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Margaret K 2019. 7. 20. 18:31

2019 7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가 10,38-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 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and it will not be taken from her.” 


프란체스코 바사노의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마르타’.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환대를 받으시고, 내년 이때에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났는데,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시고,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익숙하기에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왜 마르타가 꾸중을 들을까?’ 생각합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앉아서 놀기만 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 흐름을 통하여 등장인물 중 누가 옳은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하시며,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르타의 문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맞아들여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집에 모신 인물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주님을 초대해 놓고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 집중하지 않고, 온갖 시중드는 일에 ‘분주’합니다. 분주하다는 표현은 마르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에 반하여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1독서의 아브라함도 마르타처럼 주님을 맞아들인 뒤 주님과 그분 천사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와 달리 아브라함은 주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듭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공손히 답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천막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던 사라였습니다.
성경의 관심에서 벗어나 개인적 관점에서 ‘말씀만 듣고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리아가 정말 잘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의문으로 복음의 초점을 흐려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미 마르타와 베짱이 마리아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가장 필요한 단 한 가지

-한민택신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읽고 큰아들의 편을 드는 것처럼,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마리아보다는 마르타 편을 드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마르타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 마리아의 태도가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의견에 수긍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입장이 왠지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구미나 취향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향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다음의 물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단 한 가지를 찾았는가?’ 마르타는 예수님 일행을 잘 대접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그 일을 하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자기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동생 마리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참다못해 예수님께 다가가 분통을 터뜨렸을 때, 예수님은 평화로운 어조로 마르타에게 이르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은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이르시며, 마르타가 가장 필요한 바로 그것을 찾고 있는지 일깨워주고자 하십니다. 마르타의 문제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에 마음이 빼앗겨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에서 마음이 멀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필요한 한 가지’, 그리고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중요한 것은 허공을 향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만나는 사람 안에서 그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사람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공을 들여 만나셨으며,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만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주시며, 그들의 삶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평화와 구원이 다스리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 자매 이야기는 우리에게, 특별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봉사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잃을 때, 사람과 만나 나누는 사랑의 친교를 잃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의 봉사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만나며, 그들과 얼마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요? 혹시 내가 하려는 일, 나의 뜻과 계획을 앞세운 나머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과 이웃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았는가요? 우리가 만나는 이들 안에 주님께서 친히 당신 나라를 실현시키실 수 있도록, 가던 길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좋은 몫'의 선택

-김창선 선교사-


7월의 셋째 주일은 주님의 창조질서 보전에 유익한 몫을 선택하여 더위에 땀 흘리고 있는 농민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농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빼앗기지 않을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고 격려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친교로 주님의 뜻을 따라 각자의 소명에 충실할 부름을 받았습니다.


의인 아브라함이 마므레에 살던 시절 한 여름 대낮에 주님께서 그를 방문하십니다.(제1독서) 아브라함이 신비한 세 사람의 그룹 지도자에게 ‘나리’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주님인 줄 몰랐습니다. 두 분은 나중에 시중드는 ‘천사’로 밝혀집니다.(창세 19,1)

천막 입구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이 달려 나가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하고 경외하며 모십니다. 발을 씻으시게 물을 떠오는 겸손한 봉사를 합니다. 가족들은 한 말 가량(3 measures, seahs)의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고, 원기를 돋우도록 우유와 치즈로 요리한 송아지 고기로 상차림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해 뒤에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축복하십니다. 아브라함은 99세 때 하느님과 할례 계약(창세 17,1 이하)을 맺었습니다. ‘아들의 약속’이 이루어진 후 그는 주님의 흠 없는 증거자가 됩니다. 사라는 이 말을 듣고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내 남편도 나도 늙은 몸인데’ 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듬해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Isaac, 주님의 미소)이라고 짓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직무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일꾼’이 된 소명을 고난 속에도 기쁘게 수행합니다.(제2독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 육신으로 채운다”(콜로 1,24)는 표현은, 십자가의 수난에 역사의 예수님께 부족함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도가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고난에는 위선자들의 소행은 물론 종말에 일어날 환난도 포함됩니다.

