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5-37)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He said in reply,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replie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당시 율법 학자들은 어디까지를 이웃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만이 이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이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더 이상 출신 성분이나 율법 규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웃이고, 자비를 베푸는 이는 누구나 이웃입니다. 그 사람이 원수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학자의 잘못된 이웃 개념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어디까지 이웃인지 따지며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이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일부 피조물만의 맏이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일부만이 그분 안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을 향하여 같은 길을 걸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있기에 서로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든 이, 더 나아가 모든 만물이 이웃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어야 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
-한민택신부-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어원을 따져 보면 ‘어머니 태속이 쓰린 아픔’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이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반면,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비참한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사랑에서 비롯된 쓰린 감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가끔 등장하는 이 표현은(마태 18,23-35; 루카 15,11-32 참조) 예수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어 병을 고쳐주십니다.(마르 1,40-45 참조) 예수님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외아들을 잃고 장례를 치르는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에게 “울지 마라” 하시며 위로해주시고 아이를 살리십니다.(루카 7,11-17 참조)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마음을 아울러 표현하는 ‘가엾은 마음’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비천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굽어보시어 인간에게 몸소 다가와 구원해주는 분이시다.’ 자비로운 하느님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체험은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그에게 답하시는데, 비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 말씀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 우리가 직접 만나고 그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분이십니다. 강도를 만나 상처 입고 초주검이 된 사람은 비천한 인생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저 먼 하늘 위에서 멍하니 내려다보거나 내버려두지 않고, ‘가엾은 마음’으로 몸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 상처를 나누고자 하시며, 우리의 병고와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삶을 굽어보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예,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방문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우리도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열쇠
-장재봉신부-
바야흐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어떤 휴가를 계획하셨는지요? 교우님 모두가 어디에서나 주님을 모시고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며 하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제발 매일미사 책이라도 꼭 챙겨가 주십시오! 교회는 매일미사 책에 무려 열 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원하는 이 간절한 원의를 팽개치지 말아주시길 바라고 바랍니다.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조우하는 행복을 누리시는지 여쭙고 싶고 참으로 그리 살아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큰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매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탄이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사탄과 맞설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 굉장한 것이나 대단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선의 무게와 악의 무게를 비슷비슷한 중량감으로 위장합니다.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괜찮아서 탈이 없을 것처럼 포장합니다. 모호하게 느껴서 불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마음에 올무를 놓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결과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믿음이 희미해질 때, 삶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대상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주님의 ‘돌직구’가 매섭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니까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엾은 마음”만 잃지 않아도 몸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십니다.
사랑은 끝까지 마음을 쏟는 최선의 배려임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희생이란 기꺼운 사랑의 결과일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기게 됩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만으로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에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만 해주고서 돌아선다면 완성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살피라는 당부로 듣습니다.
그날 사마리아인처럼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하는 마음 폭을 지녔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통 큰 배포를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라 싶습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 자신이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살아가는 양 여기진 않는지, 심중을 꼼꼼히 뜯어보라는 말씀이라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고쳐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고백이십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두 발로 걷기를 마다지 않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서 보고 싶다는 고백이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난관은 “최선의 방법을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를테면 “이번 휴가 기간에는 성경을 꼭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도 성경은 무겁다는 이유로 부피가 작은 매일미사 책으로 바꿔 넣거나 “기도를 많이 바치겠다”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저 더 먹고 더 떠들고 더 흥분하느라 손에 묵주 한 번 쥐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더딘 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는 의지가 소중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 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웅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주기만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밝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마음을 합하여 예배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은혜를 선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웃으로부터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한 복음의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믿음의 나침반이 알려주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 주십시오. 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여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시길 두 팔 벌려 축원합니다.

찢어져 열린 마음
김승태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을 이야기한 율법교사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유로써 말씀해 주신다.
그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비유 말씀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등장인물인 사제와 레위인과 달랐다.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갔을 만큼 완전히 멀어졌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치유해 줄 뿐만 아니라 초주검이 된 사람이 여관에 머물러 쉴 수 있도록 돕는다.
사마리아 사람이 초주검이 된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 번역된 희랍어는 σπλαγχνζομαι(스플랑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연민을 느끼다’는 의미도 있지만 ‘속이 쓰리다’는 의미도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팠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이 찢어져 열렸기 때문에, 초주검이 된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며 묻거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게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니, 지난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을 마치며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이 리본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교황은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이미 함께 머물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프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이웃를 사랑하자=이웃이 되어 주자
최창덕 신부-
여름철 날씨가 무덥습니다. 생각으로나마 시원한 상상을 하며 겨울을 떠 올립니다. 겨울 하면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 다. 성탄 즈음 길거리에선 흥겨운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도 들립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 큰 백화점 앞에서 “딸랑딸랑, 불우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보냅시다.”하는 자선냄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유심히 지켜보다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옆에 자 리를 깔고 “딱딱딱,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기 시 작했습니다. 자선냄비 입장에선 아주 심한 훼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 게 뭐람, 종교 간에 싸우는 것도 아니고”라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면, 아이러니한 광경에 웃음을 터뜨리며 스님의 모습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 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염불을 외며 절을 하였습니다. 스님 앞에도 차츰 돈이 모였고 추 웠던 날씨는 슬슬 눈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염불과 절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질세라 구세군의 종소리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종소리가 그치며 자선냄비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 습니다. 그제야 스님도 일어났는데, 자신 앞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모두 집어 들고 자선냄비에 ‘탁 탁’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곤 합장을 한 채 인사를 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행인 하나 가 쫓아가 자선냄비에 돈을 넣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무엇인가 도움 을 주고 싶었습니다.” 행인이 “아니, 스님은 크리스챤이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니 스님은 미 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웃을 돕는 데에 부처님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사랑 한가지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개념’ 자체를 바꾸십 니다.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이 셋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 였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동료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이웃이며, 어려움에 처 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절친한 이웃이 되어 주어서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이웃은 나와 가까운 이들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가까워지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웃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매사에 모든 이에게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구조적 폭 력에, 우리 무관심의 폭력에 쓰러진 이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들, 실직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장 애인들, 농민들 그리고 북녘 동포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이들을 두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며 여전히 우리의 이웃 사랑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하 겠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아멘.

