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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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마태오 13,47-53)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net thrown into the sea,
which collects fish of every kind.
When it is full they haul it ashore
and sit down to put what is good into buckets.
What is bad they throw awa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증언판을 가져다 궤 안에 놓자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 비유하시며, 세상 종말에는 악한 자들을 가려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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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세운 성막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증언판을 궤 안에 모신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지입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건너갈 때 움직이는 성소였습니다. 이 성막이 세워진 뒤,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천막을 덮으시고 당신 영광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히브리인들이 볼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큰 위로의 동기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지만, 여기에서는 당신과 대화를 허락하시는 개인적인 현존을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에 현존하시기를 바라십니다.구약 성경에서 성막은 만남과 안전의 장소, 다른 천막과 거처, 곧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실 주님 말씀의 천막에 대한 예고이며 전조입니다. 처음에 이 거처는 동정 마리아였습니다. 주님 탄생 때에 성령의 구름이 그를 덮었고 주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습니다(루카 1,35 참조). 이제 땅 위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참된 거처는 예수님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든 지체가 모두 좋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좋은 이들과 악한 이들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좋은 이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이들은 가려내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태한 삶과 그릇된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배가 나오면 사람들이 나를 게으른 사람으로 볼 것 아냐?”
배 나온 사람이 게으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저만의 문제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배가 나온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또 어떤 분은 차가 낡아서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 같다며 차를 바꾼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자신의 생각일 뿐이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떤 모임에 갔다가 글쎄 바짓가랑이가 터지는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모임이 끝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모임 내내 바짓가랑이에 온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나서 친한 분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그분께서는 깜짝 놀라면서 “계속 신부님 곁에 있었는데도 저는 몰랐어요.”라고 하십니다. 하긴 누가 저만 바라보고 있겠습니까? 아마도 바로 옆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에만 신경 쓰면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가 아닙니다. 이는 관객들 앞에서 굳이 연기하는 배우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진짜의 나로 사는 비결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시지요. 그물 안에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처럼, 의인은 하늘 나라로 악인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과연 누가 할까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며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판단은 오로지 한 분 바로 주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면서 사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전혀 내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가장 중요한 판단을 하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주실 주님께 잘 보여야 하고, 그래서 의인으로 뽑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 보이는 방법은 살을 빼고 멋진 차를 타는 등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삶만이 가장 잘 보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몇 년이 걸려야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친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친해졌는지를 떠올려보십시오. 바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 때였습니다. 즉,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우정이 샘솟는다.
많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상대방과 나의 차이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공통점을 찾도록 노력하고 칭찬과 지지 그리고 응원을 계속적으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이는 주님과도 마찬가지이지요. 주님의 뜻에 동조하고 따르게 될 때 주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절대 아닙니다!
-양승국신부-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영억신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도 심겨져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봉환신부-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세운 성막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증언판을 궤 안에 모신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지입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건너갈 때 움직이는 성소였습니다.
이 성막이 세워진 뒤,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천막을 덮으시고 당신 영광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히브리인들이 볼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큰 위로의 동기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지만, 여기에서는 당신과 대화를 허락하시는
개인적인 현존을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에 현존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막은 만남과 안전의 장소, 다른 천막과 거처, 곧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실 주님 말씀의 천막에 대한 예고이며 전조입니다.
처음에 이 거처는 동정 마리아였습니다. 주님 탄생 때에 성령의 구름이 그를 덮었고
주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습니다(루카 1,35 참조).
이제 땅 위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참된 거처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든 지체가 모두 좋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좋은 이들과 악한 이들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좋은 이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이들은 가려내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태한 삶과 그릇된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껄끄러운 성인
-이종훈신부-
오늘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창립자 알폰소 성인 대축일이다.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성인의 삶을 따르려고 하면 그 때부터 마음은 불편해진다. 그러니 성인과 함께 살았던 형제들은 얼마나 더 했을까? 성인은 한 마디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성인은 요즘 말로 잘나가는 청년이었다. 높은 귀족집안은 아니었지만 귀족이었고, 그 당시 가장 좋은 직업이었던 변호사였으며 딱 한 번 패소했는데 그 소송이 그의 마지막 변호사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분이 세속적이었다는 생각은 말아야한다. 성인은 변호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고, 그의 신앙은 공정하고 충실한 변호로 표현되었다. 변호사 십계명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쉬는 날에는 봉사활동, 특히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불치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사제가 된 이후에는 사제의 십계명을 만들었다.
