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강가에서 건져져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 되었는데, 자라서 동족을 편들다가 살인을 하고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파라오의 딸은 물에서 건져 낸 아이의 이름을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의미로 “모세”라고 부릅니다. 모세 입장에서 볼 때 ‘건져 내어진 이’라는 의미를 지닌 ‘마수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딸은 무의식적으로 ‘건져 내는 이’라는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모세는 이 이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에서 건져 내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가 구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파라오의 딸이라는 점이 참 역설적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그의 딸이 모세를 구출해 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을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더 나아가 파라오 역시 모세를 죽이려 하지만, 이 때문에 모세는 광야로 나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니, 믿음은 예수님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또 그분이 일으키는 기적을 많이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주 경험하지만, 믿음은 파라오 같은 사람을 만나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때 더 강해지나 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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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을 쓰고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0년입니다. 그 동안 참으로 많은 글을 썼고, 참으로 많은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생활하면서 저 역시 무기력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면서 이 안에서 기쁨도 많이 얻었는데, 갑작스럽게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글과 말에 대해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였습니다. 자신감도 의욕도 사라집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에 저는 곧바로 피정에 들어갑니다. 피정을 통해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님께서 운전하는 곳으로 나아만 갈 뿐,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을 따르다보면 삶 안에서의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고, 의미를 찾기 힘들며, 기쁨을 찾기도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그때 많은 이들이 이 세상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더 많은 돈을 구하려고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힘든 삶이 내게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앞으로 하루빨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습니다. 즉,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를 꾸짖으십니다. 이 도시들은 갈릴래아 호숫가 근처의 도시로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곳이었고, 예수님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감동적인 말씀으로 힘 있게 사람들에게 선포했고 놀라운 기적으로 사람들의 변화를 유도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변화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그 기적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세상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안에만 머무르면서 세상 것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지금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의미를 비로소 찾을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약한 사람일까요? 강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 같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강한 사람은 누군가 부탁하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부탁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약한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이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더욱 더 힘차게 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청하는 것은 약한 모습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자신을 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결국은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부탁하는 것도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주님께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강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믿음의 그릇
-전삼용신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은 온갖 기화요초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어버렸습니다. 당황한 부자에게 디오게네스가 처음으로 한 마디 했습니다.
“아까부터 침 뱉을 곳을 계속 찾았는데 이 집은 너무 아름다워 침 뱉을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더군요.”
교만한 사람은 침을 맞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마음도 자신을 믿는 마음이기에 교만입니다. 이런 마음은 영광이 아닌 침 뱉음을 받게 됩니다. 칭송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은 다 자신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티로와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혼내십니다. 그 많은 기적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셨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텐데 이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말씀만 가지고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밑에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보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반대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완고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그렇게나 많이 보여줘도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간직할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믿지 않을 때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덜 믿는 만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의 크기가 믿음을 담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위대한 성인이 되기 위해 한 수도원에 들어온 젊은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머리도 똑똑하여 못 하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많은 수도자들은 이 젊은 수사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젊은 수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그 수도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자만해졌습니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나이 많은 수도자는 새파란 수도자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흙이 단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한다네. 자네를 쌓아가지 말고 깨어가게. 이 일을 시작하면 비로소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라네.”
오늘 저주 받는 도시들의 사람들은 고집 세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마음을 잘 가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소홀히 하고 다른 것을 해봐야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잘 가꾼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죽여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믿음의 그릇이기에 마음을 가꾸지 않으면 믿음도 담겨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믿음을 부어주어도 믿음이 담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저주받은 도시들처럼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내 안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 믿음을 담을 그릇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마음 깊숙히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향한 예수님의 초강력 경고 말씀은, 마치 오늘 저 자신을 향한 것 같아, 굉장히 송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1~23절)
사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주님으로부터 크게 저주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고을들은 다른 고을들보다 주님께서 더 각별히 여기고 총애하던 고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컸던만큼,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실망도 컸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제대로 야단맞는 도시들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안에 좀 더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회개는 어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명저(名著)‘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을 통해 언어,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고 계시는, 존경하는 이기주 작가께서 최근 ‘글의 품격’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내셨습니다.
정신없이 읽어 내려가다가 참으로 감동적인 구절을 접했습니다. 작가께서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 설렘 반, 두려움 반,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출근해서 책상에 앉았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써넣어주신 편지 한장이 들어 있었답니다. 어머니의 문장을 접하자마자 작가의 가슴은 속절없이 내려 앉았답니다.
“그동안 애썼다. 기주야. 그리고 고맙구나.”