바오로 서간에 드러난 특색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구원의 신비를 알리는 일입니다. 구약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그리스도의 신비가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소망합니다. 말씀의 선포는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완전한 사람’(마태 5,48)으로 굳건해지는 성화의 길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 소명에 교회의 성도’들이 모범이 되어주기를 당부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0,38-42)에서 예수님은 자매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리아(동생)는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혼자 손님접대에 부담을 안고 불안해하던 마르타(언니)는 주님께 다가가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도록 일러주시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가족 제도와 남녀 성별차이라는 당시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두 여인을 가르치는 일은 놀랍습니다.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요한 11장)와 제자들을 포함한 남자들의 공간에 함께했음이 분명합니다. 남자는 자발적으로 참석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에만 부름을 받게 됩니다.


복음의 메시지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가 주님과 마주하는 천상의 상태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지혜를 갈망하고, 시중드는 일에 바빠서 천상적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적 잠심(기도)의 의미를 강조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14; 암브로시오 루카복음서주해, 1720)

수도원 전통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로 이해합니다. ‘기도와 말씀봉사에만 전념’하겠다는 사도들의 결심(사도 6,4)처럼 매일 성경을 읽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수행을 우선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회칙에서 “기도하고 일하라”고 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바이러스를 이겨낼 항체”(2017.12)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앙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으로 자라난다고 가르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서 침묵 중에 말씀을 경청하는 관상기도에 열정을 보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곁에서 친밀한 우정을 쌓고 침묵 속에 말씀을 경청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몫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도 이러한 만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과주의와 생산성이란 잣대로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 주님의 말씀 묵상과 충실한 기도의 힘은 참으로 값진 무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너무 많은 일에 매달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활동주의는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말씀의 경청과 사랑의 봉사는 어느 것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 속에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이 우선이며,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좋은 몫의 선택이요 소명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처럼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충실한 믿음은 바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아멘!


개 사료보다 못한 밥 한 공기

권오준 신부-


봄의 기운이 완연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먹을거리는 무엇보다 알싸한 향과 약간 씁쓰름한 맛을 지닌 봄나물이다. 나물이 봄에만 나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 내내 얼었던 땅을 녹이고 봄의 기운을 안고 나오는 나물은 한창때인 그것보다는 확실히 향도 더 강하고 식감도 훨씬 부드러워 가히 나 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래! 이번에는 곰취다! 우리 가톨릭농민회원의 곰취를 혼자 냉장탑차에 잔뜩 싣고 평소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가며 친분을 다져온 타교구 후배 신부에게 주일미사에 팔아 달라 찾아갔다. 미사 공지 때는 설명 좀 잘 해 달라 부탁했더니, 이 정도의 소량은 미사한 번에 다 없어져서 공지하면 다른 사람은 못사간다 할 정도이니 본당의 교세 가 가히 짐작이 되며, 소비 못할 걱정은 커녕 이미 완판한 것과 다름없어 마음이 매우 여유롭다. 게다가 인터넷 주문보다 우리농민회원의 것이 5,000원이나 더 저렴하다며, 박스당 1,000원을 더 얹어서 팔아준다니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 아, 헛되지 않도다! 그동안 후배 신부에게 사먹인 무수히 많은 술들이여! 화물차를 몰고 북한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진 2차선 국도길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 르며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보람되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다음에는 무엇을 가져 다가 얼마를 더 받아서 농민에게 보내줄까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문득 차창 으로 보이는 늘 변함없는 북한강변의 풍경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참~ 애쓴다. 애써. 그런다 고 뭐가 달라지냐” 이렇게 어쩌다가 물품 좀 팔아준다고 농민들에게 뭐가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회의감이 몰려온다. 국가는 농업을 경시하고 고부가가치 수출품만이 경제를 살린다며 농지를 갈아엎어서 반도체공장 지을 생각만 하는데, 오죽하면 농민들은 개밥값 보다도 못한 밥 한공기 원가를 300원으로 올려달 라고 외치는 마당에 내가 이것 좀 팔아준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것이 세상을 바꾸겠는가, 사람 하나를 바꾸겠는가. 그러나 이런 회의감은 비단 이 일에만 떠오르는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일 좀 한다는 사람들 은 누구나 처음에는 다하는 생각일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길 바라면서 한다면 이 또한 눈에 보이 는 것만 쫓아서 살고, 늘 결과로 판단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뭐라고 세상을 바꾸겠는가. 결국, 이런 일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해서 오늘도 열심히 자연에 순응하며, 또 하느님께 순종하며 땅을 일구는 농부의 마음에 한자락 더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그 농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면 내가 그 마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나의 신앙이 될 것이니 이 얼마나 유익하고 고귀한 일이더냐. 그래! 오늘도 개밥값 보다도 저렴한 밥 한 공기 잘 먹고 밥값 좀 하고 살아보자.


