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2. 23. 19:48

2019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신다(제1독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계획을 노래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구원사의 결정적인 시점, 곧 다윗에게 하신 후손과 왕국에 대한 약속을 다룹니다. 다윗은 티로 임금의 도움으로 아름답게 세운 향백나무 궁과 아직 천막에 머무르고 있는 하느님 현존의 표지인 궤를 비교합니다. 다윗은 주님께 당신의 현존에 맞는 장소인 성전을 짓기로 합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주변 민족들보다 종교적인 열등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지로 여깁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의 이런 결정을 듣자마자 매우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느님께서는 이 계획을 거부하십니다.예언자의 첫째 반응은 그의 자발성에서 나오지만, 둘째 반응은 하느님께서 분명하게 바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구인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전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분명 다윗의 제안은 좋았지만 하느님의 전망은 그보다 더 심오하였습니다.주님께서는 머무르시는 거처가 없어도 당신 계획에 따라 다윗과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잊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 직접 거처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히 계속될 왕좌, 튼튼한 자손을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다윗과 맺은 약속에는 이미 다윗과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복음에서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랑이 무엇일까요? 누구는 사랑의 어원이 ‘사량’, 생각의 양에 있다고 하면서 사랑을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하면 계속 그 상대방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생각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한 번? 두 번? 아닙니다. 계속 생각나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하나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과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사람도 계속 생각나지 않습니까? 물론 이때는 ‘앉으나 서나 그놈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미운 사람의 큰 차이는 보고 싶고, 보기 싫고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계속 보지 않으면 사랑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옛날 짝사랑하던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되면서 사랑하던 생각도 사라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름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상대방이 원하는 것만을 해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계속 생각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내가 되어야 그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가 노래로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모든 육적, 영적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실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온전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갖추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더욱더 함께 해야 할 분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주님께서 오늘 밤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향해 어떤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그분의 사랑을 보지 못해서 찬미보다는 불평과 원망의 노래를 드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로써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간다(윈스턴 처칠).



보이는 것만 보지 않기.

남미 국경지대의 한 세관원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매일 어떤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늘 오토바이 뒤에 주머니를 달고 있는데 이 안에 밀수품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사를 해도 의심을 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절대로 처벌하지 않을 테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할아버지 밀수하는 것 맞죠?”

할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이 세관원은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데, 도대체 그 밀수 품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합니다.

“오토바이야.”

오토바이 뒤의 주머니만 봤지, 타고 있는 오토바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보이는 것만 하느님의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기 부담스럽다면 그때 만나라

-전삼용신부-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이 소문을 들은 부엉이 한 마리가 어느 날 밤 소경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아저씨, 난 아저씨의 소문을 듣고 아저씨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나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낮에는 눈이 필요 없거든요. 그러니까 낮 동안에는 내 눈을 빌려 드릴게요. 그러나 밤에는 꼭 돌려주셔야 돼요.”

      다음날 아침 소경이 깨어보니 환한 세상이 그의 눈에 보였습니다. 소경이 뛸 듯이 기뻐하며 눈을 빌려준 부엉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부엉이와 생활을 하며 낮에는 소경이, 밤에는 부엉이가 눈을 달고 먹이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소경의 마음에 은근히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부엉이와 눈을 함께 쓰는 바보가 어디 있담.’

      소경은 부엉이가 잠든 낮에 먼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눈이 희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소경은 다시 더듬거리며 부엉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저찌, 난 밤에 먹이를 찾지 못해서 굶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눈도 기운을 잃은 것이에요.”

      가엾은 부엉이는 이 말을 마치고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다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하는 의무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부모에게 “부모라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마음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방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관계가 계약인 것을 아는 사람만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당연히 해줘야 한다고 여긴다면 남의 땅을 빼앗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땅을 가지려면 그만한 액수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약입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의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구원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임을 믿게 해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하느님임을 믿을 수 있었다면 굳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더라도 아버지께서 당연히 용서하실 것임을 알아 숨을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이웃을 심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아 아버지 집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양식으로 주시며 우리도 당신 자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밥그릇인 말구유에 놓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것이 제일 편안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식이 되지 않으면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기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셔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인간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그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부담스럽지 않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내어주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는 내어줄 생각을 하지도 않고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밀떡과 포도주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성체성혈은 당연하게 받아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십일조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서 오시는 예수님만 기다리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지도 않고 성체성혈만 달라고 보체는 격입니다.

      새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받아 모실 때, ‘나는 무엇을 드려야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만날 때 부담스러워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그때 만나라고 충고합니다. 그만큼 내가 그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온전한 계약의 관계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면 상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의 행복만을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도 그래야합니다.


