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 13,24-30)
Let them grow together until harvest;
then at harvest time I will say to the harvest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자, 그들은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시며 가라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법규를 일러 주자 온 백성은 한 목소리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답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기념 기둥을 세운 뒤 피까지 뿌리며 주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주님의 말씀을 어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하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비유 말씀을 듣다 보면 조금 어색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유하시는데, 사실 비유 안에서 하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밀을 거두어서 모아 놓는 곳간과 연결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유하셨을까요? 그것은 좋은 씨를 뿌리는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장소를 의미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면 어디나 하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존재가 하느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기적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자체로 하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 당신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을 뜻하고(마태 4,7 참조),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은 당신 자신이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며(마태 11,12 참조), 하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다는 것은 종말 때 당신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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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햇살이 비추는 양지바른 곳의 담벼락에 기대어서 어떤 놀이를 할지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너무 추운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담벼락이 너무나도 따뜻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한참동안 담벼락에 기대서 햇볕을 쬐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생산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쓸모없는 시간을 보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생산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지금도 그 날을 떠올리면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순간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생산적인 일을 해야 순간을 잘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만 오히려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얻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에 반해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게 되면, 따뜻한 사랑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순간을 잘 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세상의 생산적인 일을 ‘지금’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생산적인 일인 사랑을 ‘지금’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의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인 가라지의 비유 말씀에서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원수에 의해서 좋은 밀과 함께 쓸모없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지요. 종들은 집주인에게 이 몹쓸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좋은 밀까지 함께 뽑힐지도 모른다면서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죄는 나쁜 것이라면서 곧바로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신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세상에서 남아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장 뽑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집주인처럼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더욱 더 사랑을 실천하는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을 가장 잘 사는 방법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지 벌써 4년째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살고 있는 지금, 성지곳곳을 기억에 남기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이곳에서 생활할 때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경관이나 장소가 소중한 기억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순간의 경험이 미래의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을 제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이 자리 잡으면서 현재를 소홀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현재가 소중한 과거를 만들고 이로 인해 미래가 희망의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법
-전삼용신부-
김지은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와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시골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녀는 보다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 3년간 파출부와 도시락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도 불안을 느껴 미얀마로 피신했지만 또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의사가 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죽는 수밖에 ...’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 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장동료들은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는 국회청원을 내서 지방 한의대 편입학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입니다.
주님의 씨는 밀이고 사탄이 뿌린 씨는 가라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 구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사랑과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너무 좋아서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면 그건 집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옥 간다고 지옥까지 쫓아가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집착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자아의 집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잃더라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김지은 원장은 자살하려고 할 때까지가 가라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내려놓자 밀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다른 본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고 돈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장애가 되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면 굳이 가난을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일부러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랩퍼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도끼는 돈이 엄청 많습니다. 한 달에 수천 만원하는 백 평이 넘는 초호화 호텔 방에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명품 옷, 장신구, 운동화들을 갖춰놓고 살아갑니다. 고양이 방이 보통 집 안방보다 큽니다. 차고엔 초고가 외제차들이 즐비합니다. 진열장엔 5만 원짜리 돈다발이 수북이 놓여있습니다. 매달 한 뭉치씩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는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2년 간 기획사 옥상 컨테이너에 살며 랩을 배울 땐 단 돈 5백 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때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술, 담배, 커피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뒤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그가 돈 버는 것이 돈에 집착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이 없어도 잘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은 사랑하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가라지는 집착의 본성이고 밀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람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지, 집착하는지 살펴야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끝이 좋아야
-반영억신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24-30: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이다. 영혼 깊이 좋은 것이 뿌려진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이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나태한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있지 못하는 그때에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고 말씀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에, 즉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 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자.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 30)
-한상우신부-
가라지도 밀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가라지가 있기에
밀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밀과
가라지의 빠른
시간입니다.
가라지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주님의
가라지입니다.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가라지를 통해
삶의 교훈을
얻게됩니다.
