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Margaret K 2019. 7. 27. 06:04

2019 7 28일 연중 제17주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1-13)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 debt to us,
and do not subject us to the final test.” 


윌리엄 홀먼 헌트의 ‘끈질긴 이웃 사람’.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빚 문서를 지워 버리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청하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무 답도 없으신 하느님 때문에 절망하곤 합니다. 그런 체험을 가지신 분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저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든지, 아니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 주시든지 할 겁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분의 나라가 오시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도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악에서의 구원을 청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것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이렇게 보니 주님의 기도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무엇을 청하든지 기도의 마지막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 손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기도 때 많은 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저는 아버지를 귀찮게 하는 어린아이처럼 바라는 바를 아버지께 청합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무엇을 청하든 언제나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자녀의 바람에 귀를 기울이시다

한민택신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바람을 말씀드리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기의 바람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와 바람을 통해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어떤 것도 하지 못하십니다. 그것은 신앙이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란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저 먼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친교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새로운 사랑을 나누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자유로운 두 주체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기에 강요할 수도, 무력을 행사해 얻어낼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사랑은 외면당하고 상처 입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상처 입은 모습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다른 한편 십자가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에게 다가가 무작정 묻지도 않고 그들을 치유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에게서 떨어져 나와 당신 앞에 서도록 하셨고, 그에게 물음을 던지며 그의 마음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에게 중요했던 것은 치유나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과 만나는 그 사람이었고, 그와 만나 이루는 새로운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도록,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이 담긴 소망을 청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사람 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신앙이 회복됨을 깨달았으며, 삶을 향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만남이 그에게 생명력을 선사하였고, 삶의 열정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사도들이 선포한 하느님은 주님의 기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자녀로 누리는 자유와 평화,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삶을 멋지게 설계하고 꿋꿋하게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그 사랑 안에서 기뻐 뛰며 능동적으로 삶을 기획하고 설계하며 찾기를 바라십니다. 안주하지 않고 길을 떠나기를, 길 위에서 겪는 여러 일들,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를, 나날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당신 나라가 실현되기를, 두려움과 의기소침, 폭력과 억압, 죄와 악,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가서 당신의 사랑과 평화, 용서와 자비가 다스리기를 바라십니다.


무엇을 청할까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청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 영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8,15; 갈라 4,6 참조)


기도

-서강휘신부-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중략)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김승희 시 ‘객석에 앉은 여자’)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포기한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스스로 단념한다는 일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이 더 무겁다. 스스로를 포악하게 해 자신의 삶을 내팽개친다는 말이다. 단순히 단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폭행을 가해 못쓰게 만들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생, 내팽개쳐진 삶에 대해 그가 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늘 자신의 삶을 핑계에 가둬 버리는 삶은 그래서 꿈과 사랑 모두를 지연시켜 결국 나의 삶을 미래로 유보시킨다. 그녀는 시인의 말처럼 ‘아프다는 핑계’로 없었던 병, 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렬히 무언가를 희망해 보지 않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병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익숙해져 버린 삶의 문법에 갇혀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그저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시가이 고지라는 심리학자는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정하고 이 무의식은 우리의 평상시 언어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언어, 수동적인 태도에 지배됐던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는 시작이다. 할 수 없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망하고 청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두 가지 생각을 연이어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온전히 개방된 질문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지닌 인간적 소망을 떠올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하느님께 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망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게 돼 있다. 내가 청한 나의 승진이, 가족의 건강이, 더 많은 재물이 혹시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것이 하느님께서 달가워하시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청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 알아차림은 지속적인 소망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다. 어쩌면 정성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한다는 것은 소망의 정화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의 끝자락에 우리는 소망의 근거나 배경이 되는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참다운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내가 욕구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제한되지 않고 내 소망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내가 소망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의 소망을 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현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노력은 나의 노력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소망케 한다. 삶을 미래에 유보시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꿈과 사랑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소망하게 하는 힘이다. 이 힘은 나의 소망과 두드림이라는 응답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화된 삶이 된다. 성령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신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하느님의 소망과 같아지는 것, 그것이 기도다. 회피된 인생, 무기력한 삶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리는 언어는 결국 기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청하라는 명령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신다. 기도는 하고 싶은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제자들은 이미 ‘청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며, 반대로 필요 이상의 현세적 욕망은 거부돼야 한다.(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들의 궁극적인 소망, 즉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다. 이 유혹이란 희망을 저버리게 만드는 부정적 언어와 핑계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우리가 꿈과 희망을 유보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두드릴 일이다. 우리에게는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일용할 양식

