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7. 22. 18:54

2019 7 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6-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자 주님께서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손에 이끌려 바다 가운데 마른땅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모세를 믿고 두려움을 이기며 바닷속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은 결국 주님의 손에 이끌려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큰 권능을 보게 된 이스라엘은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시고,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14절은,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들 역시 새로운 파스카 사건, 곧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체험한 이들로, 주님을 충실히 믿는 이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이는 누구라도 당신의 어머니요, 누이이며, 형제라는, 곧 어머니와 형제의 외연을 크게 넓히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과도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따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제, 자매라는 이름만 별 의미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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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화방송에서의 방송 녹화를 마치고서 오랜만에 동창신부를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저희 둘은 몸보신을 위해 닭백숙을 잘 하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집이고, 어제가 마침 중복(中伏)이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더군요. 아무튼 약간의 기다림 끝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업원들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뚝뚝했고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습니다. 전혀 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장님은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 좋아하겠지만, 직원들은 싫어하는 구나. 이런 모습을 손님들이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제가 더 적극적으로 웃으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음식을 저희 식탁에 놓다가 직원의 손이 제 손에 닿게 되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니까 직원은 “왜 이렇게 깜짝 놀래요?”라면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때 저는 “손이 닿으니 제 가슴이 설레서 놀랐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자 웃지 않던 직원이 크게 웃습니다. 그 뒤로도 “음식이 너무 맛있어요.”, “친절하게 서빙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등등의 말을 계속했지요.

식사 계산을 하고 이 식당을 나서는데 뒤에서 “또 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말을 들은 동창신부가 이야기하더군요.

“이 식당에서는 또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자신이 행한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가 행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을 것만을 떠올립니다. 받는 것에만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미쳤다.”라는 소문이 정말로 맞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반가운 얼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면서 외면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그렇게 야박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즉, 세속적인 인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법칙에 선택의 기준을 둡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우리가 어떻게 끝을 맺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하느냐의 문제이다. 또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의 문제이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책임감

어제는 평화방송국에서 북 콘서트를 했습니다. 월요일 한낮이었고 더군다나 폭염으로 너무나도 더운 상황에서 많이 오시기 힘들겠다 싶었지만,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방송국에 오셔서 자리를 채워주셨습니다. 이번 책을 출판하고서 벌써 세 번째 북 콘서트입니다.

사실 이렇게 북 콘서트를 하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자리 잡습니다. 더군다나 많이 사람이 보고 듣는 방송까지 한다는 것은 더욱 더 큰 부담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제게 주어지는 책임감이 크기 때문이지요.

남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감이 주어집니다. 그 책임감이 부담되어서 남들 앞에 서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자신의 발전이 줄어드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 책임감을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내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감은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곧 내가 성장할 기회 역시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뜻'을 결정하는 '집'

-전삼용신부-


조선 말기 힘든 시절에 조선 땅에서 승승장구한 조선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녀에게 성공하는 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습니다.

      조선 땅에서 당시 가장 성공했던 이완용을 지금 누구도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의 피가 흐르지만 그는 일본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피 안에 흐르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가족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 가족에 흐르는 피가 아니라 그 가족에 흐르는 뜻입니다.

      ‘뜻’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뜻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육체의 뜻을 선택했다면 그 육체로부터 오는 ‘땅’에 갇혀 살아가고, 내가 하늘의 뜻을 택했다면 ‘하늘’에 살게 됩니다. 육체는 지옥의 본성이고 영은 하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살게 되느냐, 사탄의 본성 안에서 살게 되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육체의 욕망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사소한 죄들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도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 순간은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따르는 뜻이 천국과 지옥,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자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순서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적되, 그 일들이 주님의 뜻이기를 기도하며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렇게 적힌 시간표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네 살 된 아들과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들은 버거, 콜라, 튀김 등 맥도날드 대표 음식을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몸 생각을 해서 드레싱을 곁들인 따분한 샐러드를 시켰습니다. 아들이 먹는 것을 보고 입에 군침이 돌아 “아빠가 튀김 하나 먹어도 되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네 살 된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싫어요!”