가라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밀을 잘
키워 나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안에서
제 자신의
가라지를
봉헌합니다.
가라지를
만나게하시는
가라지와 함께
살게하시는
주님의 넉넉하신
사랑이십니다.
가라지를 통해
밀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됩니다.
우리 삶안에는
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욕심의 가라지가
겸손과 은총의
가라지로 익어가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요즈음 우리가 듣고있는 마태복음 13장 내용의 절반 가까이가 "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어제까지의 비유와는 양상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씨"가 또 등장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우리는 보통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장소적 개념이 아닌 자기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비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좋은" 씨를 성심껏 고르고 골라 "자기 밭"에 뿌리는 분이 하늘 나라입니다. 그분은 자기 밭(세상)에 좋은 씨(하늘 나라의 자녀들)를 뿌려 하늘 나라를 확장하고 완성하는 분이시고, 그래서 곧 하늘 나라(통치)이십니다.
농사가 잘 되어 풍성한 결실을 바란다면 땅과 날씨와 돌봄의 환경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먼저 좋은 씨앗을 고르는 게 우선일 겁니다. 주인은 자기가 고른 씨앗에 자신이 있습니다. 그만큼 정성을 다해 가장 좋은 씨앗을 골랐고, 또 씨 안에 깃든 잠재적 결실을 이미 보았기에 씨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 나라와 어둠과 악의 세력인 원수 간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겁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29)
밤새 원수가 뿌리고 간 가라지들이 자라자, 종들이 뽑아버리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인이 의연하게 종들을 만류합니다. 그 만류에는 행여 밀 한 줄기라도 해칠까 하는 염려와, 아무리 가라지가 무성해도 자신의 밀은 안전하리라는 대범한 믿음이 자리한 것 같습니다. 주인이 가지는 이런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분은 아무리 가라지가 많아도 자신이 정성들여 골라 뿌린 좋은 씨앗들이 가라지가 되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좋은 씨로 비유된 하늘 나라의 자녀들은 주인의 이런 신뢰와 사랑을 먹고 쑥쑥 자라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영광(탈출 19,16-25 참조)을 목격한 그들이기에 지금 못 할 맹세가 없을 겁니다. 아니, 그보다 더 한 것이 요구되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태세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 차례에 걸쳐 선언한 이 비장하고 확고한 고백은, 그러나 곧 무너질 것입니다. 성경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 겨레 가운데에서 군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탓으로 다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십 년 동안 광야를 걸었다."(여호 5,6)고 밝힙니다. 지금 이토록 굳세게 주님께 맹세한 이들은 스스로 맺은 주님과의 사랑의 계약을 지키지 못한 탓에 결국 광야에서 스러져갈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지금 당신 앞에 서서 '주님 말씀을 실행하고 지키겠다'고 진심을 다해 응답하는, 한치 앞도 모르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믿어 주셨기에 계약이 성립됩니다.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느님은 원수의 유혹으로 흔들리기 일쑤인 인간의 실존을 감안하시면서, 본래의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당신 닮은 모상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거기서 이미 열매를 보시기에 신뢰하고 믿어 주십니다.
가라지들을 "수확 때까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마태 13,30)는 주인의 인내와 유예 덕에 이스라엘 자손은 온갖 우상숭배와 불신, 불평, 원망, 반역의 행태로 하느님의 마음을 쓰리게 하면서도 광야에서 사십 년을 이어갑니다. 또 그 세대가 사라진 뒤 약속의 땅을 기반으로 이어진 이스라엘의 긴 역사가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어도 주인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시지요.