박승재신부-


예수님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루 살아갈 힘을 주는 양식, 이 양식을 하루만 청할 것이 아니라 매일 청하라고 하십니다. 이 양식은 밥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고 하신 것에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그렇게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 까? 걱정하지 마라. … 그런 걱정은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마태 6,31-32 ; 루카 12,29-30) 다른 민족이 애써 찾는 양식이 아닌 다른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양식이 아닌, 예수님께서 청하라고 하시는 그 일용할 양식은 오늘 하루 아버지 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는데 필요한 은총, 오늘 하루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은총, 오 늘 하루 사랑하도록 힘을 주는 은총, 오늘 하루 용서하도록 힘을 주는 은총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총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구하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립니다. 자신이 아니라 소돔의 사람들을 위 해서(물론 조카 롯이 거기에 살고 있었지만) 그렇게 매달립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한밤중에 빵을 구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자신이 배고프면 그냥 잘 수 있지만, 친구의 배고픔을 위해서는 끝까지 매달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빵을 얻기 위해 사람이 사람에게 줄 곧 매달리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끝까지 매달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매일 아침 하느님 아버지께 매달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자녀로 서 살아가게 하는 양식을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사랑하는데 필요한, 용서하는 데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 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양식을 주신다고 약속의 말씀을 전하 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최승정신부-


오늘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을 벌하시기 위하여 그 주민들을 쓸어버리시려 하자 아브 라함이 그들의 용서를 청하는 장면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10명까지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아브라함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 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과 대화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모습에서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을 막고 싶은 아 브라함의 간절함을 읽어내야 하겠습니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는 십자가 사건을 대속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없애 버리기 위해 십 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용서를 뜻한다는 것이 바오로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요청한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일정 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위해 대신 간구하고 희생하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의 질문을 우리는 어떻 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그는 올바른 기도에 대해 묻고 있 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꼼짝없이 우 리의 욕망을 채워주실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해 복음서는 명확히 밝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질문에 대 답하시는 예수님의 말 안에서 우리는 올바른 기도에 대 한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기도를 가

르쳐 주시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마지막으로 성령을 청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올바른 기도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 라,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청함 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듣게 됩니다. 이 깨달음을 누군가 는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 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 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 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 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 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 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 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 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 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 아라,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 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 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 면서….


첫사랑의 아픔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김충연신부-


일상 속에서 노래 한 곡 때문에 눈물샘이 열려 눈물이 나고, 특정 향 기 때문에 가슴 뭉클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증상들은 과거의 첫사 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사랑의 기억은 설렘도 있지만 헤어짐이란 아픔 이 더 큽니다. 많은 분들이 첫사랑의 아픔을 가슴속 어딘가에 보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의 일생 중에서 첫사랑의 아픔을 주신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 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 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1) “그가 줄곧 졸 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2가지 비유를 통해 예 수님께서는 항구한 기도 생활을 요구하십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 리가 당신을 목말라 하기를 갈망하신다.”(2560항)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항구한 기도 생활과 더불어 기도 지향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 라.”(루카 11,2)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출발점이 나를 위한 것이 아 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사랑의 추억과 상실의 고통은 나를 향한 시선에서 상대방 을 향한 시선을 갖게 합니다. 나라는 자아 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사랑을 배우게 되는 출발점이 첫사랑에 대한 상실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아픔은 하느님의 선물 입니다. 항구한 기도 생활에서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첫사랑의 아픔을 추억하며 나의 목마름이 아닌 하느님의 목마름을 만나는 기도 생활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허기원신부-


성당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이 “하느님의 뜻이 있겠지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마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러한 오해 안에서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이런 오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해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이 파멸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의인의 수를 점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계속 하느님께 매달리고,(마치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신다.(창세 18,27-32)

금송아지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을 때, 모세의 간청으로 재앙을 거두신 것처럼 말이다.(탈출 32,1-14)

 

성경은 아브라함과 모세만이 아니라, 엘리야를 비롯한 수많은 예언자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온 세상과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으신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 버리신다.(콜로 2,14) 이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 환호송이 노래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와 제자들에게 전해진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다룬다.