      아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온 줄 모르는 것일까요? 이런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또 사주고 싶으실까요? 주님의 뜻대로 십일조도 내지 못하고 봉헌을 하더라도 아주 아까운 듯이 하면 하느님도 그런 섭섭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 했던 것보다 더 바쳤습니다.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셨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삼손의 뜻이 아니라 필리스티아인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몸은 삼손과 같이 있었지만 뜻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들릴라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내 안에 머무시려 하시는 하느님의 눈을 뽑고 사탄의 소굴로 집어넣는 행위와 같습니다. 나는 두 뜻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실 때, 성모님은 오히려 칭찬으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당신만큼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뜻’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핏줄을 배신한다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내 뜻만을 따른 이들만 내 나라에 들어와라!”라고 명하실 때,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국가와 사회가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역사와 현실을 떠나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양승국신부-

 

아들 예수님의 근황이 걱정되서 찾아가셨을 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50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으셨을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안그래도 걱정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공생활을 위해 예수님께서 출가하신 후, 어머님의 촉각은 일편단심 예수님께로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척들이 어머님을 찾아와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마리아! 어떡하죠? 아드님이 미쳤나봐요! 기적이며 치유하는 것까지는 다 좋은데...자신을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나? 헤로데며 유다 고관대작들이 들으면 불벼락을 내릴 위험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나? 저러다가 제 명대로 못살겠어요.”

 

너무 걱정되었던 어머님은 친척들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어머님이 먼길을 오셨다는데, 한번 나와보지도 않고 하시는 말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성모님의 생애는 평생토록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신비스롭고 또한 연구대상이었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날카로운 비수, 혹은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늘 씹고 또 곱씹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했습니다.

 

비수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성모님은 씁쓸하고도 허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귀가길에는 그분은 아드님이 던지신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말씀을 화두 삼아 또 다시 깊은 묵상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기나긴 영적 여정을 거친 끝에, 드디어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 그분이 던지시는 말씀에 대해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매일 상처받으면서, 또 고통 당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모님은 나자렛 처녀 시절 지니셨던 겨자씨만한 신앙은, 후에 그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돌아가는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존경하는 문학평론가의 거장 고(故) 황현산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시민으로서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보라 생각합니다. 나는 정치·사회 현실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문인을 경멸합니다.”

 

교수님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실 위에 발을 딛고 서있어야 합니다.

 

성모님 역시 당신께서 처해 계시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위해 매일 지극정성으로 삼시새끼 밥을 지으셨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율법과 관습에 충실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셨습니다.

 

동시에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백성들이 처한 곤경을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족들이 겪는 불행과 불의한 현실 앞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이시고 현실에 뛰어드셨습니다.

 

최근 아베를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슬프게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적들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 언행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의한 현실 앞에, 성모님께서도 분명 분노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국가와 사회가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역사와 현실을 떠나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우리 민족과 백성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울분을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교회가 동족들이 겪고 있는 불의한 현실 앞에 눈을 감아서도 안되겠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얻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부모와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혈연관계를 통하여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자체이신 분과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5,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1-13).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모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남자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지 묵주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관계는 어떤 물질 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실이 하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 어머니를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바리사이들이 이혼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4-6).”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2-24).”
(아담과 하와는 둘이 한 몸이 된 부부가 아니라,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한 몸이다.” 라는 말씀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몸’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부모와 ‘한 몸’이고,
형제자매들도 ‘한 몸’입니다.
가족의 형성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가족이 분열되고 해체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신앙을 이유로 가족이 해체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참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혈육의 가족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혈육의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 더 우위에 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이 무엇으로 결합되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가족은 원래 한 몸이지만,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행함으로써’ 그 결합이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지상에서의 가족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해체되어서
남남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족인데, 하느님 나라에서 해체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그분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그들은 내 형제들이 아니다.” 라고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가족이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또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이들이(제자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은
비유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 복음서의 다른 곳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요한 20,17).
그렇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이고,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목표인데,
지상에서의 가족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서라도 그 나라에 들어가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참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목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고 지상에서의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모두가 함께 하느님과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라고 말씀하셨다. 또 루카복음을 보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들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세속의 걸림돌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그들’을 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버리기 위해서
가족이 함께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혼자서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가족을 버리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가족들은 연옥이나 지옥에 있는데,
혼자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면, 그게 행복인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가족이든지 이미 죽어서 저승에 간 가족이든지 간에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신앙인의 기도와 노력 덕분에 가족에게 구원의 은총이 내릴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신앙 공동체와 가족 공동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면서 식구들을 버리거나 멀리하면 행복할까?
식구들이 신앙을 갖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들을 적으로 삼아야 하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정생활의 목표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해서 말하면, 살아서는 성가정을 이루고,
저쪽 세상에 가서는 가족이 함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2,46-50: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라고 하셨다. 여기서 마귀는 예수님의 친척들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의 신성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 이 말은 예수여, 그대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째서 하늘에서 왔다고 자랑하는가?”하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 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극구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자매도 된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 작은 마리아로써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 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신부-

