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오 13,36-43)
"He who sows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the good seed the children of the Kingdom.
The weeds are the children of the Evil one,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of the weed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자마자 첫째 계명을 어깁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돌판을 새기는 도중 산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약속된 땅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며, 그들이 당신 백성이 아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다행히 모세의 중재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시고 그들과 여정을 함께 떠나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과 다시 계약을 맺으십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하느님과 모세가 다시금 계약을 맺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종말 때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남 이야기같이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가운데 죄가 없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3,20; 7,24 참조).
참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개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덕분에 부족한 우리가 용서받아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불의한 자로 취급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개는 모세의 중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중재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그리스도의 중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그분 구원 업적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모두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 제자로 삼아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드립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불의한 일을 저지르거나, 남을 불의하게 만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물론, 부족해서 계속 무너지는 우리지만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에 의탁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노력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들 중에 낚시를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는 낚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물고기를 낚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제게도 이 낚시를 권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전에 몇 차례 낚시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허탕을 쳤던 기억이 떠올려지면서 낚시와 저는 맞지 않다고 스스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낚시는 제게 딱 맞는 취미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조용히 앉아서 책 읽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활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나와 맞지 않다고 선언을 해버려서 가까이 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노력의 중요성을 많은 이들이 이야기합니다. 이 노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선언보다 ‘할 수 있다’는 선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도 하고, 이 노력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또한 이 노력으로 각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입니다. 운이 아니라, 어떻게든 행하는 노력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이러저런 핑계를 대면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지례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훨씬 더 성공의 문에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을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끝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밭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를 언제 거두어 불에 태우십니까? 처음에 보였을 때 과감하게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수확 때인 세상 종말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운다고 하시지요. 이렇게 세상 종말 때까지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씨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종종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속적인 흐름에 빠져있다 보면 주님의 뜻을 따르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는 필요 없는 가라지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주님을 떠올리면서 다시금 힘내어 가라지에서 벗어나 좋은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레싱).
십자가의 길은 좋은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왜고개 십자가의 길.
나의 행복을 위해 내려놓을 것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인 세네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적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탐내는 사람이다.”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사실 종종 방 안에 앉아서 제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러면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잘 활용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이것을 구입하려는 순간에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구입하고서는 늘 후회합니다. ‘또 다시 짐이 늘어나는구나.’ 라면서 말입니다.
특히 욕심을 부리는 것이 필기구입니다. 그래서 연필도 많고, 볼펜이나 만년필도 많습니다(지우개도 참 많네요). 이렇게 많아도 특이하거나 특별한 기능이 있다는 광고를 보면 저절로 손이 갑니다. 이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만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불행했을 때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여기에 만족할 것 같지만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욕심이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관리할 것도 많을 것이고, 또 신경 쓸 것도 많아져서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내려놓을 것은 무엇입니까?
소유의 욕심이 생길 때 주님을 바라보세요.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양승국신부-
제자들은 며칠전 스승님께서 선포하신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귀가하자마자 즉시 스승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13장 36절)
예수님의 설명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쪽집게 과외입니다. 초등 학생이 들어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마태오 복음 13장 37~39절)
밀과 가라지를 그냥 두었다가 수확 때에, 다시 말해서 세상 종말에 가라지만 따로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겠다는 말씀, 즉,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 언뜻 생각하니 엄청 두려운 말씀처럼 들립니다.
요즘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들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천박하고 비열한 말들을 들을 때 마다, 통제할 겨를도 없이, 자동으로 입에서 욕이 나오니, 참으로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때는 옆에 있다면 한대 때려주고 싶으니,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이 악행과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그 큰 과오와 악행을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으로 걱정됩니다
언젠가 그들이 겪게 될 육체적·정신적인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그보다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생명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빛 앞에 진리와 거짓이 명명백백히 가려지게 될때, 그제야 그들은 가슴을 크게 치고 불구덩이 속에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정말이지 남을 죄짓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보다 더 큰 악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분명 남을 죄짓게 하는 가라지들이 자라고 있으니, 유심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어떤 존재들이 가라지인지? 혹시 나도 가라지는 아닌지?