주님의 기도는 그 내용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세상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는 기도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주도하시지만,

우리 또한 그 계획에 동참하여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수많은 예언자와 제자들, 교부들, 성인들을 비롯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뜻에 우리의 마음을 모으게 된다.

 

주님의 기도는 수많은 유혹이 도사리는 상황에 놓일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 기도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유혹을 경험하며 때때로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비록 시험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저 수동적으로만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자세라고 볼 수 없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간청하는 가운데 그 계획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리는 진정한 자세일 것이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청하였고예수님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목욕재계(沐浴齋戒)로 준비하라는 말씀도 없고제물(祭物)을 먼저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기도를 위한 자세도, 기도를 위한 복장도 없습니다기도를 위한 특별한 장소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오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들을 보살피듯이,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아버지가 함께 계셔서 자녀들이 안심하고 살며 행복하듯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신앙인도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우리를 배려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남성 위주의 가부장(家父長)적 옛날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함께 들어있습니다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분이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분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겠다는 결의(決意)도 들어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고치고 살리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 36)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느님에게 가져와 말씀드리고 그것의 성취를 비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고, 그 실천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다는 말입니다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하는 항목입니다성숙한 자녀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자녀는 먼저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질 것을 빈 다음, 기도는 이어집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노동하여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위선적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한 우리는 우리가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기도입니다그리고 기도는 계속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이 말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할 때만,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우리가 실천하는 용서가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전제조건이 아닙니다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는 기도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겠다는 마음입니다유혹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루가 22, 40).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원하신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42).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유혹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자기 행동의 유일한 기준입니다게쎄마니에서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잠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각자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이렇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친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친구를 졸라대는 사람이 친구에 대해 가진 신뢰심과 같은 신뢰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긍정적 신뢰심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이렇게 선언하신 다음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명하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제대로 된 자녀는 부모를 신뢰합니다노예나 종은 주인을 신뢰하지 않고, 주인의 마음에 들어서 혜택을 누릴 궁리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청할 것은 성령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분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아버지의 나라가 오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하느님은 우리가 큰 신뢰로써 다가가야 할 분입니다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천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색하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갖고명예와 허례허식(虛禮虛飾)을 탐하던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인간은 학문과 예술을 익히기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하느님을 배우겠다는 우리의 마음 안에 성령은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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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묵주기도를 하면서 운동을 겸해서 많이 걷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강화의 ‘나들길’이 정말로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강화에 오래 살아 왔기에 웬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들길’에 가봐야 특별한 것이 뭐 있을까 싶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우연히 ‘나들길’ 코스를 걷게 되었습니다. 주변 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솔직히 전에는 차들이 많은 이 강화에 걸을 곳이 별로 없다면서 투덜거렸는데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곳이 뭐 있을까 싶었지만 특별했습니다.

문득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려는데,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다면서 불평과 불만을 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옆에 있음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바로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시지요. 아브라함의 간절한 청이 담긴 기도가 희망의 말씀이 되었고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너무나도 소홀히 했던 것이 아닐까요? 마치 따분한 하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해야 하는 특별한 행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서 별 특별한 곳이 있을까 했던 곳이었지만, 직접 가보니 너무나도 멋진 곳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 역시 밖에서 볼 때에는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새롭고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안에서만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는(콜로 2,13.14 참조) 주님을 만날 수가 있고,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전라도 지역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막걸리 골목’이 아주 유명하더군요. 전라도 인심이 느껴지는 많은 안주에 막걸리 한 잔은 필수인 것처럼 나와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라 택시를 탔습니다. 그리고 ‘막걸리 골목’에 가자고 했지요. 운전기사님께서는 그곳에 왜 가려고 하느냐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여기 사람은 그곳에 안 갑니다. 왜 그런 데를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모르지요. 이처럼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기도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중요하기에 주님께서는 직접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계획 없는 목표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기도

강의 중, 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즉,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답하지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 가족의 평화의 일치,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등등을 말입니다. 하지만 이 좋은 꿈을 위해 지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대부분 우물쭈물합니다.