필요한 것 한 가지뿐

-김윤호 신부-


공통분모 찾기

- 식용 버섯과 독버섯은 단 1 퍼센트 성분 차이로 구분되는 데, 그 가운데 1퍼센트를 차지 하는 미네랄의 특성에 따라 독 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합 니다. 버섯 이야기를 읽다 보니 때론 누군가에게 날 카로운 말 한마디로,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길로, 모 욕감을 주는 폭력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그렇게 독버섯처럼 변하는 우리 모습이 떠오릅니 다. 무엇이 우리를 독버섯으로 만드는 걸까요? 우리 가 독버섯이 되는 데는 그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 지 않습니다. 단 1퍼센트의 편견이나 오만이면 충분 합니다. 사랑은 99퍼센트여도 충분하지 않지만 미 움은 단 1퍼센트만으로도 완벽하다는 불편한 진실 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미워하지 않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습니다. (이충무, 『사방이 온통 행복인데』 중에서)                                               

 - 1930년대 미국 보험사에 근무했던 허버트 하인리 히가 법칙 하나를 내놨습니다. 산업 재해로 중상자 1명이 나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 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당할 뻔한 잠재적 부 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형 사고가 일어 나기 전에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게 ‘하인리히 법칙’의 교훈입니다.   (이대현, 『하인리히 법칙』 중에서)                                                -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41-42)


# 복음 레시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이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볼 때, 마리아보다는 마 르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 을 맞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마리아가 자신을 돕 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에게 하시 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문제에 빠져 예수님 말 씀을 듣거나 그분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마 르타를 어떻게 교육시키는지 보여줍니다.
- 이 두 유다 여성의 이야기는 신앙 여정이 ‘받아들 임’에서 ‘발치에 앉아 귀 기울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그분의 가르침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자직의 여정이라는 것을 두 여성 제자를 통해 가 르치고자 합니다.
# 엔테오스(하느님 안에/열정): 십계명의 첫 단추
-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 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 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29-30)                                       -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코린 13,2

“먹고, 쓰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강형섭신부-


유정란, 현미유, 주방세제, 섬유유연제, 한몸(샴푸,비누)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사람에게 주셨다.”(창세 1,29)
흙에서 온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땅에서 나는 씨앗과 열매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온몸이 매일 매일 하느님 사랑을 먹으며, 매일 하느님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농민 주일을 맞아 생명이 가득한 열매와 생명이 없는 열매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호두나 은행처럼 껍질이 단단한 먹거리는 하느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딱딱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에 반해 닭은 매일 알을 낳으며 “나 알 낳았소”하고 외칩니다.

달걀이 매일 주어지는 것은 매일 매일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이 계란도 생명의 기운이 없는 무정란과 생명의 기운이 가득해 품으면 병아리가 되는 유정란이 있습니다.

이처럼 무정란과 유전자 조작 식품은 가격이 싼 만큼 그 열매들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없습니다.

이들을 품고 땅에 심으면 썩어버립니다. 생명의 기운, 곧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 사랑의 기운으로 성장한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라고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맛난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와 공기를 누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먹고 입고 설거지 하는 것에서 우리농 ‘유정란’ ‘현미유’ ‘주방세제’ ‘섬유유연제’ ‘한몸(샴푸, 비누 겸용)’을 사용합시다.

