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2일 토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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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2,11-18)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uni," which means Teacher.
알렉산더 이바노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가의 신부는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니다가 야경꾼을 지나치자마자 그를 찾았다고 말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자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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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리아 막달레나는 갈릴래아의 부유한 고을 막달라 출신 여인이었습니다. 막달레나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로, 전승은 그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주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여인으로 사도들에게 부활을 증언해 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주님의 죽음을 목격한 뒤 숨어 있었을 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주님의 무덤으로 나아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1독서 아가가 노래하듯이 막달레나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지 못하고 슬피 우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슬픔이 앞을 가렸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완전히 변화된 몸이었기 때문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리아를 사랑스럽게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그분이 자신 앞에 서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립니다.
여인이 처음 부활을 목격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에 약점이 됩니다. 남자 둘 이상의 증언만 인정되던 유다 사회에서 여인의 증언은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여인이 부활을 처음 목격하였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복음서 속에 마리아의 증언을 담아 두고 있습니다.
마리아에 이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합니다.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증언되기 시작합니다. 목숨을 걸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말보다 힘이 있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따라서 제대 위에 봉헌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봉헌의 마음으로 사제와 함께 미사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향이 불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와서 기분 좋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미사 지향에 적혀 있는 이름을 잘못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과를 하면서 봉헌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영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더군요. 봉헌한 것으로 충분해야 하는데, 그 이상을 생각하기에 봉헌 자체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찍은 사진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을 때에는 어쩔 수없이 지우게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초점을 제대로 맞추는 것입니다. 즉, 내가 찍고 싶은 곳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춰야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데, 부수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요.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듭니다.
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이었는데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리아의 초점은 예수님께 맞춰져 있지 않고, ‘죽음’에 맞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엉뚱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로 세속적인 것들은 크고 화려해서 내 눈에 확 띄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지만, 그 곳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내 눈을 가득 채우고 그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적극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을 우리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으로부터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초봉헌대에서 자신의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불이 붙어있는 옆의 초에 심지를 대려는 순간 어떤 자매님께서 “왜 남의 초를 만지시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제 초에 불을 옮겨 붙이려는 것인데 안 되나요?”
그러자 단호하게 “안돼요. 그러지 마세요.”라는 것입니다.
봉헌한 것으로 충분한데,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봉헌한 자신의 초에 심지조차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신이 봉헌한 초를 건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봉헌하고서도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과연 이런 봉헌을 기쁘게 받아들이실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최고를 기대해야 한다
-전삼용신부-
말 조련사 아버지를 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설계해 보라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이 다음에 1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7장의 종이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꼼꼼하게 작성하여 다음날 선생님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의 숙제에 빨갛게 x표를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와 너의 아버지는 지금 너무 가난하단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니? 좀 더 현실적인 계획표를 작성해 오면 그때 다시 점수를 주겠다.”
하지만 소년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x를 주세요. 저는 점수와 제 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소년은 그의 꿈대로 100만평의 목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0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목장의 규모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장 주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보게! 나를 기억하겠나? 30년 전 자네의 100만평 꿈에 x표를 했던 선생이라네. 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꿈에 x표시를 한 꿈 도둑이네, 꿈 도둑! 아, 그런데 자네만이 나에게 꿈을 도둑맞지 않았구먼.”
제가 강의하다가 천국에도 서열이 있다고 했더니 어떤 분들은 그것을 꽤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기는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엔 하늘나라에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존재하려면 가장 큰 사람도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서열’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하늘에서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9)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는데 자꾸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더 높은 꿈을 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더 높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만큼 그 스승은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가장 높은 영성의 단계에까지 오른 여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마리아를 만나주신 데에는 그만큼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장면과 다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이 하나의 정원인 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처럼 사는 이들을 당신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나게 하여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창세기의 아담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이들은 아담의 하와가 되어 아담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여기서는 “마리아!”란 이름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라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스승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처럼 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 자신처럼 성장시키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고 하십니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같은 하느님이시다.”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큰 죄인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라뿌니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조던 피터슨은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성장할 무렵 자신의 동네에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당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아 자신보다 더 잘나고 운동과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도시의 대학에 나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 되었습니다. 현재 시골 친구들은 술과 세상사에 짓눌려 자신도 못 알아볼 만큼 완전 몸과 마음이 피폐한 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큼 나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보며 “너는 하느님이야!”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꿈을 주러 오신 참 스승이십니다. 가장 높은 것을 기대하는 스승이시기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분에게서 배워 사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스승이 됩시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장 높은 이상을 바라시는 참 라뿌니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손길에 내 영혼에 닿는 순간 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시름시름 앓고 있던 병이 깊어져, 회복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삶이 참 막막할 때가 있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한창 꽃피어 날 나이에 맨날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를 하다보니,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세상이 너무 싫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온통 짙은 회색빛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계절은 늘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니 매사에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지나가는 아무 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도 마음이 크게 상하고 가라 앉았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인자하신 한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측은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에 제게 건네시는 몇 마디에, 그간의 고통과 서러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오래 세월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몸과 마음은 늘 함께 갑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너무 비관적으로도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좋겠습니다. 병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꼭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자상한 눈길, 따뜻한 음성이 제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순간, 저는 길고 지루한 병으로부터의 치유가 시작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 제자 중의 제자이자 여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복음서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일곱 마리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마리 마귀’란 표현 만으로도 그녀의 병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한 마리 마귀 대적하기도 힘든데, 오랜 세월 동안 일곱 마리 마귀와 대적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심신을 이끌고 하루 하루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아마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생깁니다. 은혜롭게도 그녀는 삶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깊은 병고로 인해 언제 어딜 가든지 외톨이였고 천덕꾸러기였던 그녀였습니다. 끔찍한 그녀의 모습에 다들 외면하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분으로부터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측은지심 가득한 눈길, 더할 나위없이 부드러운 음성,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영혼과 육체에 닿는 순간, 혹독한 겨울은 즉시 물러가고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야,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네가 겪은 고생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제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시작이다.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하자!”
