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7. 18. 18:47

2019 7 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Picking grain on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들을 치시는 밤에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라고 명하시고,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시간이 지나면서 오경의 율법을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라삐들은 율법 규정을 실생활에 맞게끔 해석해 주곤 하였습니다. 유명한 라삐의 해석은 시간이 지나며 판례로 사용되어 엮였는데, 그렇게 등장한 것이 미쉬나, 탈무드 같은 미드라쉬입니다. 

예수님 시대까지는 이런 판례들이 아직 권위 있는 책으로 엮이지는 않았고,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였는데,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율법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보인 행동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던 조상들의 전통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종파마다 율법을 해석하는 방법, 곧 ‘할라카’가 달랐습니다. 곧, 바리사이들의 할라카, 사두가이들의 할라카, 에세네파의 할라카가 저마다 달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할라카란 ‘길’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할라카’에 따라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희생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이며, 당신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 곧 영원한 안식이 이루어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깨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의 참의미를 밝혀 주시는 분, 생명에 이르는 참된 할라카(‘길’)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규칙과 규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 곧 할라카에 따라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규정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따금 바리사이들처럼 외적 규정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규정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규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당신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지키는 모든 규정이 참된 의미를 드러낼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께서 자기 아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면 나오지를 않는다고 답답한 마음을 제게 풀어놓으십니다. 거실에 앉아 대화도 함께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웃음꽃을 피운다는 것은 자기 가족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상 속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는 요즘 세대가 다 그렇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자기 것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운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하지요. 차들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차선을 옮기겠다고 차선변경 신호를 하면 속도를 줄여 자리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도를 내면서 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뒤에서 경적을 울리면서 빨리 가라고 야단입니다. 이 모습은 평상시에 양보를 잘 하는 사람도 차만 타면 이렇게 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차 안이 자기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는 이 공간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행복 앞에 누군가가 끼어든다고 또 내 앞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앞서 자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 역시 ‘자기 공간’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이 애착에서 벗어나려면 더 좋은 것이 있음을 발견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 대한 애착들을 많이 간직하는 우리입니다. 이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고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서 먹는 것이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너무 억지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빵은 사제나 레위인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제 아히멜렉은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바리사이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즉, 율법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확대 해석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말합니다. 자신들보다 더 인기를 끄는 예수님의 모습에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애착이 성경 속의 내용까지도 부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내 자리만을 지키려는 애착으로 인해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라는 분께 더 집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애착에서 벗어나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미상).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신학생 때에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이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삶은 시궁창이다’ 뿐이라면 신자들에게 굳이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사제의 일은 희망을 전하는 것이지, 혼내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제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이 말씀이 얼마나 커다란 가르침으로 와 닿는지 모릅니다. 제 눈에도 참으로 많은 부정적인 것들이 모입니다. 그만큼 세상 안에서는 부정적인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사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은사 신부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사제만이 희망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어쩌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는 이 희망의 삶을 살고 또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안식일에 '자비'의 열매를 봉헌합시다

-전삼용신부-


“정훈이 엄마, 정훈이가 우리 애랑 어울리지 않게 신경 좀 써 주세요!!”

      이런 문자를 받는다면 어머니 마음은 어떨까요? 송정훈은 날라리로 소문난 소년이었습니다. 모든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정훈이와 어울리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학생 때부터 춤이나 추러 다니고 공부는 꼴찌였습니다.


      “아들, 엄마가 항상 믿어!”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중반이 된 정훈이는 여전히 날라리였습니다. 부모님은 힘든 형편에도 불구하고 정훈이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정훈이에게 미국 시골 유타의 삶은 끔찍했습니다. 심지어 “너 벙어리냐?”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청년은 모든 걸 포기하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에 십만 원으로 생활하며 자신을 미국으로 보낸 부모님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놈이었나?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갈 수 없어.”