꿈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꿈과 목표가 있어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꿈과 목표를 갖는 것은 쉽지만, 이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께 맡기는 게으른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꿈을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이 목표에 도달할 시간은 얼마나 될지,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할지,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도와줄 사람은 누구인지... 이밖에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한 후에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로 얻는 빵 세 덩어리의 가치

-전삼용신부-


중세기 이탈리아에 기사도 정신에 충렬한 한 성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공을 세웠으면 하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만찬을 나눌 때 사용한 금잔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성주는 당장 많은 돈을 준비해서 말을 타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문을 나서려 할 때였습니다. 성문 앞에서 한 문둥병자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푼 도와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 우리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금잔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 냉큼 비키지 못할까!”

“성주님, 저는 며칠을 굶었습니다. 제발 한 푼만!”

성주는 마지못해 금화 한 닢을 꺼내 땅바닥에 내던지며 소리 질렀습니다.

“자, 이걸 가지고 떠나라.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큰일 때문에 너를 돌볼 겨를이 없다.”

      이때부터 수십 년 동안 성주는 예루살렘은 물론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그리고 멀리 애급의 사막에까지도 금잔을 찾기 위해 뒤지고 다녔으나 헛수고였습니다. 드디어 돈은 떨어지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용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떠나던 때와는 달리 낡은 옷에 지팡이를 짚은 쓸쓸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의 앞에 예의 문둥병자 거지가 나타났습니다.

“한 푼 도아 주십시오.”

      그동안 숱하게 겪은 고생으로 이제 그의 거드름은 잦아지고 사랑이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지에게 나누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 밖에는. 그는 빵의 절반을 잘라 거지한테 주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을 들고 옹달샘으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길어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돕는 것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이 내 전부인 것을 어떡하오.”

      그러자 갑자기 문둥병자 거지가 예수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들어라. 금잔을 찾으려고 아무리 헤매어도 소용이 없다. 샘물을 길어온 그 보잘 것 없는 쪽박이 나의 성배이다. 네가 떼어준 빵이 나의 살이며 이 물이 내 피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와 더불어 나눈 식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출처: 정채봉의 생각하는 동화]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려는 어떤 귀중한 은총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내가 바라는 것과 같지 않다면 은총을 주어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사과를 바라는데 돌을 주는 격입니다. 그러나 그 돌이 다이아몬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오래 많이 한다고 해서 많은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열심히 바치는 기도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어떤 신부님이 “주님의 기도는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그런 기도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지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들은 주님의 기도의 완전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왜 어떤 신자들은 같은 주님의 기도를 보면서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여기는데, 어떤 분들은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이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기도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가장 완벽한 기도의 가르침이 ‘주님의 기도’란 뜻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기도를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기도 중 하나라고 여긴다면 어쩌면 그 분은 주님의 기도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꾸준한 마음’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잠들어 있는 친구의 집에 찾아가 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빵 세 덩어리’만 얻으려는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계속 두드리고 청하다보면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기도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꾸준하게 바치면 성령을 받게 되는데 성령을 받는 것은 마치 빵 세 덩어리를 받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빵 세 덩어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례 때 성령을 받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알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고 광야에서 자아의 세 가지 원수인 ‘세속-육신-마귀’와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얻어내신 것이 ‘복음삼덕’, 즉 ‘청빈-정결-순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침으로써 얻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자아를 무찌를 수 있는 복음삼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를 이겨 복음삼덕으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기도의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쳐서는 아무 소용없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빵 세 덩어리, 즉 복음삼덕의 가치를 안다면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빵은 먹으면 또 배가 고파지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커져서 나를 집어삼킵니다. 그러니 그 자아의 욕망의 나쁜 것을 알고 그것을 누르기 위해 꾸준한 빵 세 덩어리를 다시 청해야합니다. 고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만 하는 사람은 매일 약 먹는 시간을 절대 잊는 일이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고혈압에 걸리는 것보다 자아에 지배당하는 것이 더 큰 고통입니다.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누를 수 있는 것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가 얼마나 나쁜 것이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빵 세 덩어리인 복음삼덕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안다면 기도에 꾸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루에 결코 빼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도가 되려면 그 기도로 얻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아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죽일 수 있는 성령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는 비결은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넓고 깊고 높은 사랑입니다. 때로는 품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며 기다리시고 마침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시간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양보하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하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세상의 기둥이고, 지혜의 창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낙심의 치료제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로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지금까지 기도를 안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회당의 집회와 가정의 부모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유다의 아이들치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기도에 대하여 매우 자상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자기들이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법이 분명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수없이 외우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11,2)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 그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뼈대가 되시고 거기에다 살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행동은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청해야 하고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고 청하되 거기에 걸 맞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몫이란 말입니다. 사실 기도의 목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를 자꾸 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도 한밤중에 기도하시고 때로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이 활동하시면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사는 것인지요?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통보가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문을 외우는데 급급해 하고 자기의 바람을 청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이 앞서고 떼를 쓰며, 침묵하시는 주님께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거지처럼 달라고만 하고, 때로는 흥정하고 심지어 협박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고 받길 원하고, 찾지도 않고 얻길 기대하며 두드리지도 않으면서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청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1-4). 사실 이럴 때는 구한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더 고마운 응답입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1요한5,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하면서 갈구해야합니다. 벗을 찾아가 귀찮게 해서라도 빵을 얻어내듯 우리도 참고 기다리며 매달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아브라함이 간절한 청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약하십니다.