밀과 가라지의 비유 안에서 유난히 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밭의 주인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가라지를 당장 뽑아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걱정스럽고 불편하겠지만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의 결정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추수 전에 가라지를 뽑아버리고 싶어합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 앞에서 인내하기 힘들어 합니다. 크게 분노하며 당장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주인은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해 놓으신 목표와 시간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는 작업은 우리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서 12장 19절)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은 듣는 오늘, 우리 역시 섬뜩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체험하는 바처럼 삼십 년, 오십 년 전 저질렀던 악습을 오늘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가 각별히 돋보이는 비유 말씀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마치도 밥 먹듯이 죄를 짓고,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구원자이자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그때 그때 처벌하시고 진노하신다면, 견뎌낼 자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무수한 악행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 각자 스스로의 양심과 의지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것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하시면서도, 배반자 사도를 눈여겨 보시며, 빨리 돌아오라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유치원생 취급하지 않으시고, 성숙된 한 인격체로 대해주시는 관대한 주님이십니다.

무상의 은총
-반영억신부-
인생의 끝에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을 심은데 팥난다”.고 합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절제와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자기수행을 게을리 하자 말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는 쇄신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물론 구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
-이종훈신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면 죽는다고 했지만, 예외인 사람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느님과 흥정을 했고(창세 18,20-32), 모세는 특별한 장소에서 친구처럼 친근하게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과 대화했다(탈출 33,11).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하느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동산에서 알몸으로 그분과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이셨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그곳을 잃어버렸고 그분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이후 그것이 전해지면서 하느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음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돼버렸다. 그리고 그분은 신비스러움을 넘어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처음의 그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찾아가야할 인류의 최종 목적지라고 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곳이 잃어버린 곳이든, 최종목적지든 우리는 그 낙원으로 하느님의 집으로 가야 한다. 하느님과 친해져서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특별한 몇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하느님은 이 세상사람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집도 무지 넓다고 들었다(요한 14,2).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얼마나 바라시면 아들까지 내어주기까지 하시면서 그 마음을 전하셨을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저분의 비참한 모습은 하느님의 경고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께 올 수만 있다면 저렇게까지도 하신다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예수님, 주님께 하느님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아니 아빠셨습니다. 그 친밀감을 저에게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예수님이 왜 당신을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또 당신이 왜 이런 길고 어색한 이름을 가지게 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뭐 그리 복잡하게 하느님께 가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아무리 기도하고 결심해도 여전히 하느님은 불편하고 두려운 분으로 느끼니 어쩌겠습니까? 제 죄를 대신 보속하실 정도로 저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주소서. 아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기정신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 13,37~43)”
좋은 씨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며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나쁜 씨 뿌리는 이는 악마들이며 나쁜 씨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랍니다.
종말 때 천사들은 남을 죄짓게 하거나 불의한 자들은 불에 태운답니다.
지옥에선 울며 이를 갈고 의인들은 천국에서 해처럼 빛날 거라 합니다.
이런 세상 미래의 이야기를 하시고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도 안 믿는 자들도 다 귀는 있고 열고 닫기를 자유로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귀 열고 악마 말에 귀막고가 정답인데 반대로들 합니다.
좋은 선물 자유사용 할 때 하느님아버지말씀 예수님께 귀 열고 삽시다.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송영진신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태어날 때부터 ‘가라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밀’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냥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라는 말씀과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라는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나라의 자녀들로 태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백지 상태로 태어나지만, 예수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를
받아들이는 사람만 하늘나라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또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라는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자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살면서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지르면 악한 자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인데,
원래 ‘가라지의 비유’는,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고 해도 곧바로 처벌하시지 않고
심판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8-30)”
주인이 가라지를 뽑지 말고 수확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지 않지만, 사람들 경우에는
가라지 같은 사람이 회개해서 밀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밀과 같은 사람이 타락해서 가라지 같은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일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는 주인의 걱정은,
가라지 같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하느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에제키엘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다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루카복음 13장에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여기서는 밭주인의 뜻과 재배인의 뜻이 다른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죄인의 회개와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30).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이신 분이고(루카 15,4),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입니다(마태 12,20).
그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시는 때가 종말이고 심판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포기하신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악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과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자신이 스스로 처벌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끝까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그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도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유다의 자살은 회개하기를 포기한 일이기도 하고, 거부한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스스로 멸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고 강조됩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은,
지금 ‘나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20).”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이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로 되는 것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판단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노력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마태 13, 37)
-한상우신부-
씨를 뿌리시고
거두시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이 모든 여정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
교만은 또 다른
교만을 낳게됩니다.
이와같이
선과 악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좋은 씨를 믿습니다.
세상이라는 밭을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십니다.