‘먹고’ ‘쓰고’ 하는 우리의 행위가 값싼 제품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땅과 하천을 살리는 ‘먹고’ ‘쓰고’ 하는 수고로움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매일 매일의 생활이 되길 농민 주일을 맞아 청합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전식품인 ‘유정란 먹기 운동’을 이번 농민 주일에 청해봅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를 예수님이 방문하신 이야기입니다마르타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마르타는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청합니다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예루살렘 근방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그러나 그들에 대해 복음서들은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복음서는 역사서가 아닙니다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이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체험입니다복음서는 초기 그리스도신앙체험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꾸미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복음서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그들은 이야기들 안에 잠시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사라집니다그들은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과 같습니다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도 그리스도신앙체험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무대에 올라온 두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두 자매는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마르타는 그 갈등을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만 앉아 있는 동생 마리아를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비난하였다면, 그들의 갈등은 예사롭지 않습니다예수님은 마르타가 청한 대로 마리아를 타일러 두 자매를 화해시켜 주지 않으십니다오히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많은 일 때문에 부산을 떨고 있지만,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셔서 자매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이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혜나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신통력이 그분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그것은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닙니다그것을 가르친 예수님은 유대교 실세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마르타와 같이 우리는 여러 가지 세상일을 염려하고 바쁘게 살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오늘의 복음입니다그것이 우리 삶의 가장 좋은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옛날 문서입니다. 인간의 말은 시대적 성격을 지녔습니다과거 유럽 중세 사람들은 오늘의 복음을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생활보다는 관상(觀想)하는 수도생활을 예수님이 더 높이 평가하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마르타는 사도직에 종사하는 소위 활동 수도자들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마리아는 관상 수도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그 시대에는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몸을 움직이는 노동보다는 앉아서 고요히 하는 관상(觀想)을 한 차원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세상을 위한 사도직보다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수도자들이 더 돋보이는 시대였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중대한 일은 모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하였습니다.  황제나 왕은 일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전화(戰禍)에 휘말렸습니다그들이 세금징수를 결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쳐야 했습니다그러나 오늘 우리의 여건은 다릅니다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아닙니다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눈감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난폭하고 비인간적이었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수도자들은 세상과 결별하고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오늘은 세상을 외면하면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관상이 활동보다 우월하고, 앉아서 일하는 선비가 농사짓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오늘 사람들은 그런 것의 우열(愚劣)을 논하지 않습니다인간의 삶이 다양(多樣)할 뿐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세상을 외면하여 자기를 성취하지 않습니다인간은 세상 안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정보를 받아 일하고세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답게 삽니다예수님도 세상을 외면하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신”(사도 10, 38) 분으로 제자들이 기억하였습니다.요한복음서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 35)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세상의 잡다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합니다교회도 옛날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사고방식곧 신분서열을 중요시하고, 신분에 따른 권위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예수님은 유대교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우월감을 거부하셨습니다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起源)이시며 은혜로운 분이십니다예수님의 행적에서 그 은혜로움을 알아듣고, 이웃을 위해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우리의 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나라에는 차별과 서열과 우월감이 있습니다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관상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차별들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우리의 나라에 삽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섬기는 나라입니다우리가 만드는 차별들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극복하고섬김으로 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허규신부-


성경은 우리를 생생한 이야기 속으로 초대합니다. 여러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 다. 성경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단지 하느님과 예수 님만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특징을 가진 인물들 역시 성 경을 통해 만나게 되는 보화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닮았기 에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짧은 이 야기를 듣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루카복음만이 전 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은 라자로의 소생에 대해 언급 하면서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가 살고 있던 동네가 예 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베타니아라고 소개하고 (요한 11,1)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요한 11,3). 복음서가 많은 내용을 전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분명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활동하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중요한 손님들 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습 입니다. 이런 마르타를 잘 표현하는 것은 봉사(디아코니아)라 는 용어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주위의 어수선함이나 분 주함에 동요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그 리고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기도하는 사람의 대표이고 그녀를 표현하는 것은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예

수님의 말은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도와 관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교부들과 많은 성가들에게 감을 주었습니다. 봉사와 기도.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입니 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봉사하는 것 없이 기도만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 없이 활 동에만 몰두하는 것도 바른 처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 쩌면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와 신 앙인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상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 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기도가 바탕이 되지 않는 봉사는 쉽게 공허해집니다. 반면에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고 실 천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말을 듣 는 것은 단지 귀로 듣는 것을 말하지 않고 삶을 통해 실천 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모든 신앙인에겐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이 모두 필요합니다. 물론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말 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기도에 바탕을 둔 봉사와 봉 사를 통해 표현되는 기도의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베네딕토 성인의 모토 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오늘 복음과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하고 계 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라.”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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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봉사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받는 것에 집중하는 삶이 아니라 주는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겠다고 봉사활동에 시작하셨지만 이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더욱 더 봉사활동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는 심리적인 동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친절과 이타주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행복해야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봉사는 행복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안 좋은 인상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자그마한 일에도 화를 내면서 짜증을 낸다면 어떨까요? 봉사는 행복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행복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간직하고 봉사를 한다면 분명히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봉사 안에서 다른 것들을 찾는 분들이 참으로 많지요.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봉사를 하는 분, 또한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놀기만 하네.’라는 다른 이들과 비교를 계속해서 하시는 분, 자신에게 주어질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분 등등... 기쁨의 봉사를 할 수 없는 분들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두 자매는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마르타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 오신다면 계속해서 곁에 있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손아래 동생인 마리아가 차지하고 있으니 화가 났던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를 마르타는 가지고 있었을까요? 첫 번째인 심리적인 동화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봉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봉사하지 못하는 마르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시중드는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전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봉사를 하고 있나요?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성녀 마더 데레사). 



