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31일 연중 17주간 수요일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 13,44-46)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 살갗이 빛나게 되자 얼굴을 너울로 가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아,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눈 모세는 얼굴의 살갗이 빛납니다. 여기서 ‘빛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란’인데, ‘뿔’이라는 의미를 지닌 ‘케렌’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로마 시내에 위치한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모세 상에도 뿔이 달려 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상징합니다. 번제 단이든, 분향 제단이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단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죄 제사를 바칠 때, 제물의 피를 제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게다가 죄를 지은 사람이 이 뿔을 잡으면 그를 처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권능을 지니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은 나의 뿔”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뿔’은 주님 권능을 실행하는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숫양 뿔로 만든 나팔은 기쁜 소식, 곧 구원을 알려 주는 도구였고, 사무엘 등 예언자들은 ‘뿔’에다가 기름을 채워서, 임금들을 축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니 제1독서에서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는 말은 모세가 바로 이 뿔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뿔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 뿔을 도구로 받은 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얼굴을 너울로 가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빛이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이상 너울이 필요 없는 참빛을 보게 되었다고 강조합니다(2코린 3장 참조).
오늘 복음이 말하는 기쁜 보물, 진주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보물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어떤 책에서 여성에 대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자들은 자주 아프다. 생리통부터 배란통, 출산, 갱년기까지... 이렇게 아프면서 늙어간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머니께서 늘 아프다고 하셨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프면서 늙어간 것인데, ‘왜 늘 아프다고 하실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더군다나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는 삶을 살 때 얼마나 더 아프셨을까요?
내 자신이 상처 받은 사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남에게 상처 준 사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받은 상처에만 집중을 하면 복수하겠다는 마음, 미워하겠다는 마음, 상대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까지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과연 주님의 사랑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자신이 남에게 준 상처에 집중을 해보십시오. 저절로 미안한 마음에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 안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상인에 대한 비유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소유한 채 밭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어떠했나요? 그 역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진주를 샀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분명한 포기와 선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이나 좋은 진주는 바로 하늘 나라의 큰 가치를 의미합니다. 즉, 영원한 삶이라는 커다란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것도 갖고, 저것도 갖는 선택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사랑만이 정답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나라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사도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한 번 맞춰보십시오.
“한 이름난 부자가 어느 날 강물에 빠졌다. 그는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정신없이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세 명의 남자 일행이 그 근처를 지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바로 현장에서 도망쳐 버렸고, 또 한 사람은 그곳에 있던 작은 돛단배를 하나 잡아탔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용기 있는 자이며, 누가 겁쟁이고, 누가 탐욕스러운 사람일까?”
그는 곧바로 물속에 뛰어든 사람이 용기 있는 자이고, 도망친 사람이 겁쟁이고, 작은 돛단배를 잡아탄 사람이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답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 년 뒤에 다시 그 자리에 서서 다른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답이 아니랍니다. 또 일 년이 지난 뒤에 다시 그 자리에 섰을 때, 그는 도저히 정답을 몰라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하늘나라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판단을 섣부르고 하고 있을까요? 그 모습이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집중해야 하늘나라 문이 열립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양승국신부-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보물중의 보물
-반영억신부-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 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한다면 결코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청년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와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으러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도 놀라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녀 엘리사벳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보물은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가9,62) 내 삶의 자리에서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 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교부들은 이 비유말씀에서 밭을 성경으로(오리제네스) 보물을 그리스도로(힐라리우스) 풀이합니다. 성경 말씀을 애써 뒤적임으로써 최고의 보물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보물, 영원히 빛나는 진주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분을 만나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다면, 성경 말씀을 묵상합시다”(함께야).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이 두 비유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된 ‘기쁨’과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보물의 비유’의 경우에, 보물이 밭에 숨겨져 있다는 것과
발견한 뒤에 다시 숨겨 두는 것은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얻는 것과 같은 일이고,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일은(마태 4,17),
그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현세에서의 인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그냥 ‘남의 일’로만 생각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해도, 그것이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은
기뻐하지도 않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는 것”과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좋은 진주를 사는 것”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얻는 ‘신앙인의 전적인 헌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 두 비유를, “덜 중요한 것을 모두 버리지 않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얻지 못한다.”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 걸림돌이 다른 사람과의 인연일 수도 있고,
재물이나 권력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걸림돌들은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2) 두 비유를, “신앙인은 자기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그것만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별로 기쁨을 주지 않는 다른 것들은
그냥 미련 없이 버리는 사람이다.”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 그 ‘다른 것들’은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그것들이 악한 것들이어서 버리는 것은 아닌데,
가지고 있어도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또 계속 가지고 있을 만한 영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아주 하찮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모으고, 보관합니다.