성인에게는 두 번의 중대한 회심,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하나는 가장 공정해야 할 법조인들의 부패한 현실의 피해자가 되면서 법조계를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 이후 사제가 되어 열심히 일하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산골의 양치기들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고 가장 버림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 그 두 번째 하느님과의 만남이었다. 성인은 부패한 세상을 떠났지만 목자가 되어 다시 그 세상으로 돌아왔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던 변호사가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였다.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하지만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 가장 작은이들이 그 복음을 들어야했다. 주님의 그 마음을 알았을까, 성인은 그 일을 위해서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회를 사랑했다. 주교가 돼달라는 교황의 부탁도 고사하고 그 편지를 쓰느라고 시간을 낭비했다고 불평할 정도로 성인은 수도회를 떠나기 싫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교황의 부탁에 결국 주교가 되었다. 그의 주교서품식은 지금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주교서품을 축하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던 비서신부는 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우리 주위에 가난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가난한 이웃들이 있는데, 그대는 여기서 우리들이 잔치를 벌이기를 바란단 말인가!” 짚으로 만든 침대와 주전자 뚜껑으로 만든 주교반지가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주교는 직위가 아닌 목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가 그 교구에서 어떻게 사목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변호사였을 때나, 사제가 되고 수도회를 세웠을 때 그리고 주교가 되었을 때나 성인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선포의 내용이며 성인이 사는 이유이고 목적이었다. 그래서 성인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특히 가장 작은이들을 사랑했다, 예수님처럼. 성인은 충실하게 살았다. 너무 철저하게 살아 세심증 환자가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성인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행복했을 것이고, 수도회 형제들은 좋으면서도 불편했을 것이다. 주교서품 청원을 거절하는 편지 쓰는 시간조차 아까워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창립자를 기억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이 불편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강한 자극제가 된다.
구속자이신 예수님, 주님이 사랑하셨던 알폰소 성인을 기억합니다. 그는 주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갔고, 오늘 저희도 그를 따라 주님의 그 일을 이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알폰소 성인이 어머니를 만날 수도 있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언제나 그와 함께 계시면서 하셨던 것처럼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47-53: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으며, 온갖 고기가 들어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그물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졌다. 파도는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이 그물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을 그물처럼 모아들이셨다. 그리고 그 그물은 물속에 사는 온갖 고기들을 모아 물 밖으로 끌어내듯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참 빛이신 주님 안에 데려다 놓는다. 빛 속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심판에서 빈틈없는 심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교회는 그물에 비유된다. 교회가 어부에게 맡겨졌고, 모든 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물속에서 그물에 담겨 영원한 나라로 끌어 올려진다. 이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다. 모든 사람을 죄의 용서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 그물은 마지막 때, 모든 인류를 모아들일 때, 가득차고,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고 물가에 앉는다. 현세를 바다라고 하면 물가는 현세의 종말이고 심판의 장이다.
이 그물은 종말까지 모든 물고기를 모아들일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천사들이 모든 것을 끌어올려 놓고, 의인과 악인을 가를 것이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살피는 사람들은 그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 현세의 종말에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담기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48절) 버려진다. 그물에 모아들여져 물가에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밖”은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라고 하신 불구덩이를 말한다. 또한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3)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하늘 나라의 기쁨에 관한 새로운 것을 꺼내올 줄 알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으로써 그것들을 꺼내 오는 것이다. 마음의 곳간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신의 직무에서 그것들을 꺼내온다. 그가 꺼내오는 옛것들은 새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 47)
-한상우신부-
구속주회를
창설한
알폰소 성인의
축일입니다.
성 알폰소는
구속의 기쁨을
온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실패 없는
구속의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가 향해야 할 곳은
언제나 낮아지는
복음의 육화입니다.