행복한 사람

지금 내 자신이 무인도에 홀로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다행히 이 무인도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분했으며, 넓은 땅이 있어서 농사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심심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책까지 있습니다.

이 정도면 혼자 살아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인도에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더군다나 굶어죽지 않을 상황에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나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런 상황에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주는 긍정적인 감정 없이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서 얻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여기에서 만족감 이상의 행복을 얻기 힘듭니다.

관계가 중요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의 행복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관계를 스스로 깨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관계를 이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손님이 바라는 것

-전삼용신부-


러시아 이완 대제 하면 아주 선정을 베푼 유명한 임금입니다. 이분은 종종 백성들의 생활을 알기 원해서 은밀하게 민정을 살피곤 했습니다. 한번은 비바람이 요란하게 내리치는 어느 날 밤에 방랑객으로 변장을 하고, 이 집 저 집 찾아 다녔습니다. 가는 집마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황제는 아주 참담한 심정이 되어서 도심지에서 벗어난 변두리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 대문이 열리더니, 반갑게 그를 맞아 들였습니다. 마침 아기가 순산을 했고, 조리 중이었습니다. 이 가난한 농부는 짚방석 한 개와 한 덩어리의 빵, 그리고 물 한 그릇 외에는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흐뭇한 마음에 짚방석에 앉아 평안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농부에게 어떤 축복이 뒤따랐을 지는 더 이상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손님을 잘 대접하여 축복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세 명의 손님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들은 그냥 지나쳐가려 했는데 아브라함이 뛰어가 붙잡으며 제발 쉬어가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씻을 물과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러자 그 세 손님은 내년 이맘때에 아브라함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가까운 나이었지만 그때까지 자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면 복이 올 수도 있다고 믿어서 그런 행동을 하였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이 기쁜 일이니 그렇게 대접하다보니 축복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만약 가난한 농부의 집에 찾아온 사람이 임금인 것을 알았다면 농부는 임금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면 임금도 농부에게 부담을 주는 것에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일부러 축복을 얻기 위해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 행위는 참다운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월급을 기대하며 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하는 행위가 힘들어 얼굴을 찌푸리게 될 것이고 손님은 그 감정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무언가를 기대하고 대접하면 그 사람에게서 그 기대하는 것을 얻어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아드리고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신은 분주한데 동생은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과만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무언가 해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칭찬해 주시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자신이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마음 안에 맞아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세 손님을 그렇게 맞아들였을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부부싸움을 한다면 그 손님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손님이 가져올 축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예수님을 원하는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원하는지 항상 잘 분별해야합니다. 함께 머무는 것이 즐거움이면 잘 하는 기도이고 많은 축복을 받겠지만,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하는 기도라면 기도가 힘이 들 것이고 그러면 축복도 덜 받게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이씨조선 선조시대의 명의 허준이 아직 명의가 되기 전 초보적인 의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서울 구리개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남루하게 입은 노인 한분이 찾아와 약국 한 모퉁이에 앉아있었습니다. 사람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좁은 약국인데도 허준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허준은 그 노인을 정성껏 대접을 했습니다.

      그 때 산모가 쓰러져 죽게 되었다고 급한 자가 찾아왔습니다. 허준은 도저히 약방문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노인이 곽향정기산을 지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그 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 노인은 당대의 명의였는데 자기의 의술을 전수시킬 사람을 찾던 중 허준과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허준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손님을 맞아들이면서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었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나는 오늘 한 명의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내 집에 초대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오늘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한다면 그 사람은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기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많은 축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축복은 ‘이미’ 감사하고 기쁜 사람에게 내립니다.