      그때부터 청년은 미친 듯이 레스토랑 알바를 하며 영어도 배웠습니다. 그는 공부는 못했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놀라운 재능이 있었습니다. 정훈은 ‘그냥’ 서빙을 하는 대신, 손님 한 명 한 면에게 ‘특별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남들이 ‘바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장사’의 기본을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정훈은 TV 다큐를 보던 중, 머리가 번쩍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그곳엔 노량진 컵밥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컵밥으로 푸드 트럭 장사를 해보자!’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극구 말렸습니다. 정훈은 돈도 없었고 음식을 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훈은 유학 중 만난 지형과 종근에게 동업을 부탁했고 셋은 의기투합하여 4,500만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20년 된 트럭을 하나 샀습니다. 그들은 그 트럭에 목숨을 걸고 밤을 새우며 음식 만드는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냉담한 유타 사람들을 사로잡을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정훈은 정량만 주는 미국의 고정관념을 뒤집어보기로 합니다. 한국인의 ‘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덤’으로 음식을 주고 몸을 부대끼며 손님들과 춤을 추고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추억을 선물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음식은 무조건 주문 후 30초 안에 만들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미국 전역에 노량진 컵밥 매장은 21개가 되었고 매출 300억 원을 돌파했습니다. 그들은 노숙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컵밥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으며 부채춤, 태권도, 김치 행사를 열며 한국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학교 때 전국 꼴찌였던 그는 말합니다.

      “자존심이 뭐가 중요해요? 내가 하고 싶은 꿈이 있는데.”

      [참조: ‘미국에서 낡은 트럭 사고 인생 뒤집은 전교 꼴찌 한국인’, 포크포크, 유튜브]

 

      송정훈씨의 부모님은 송정훈씨를 끝까지 믿어주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이 믿음 때문에 그는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교 꼴찌 날라리 아이에게 자비롭지 못했지만 부모님만은 자비로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어주고 희망하게 합니다. 믿음과 희망은 사랑의 양 날개입니다. 그렇기에 자비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믿어주고 희망하는데 어떻게 잔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임에도 남의 밭에 들어가 밀 이삭을 훔쳐 먹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탓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쉬라는 의미는 자신을 위해 그만 벌고 주님과 이웃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억매여 쉬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랑삼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을 나무라는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도 하고 이웃을 위해 나눔도 하라고 정해놓은 율법이 그 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고 이웃을 판단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랑이 목적이고 자비가 목적이기에 오히려 미워하고 자비하지 못하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자비롭습니다. 믿고 희망하기에 끝까지 참아줍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연습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믿어주신 것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이제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와 자비로 보답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주일도 주님께 더 내어드리고 이웃을 용서하고 도와주는 목적의 거룩한 날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서로를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서로에게 철두철미해 지고 사나워지지만 신앙인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시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대 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안식일도 그 깊은 의미를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뿐 아니라, 점점 자기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라고 한다. 이 주장을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물리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 했는지 묻고는 사제들과 레위 지파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 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제물은 바로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8)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신부-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일의 독점권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
있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도
열매를 맺는
삶의 신비는
계속 일어납니다.

안식일에도
회심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위한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되어야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안식일의 함정과
안식일의 차단막을
제거하며 우리를
은총으로 이끕니다.

서로를 위한
서로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는 안식일이
살아있는 안식일입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간격과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습니다.

안식일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우리들 마음입니다.

