘 안다고? 조용히 있으면 좋을텐데...’하고 엘리사벳의 제안을 개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겠느냐며 손짓으로 물었습니다.

 

 아직도 말문이 막혀있던 즈카르야는 글쓰는 판을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는 밀랍을 입힌 나무판에 글씨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쓰는 즈카르야의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습니다. 즈카르야의 선택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짓는데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의 뜻, 주님의 의지는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 인간의 상식이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초월합니다. 성령의 바람, 성령의 계획은 자유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계획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엘리사벳와 즈카르야가 선택한 아기의 이름 ‘요한’이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주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신다.’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은혜로우심으로 인해 이제 즈카르야의 일시적인 벌은 종료됩니다. 즉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즈카르야의 입에서 최초로 터져나온 말은 주님의 놀라운 구원 업적과 자비를 칭송하는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제 구원의 때가 시작됨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선언입니다. 마지막 대예언자의 탄생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큰 목소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나 나약함 앞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데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악과 부조리 앞에 한탄하고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을 향해 부단히 시선을 들어올려야만 합니다.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자비와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아기의 이름은 요한

 -반영억신부-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름은 단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게 하는 것만을 넘어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로 다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작명소라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요한의 탄생과 함께 그의 이름이 지어지고,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집니다. 곧 주님 앞에서 길을 닦게 되는 엘리야로서의 예언자의 신원과 사명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리아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리아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 57)

-한상우신부-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손길 안에서
요한이 마침내
탄생합니다.

탄생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간절함 뒤에 오는
눈물겨운 탄생입니다.

이와같이
그냥 이루어지는
탄생은 없습니다.

보살피시는
여정을 통해
소중한 생명이
탄생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탄생을 통해
하느님의 위로와
놀라운 희망을
보게됩니다.

탄생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탄생을 노래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의 눈물을
기억합시다.

즈카르야의 기도를
생각합시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기다림을 봉헌합시다.

요한의 탄생으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만납니다.


-오상선신부-


우리 모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도 정성스럽게, 그리고 충실하게 주님을 맞으려 애쓰는 이들을 만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출산한지 열흘도 채 안 된 늙은 산모가 외칩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부친이나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 풍습에 따라 아기를 "즈카르야"라 부르려 하는데 아기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루카 1,13).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이 전언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 풍습이나 관례, 취향이나 선호도로 뒤집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재차 확인을 요구받은 즈카르야마저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이라고 쓰자 이웃과 친척들이 물러나지요.

이름에는 그 사람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름 안에 녹아듭니다. 이 존재의 호칭이 무수히 불리워지고 언급되면서 그 이름의 의미역시 그 존재 안에 더 깊이 각인되고, 그는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과 목적성을 더 깊이 살아가게 되지요.

요한에게 주어진 이름을 지키려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노력은 구원 역사 안에서 이 아기에게 배정된 하느님의 계획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정성과 충직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숙제까지 마치고 나자 비로소 즈카르야의 혀가 풀립니다. 의심으로 묶였던 것이 믿음의 증언으로 제 구실을 되찾은 것이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두려움에 휩싸인 이웃들을 통해 아기의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민중에게 일말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 마음 안에 떠오른 이 질문의 답은 제1독서 안에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말라키 예언서 저자는,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세상을 준비시킬 "엘리야 예언자"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아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기의 이 역할과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주님의 뜻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했지요.

살다보면 희생도 해야 하고 물러나 주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 말씀의 완성과 관계된다면 더더욱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주님께서 당신 성전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이고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한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오심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성전을 가꾸어야겠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영성체송).

주님께서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성탄이 거의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과 우리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니 우리 편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겸손과 가난으로 오시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혼의 문을 활짝 열지 않는다면, 구중궁궐 안에서, 거룩한 수도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온갖 전례와 행사와 이벤트 한가운데 있더라도 성탄의 기쁨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고 숨을 고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뛰어난 성과나 고액의 헌금, 모두를 만족시킬 재주보다는 가난한 그분이 마음껏 편히 머무르실 수 있는 소박하고 정성스런 우리 마음의 구유입니다. 초라해도 좋고 빈한해도 좋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유를 값지게 해 주실 분은 거기에 누우실 아기 예수님이시니까요.


기도를 답을 얻는 우리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058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23일 

2015년 12월 23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루가 1,57-66)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이 모습에 우리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늘 부족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늘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와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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