가라지들에 휩쓸리지 않는 좋은 씨앗을 믿는 마음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를 넘어 온 인류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수확 때까지 뽑아 없애버리지 않는 주인의 신중하고 인내로운 믿음은 세상 끝날,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순간까지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글자색 하느님께서 우리 안의 가라지들, 즉 약함과 죄악을 뿌리뽑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것은, 좋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들이 하나라도 손상될까 염려하는 마음과, 원수가 놓는 어떤 어두움의 덫도 우리가 받은 은총을 축소, 왜곡, 변질시킬 수 없다는 자신만만한 여유 덕분입니다. 그 염려와 여유의 뿌리에는 당신 친히 선택하신 우리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자리하지요. 그분은 현재의 우리 안에 담긴 다가올 완성의 온전한 아름다움도 보시니까요.
그런 하느님의 시선에 포개어 자신을 바라본다면, 자기의 못마땅하고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하느님과 함께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을 겁니다. "가라지"보다 "좋은 밀", 어두움보다 은총의 선물을 더 바라보고, 하느님이 어련히 알아서 선택하신 자신을 더 믿어 주면 좋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 안에 행여라도 있는 가라지들은 원래 하느님이 심어놓은 좋은 씨가 아니랍니다. 그건 원수가 심어놓은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가라지들을 다 없애 주실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좀 귀찮아도 그냥 데리고 삽시다요! 그래도 여전히 벗님은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닮았습니다! 아름다운 벗님을 축복합니다.

힘자랑을 말라!
-김찬선신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상의 악과 관련한 거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은 좋으신 분, 선이신 분이신데 왜, 어떻게 세상에 악이 있는지,
세상의 악과 공동체의 악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비유는 먼저 세상의 악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얘기하는데 하느님께서
당신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함으로써
악이나 악한 사람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도, 창조하신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러면 ‘원수란 누구인가?’입니다.
우리의 교리는 하느님과 같은 급의 다른 신은 없고 그래서 악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악신이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 비유의 원수도 악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이며,
선으로 창조했건만 하느님의 선한 창조의지와 달리 악하게 된 존재입니다.
이 원수 중에는 타락한 천사인 악령도 있지만 인간도 있으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하느님의 뜻이나 계명을 어기고,
그럼으로써 자기만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하느님께 가는 것도 막음으로써 존재를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복음에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주님께 달려 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뭣 하러 자기에게 왔냐며
자기 영역에서 나갈 것을 요구한 악령이 바로 이런 존재의 대표이지요.
그러니 원수란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하도록 만드신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이런 존재가 된 것이며 악령뿐 아니라 악한 인간도 원수로서
개인과 공동체를 파고하는 존재가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게 마련인데
문제는 이런 파괴자 원수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내 손으로 끝장내고 내 힘으로 뭘 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로 악과 악한 존재를 내가 어떻게 하려하기도 하지만
나와 다르거나 반대되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까지 다 원수라고 하며
내 힘으로 제거하거나 배제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선악과 상관없이 그러니까 악을 제거하겠다는 그런 것도 아닌데도
한 번 힘을 행사하고픈 힘의 본능이랄까 나쁜 본능이 있습니다.
장난삼아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데 개구리는 그것으로 죽을 수도 있지요.
조무래기 깡패들이 아무 이권다툼도 없는 지나가는 사람을 괜히 괴롭히고,
요즘 어린아이들은 힘없는 사람을 골라 왕따시키며 집단 괴롭힘을 하는데
다 자기 힘 또는 자기들의 힘을 이렇게 행사하고픈 힘의 본능의 발로입니다.
이런 힘의 본능이나 힘자랑이 실은 능력의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며 하느님만이 행사해야 할 권능을 인간이 행사하려는 것이며
가라지를 자기가 제거하려는 것도 이런 거라고 오늘 비유는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신 분이고 그 힘을
선하게 사용하시고 창조적이고 건설적으로 곧 사랑으로 사용하십니다.
지혜서 11장 22-25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든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 당신 팔의 힘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유보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힘인 사랑, 은총을 입기 위해 우리는
은총이 내게 내려오시도록 낮은 곳에 위치해야 하고, 힘의 사용의지와
반대인 되어지는 대로 되려는 영적 수동태 의지를 가져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3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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