밥보다 말씀이 먼저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먼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8,3)고 하셨고, 실제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1,14).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아주 가깝게 오셔서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가운데 복을 받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과의 만남의 깊이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영육의 합일체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구지 영과 육으로 구분해 본다면 ‘영을 지닌 육이 아니라 육을 가진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고 말씀도 먹어야 산다고 할 때, 말씀이 먼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지, 밥을 먹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25절이하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걱정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6,33)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 4장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말씀이 우선입니다. 근본을 택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음식준비를 하였습니다.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타가 참다못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활동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마르타와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역할이 다 필요하지만 무엇이 근본적인 선택이고 우선이냐를 생각하면 마리아의 몫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르타도 자기가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준비하였으면 그것으로 행복해야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와 비교하여 시기나 질투, 얄미운 마음을 갖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처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신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마르타는 깜박 잊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에만 너무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습니다. 그녀에게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활동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생활에도 선택과 집중이 요구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경청의 달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마리아도 경청에 몰두하였습니다. 우리도 경청의 달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르타의 유형으로 삽니다. 가끔 신부가 가정 방문을 가면 텔레비전을 켜 놓고는 잠깐 보고 계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차나 과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신자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과일이나 음식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그래도 체면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습이 꼭 마르타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활동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 동네 다 쫓아다니며 봉사한다고 합니다. 음식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단체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없이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마리아 유형을 흉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서서 하는 활동은 아예 외면하고 성체조배를 한다. 무슨 기도회를 한다. 신심활동을 한다면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만 열심입니다. 사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그렇다면 기도와 실천이 어우러진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중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는 꼭 필요합니다. 사실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와야 바른 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활동이 되려면 기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활동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도가 없었다면 그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활동은 힘을 잃게 됩니다. 활동은 창조사업의 연장이요 구원사업의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성 줄리 빌리아르).

  

기도를 뒷전으로 미루고 활동을 앞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내세우고 싶은 교만함이 쌓여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실 겨를이 없이 바쁘셨지만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새벽에, 한 밤중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바쁘다고 주일을 소홀히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주일 하루는 쉬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보내기 위해서 한 주간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에 주님과 함께 쉬기 위해 한 주간을 정성껏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주간이 즐겁습니다. 사업뿐 아니라 모든 것이 잘되어 복으로 돌아옵니다. 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의 영적인 축복과 경제적인 물질의 축복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이든 근본을 바로 세우십시오. 길이 열립니다. 사실 마리아가 선택한 몫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16,26)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것에 앞서 하느님을 알고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 밥보다 말씀을 우선 선택하여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복을 짓고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앙생활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그리고 교황들일 수는 있지만 주님의 진정한 제자들은 될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고난이 다가올 때 마다...

 -양승국신부-

 

우리가 평소 지니고 있는 신앙의 깊이를 측정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있는데, 그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원치도 예기치도 않았던 인생의 고난이 찾아 오는 순간입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내 인생의 역사 안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정말이지 이해나 납득이 가지 않는, 엄청난 높이의 고난의 파도가, 잔잔했던 내 삶을 크게 뒤흔드는 순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 감당하기 벅찬 호된 시련,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고난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집니다. 깊은 좌절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럴수 있느냐며 울부짖고 따집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 존재로서 그런 모습이 자연스런 일이고, 그것 역시 일종의 기도요 주님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거듭되는 혹독한 고난과 시련 앞에 섰던 바오로 사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와 통찰은 놀랍기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새서 1장 24절)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그는 고난이 다가올 때 마다 그것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련의 높은 파도가 밀려올 때 마다, 초대 교회 여러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위한 보속이요 봉헌으로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을 겪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었던 고통에 합치시켰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성숙한 바오로 사도의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 역시 더 깊이와 성숙도가 가미되면 좋겠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면 고난으로 인한 표면적인 괴로움에 좌지우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마다, 우리에게 고난을 보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 마다 좌절하고 괴로워하기보다, 바오로 사도처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신부-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받아먹는 것이 곧
주님을 잘 대접하는 일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양들인 우리가 목자이신 예수님을 먹이는 일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양들인 우리가 받아먹는 일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ㄱㄴ).”
그렇다고 해서 마르타가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한 일 자체가
큰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모시려고 애를 쓴 마르타의 정성과 사랑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 것과
‘말씀’을 듣지 않고 음식 접대를 먼저 신경 쓴 것은,
마르타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말씀을 이 이야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만일에 마르타가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안 듣고 음식 접대만 신경 썼다면,
마르타는 썩어 없어질 양식만 신경 쓴 셈이 됩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포함해서 사람들을
당신의 ‘말씀의 식탁’으로 초대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받았습니다.
장소가 마르타의 집이긴 해도, ‘말씀의 식탁’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마르타의 집을 빌리신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면서도
그 말을 마리아에게 직접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자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은,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마르타를 꾸짖으셨다면,
마르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중단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많은 일’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일’을, 즉 마리아의 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하지 마라.” 라는 뜻일 수도 있고,
“마리아의 일까지 상관하지는 마라.”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또는 예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다.”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마르타가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다가 음식만 생각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를 잊어버렸다면, 그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즉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면, 그것도 잘못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마르타는 안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뜻은 아니고,
마리아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마라.” 라는 뜻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고,
동시에 마르타 자신도 예수님을 왜 접대하는지
그 목적과 이유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르타가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섬기면서 행복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라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어버렸고,
그래서 마르타는 ‘덜 행복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르타의 일’과 ‘마리아의 일’을 대립 관계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누군가는 ‘마르타의 일’을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나 왜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큰 대축일 같은 때에, 미사 참례는 하지 않고 주방에서 잔치 준비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 “미사가 끝난 뒤에 준비를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
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진짜 잔치는 ‘미사’입니다.
진짜 잔치는 참석하지 않고, 부수적인 잔치만 신경 쓰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올바른 신심도 아닙니다.
반대로, 잔치 준비 하는 일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서, 차려진 음식만 먹고 그냥
가버리는 것은 일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사랑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원칙은 항상, “일을 하기 전에 기도 먼저”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든지 말씀을 듣든지 일을 하든지 간에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그네 접대의 가르침