예수님의 따스한 눈빛은 깊은 구렁 어둠 속에 앉아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밝은 빛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그분의 음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몰골의 마리아를 본래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에 힘입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리 악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녀의 선택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하늘같은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갚아드리는 것...
이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요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과제자단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아우구스티누스 교부께서는 ‘사도들 중의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베풀어졌던 똑같은 방식의 은총과 축복이 반복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가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가 8,2)로 나타나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들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으며(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 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한상우신부-
비온 뒤 더욱
맑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반성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사랑은 부활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막을 수 없습니다.
맑은 사랑이
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한 여인의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에서
부활은 눈물어린
빛이 됩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
부활의 빛입니다.
사랑 안에 참된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서로를 위한
부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생애 전부를
빛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랑할수록
십자가도 무덤도
갈릴래아도 부르심도
첫 시작도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빛나는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예수님 사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축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미사 독서들에서는 사랑하는 님을 찾는 여인들의 애절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로 신랑이신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이고,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찾는 교회의 마음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예수님 생애의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두 순간, 즉 십자가 죽음의 현장과 부활의 첫 목격 순간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를 받았다는 그녀는 일곱이라는 숫자만큼 온갖 악에게 사로잡혀 지독하게 고통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구원자 예수님 향한 그녀의 사랑이 이토록 뜨겁고 충실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 앞에서 그녀가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황급한 전갈에 이미 남성 제자들이 한 차례 왔다가 돌아간 뒤인데도 그녀는 그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을 이성보다 사랑이 알려주기 때문에 그 사랑이 지시하지 않는 한 떠날 수 없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질문하십니다. 마리아의 기쁨과 슬픔이 온전히 당신께 달려 있다는 걸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님의 부재는 이미 겪었던 그분의 죽음과 맞먹는 상실감과 공허에 혼란까지 더해줍니다. 어쩌면 십자가 밑에서보다 지금이 더 아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예수님이 그녀를 부르십니다 육안으로는 못 알아뵈었지만 그녀의 귀가, 그녀의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음성의 크기, 고저, 장단, 깊이, 감촉, 파장, 흐름, 여운까지 딱 그분입니다. 내 이름을 꼭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분뿐이십니다. 그제야 그녀도 "돌아서서"(요한 20,16) 자신이 그분을 부르던 그 음성으로 "라뿌니!"(요한 20,16) 하고 화답합니다.
제1독서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사랑의 노래라 불리는 아가의 한 대목입니다. 짧은 대목인데도 "찾다"라는 동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말에서는 "구하다, 찾아다니다(seek, look for)"는 뜻과 "발견하다(find)"는 뜻을 모두 "찾다"라고 표기하니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밤새도록"(아가 3,1)
"성읍, 거리와 광장마다"(아가 3,2)
"야경꾼"(아가 3,3)
이 말씀들에는 님(연인, 신랑)을 찾아나선 여인(신부)의 다급하고 절절하고 심정을 담겨 있습니다. "밤새도록"은 자기의 깊고 내밀한 온 시간을 다 쏟아 님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성읍, 거리와 광장마다"는 님을 찾기 위해 내적 외적 모든 장소를, 심지어 위험에 노출된 곳까지도 샅샅이 헤매고 다님을, "야경꾼들"은 님의 거취를 알만한 모든 이들, 설령 결과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마저도 입힐 수 있는 관계에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다가갔음을 드러냅니다. 한 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 모든 거칠고 험한 행보의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숨어 계신 님을 향한 애타는 사랑...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 3,3) 여인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녀가 그들에게서 멈추지 않아 천만 다행입니다. 그녀는 야경꾼들을 그분으로 착각하지 않았기에 단호히 지나쳤고, 드디어 사랑하는 님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그분은 영영 숨어 계시지 않고, 영영 그녀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녀는 자기 여정의 원인과 목적을 분명히 아는 여인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지혜를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두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아가의 신부는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찾아나서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을 향한 갈망으로 흠뻑 절여져 다른 무엇에 눈 돌릴 수 없을 때,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일 때, 때때로 엄습하는 주님의 부재에 두려움과 고통 가득한 눈물을 흘릴 때 "○○야!" 하고 부르시는 그분 음성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 포착은 감미롭고 부드러우나 먹잇감을 잡아채는 맹수의 포획 순간처럼 강렬하고 재빠릅니다.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보잘것없는 한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첫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다른 외적 조건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노라 하는 신분과 학식과 재물이 아니라 다만 사랑이 그분을 끌어당기기에 당신 얼굴을 보여주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말하여라, 마리아. 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이는 볼 것이고, 본 이는 말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자신에게만 고여 있다면 홀로만의 낡은 기념품이 될 뿐이지만, 가난한 채로 흘러나와 나눔이 되고 증언이 될 때 세상과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가교가 됩니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순수한 열정을 시작으로 부활을, 부활하신 분을 대면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벗님이 갈망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옴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나는 주님을 만났소!'라고 고백하는 기쁨을 누리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실종된 하느님 찾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158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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