빛과 소금의
실행을
말씀하십니다.

실행을 위한
새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뜻과 실행으로
영글어갑니다.

실행과 함께
우리의 정체성을
뚜렷이
만나게됩니다.

삶의 배경에는
실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의 뜻과
우리의 실행입니다.

솔선수범보다
더 아름다운 관계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실행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고질적 악습을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실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실행속에
담겨있습니다.

형제와 누이
어머니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은
신앙의 실행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오늘을
주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라고 주신
은총임을 잊지마십시오.

실행으로
우리의 관계를
새로이
봉헌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생물학적 가족과 영적인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은 "밖"에 서 있고,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는 배경 설정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를 단순히, 예수님이 가족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일을 하시는 대인적 면모가 있으시다거나, 가족에게 좀 매몰차고 냉정하다든가, 성모님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하는 식으로 본다면 너무 인간적 관점에 멈춰버린 것 아닐까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사실 이 질문은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우월감과 편협한 폐쇄성으로 변질되어 버린 당시 유다인들에게 던지시는 질문인 동시에, 세계화 시대, 소통의 시대를 사는 현대 사회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마치 각자가 생각하고 고려하는 가족의 경계, 형제 자매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인지 숙고하도록 반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예수님은 혈연적 가족 관계를 부인하시는 게 아니라, 그 관계성을 확장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처럼 넓게 확대된 가족의 뿌리에, 중심에, 정점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새로운 가족으로 묶어줄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실행하는 하느님의 뜻은 곧 사랑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본능적 본성적 명제를 탈피해, 나와 너, 내 식구와 남의 식구, 내 민족과 타 민족, 우리 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하지 말고 한 아버지의 같은 자녀로서 서로 아우르고 보듬고 돌보고 보살피라는 것, 모두에게 이로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랑이 하느님의 뜻이지요. 더욱이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이미 구석구석 감추어질 수 없이 서로에게 환히 드러나는 소통과 공유의 현장입니다. 낡은 연결 고리를 넘어 새로이 연대하고 결속하여 서로를 살리는 보편적 사랑이 온 인류, 모든 피조물을 주님의 가족으로 엮는 힘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찌어찌 이집트를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 뒤로는 파라오의 군대, 앞으로는 시퍼런 바닷물 사이에 끼인 진퇴양난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들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의 팔이 펼쳐지지요.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탈출 14,21)

이윽고 그들 앞에 마른땅이 열립니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탈출 14,22) 물은 생명과 정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죽음과 파멸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 물이 마치 든든한 호위병처럼 이스라엘 민족 양 옆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물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해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본성을 바꾸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잠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로움을 선사했던 물이 파라오의 군대에게는 얼굴을 바꿉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과 파멸의 힘을 과시한 것이지요. "물이 되돌아와서 ...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28)