-조재형신부-


홍익희의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브라만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과 문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서로의 종교는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다른 종교의 교리와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워지기도 합니다. ‘창조, 지혜, 선과 악, 윤회, 영지, 구원, 심판, 천국, 연옥, 지옥, 부활, 깨달음의 개념이 종교의 틀에 들어왔습니다.

 

화이트 헤드는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라는 책에서 세계종교 가운데 보편성을 지향하는 불교와 기독교를 가장 합리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불교와 기독교는 붓다와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구원을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통해 도달하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활동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리를 준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다윗은 하느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화려한 궁에 살면서 하느님은 장막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나탄은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 갔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낯선 곳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준 것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준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다시는 고통도, 눈물도 없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20191224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은 이 질문으로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요?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모든 신앙 행위의 정수(精髓)는 거룩하게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전해진 세례자 요한 잉태와 관련된 예언을 의심했던 이유로 아홉달 간이나 말못하는 신세가 된 즈카르야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아기의 할례식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혀가 풀리고 말문이 열립니다.

 

 말문이 열린 즈카르야의 입에서 최초로 흘러나온 노래는 라틴어로 베네딕투스(Benedictus), 곧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마니피캇(Magnificat), 즉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 가장 널리 알려지고 불려졌던 노래였습니다. 결국 이 노래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 가장 사랑받던 노래, 가장 보배로운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의 내용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희망적입니다. 무척이나 교회적이고 영성적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 세계 모든 수도자들이 아침마다 바치는 성무일도서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즈카르야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전반부는 종말론적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위대한 업적으로 보고 그분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보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음을 노래합니다.

 

 후반부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기리는 찬가입니다. 아기의 출생을 축하하면서 그가 받은 사명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요한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묘사하는 동시에,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것임을 노래합니다.

 

 ‘거룩하고 의롭게’라는 문장에 계속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모든 신앙 행위의 정수(精髓)는 거룩하게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진정한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목숨걸고 지켜야할 일은 지존하신 분께 바친 서원(誓願)을 채우는 일입니다. 불행의 날에 그분을 부르고, 공경하며,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떠오르는 태양같은 메시아, 칠흑같은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큰 별 같으신 메시아께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무장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죄와 죽음에 짓눌려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니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시 앞에서 기뻐합니다.”(이사야서 9장 1~2절)

 

 교회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앙이 밤의 어둠을 몰아낼 때 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릅니다. 때로 먼저 떠난 이들이 곤히 잠들어있는 무덤가에서도 이 노래를 부릅니다. 떠오르는 태양이요 찬란한 별이신 메시아께서는 죽음의 어둠을 물리치시고 광명을 가져다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세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과거에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행위와 그 행위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지를 서술함으로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모두 망라하는 요약의 노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 육화와 속죄의 목적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세상 모든 피조물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고, 당신의 백성을 평화와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시는데 있음을 즈카르야 노래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언자가 되어야

-반영억신부-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와 모두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기 몫을 알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이 닦은 길을 바탕으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오신 분은 지배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의 예언자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더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며,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시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송영진신부-


“......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루카 2,7-8).”

여기서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 라는 말은,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것은
“여관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요셉과 마리아는 외양간으로 갔고,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방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 베들레헴에는 딱한 상황에 처한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 9,58) 처지에 놓이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의 외양간을 내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외양간은 대개는 바위 동굴이었고, 목자들의 숙소 역할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의 숙소를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야영을 했을 것입니다.
< 뒤의 15절-16절을 보면, 목자들이 요셉과 마리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외양간의 위치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처음에 외양간을 빌려 줄 때에는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평범한 나그네 부부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천사가 메시아 강생을 알려 준 뒤에도
그 부부가 메시아의 부모일 것이라고 바로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시아의 부모와 메시아를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들의 외양간에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냈고,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고 믿게 되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메시아의 부모에게
자기들의 숙소를(외양간을) 빌려 주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9-14)”