생명에 대한 감사가
울려퍼지는
기도의 날이
안식일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안식일은 사랑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사람을 위한
사람의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 중 한 대목이고, 제1독서는 탈출기의 중심 사건인 파스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일"과 "파스카"는 얼핏 생각할 때 제각기 고유하고 독립적인 주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신명기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탈출기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이렛날에 쉬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창조에 방점을 두어 가르치는데 비해(탈출 20,11), 신명기 저자는 사뭇 다른 각도로 안식일에 접근합니다. 즉,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되, 그 자유와 해방이 종이나 짐승, 이방인에게까지도 똑같이 적용되어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억지로라도 지켜야 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말입니다. 필요하고 원할 때 쉴 수 없는 종이나 노예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위업으로 해방된 자유인 백성으로서 그 특별한 사건의 밤을 기념하기 위해 비워놓은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마태 12,1)라고 첫 구절을 시작합니다. 이는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탈출 11,12)라는 파스카날의 정황 묘사와 흡사한 배열이지요. "지나가다"라고 중복되어 나타난 표현은 "거르고 지나가다"는 뜻의 파스카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의 식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것을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1,11) 일반적인 식사 예법과는 거리가 먼 태도에, 먹어야 하는 음식 역시 급하게 장만한 것들이지요. 이런 것들이 용인된다는 것은 그 순간이 예의나 절차를 따지기 어려운 매우 화급한 찰나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 복음의 제자들 역시 나름 요기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장정들이 온종일 스승을 쫓아다니느라 끼니를 걸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예의주시하던 바리사이들의 눈에 딱 걸린 것입니다. 죄목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마태 12,2) 한 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예외적 예시들을 들어 그들을 두둔하십니다. 안식일이 파스카의 정신을 제대로 잇고 있다면, 무죄한 어린양을 희생하는 것도, 내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이민족의 맏이들을 죽이는 것도, 예법을 무시한 식사도, 배고픈 이들이 본때 없이 함부로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도,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의 동기가 고역에 짓눌려 울부짓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탈출 11,13) 무시무시한 살육의 천사가 지나가던 공포의 밤, 이스라엘 백성이 무죄한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집은 구원을 받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하느님의 무죄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가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날 희생된 이집트의 모든 맏이들의 죽음까지 당신 몸에 짊어지시고 진정한 희생제사를 바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만의 파스카를 온 인류의 것으로 확장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렇게 안식일은 하느님 창조의 완성을 기리는 날이면서,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된 파스카의 축복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제에 이어 등장한 "안식"이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를 진정한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충실히 일하고 하느님과 함께 거룩히 쉬는 삶,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 여기까지도 참 좋고 소중할 테지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하려면 아직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안식일을 통해 종과 짐승과 이방인과 땅까지 숨 좀 돌리고 휴식을 누리게 하셨던 하느님의 뜻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조건과 잣대와 규정을 거두고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도는 이들에게까지 영육의 쉼자리, 쉴 틈을 내어 줄 때까지 우리의 안식은 아직 안식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진정으로 쉼의 권리와 축복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안식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안식의 뿌리는 자비이고, 열매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의무감 때문에 주일을 지킨다면 못지켰을 때 죄로 인식되고 그래서 성사를 봐야하니 율법에 갇혀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자유와 해방의 축복을 누리기에 기쁨으로 충만하고 그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거룩한 날이 됩니다. 이 축복으로 초대된 안식일의 주인이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아멘.

못갈게 구는 것의 영성적 의미

-김찬선신부-


7월 저는 매우 바쁩니다.
몸도 바쁘지만 마음도 바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뿐 아니라 다 중요한 일들입니다.

당장 이번 토요일에 선교 협동조합 설립 총회가 있고,
바로 그 다음 주 화요일부터 포르치운쿨라 행진이 있으며,
그 다음 주에는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파종회 여름 모임이 있습니다.

자연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랄까 압박감 같은 것이 제 안에 있었고,
어제는 묵상을 하다가 아직도 그런 저를 보며 ‘언제 철이 들래’하고
옛날에 어른들께서 하신 말이 생각나 ‘언제 신앙의 철이 들래’하고
제가 저 자신에게 야단치듯 한 소리 하고는 욕심과 걱정을 내려놓았습니다.

욕심에서부터 걱정도 하게 되고 긴장도 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내려놔야 하고, 더 근원적으로는 일 자체를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되도록 하느님께 책임을 완전히 떠넘겨야합니다.

그러면 되는데,
그러면 정말 아무 문제가 없고 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이고
저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는 충실한 집사가 되는데
참으로 끈질기게 저는 하느님의 것을 제 것으로,
하느님 일을 제 일로 만들고는 제가 그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뜻대로 그리고 내 힘으로 이루려는 성취욕인 거지요.ㅍ
그런데 아직도 이런 성취욕이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만 보면
아직 죽지 않고 힘이 있다는 표시이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이고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존재이기에
이런 성취욕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소돔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
롯의 가족이 뒤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소돔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안주安住의 안식安息을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제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안식이지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안식이 아니지요.

이틀 전에도 얘기했지만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해줬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실은 탈출하지 않고 이집트에 계속 머물렀을 텐데
이집트에서 못살게 구니 이집트를 떠나게 된 것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래서 찾아 떠나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못살게 구는 것의 영성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못살게 구는 것이 나쁜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간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탈출을 하기 위해선 우리에게도
파라오와 같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못살게 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확실히 탈출하기까지
파라오는 끝까지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역할을 합니다.
모세만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케 한 것이 아니라 파라오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이제는 마음이 완고해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지 못하게 막고, 막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서둘러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얘기하며 재촉합니다.ㅍ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세상일은 서두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서두름은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데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이고 우리 여정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1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