 

 어떤 아가씨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발 신랑감을 보내주세요!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제발! 그러나 도대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하느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사정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아가씨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을 보내야 된다고 안달을 하십니다. 제발 사윗감을 보내주세요!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으로 기도하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숨결,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항구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숨은 한꺼번에 쉬고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꾸준히 고르게 쉬어야 합니다. 기도는 일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좋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자투리 시간을 내놓지 말고,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내 놓으십시오. 나를 위한 공간 꾸미기에 급급해 하지 말고 기도할 장소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이 앞에서 결코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십시오. 옛 말에도 울어야 젖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아가며 다리를 뻗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과 결과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시기에 청하는 대로 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급해 하며 답답해하여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8,26)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믿으십시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늦춰질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이야기 하고 저는 그분께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심장의 고요함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심장이 충만해진 채 우리가 말하고 그분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심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심장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제 뜻을 접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폰스).

 

우리가 많은 경우 우리의 바람을 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원의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여전히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14,28). 그러므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종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귀한 선물로 만족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더하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총알택시기사와 신부님이 같은 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천국으로 가고 신부님은 연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아니! 하느님의 일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하였는데 너무하네요!하고 투덜댔습니다. 그러자 그 옆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저 총알택시 기사는 손님들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게 만들었고, 당신의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다 졸고 있었는데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아야 하겠느냐?

 

“인생이 짧든, 길든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기도>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할 것이다.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할 것이다.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마태 6,8).
이 말은 그것을 우리에게 제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알고 계시니까 그것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따라서 우리가 청하고, 찾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그것을 잘 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기도는 안 주시려고 하는 분을 졸라대서 억지로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잘 받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잘 차려진 밥상이 자기 앞에 놓여 있다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것은 각자 할 일입니다.
< ‘혼인 잔치의 비유’에 바로 그런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주인은 사람들을 초대하기 전에 이미 잔치 음식을 모두 준비했고,
식탁에 차려 놓았습니다(루카 14,16).
초대받은 사람들은 가서 그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기도’는 초대해 달라고 청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물쇠를 여는 것과 문을 여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물쇠를 열어 놓으신 분입니다.
자물쇠가 제거되어 있는 문을 두드려서 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기도’는 잠겨 있는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물쇠를 제거해 놓으신 문을 우리가 여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이미 하늘나라 대문의 자물쇠를 제거하셨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 문은 그냥 닫힌 채로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해도,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랫동안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기도는 이미 주신 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믿음’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2-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이 말씀들이 ‘초능력’을 주겠다는 약속도 아니고,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주겠다는 약속도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말씀들 때문에 ‘기도’가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내가 바라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 같은 거창한 일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들처럼 건강하게, 또 쪼들리지 않고, 근심 걱정 없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를 바랄 뿐인데, 그것도 안 들어 주시나?” 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내 기도의 지향이 잘못되었나?” 라고 걱정하기도 하고,
“나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는가?” 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1) 지향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그저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건강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라는 그 말을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소망 자체는 별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혹시 그 소망이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속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또는 남들이 고난과 시련을 겪든지 말든지
자기 혼자서만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내가 바라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것은 아닌가?
앞으로 나아갈 마음 없이, 그저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런 소망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은 있는가?
계획이 있더라도, 그 일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일인가?
자기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한 일인가?