어떤 추억 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는 없어도 성격 탓에 그럴 수도 있고,
또는 취미 삼아서 그런 것들을 모으고 보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성격이나 취미 자체를 죄나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애착이 되고 집착이 되면,
그것도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자유롭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두 비유를 루카복음 14장에 있는,
‘탑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출발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나라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전력을 다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간절함도 없이, 정성도 없이, “도착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같은 태도로는
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앞의 두 비유에 연결하면,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차지하고 싶어 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다 팔기가 싫어서 망설이거나,
또는 가진 것의 일부만 처분하는 바람에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탑을 세우려고 하다가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보물을 차지하고 싶다면, 그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진 것을 모두 버린다는 말을
세속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자는 버려야 할 것이 많고, 가난한 사람은 버려야 할 것이 적지만,
‘버리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버리는 비율’이 중요합니다.
‘전부를 버리느냐?’ 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버려도, 또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많이 버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만 버리고 일부는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즉 부자가 확실히 더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버려야 할 것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9,24).” 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이 좀 더 유리하긴 한데,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 안에 감춰진 보물
-이종훈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발견한 그 보물은 밭에 있어야만 보물인가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물만 몰래 캐 가면 됐을 거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매일 황금알을 갖고 싶다면 거위를 잘 키워야지 그 거위의 배를 가르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다. 그분과 맺은 계약위반을 생각하면 인간은 오래 전에 아니 만들어지고 얼마 안 돼서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동생을 살해하고 바벨탑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숭배한 이후에도 수없이 계약을 위반했는데도 인류가 아직 생존하는 걸 보면 인간세상 안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계약위반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자책하고 목숨을 끊으려 해도 하느님은 절대로 그렇게 못하게 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사랑할 대상이 사라지면 하느님은 정말 괴로우셔서 그러실 거다. 억지인가? 여하튼 하느님은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저주하듯 자책함을 거룩함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이다. 거룩함을 가장한 숨어 있는 교만이다.
자신의 죄를 모르든 그것을 알고 자책하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뭐가 그리 좋으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그렇게 사랑하시니 나의 삶 안에는 뭔가 특별한 게 감춰져 있는 게 분명하다.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가지시려고 하시니 말이다. 그게 도대체 뭔지 알아야겠다. 찾아봐야겠다. 이 생이 끝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그 전에 미리 알면 지금부터 신나는 일이 아니겠나. 그것은 전 재산을 팔아 사야할 진주(마태 13,46), 한 번도 빼지 않고 나를 배신했는데도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거짓행복약속을 포기하면 얻는 참된 행복이다. 하느님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나의 삶 안에 그렇게 값진 진주가 묻혀 있다니 오늘도 그걸 찾아야겠다.
예수님, 주님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늘에서 그런 말씀을 했다면 말 그대로 저 먼 ‘하늘나라’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저희처럼 땀 흘려 일하고 내적 외적 고통을 받으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믿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늘 나의 삶 안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주님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예수님을 그렇게 안고 계시듯이 저도 그렇게 안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저를 주님의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44-46: 밭에 묻혀있는 보물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고 말씀하신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보물을 가지려면 밭을 사야 가질 수 있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사야하는 것처럼, 하늘 나라의 보물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밭이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밭으로 오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물인 지혜를 찾는다. 신앙인은 이제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을 따르려고 애쓰는 가운데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거기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게 된다.
값진 진주는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귀한 살아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삶이라는 하나의 진주를 찾는다. 하느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은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는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속된 욕망에서 돌아서게 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면 나머지 모두도, 즉 율법과 예언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지만, 복음을 알고는 율법에 관계된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라고 하셨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그 진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을 뿐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것들을 바라며,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치 못한다. 오직 값진 진주의 광채, 즉 그리스도만이 그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라는 말은 이러한 사랑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원한 삶에 대한 불타는 열망은 물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 깊이 빠진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 46)
-한상우신부-
살아있는 정신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과 삶 사이에
기도와 기도 사이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생성과
소멸 속에서도
살아있는 정신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예수님의 일생을
자신의 삶 안으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수록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보물이라는 양심이
자유와 함께
춤을 춥니다.
양심에서
출발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우리의 양심에
있습니다.
양심이 성장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양심성찰에서
회개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회개로 신앙은
공허한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모든 걸 바치며
모든 것을 바친
신앙은 모든 것을
보물이 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값진 보물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보물을
놓치지 마십시오.