가라지를 거두고
불에 태우시며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분또한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빛으로 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해처럼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 가득차 있는
주님의 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 43)

-오상선신부-
오늘은 며칠 전에 만났던 가라지의 비유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마태 13,26)
예수님의 공생활 일과는 군중과 함께하시며 가르치고 치유하고 돌보는 시간과, 집이나 산, 외딴곳으로 물러나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의 리듬으로 짜여 있습니다. 마침 지금은 제자들이 따로 주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비교적 고요한 시간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 여쭙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하나 짚어가며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사실 비유는 가르치는 이에게는 의도적인 정답이 있지만, 듣는 이 입장에서는 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빈번히 대두되는 두 가지 양상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밀과 가라지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보는 해석, 그리고 인간 안에 공존하는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을 가리키는 해석입니다. 둘 다 말씀을 만나는 이에게 의미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계시니까요.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마태 13,41)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정확히 적시하십니다. 장단점이 다 있는 보통 사람 중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성인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또 완전히 악하기만 한 사람도 잘 상상이 되지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라지들은, 어쩌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악을 고수하며 살아온 이들 같습니다. 하늘 나라의 자녀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좋고 선한 표양을 닮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감화도 성화도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올가미를 놓고 즐겨 걸림돌이 된 이들이지요.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반면 하늘 나라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의 모상성을 무럭무럭 키워온 선한 이들에게는 아버지의 나라가 주어집니다. 거기서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 빛을 받아 해처럼 빛나리라고 하시니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할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벅찹니다.
제1독서는 모세와 하느님의 관계성, 그리고 모세의 중재로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용서의 간청, 새 계약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이어지는 대목이지요.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의 일과에도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리듬이 존재합니다. 백성들 틈에서 그들을 이끌고 가르치고 조정할 때와, 만남의 천막에 머물러 주님과 마주하는 시간이 공존합니다. 지상의 삶을 사는 한 인간으로서 이만큼 주님과 직접 내밀한 관계를 누렸던 이는 없었다고 성경이 증언할 정도로(신명 34,10 참조) 모세와 하느님 사이는 각별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계약 후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며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렸고, 이에 하느님은 그들을 멸하신 후 모세에게서 새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분노하십니다. 모세는 필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려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며 백성에게 내리실 재앙을 만류하지요.(탈출 32장 참조)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8)
이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간구합니다. 그는 줄곧 "저희"라는 인칭을 사용해 자신과, 죄지은 백성을 한 무리로 언급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 백성과 죄로 묶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을 순종, 경외심, 겸손으로 자신과 다시 묶는 겁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간청이기에 주님은 모세를 보아 마음을 돌리십니다.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마주한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재차 계약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손가락으로 직접 써서 주신 첫 십계명 판(탈출 31,18)과 달리, 이번에는 모세가 직접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탈출 34,28)고 하지요. 모세는 이미 이 지상에서 "해처럼 빛난 의인"이었고, 의인의 중재야말로 온 백성을 되살리도록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비유의 풀이는 그 배경이 "수확 때" 즉, "세상 종말"(마태 13,39)입니다. 언제가 될지 누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마지막 날이지요.(마태 24,36 참조)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가망이 없다는 결정론적 통보가 아닙니다. 그때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의인들의 기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가라지들과 그들에게 걸려넘어지는 이들을 위해 여전히 애끓는 간청으로 주님께 올려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시며 아들이신 예수님의 희생제사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밀 한 줄기라도, 밀 이삭 하나라도 잃을까 염려해 가라지를 그냥 두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가라지 하나라도 더 구해 보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천상에서건 지상에서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이들은, 백성을 위해 자기 이름마저 당신 책에서 지워 달라고(탈출 32,32) 목숨을 걸고 외쳤던 모세와 한 목소리로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파스카의 죄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처럼 모든 걸 걸고 하느님 앞에 자기를 내놓아야 합니다. 하느님 빛으로 해처럼 빛나는 의인들의 기도와 중재 덕분에, 마지막 날 무서운 불구덩이는 빈 채로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친구인 벗님이 바로 그 의인입니다. 아멘.

만남의 천막을 치자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621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1일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8월 1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0) | 2019.07.31 |
---|---|
2019년 7월 31일 연중 17주간 수요일 (0) | 2019.07.30 |
2019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0) | 2019.07.28 |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0) | 2019.07.27 |
2019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0) | 2019.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