2) 믿음
믿기만 하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고
정말로 믿음만으로(생각만으로) 산을 옮기려고 시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실제로 산을 옮겨야 할 사정이 생긴다면, 중장비를 동원하면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바치는 기도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고,
일상적인 작은 소원들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정말로 ‘믿음으로’ 기도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하면 되겠지...”, “또는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 같은
막연한 기대감은, 또는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지면 어쩔 수 없고...”,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말고...” 같은 생각은 믿음도 아니고,
그런 생각으로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작은 소원을 빌더라도,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선 것과 같은,
글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간절함, 또는 절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3) 많은 경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 눈에 안 보이고,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것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바라는 것보다 더 크고 풍성한 은총을
하느님께서 이미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해야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

-이종훈신부-


우리 하느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돈을 넣으면 원하는 것을 내어주는 자판기처럼 열심히 기도한 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 너머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계신 분도 아니다. 그분은 세상과 나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당신의 방식으로 관여하신다. 당신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을 구하셨다(창세 18,20-21).

 

나는 흙으로 만들어져서 본성적으로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성과와 성공을 추구한다. 거기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성장과정에서 입은 내면의 상처들로 왜곡된 마음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정말 어려워한다. 그래서 기도는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지 팔을 뻗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봐야 팔만 아프다. 몸은 땅에 붙들려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마음은 하늘을 향하고 거기에 머무르려는 노력이 기도다.

 

우주를 여행하려면 엄청난 힘이 있어야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땅의 존재가 그의 영혼을 하늘로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나? 그래서 기도는 숨을 쉬듯, 아침에 양치질을 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연히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이 부담스럽지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 땅에서는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사람은 기도해야 한다. 숨 쉬듯 기도해야 한다. 빵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 붙잡혀 있는 마음을 하늘에 올려놓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알고 믿는다, 우리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신다고. 그러니 그런 것들을 말하면 입만 아프고 시간과 정력 낭비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을 청함은 그분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 잊지 않기 위함이다. 오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오롯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이 알아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는 것이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게 돈이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마련이며, 정권이 바뀌어도 국민들 삶은 거기서 거기,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이념은 없다. 그렇다고 마치 달관한 듯 세상일을 외면하는 비겁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깊은 상처를 입으셨다. 그 상처로 구원의 길이 열렸다. 소돔은 한 사람의 의인이 없어 멸망했지만 오늘 세상은 한 사람의 의인 때문에 멸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늘로 쉽게 오른다.

 

예수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매일 매 순간 기도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땅의 속성을 지닌 이 몸은 눈에 보이는 것만 찾습니다. 저의 영혼을 언제나 하늘을 향해 활짝 열어 놓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늘 길을 보여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기도의 본질적 의미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기도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들었다. 주님을 올바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기도도 잘 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독서: 창세 18,20: 아브라함의 기도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 야훼와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도시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악을 편들어 변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50명에서 10) 그 도시에 있을 수 있는죄 없는 사람들의 선으로 그 악을 상쇄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32)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예레 5,1). 예제키엘 예언서에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단 한명을 요구하고 있다(에제 22,30). 만일에 아브라함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제시하였다고 해도 하느님은 허락하셨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의 역할은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1독서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 기도의 힘은 우리 인간의 관심과 한계를 훨씬 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그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 대해 거리낌 없이 표현되는 듯한 기도의 대담성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신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기도자는 진정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루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떤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1).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부성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는 아빠라고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태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 즉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출 것을 가르쳐주신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권위주의와 엄격함으로 변모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아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다운 태도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주시고 계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마태 18,3)하는 의지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에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매일의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으신다. 영적이면서 육적인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기도가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도는 자기 소외와 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이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항상 새로운 은총과 힘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매일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실현시키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자유로운 마음과 자녀다운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모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루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을 주님께 청하자.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루카 11, 2)