작가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걸음을 떼지 못할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을 쓰다듬은 건 세계적인 석학의 조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건네준 따듯하고 단출한 문장이었다. 이 날도 그랬다. 어머니가 몰래 넣어둔 편지 한 장에 내 마음은 멈칫했다. 읽을수록 향기가 풍겨 나오는 문장에 난 진종일 붙들려야 했다.”(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 북스 참조)
우리가 매일 이웃들과 주고 받는 언어가 좀 더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과 글에서 좀 더 예의범절과 품위가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언어와 글이 함께 걸어가는 이웃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언어 정화의 노력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언어의 온도’에서 이기주 작가께서는 또 이런 명문장을 남기셨습니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히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리는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따지고 보니 회개라는 것, 너무 어렵게, 그리고 멀리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말, 글만 잘 성찰해도 아주 좋은 회개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틈만 나면 섬뜩섬뜩한 폭언과 망언을 앞다투어 남발하시는 분들이 한 두분이 아닙니다. 국민을 대표하시는 분들, 공인들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성숙함이나 배려심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천박하고 유치해서 듣기가 참으로 민망합니다. 혹시라도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듣고 따라할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언어도 너무 날카롭습니다. 때로 상대방을 해치는 무기같습니다. 이웃들과 주고받은 대화 역시 마음과 영혼을 나누는 소통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의사 전달이나 일방통행식 대화로 전락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언어 생활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 작업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예의바른 것인지요? 논리정연한 것인지요? 상식적인 것인지요? 이웃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주님께는 영광과 찬미가 되는 것인지요? 따지고 보니 회개 중에 가장 우선적인 회개는 언어의 회개인 듯 합니다.
언어는 곧 그 사람 자체를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곧 그의 인격입니다. 언어가 곧 그 인간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에 좀 더 품위와 품격이 가미되어야겠습니다.

은총은 풍부하다
-반영억신부-
심판 날이 다가 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카프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근거지요,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주 모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 맞는 삶의 변화를 가져올 때 완성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 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날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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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치유되어 뛰어다니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 것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무엇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도 더 악하다고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꾸짖으셨는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거절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중요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절)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의 예언을 거역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회개를 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드러낸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에제키엘서에서 예루살렘을 질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짓으로 너의 자매들이 오히려 의롭게 여겨지도록 만들었다.”(에제 16,51)
이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에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 20)
-한상우신부-
교만과 회개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기적(奇跡)과
일상사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를
모르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진심어린 우리의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삶이
하느님을 진정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회개와 함께
감사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참된 회개가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길을 가지 않는
우리들을 아프게
꾸짖으십니다.
회개는
우리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길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하느님이 숨어 계십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시지만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존하셔서 우리가 그들을 통해 하느님 마음을 감지할 수 있게 이끄십니다. 함께 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한번 찾아볼까요?
제1독서인 탈출기는 모세의 탄생을 다룹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지요. 하지만 원래 그의 탄생은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탈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그에게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동족인 가족과 이집트 공주, 양 쪽 모두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탈출 2,6)
이방인, 그것도 이스라엘에 죽음의 칼날을 겨눈 이집트 왕실의 공주에게서 숨어 계신 하느님을 봅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작고 가난하고 약한 존재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에는 그가 누구이건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탈출 2,10)면서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물 속 상자에 담긴 아기를 구해낸 이집트 공주에게서 우리는 훗날 "바닷물을 밀어내시어"(탈출 14,21)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죽음의 권세를 상징하는 물에 삼켜지지 않고 살아난 모세는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탈출 14,29)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례 때 물로 죄를 씻기우고 정화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1.23)
당신이 직접 다니시며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던 지역을 일일이 거론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립니다. 백성을 향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사로운지 아는 우리로서는 이 날선 목소리가 적잖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지요.
복음사가는 이 꾸중의 이유를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킨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마태 11,20 참조)이라고 밝힙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이 세 지역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쩌면 예수님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고을들이었나 봅니다. 간절히 찾아 헤매거나 애타게 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의 혜택을 너무 쉽게 누리다 보니 그 가치와 의미를 간과했던 걸까요? 이들은 어쩌면 종교적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우리같은 종교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부어진 특별한 사랑이 깊은 회개의 열매로 맺히지 못하자, 예수님은 이에 안타까움을 느끼시며 그들을 일깨우시는 겁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 마음의 고통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아픈 상처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사랑을 퍼부으신 하느님은 번번이 우상숭배로 배반과 모욕을 당하셨지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에는 이스라엘도 들어있고, 또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진정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기를 미루며 미지근하게 무늬만 띄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들어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는 주님께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쉬울 것 없는 그분이 무슨 대가를 원하시고 죽음과 죄악의 오류라는 급류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 아니지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우리는 매순간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응답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족과 지인 등 이미 잘 조성된 종교적 환경 덕분에 너무 쉽게 주님을 만나고 누려왔다면 그만큼 감사하며 주님과의 결속을 다져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고통과 죽음의 물살에서 겨우 건져내어져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다면 그 어둠과 상처의 무게만큼 더 절실하게 주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오랜 미혹과 갈망의 미로를 돌고 돌아 겨우 그분을 만났다면 그간 쌓인 절원의 두께만큼 귀하고 소중히 그분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오늘 예수님의 꾸짖음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들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과 한 마음으로 외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요동치며 호소하고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숨어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 천국, 지옥의 결과론적 으름장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벗님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벗님을 '죽음의 물'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때론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는 사랑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맞갖게 응답하는 회개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약하다고 느낄 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3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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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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