삶을 잡아 올리시는
주님께서는
실패와 좌절까지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끌어올리십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들을 드디어
알게됩니다.
자아에서
빠져나온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나누어줍니다.
분리될 수 없는
가난한 이웃들의
기쁜소식입니다.
성 알폰소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대적 징표를
읽을 것을 요청합니다.
굴곡진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사랑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길은
우리가 먼저
구속의 기쁨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 알폰소와
구속주회 모든 성인들과
복자들이여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오상선신부-
8월 첫날입니다. 8월의 무더위도 말씀묵상과 함께 시원하게 물리치시길 빕니다.
오늘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마무리하십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하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그런데 특정 종류의 고기 떼를 겨냥하지 않고 무작위로 친 그물이기에 온갖 고기가 다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하늘 나라를 빗댄 도구라면 애초에 고기를 잡을 때부터 좋은 것들만 골라서 낚시하듯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물이다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좋은 것, 나쁜 것 구별 없이 다 끌어모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이 상태는 "아직" 완성이 아닐 겁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와 있는 하늘 나라이지만, "아직" 완성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그러니 잡힌 고기의 종류와 상태, 쓸모에 따라 선별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좋은 것, 나쁜 것이라 표현했지만, 합당한지, 적합한지, 유용한지, 건강한지 등 그 기준은 어부들이 가장 잘 알겠지요. 바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마태 13,49)
의인과 악인을 가리는 이 선별 작업은 신중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어쩌면 악인들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깨닫고 자청해 "밖"에 자리잡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의적으로 악을 고수해온 이라면 하늘 나라에 모인 의인들의 무리가 낯설고 시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같이 살 생각을 하면 지루하고 따분하고 역겹기까지 할 테니까요. 또 하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애시당초 없었기에 꼭 의인들 무리에 들겠다는 욕심도 없을 겁니다. 그들을 선별하는 천사들에게는 좋고 나쁜 기준이 선명하지만, 이미 그들은 좋고 나쁨의 기준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이들이니까요. 지상 삶을 살아온 모습과 방식대로 안이든 밖이든 비슷한 무리 곁, 제 자리를 찾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50)
악인들이 던져진 곳이 불구덩이라서 울며 이를 가는 건지, 그곳이 어디건 그들이 울며 이를 갈기에 불구덩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 종말에 하늘 나라에서 제외된 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늘 나라가 아니라서 불행하고, 불행해서 하늘 나라가 아닌 겁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마치시고서 예수님께서는 덧붙이십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율법 학자라면 옛 계약과 그 규정에 정통한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 복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더 바랄 것 없는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옛 계약이든 새 계약이든 그 안에 관통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옛것과 새것,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기에 그의 안에서 진정한 통합을 이루었고, 제 지혜의 곳간에서 자유자제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끄집어내어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를 디딤돌 삼아 "아직"을 향해 발돋움하며 예수님의 비유들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는 만남의 천막, 성막의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 현존하십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탈출 40,16)
하느님께서 백성들 안으로 들어오시는 일은 모두 모세의 철저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비슷한 표현이 19절, 21절에도 반복되는 걸 보면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려는 주님의 의지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또 그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겸손과 순종이 요구되는지 알겠습니다.
"그 모든 여정 중에..."(탈출 40,36.38)
두 차례나 반복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충실성, 변함없는 현존을 보여줍니다. 긴 광야 여정 동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 자손을 동반하고, 그들은 앞길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 채 구름의 움직임을 신호 삼아 머무르고 나아갑니다. 이처럼 한덩어리가 되어 동행하는 건 서로 믿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광야길은 상호적 충실함과 신뢰를 요구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만남의 장막이 아니라 "성체로, 말씀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주시하며 머무르고 나아가는 사이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뜨락, 하느님 집"(화답송)에 가 닿을 것입니다. 우리를 신뢰하시는 그분께서 충실하시니, 우리도 겸손과 순종으로 따릅시다. 하늘 나라는 장소나 제도를 넘어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곳입니다. 오늘도 벗님이 머무는 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써 하늘 나라를 만끽하시길 축원합니다.

구름속의 하느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715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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