파스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민족의식, 자부심을 선사합니다. 이 사건은 세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구심점으로 공고히 자리잡지요.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받았어도 이를 폐쇄적이고 편협한 선민사상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그 은총을 헛되이 사용하여 유실하는 것이 됩니다. 아마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같은 편"이어서 보호를 해주시고 "반대 편"인 이집트에게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편가르기에 심취하다 보면 내 민족과 타 민족, 정결과 부정, 의인과 죄인 등 피조물을 자꾸 구분하고 가르고 소외시키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야말로 하느님께서 불편하게 여기시는 악일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군대를 치신 것은 이방인을 억압하여 자기 민족의 잇속을 챙기고 약자의 생명을 학대하고 해친 악,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살기 원했을 때 하느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완고한 마음으로 무시한 태도에 대한 징벌이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고작 내 편 네 편 따져 민족적 희비극을 연출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본능, 본성을 넘어서는 가족을 새로이 정의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곧 당신 가족이라고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혈연, 민족, 성별, 신분, 인종, 종교, 학력 그 무엇도 주님의 가족 형성에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약자와 가난한 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크게 혹은 작게 이 사랑을 행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주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일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49)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세상을 향해 우리를 소개하십니다. 부족하나마 아버지 뜻을 찾고 따르고 실행하려 애쓰는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시는 그분 곁에서, 우리를 이어준 이 새로운 가족의 끈이 그침 없이 계속 연장되고 확장되길 소망합니다. 언젠가 온 인류 모든 피조물이 형제 자매 부모로 엮일 때를 기대합니다. 오늘 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가 되어주신 벗님을 기억하며 축복합니다.

사랑의 의지여야!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주님께서 저도 가리키시며
‘너도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실까요?

물론 저도 여러분도 제외하지 않으시겠지만
만일 이 말씀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당신 형제이고, 누이고, 어머니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거라면
주님께서 과연 제게도 ‘네가 바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자’라고 하실까요?

실천의지와 미래의 실천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만 놓고 본다면
제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 그것도 잘 실천하는 자라고 할 수 없으니
저를 가리키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저의 일생을 돌이켜보며 감히 말한다면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했듯
하느님의 뜻과 씨름을 한 일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대로 해야 한다는 거의 강박관념 수준의 생각이 늘 있었고,
하느님 뜻대로 했는지 반성을 늘 했다는 면에서는 하느님 뜻과 씨름을 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거의 대부분 제 뜻대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과의 씨름에서 제가 거의 대부분 이긴 거지요.
저의 뜻이 하느님의 뜻을 이겼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대로 해야 한다는 저의 의지와 지향 면에서는
그러니까 저와의 싸움 면에서는 제가 거의 대부분 졌습니다.

왜 졌을까요?
제 의지나 지향이 강하지 않고 약해서 그랬을까요?

단순화하면 물론 그런 거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단순치 않습니다.
제가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 뜻대로 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고 나간다든지,
관구장이나 평의원에 선출되고 소임이동을 한다든지
이런 중요한 것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따랐지요.

그런데 음식을 먹을 때는 하느님이 굶기를 원하실지 먹기를 원하실지,
이 반찬을 먹기를 원하실지 저 반찬을 먹기를 원하실지 생각지 않고
그저 배고프면 먹고, 먹고 싶은 대로 먹었습니다.
특히 짜게 먹는 저는 사람들이 짜게 먹지 말라고 할 때
사람들 눈치는 봤어도 하느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짜게 먹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느님께서 왜 이 사람을 내게 보내셨는지,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실지 의식치 않을 때는
늘 그가 제 마음에 들고 내 뜻대로 하는 사람이기를 바랐지요.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가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할 때 늘 또 다른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탄하듯 두 개의 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식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하면
내 좋을 대로이고 내 뜻대로인데 크고 중요한 것을 할 때는 의식을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거의 다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의 일상은 소소한 것이라는 점이고,
그래서 제 삶의 대부분은 제 뜻대로지 하느님 뜻대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다시 사랑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의지가 사랑의 의지여야지 강박적 의지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이 강렬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그를
늘 의식하고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않고 그에게 맞추며 그의 뜻을 따릅니다.

사랑의 의지,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의 의지가 있어야
아버지의 뜻을 언제나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오늘 이 새벽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