-한상우신부-



오늘도
주님의 기도로
새 날을
시작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불리움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기도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주님의 기도로
우리는 기도의
자녀들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기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살게하는 기쁨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주일 미사의 말씀들은 "기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루카 11,1)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 동안 끊임없이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며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했듯이 그들도 스승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사 청합니다. 사실 기도는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따라오도록 재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급할 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무언가를 졸라대는 기도는 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이고 "시간 보냄"이고 "사랑의 일치"인 기도는 무엇보다 '하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기도를 배우고 싶어하는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얼마나 대견스럽고 기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통치),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에서 지켜줌."(루카 11,2-4) 이 지향들은 눈물의 골짜기로 지칭되는 이 세상 순례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와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맺어 줄 필요충분조건들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두 벗 사이에 일어날 법한 일을 비유로, 얼마나 적극적으로, 겸손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포기하지 말고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

이런 기도 자세의 모범은 제1독서의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이 있는 힘을 다해 간청하는 대목이지요.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창세 18,25) 혹시 그 도시에 의인들이 있다면 죄인들과 똑같이 죽이시는 일은 공정과 자비의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다고 감히 전제하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신관, 하느님 인식이 매우 건강하고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알고 있기에, 두렵고 외람됨을 알지만 한껏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반복해서 졸라댑니다. 그의 청은 조건문 형식의 질문이지만 간절함이 뚝뚝 묻어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집요하고 끈질긴 청원을 주제 넘다고 보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 주십니다. 한 마디도 흘려내시지 않고 일일이 답을 주시면서요. 겸손하신 하느님! 아브라함보다 더 그들을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는 하느님께 이 '밀당'(?)은 징벌 앞에서 주저하며 용서와 철회의 기회를 찾는 하느님의 최종 유예의 시간이 될 겁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라고 못박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악하고 부족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걸 주려는 게 아버지의 본능인데, 하늘의 아버지는 어련하시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언급하십니다. 성령! 기도의 핵심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사도 바오로는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주체가 성령이심을 밝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온갖 욕망과 이기심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인간 실존은 기도를 한다면서 종종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 요구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안 들어 주신다고 분노하고 신앙을 놓고 거래를 하려고도 하지요. 아직 그가 자기 내면에 계신 성령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고 성령의 움직임에 귀를 막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을 잘 아십니다. 또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베풀어 주실지도 아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아버지가 제대로 통교하고 일치하도록 가교 역할을 해 주십니다. 우리의 숨은 바람까지 아시기에, 모든 바람을 아버지의 바람과 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기도가 무르익고 진보하면 주님께 구체적으로 세세히 청하기보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하시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게 곧 내게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것이며, 아버지께서도 원하시는 바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물과 성령으로 받은 세례를 통해 옛 인간이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신분을 이야기합니다. 세례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우리와 아버지의 관계성의 증거이며 표지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를 아버지와 연결해 주시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콜로 2,13) 이는 아버지께 바치신 예수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앞에 두고 바쳤던 간절한 청원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와 죽음의 세례를 통해 완성하셨고,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말씀의 핵심은 복음 환호송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복음 환호송)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잘 아시고 청하도록 떠올려 주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사심없이, 기탄없이, 중단없이 청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을 청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영성체송) 결국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귀결되어갈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회상하며 감사하고, 찬미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기도는 결국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멘.

주실 것을 믿지 말고 인자하심을 믿어라.

-김찬선신부-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아무래도 청원기도인 것 같습니다.
독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청하는 내용이고,
복음은 청원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생각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청하지 않기 때문에 청하라는 말씀처럼 들리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늘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청하지 않는 자들아 청하여라.’는 말씀일 수도 있지만
오늘 제게는 매우 인자한 초대로 들립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청하여라.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청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청하여라. 이런 뜻으로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인간들에게 청할 때에는 청해도 되는지 많이 망설이고,
거절당할까봐 많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청하기 때문이고,
많이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결국 청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는 자비를 의심하지 말고 안심하고 청하고,
의붓자식처럼 눈치 보며 청하지 말고 마음 놓고 청하라는 말씀이지요.

하느님께서 기분 나빠하신다면 자꾸 청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청하지 않는 것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가 당신 자비를 믿지 못하는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주실 것을 믿기보다 인자하심을 믿으라고.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