여기서 ‘주님의 천사’는 가브리엘 천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일이
세 번 있는데, 첫 번째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면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함께 전해 준 일이고,
두 번째는 마리아에게 메시아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일이고,
목자들에게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고 알려 준 일이 세 번째입니다.
즈카르야와 마리아는 직접 관련된 당사자였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목자들이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 목자들을 선택하셨을까?
당시에는 그들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는 해석도 있고,
그 목자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외양간을 빌려 준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 ‘거리’가 가깝기도 했지만, 그들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내용에서 목자들이 선택된 이유를 찾아보면,
그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14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마태 7,21)이고,
‘하느님 뜻의 실행’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 실천’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또 예수님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선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물론 이 말은, 사랑이 있는 곳에만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뜻은 아니고,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목자들은 사랑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성탄절은 의례적인 연례행사가 아니고,
“과연 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인가?”를 반성하는 날입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너희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가라. 그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바로 그분이 메시아라는 증거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표징을 삼으셨을까?
그 모습은 메시아께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음을 상징하고,
동시에 그 무엇보다 강한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9).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그 일의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인간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느님께서는 세속의 방식으로 하시지 않고,
당신만의 방식으로 하십니다.
그 방식은 바로 사랑, 자비, 용서입니다.
(세속의 방식은 힘으로 억누르는 강압적인 방식입니다.)
사랑, 자비, 용서는 겉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들어 있습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그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성탄 밤 미사: 사람이 되어 태어나신 하느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1-14: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다

호구조사의 상황은 요셉과 마리아를 왕도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다. 이곳은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 곳이다(루카 2,1-5; 참조 1사무 16,1-13, 성령의 선물과 함께 13). 여기서 마리아, 시온의 딸인 그리고 성령의 거룩한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루카 2,6-7)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다.

 

들에서는 주님의 천사주님의 영광과 함께 깨어있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부활의 명칭). 그 표지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지극히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여기서 말씀이 전해졌다. 즉 복음화 되었다. 목동들이 알아들었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오늘”(11) 모든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함께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사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참으로 탄생하셨다.

 

성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깊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무덤에서 옛 시간의 날이 끝나고, 새로운 ”, “”, “오늘이 시작된다.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날은 무덤에서 지지 않는 날로 시작되며, 탄생에서도 그렇다.

 

* 같은 인격(위격)살아 계신 분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때문에 탄생에서도 살아 계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 수의로 싸여 무덤에 모셔졌다. 탄생에서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

 

* 무덤에서 인간으로서 신적 생명으로서 나셨다. 때문에 그분의 탄생은 즉 인간이 되신 것은 무덤을 위한 것이다.

 

생명에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으셨다. 진정 부활로서 아버지는 성령의 복되신 영원 안에서 영원한 아들의 인성을 낳으셨다. 바오로 사도가 시편 2,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십자가는 탄생을 위한 것이며, 탄생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다.

 

* 마리아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무덤에 묻기 위해 수의로 싸는데 있었고, 그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포대기에 쌓아 구유에 모신 것이다.

 

*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무덤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요한 19,41), “3때문에라도 사랑으로 내어드려야 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위해서는 탄생할 자리가 없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여관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몰약은 무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위해 쓰였다.(요한 19,39). 그 몰약은 박사들이 아기에게 바친 예물이었다(한번만 쓰였다).

 

* 하늘의 천사들은 부활에도 있었으며, 탄생에도 있었다.

 

* 초자연적 신적 빛이 부활에도 빛났고, 같은 것이 탄생에도 있었다.

 

* 부활 사건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신현) 앞에서 두려움은 탄생에서도 나타난다.

 

* 제자들 사이의 부활에 대한 놀라움은 탄생에서의 목동들의 놀라움과 같다.

 

* 두려움에 대해 부활에서 천사들의 안심시키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탄생에서도 같이 나타난다.

 

* “큰 기쁨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같은 기쁨을 목동들도 맛본다.

 

* “표지로서 무덤에 있던 얼굴을 싸맸던 수건과, 끈이 표지가 되었으며, 같은 표지로서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다고 하였다.

 

* 부활 사건에서 제자들이 달려가는 것, 미래의 하느님 양떼의 목자들”, 탄생하신 곳으로 달려가는 목동들이 나타난다.

 

* 제자들에게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부활, 탄생에서는 목동들의 주님의 찬미와 찬양을 볼 수 있다.

 

*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에서 부활하셨고, 인간적인 왕의 도시, 메시아적 왕의 도시, 다윗 왕의 도시, 예수께서는 인성으로 그리스도의 선조인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표지는 탄생의 표지이다. 이것은 기쁜 소식(복음)이며 살아있는 표징이다.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이분이 바로 오시는 분이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분은 평화의 왕자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시고 계시다.

 

복음에 나타난 성탄 사화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탄의 신비는 바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가 모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신비는 거기에서 오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 78)

-한상우신부-

기다림 너머엔
탄생이 있습니다.

길을 만드는
탄생이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의 빛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탄생을
보게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달려옴과
기다림 사이에서
마침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사랑을
어디에 두어야할지를
오시는 성탄을 통해
만나게됩니다.