 -조욱현신부-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씀은 제1독서의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주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일을 보여주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손님 접대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손님 접대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자체를 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신앙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모두가 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메시지의 표지로 삼으신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사람 등으로 나타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이는 단순히 그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하나를 대접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거나, 베타니아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환대를, 카파르나움과 예리고에서 마태오와 자캐오의 환대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초대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과 우정의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천막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바로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새로운 베타니아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 루카 10,38-42: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는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찬 나그네 대접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두 자매의 서로 다른 태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자신들의 사랑을 바쳐드리고자 한다.

 

그 때 마르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갑작스럽게 오신 주님께 훌륭한 식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의 뜻을 거들어 달라고 청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리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40) 그러나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이었다. 그분이 찾아오시는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말에 마리아를 옹호해 주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42),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면 식사나 음식은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 그가 선택한 것은 상해버리거나 없어져 버리지 않는 그러한 몫을 택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종말론적인 실체이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데 두 자매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타의 잘못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41)하여 그 일의 결과를 돌려드려야 할 대상인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떨어지기 쉬운 위험은 행동주의에 빠져 내 활동이 모두 기도다.” 하면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 찾게 된다.

 

반면에 오직 귀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와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에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용과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스승의 메시지를 우선 내면 깊숙이에 새겨듣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분을 알리고 그분을 특별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난한 이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안에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타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려면 더 깊은 관상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42)임을 알게 되면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예수님께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알아, 그분으로 자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닮고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그분도 채워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도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가 그분으로 채우는 동시에 그분의 모습인 우리 이웃들을 통하여 그분의 배고프심과 목마르심을 채워드리는 손님 접대, 이웃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청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42)

-한상우신부-

사랑으로
머무르는 것이
답입니다.

모든 좋은 몫은
언제나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마리아도 농민들도
사랑으로 함께
머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우리가
사랑으로
당신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조차도
편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계가 빠져버린
신앙은
자기중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시중드는 일도
주님께
머무르는 일도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은총의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께 머무르는
사랑입니다.

곡식을 가꾸는
농민처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주님안에
먼저 머무르는
사랑의 날 되십시오.

가장 좋은 몫은
언제나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안에서
머무를 때입니다.