-오상선신부-
7월 마지막 날인 오늘은 예수회의 창립자 성 이냐시오 축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비유를 우리에게 들려 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밭에 감추어진 보물로 비유하십니다. 이 보물을 발견한 이는 당장 달려가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보물이 숨겨진 밭 전체를 살 겁니다. 힘껏 찾아온 보물을 발견한 마당에 재산이 문제겠습니까? 거기에 다 쏟아붓고 올인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횡재라 여기겠지요.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그런데, 가만! 방금 들었던 '하늘 나라 - 보물' 비유 공식에 비추어 본다면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와 같다'고 해야 할 듯한데, 그게 아니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좋은 진주"가 아니라 "상인"에 비유하신 겁니다. 아마 그냥 지나쳤다면 놓칠 뻔했을 의미가 있는 듯하네요.
하늘 나라는 보물이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라면, 우리는 그 보물의 발견자이고 좋은 진주가 됩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와 우리는 서로를 찾고 있습니다. 탐색하고 추구합니다. 어느 한 쪽도 정지상태로 고정되어 상대가 다가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양쪽 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서로를 향해 움직입니다.
하늘 나라는 때에 따라서 간절히 추구하는 이들에게 발견되고, 취득되고, 소유되기도 하지만, 또 때에 따라서는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서고 발견하고 취득하고 소유합니다. "값진 진주"인 이들이 하늘 나라에 소유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이, 발견한 이를 맞이하는 장소, 공간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아 움직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과 다시 계약을 맺은 모세가 증언판 두 개를 들고 시나이산을 내려오면서 시작됩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다"(탈출 34,29)고 합니다. 그 빛은 모세 자신의 인간적 빛이 아니라 분명 하느님으로 인한 빛입니다. 그분 영광의 빛을 머금고 그 잔영에 물들어 나오는 광채였을 겁니다. 마치 타볼산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빛난 예수님에게서처럼, 자연적인 현상을 넘어서는 그 빛은 그가 누리는 하느님 현존과, 그분과 맺는 관계성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지요.
"모세는 주님과 이야기하러 그분 앞으로 들어갈 때는 너울을 벗고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탈출 34,34)
모세가 백성들 사이에 있을 때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지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경감시키려는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의 영광을 누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모세가 주님 앞에 머무를 때는 너울을 벗었다고 합니다. 주님과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 맨 영혼의 민낯을 숨김없이 드러내어도 괜찮은 사이기에 그랬을 겁니다. 주님과 모세는 서로에게 활짝 열려 있는 사이입니다. 서로를 찾고 대화하고 사귀는 사이입니다. 이는 조물주와 피조물이 맺는 최고 경지의 친밀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불타되 타버리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몸소 "좋은 진주"를 찾아나선 하늘 나라이십니다. 거듭 주저하고 거부하는 모세를 설득해 조력자 아론까지 붙여 주시는 적극성도 하느님에게서 드러나지요.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준비된 도구, 좋은 진주를 찾은 상인답게 그에게 올인하십니다. 그리고 신뢰와 힘을 아낌없이 퍼부어 주시지요.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 스스로 다가갔다가 주님께 붙잡힌 순간부터, 모든 일을 그분과 상의하고 여쭙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 감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보물(하늘 나라, 주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는 자아,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전하고 움직일 뿐입니다.
주님과 모세는 서로를 찾고 발견하고 얻었습니다. 그래서 한 팀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파스카를 이끌어 내지요. 거기에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모세를 당신의 상대로 들어높이시고 존중하고 사귀신 주님의 겸손이 깔려있습니다. 모세 역시 주님께 겸손히 순종하지요. 조물주와 피조물의 상호적 겸손이 이 관계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걸 걸어도 아깝지 않은 보물입니다. 감추어져 있지만, 평소 부단히 추구하고 애써 찾던 이들의 눈에 보이는, 보이기를 갈망하는 실재입니다.
또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가치로운 자녀들을 찾아 나선 상인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발견할라치면 가진 모든 걸 맞바꾸더라고 그를 꾀고 달래고 껴안아 데려옵니다.(호세 2,16 참조) 그와 얼굴을 맞대고 사귀시며 그를 빛나게 하셔서, 그와 함께 하늘 나라를 확장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우리는 하늘 나라를 발견하고 기뻐 뛰는 발견자인 동시에, 하늘 나라의 손 안에 들어간, 하늘 나라에 사로잡힌 귀한 진주입니다. 비천하고 죄인이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당신 영광의 빛으로 꾸미시어 당신 일을 하도록 초대하신 주님의 겸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을 온 존재에 입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이런 가난한 우리들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움켜쥐었고, 동시에 하늘 나라에 포획되고 사로잡히고 점령되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이냐시오 성인도 이렇게 하늘 나라라는 보물을 찾아 얻은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늘 나라를 꿈꾸며 찾는 기쁨의 하루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성 이냐시오)

자유롭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6583
-김명겸신부OFM-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648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일 연중 17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0) | 2019.08.01 |
---|---|
2019년 8월 1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0) | 2019.07.31 |
2019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0) | 2019.07.29 |
2019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0) | 2019.07.28 |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0) | 2019.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