우리도
예수님같이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삶이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오시는
주님의 성탄에서
비로소 우리는
삶이 선물임을
깨닫게됩니다.

성탄처럼
가장 기쁜 사랑이
됩시다.

뜨겁게 자신을
버리고 내려놓는
사랑말입니다.

-오상선신부-


"보라. 이제 때가 차,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보내신다"(입당송).

입당송은 대림 시기를 응축하는 말씀으로 오늘 미사를 엽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코앞에 당도하셨습니다. 오늘이 무르익을 즈음이면 우리는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성대히 맞이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루카 1,68).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예언합니다. "찾아오다"는 말씀은 복음 내용과 영성체송에 세 차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즘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의 필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습니다. 앉아서 민원을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가서 묻고 헤아리며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일 텐데요. 찾아와 섬기는 서비스의 원조요 절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실까 생각해 봅니다.

살다 보면, 정말로 힘들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질 때, 적극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는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멘붕이 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고요. 이처럼 꼼짝할 수 없는 절벽같은 순간에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할까요?

구원자의 찾아오심!
주님은 저 위 하늘 옥좌에 앉아서, 우리가 당신을 찾아와 조아리고 굽실대기를 기다리는 절대군주가 아니십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 아니 제 목소리조차 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직접 내려오셔서 살피고 돕고 구원하는 분이시지요.

즈카르야는 성령의 힘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온갖 죄악과 적에게서 구하시어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루카 1,74)입니다. 구원된 우리가 하느님 모상성을 되찾고 창조된 목적에 알맞는 삶을 회복하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본래 우리는 그러려고 지음 받았으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싶어하는 다윗과, 나탄을 통해 그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목소리가 오고갑니다.

외세와 내부적 분열로부터 안팎으로 이스라엘을 안정시킨 다윗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또 국가적 결속을 목적으로 성전 건축을 꿈꾸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소와 경전, 의례의 존재는 한 민족의 종교적 위상을 드러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2사무 7,17).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안위를 살피십니다. 주님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찾아오는 이들이나 겨우 선심쓰듯 만나주는 군주가 아니라, 당신 백성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괴롭힘 당하지 않게 자청하여 울타리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리"

이 말씀은 곧 즈카르야가 노래한 내용과 맞닿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제자리"니까요.

우리를 "제자리"에서 살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박차고 내려와, 가난한 이들과 짐승들 틈에 "제자리"를 꾸리셨읍니다. 오늘 밤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루카 1,79).

점점 밝아지는 대림초 색깔과는 달리 여전히 세상사로 마음이 어둡고 복잡하십니까? 풀리지 않는 관계와 상처의 쳇바퀴 안을 계속 맴돌고 계신가요?

괜찮습니다. 아직 어둠 속이고 그늘 안이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분의 빛이 한줄기라도 새어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여십시오. 성탄을 코앞에 두고도 아직 정리도 안 되고 어지럽혀진 민망하고 송구스런 마음이라도 여십시오. 벼락치기 같아도 빛이신 그분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테니 믿고 여십시오. 결국 우리의 발은 빛이신 구세주 아기와 함께 평화의 길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의 평화가 내 안으로, 내 안에서 시작된 평화가 온누리로 번져나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평화"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19개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8538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12월 24일

2013년 12월 24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67-79)

 

 받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내어주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는 내어줄 생각을 하지도 않고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밀떡과 포도주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성체성혈은 당연하게 받아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십일조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서 오시는 예수님만 기다리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지도 않고 성체성혈만 달라고 보체는 격입니다.

      새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받아 모실 때, ‘나는 무엇을 드려야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만날 때 부담스러워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그때 만나라고 충고합니다. 그만큼 내가 그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온전한 계약의 관계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면 상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의 행복만을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도 그래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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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브라만교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탄생과 문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서로의 종교는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다른 종교의 교리와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워지기도 합니다. ‘창조지혜선과 악윤회영지구원심판천국연옥지옥부활깨달음의 개념이 종교의 틀에 들어왔습니다.

화이트 헤드는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라는 책에서 세계종교 가운데 보편성을 지향하는 불교와 기독교를 가장 합리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그에 따르면 불교와 기독교는 붓다와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불교는 인간의 구원을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통해 도달하는 반면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활동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 달성하려고 합니다그래서 붓다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리를 준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다윗은 하느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자신은 화려한 궁에 살면서 하느님은 장막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뜻을 전하고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낸다고 하십니다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 갔습니다성전은 파괴되었고낯선 곳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준 것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준 예언자였습니다예언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다시는 고통도눈물도 없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2019년 12월 24일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오늘은 이 질문으로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요?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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