가장 좋으신
주님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를 "좋은 몫"(루카 10,42)으로 초대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일화는 활동과 관상의 비교 관점에서 교회 역사 내내 논란을 선사했고 여전히 끝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활동과 관상의 우열을 가리려는 낡고 소모적인 논쟁은 양편 모두 자기 소명에 대해 의구심이나 편협한 우월감을 갖게 만들어 통합적 영성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할 뿐이지요.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오늘 복음 대목은 마르타의 적극적 환대에서 시작됩니다. 현대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낮고 발언권도 없었던 과거 중동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마르타가 미혼 여성이라면 그의 아버지나 오빠가, 기혼 여성이라면 그녀의 남편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관습상 자연스러웠을 텐데, 루카 복음사가는 별다른 배경 설명 없이 마르타가 주도한 초대 행위를 언급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직관력과 자기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진취성, 서슴치 않고 낯선 그분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용기를 지닌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동생 마리아의 태도가 흥겹고 화기애애해야 할 손님 접대 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갈등의 발화점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런 줄도 모르고 주님 발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치!"
한 인간에게서 이만큼 가깝고 또 겸손한 거리의 자리가 또 있을까요? 어딘가에 걸터앉거나 바닥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분의 발치라면 그분 바로 앞, 그분 발에 닿을락 말락한 곳, 그분 음성이 직접 귀에 꽃히는 위치일 겁니다. 말씀의 파장은 공기를 가르며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이의 귀를 관통해 들어와 마음까지 관통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안주인인 언니를 도와 손님을 접대해야 한다는 의무도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주님, ... 보고만 계십니까? ... 도우라고 ...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정말 바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하지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느라 혼자 동분서주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마르타가 급기야 예수님께 자신의 요구를 피력합니다. 질책과 명령까지 넌지시 섞어서요. 자청해서 맞아 들인 분께 원망의 기색까지 흘리는 걸 보면 정말 힘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루카 10,42)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료합니다. 주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듣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하십니다. 허기지고 피곤하셨을 예수님과 그 일행의 육적 필요에 마음을 기울이며 애쓴 마르타의 노고도 참 귀하고 고맙지만, 설령 당장 굶는다 해도 지금 이 자리에 말씀이 현존하시니, 혹여 나중에 대접이 소홀했다고 뒷말이 나온다 해도, 영혼의 양식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를 놓치는 것만큼 아까운 손실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마음속 외침을 대신 답으로 전하십니다. 논란의 주인공이 된 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녀의 생각, 굳은 의지를 아셨을까요? 서로 마주보며 머무르는 사이, 한 쪽은 말하고 한 쪽은 듣는 동안, 음성으로 말하는 이는 침묵하며 듣고 있는 이의 마음 속에서 공명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은 당신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마음을 듣고 아십니다.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말씀과 나, 서로에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천사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물과 양식이 귀하고 듵짐승이나 자연재해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 고대 사막 지대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주인과 나그네 양편 모두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품위를 높여주는 동시에, 무엇보다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고운 밀가루,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엉긴 젖, 우유..."(창세 18,6-7) 아브라함이 서둘러 구체적으로 지시한 접대 양식들은 당시 환경에서 볼 때 최고급 재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군지도 모르는 나그네에게 이처럼 후한 온정을 베풀지만, 음식 장만과 대접으로 주인의 역할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창세 18,8) 먹을 것, 쉴 자리를 나누는 것만으로 최대의 호의가 될 수 있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 앞에 머무르면서 필요를 살피고 응대하는 겸손한 집중이 때론 초대를 더욱 빛나고 가치롭게 완성합니다. 노동력과 시간, 재화에 그치지 않고 눈과 귀, 마음까지 내어주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오늘 대목의 아브라함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아들의 탄생 예고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그를 믿고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치열하게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반복해 청하고 응답을 받은 그 모든 과정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신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말씀은 ...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십니다."(콜로 1,26-2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과거에 "신비"로 감추어져 있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말씀이 예언자나 임금 등 일부 계층에게만 전달되는, 마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일반 백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존재와 말씀은 직접 닿을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지요. 그런데 말씀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신약 시대에는 그 "신비"가 드러나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전에는 "신비"라 감히 근접 못 했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는 어느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이가 말씀에 머물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계시된 이상, 말씀은 어느 신분에 국한하여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학문적 경로와 자격은 존재할지 몰라도 그것이 꼭 말씀과의 친밀한 거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향유하는 축복, 그분 신비 안으로 흡수되는 은총은 역할이나 신분이 아니라 한 영혼의 들음, 머무름, 갈망, 사랑에 달렸습니다. 주님 발치에 겸손히 머물며 귀와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이를 향해 불타오르는 영혼에게, 그가 대단한 학설을 몰라도, 엄청난 재력이나 능력이 없어도 말씀께서 겸손히 당신을 낮추어 다가오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영혼은 절대로 "그것을 빼앗기지 앓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주하며 말씀을 듣고 사랑을 나누도록 이 모든 장을 마련해 준 이는 예수님을 모셔 들인 마르타라는 사실입니다. 그 역시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능력 출중하고 용기 있고 멋진 그녀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길은 명료할 겁니다. 이제는 마르타 자신이, 자기가 열어준 장의 내적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 마르타 정도의 저력이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듣고 머무르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말씀은 열려 계시니까요. 우리 모두가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은 농작물의 모든 소리를 듣습니다. 또 농작물은 주인인 농민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요. 이런 사랑과 관심이 농작물을 키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농민들의 들음과 흘린 땀이 풍성한 수확으로 보답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일을 할 것인가, 사랑을 할 것인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114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