새로운 탄생
-박진수 신부-
우리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을 나를, 우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시 선에서 오늘 말씀이 새로운 삶 으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 음에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복음을 세상 안에서 나-너-우리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과정을 지나간 결과, 삶 의 자리로서의 공동체의 무한한 풍요로운 열매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와 우리를 위한 하늘 나 라의 초대에 이웃이 되어줘야 할 고통받는 이들을 보내주신 주님의 성심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와 힘 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늘 나라의 진정한 표지를 그 안에서 보고 발견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새로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 사이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습 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말씀은 일상생활에서 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성경의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충실함과 변 화를 위한 우리의 역량을 확인하는 기점이며 핵심 적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재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사회 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그들의 삶이나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을 어떻 게 만나고 있습니까? 혹시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 체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안전 을 지키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자신의 갈 길
을 가기 위해 자주 침묵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런데 침묵의 시간 중에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질 문이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를 통 해 알지도 못하는 한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오 히려 ‘형제’와 ‘적’을 구별 못하는 현명치 못한 처세 로 취급되지는 않았습니까? 어쩌면 이러한 소박한 관심은 오히려 응답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이해 를 받지 못하며 심지어 비난받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더욱 복음 에 희망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 다. 그것은 전에는 마치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었다 면, 불을 켜는 일과같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 어나려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나-너-우리 공동체는 울타리 - 스스로 만들어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떤 울타리, 곧 자 기 자신이나 가족 아니면 공동체 또는 민족일 수도 있는 울타리 - 를 열고, 밖으로 나가 고통받는 자 매 형제들에게 가까운 사람, 곧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셨고, 당신의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지 않습니까!) 이렇듯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열고 나와, 하느님 께서 우리를 위해 창조해 주신 세상을 마음껏 숨 쉬 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 바로 ‘하느님 사랑’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이르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하였고, 예수님이 답하시면서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는 유대교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합니다. 그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오늘 율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사는「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갔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주고, 그를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도 말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율사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사의 질문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어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聖殿)에서 성무(聖務)를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역시 성전의 성무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탈출 33, 19)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사람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생활지침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전담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사람들이 제물을 봉헌하게 하면서 성전에서 일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 때문에 사람들 앞에 우월감(優越感)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배경으로 우월감을 가지면서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무섭게 군림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율법 지킬 것과 제물 바칠 것만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는 강도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와 율사는 성전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원초적(原初的) 체험,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 17)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알려주고, 실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초기신앙인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해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 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 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의 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가 계획하고 만든 일 안에, 우리 계획의 산물(産物)로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선한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지 않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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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이렇게 말줄임표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는 것 안에서 사랑은 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머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빨리빨리’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할 때를 떠올리면 이런 부분은 분명해집니다. 앞 차가 너무나도 너무 천천히 간다고 경적을 울리고 앞 차에 바짝 대어서 위협을 하듯이 운전합니다. 그런데 앞 차의 운전자가 지금 운전을 힘들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앞 차 운전자의 마음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앞 차 운전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과속하며 앞으로 갈 때에도 역시 머무르고 생각해보십시오. ‘급한 일이 있나 보다.’라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저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만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로 잠시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이웃이 된 사람은 누구였냐고 물으시지요. 먼저 사제와 레위인은 길반대편으로 피해갑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또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만을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한 번 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유만을 내세워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버려둘 수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지 않는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유다인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상황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머물렀고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사랑을 행합니다.
우리 역시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도 나오듯이 사랑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배우자를 어떻게 부르십니까? 아마 ‘여보’,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그 말의 뜻을 아십니까?
우선 ‘여보’는 한자로 같을 여(如)와 보배 보(寶)자를 쓴다고 합니다. 즉, ‘보배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할 당(當)과 몸 신(身)자를 씁니다. 곧 ‘당신은 바로 내 몸이다’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말이고 아름다운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새기면서 상대방을 부르고 계십니까? 혹시 화를 내면서 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배우자에 대한 안 좋은 생각이 들 때에는 이 의미를 새기면서 천천히 불러 보면 어떨까요? ‘당신은 보배와 같아요. 당신은 바로 내 몸입니다.’라는 의미를 새기면서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서 머물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전삼용신부-
한 기계체조 금메달 유망주가 고난이도 기술은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된 것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9개 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로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 맞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해 주었고,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믿게 되었고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느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당시 미국에 두 명밖에 없었던 하반신 마비 장애인 의사 이승복씨는 자신도 재활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겨우 눈만 깜빡이는 아이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묻습니다. 율법 교사는 구약의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그는 십계명의 요약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명료하게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을 거친 유다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사랑을 짐짓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엔 이미 ‘내가 계명을 아니까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굳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스스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구약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자녀들을 낳아놓고 그 자녀들을 주신 주님께 “주님, 제가 어떤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느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실까요? 선택을 하려는 것은 사랑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선택’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소명’이라는 하느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말씀을 다 마치시고,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이 선택하여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카인이 자신이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냐고 하느님께 대든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되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되어 주라는 말씀은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소명으로 알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이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율법이 이 부르심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만으로는 구약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주님께서 저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를 위해 오셨고 물고기 잡는 어부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이들을 사랑의 소명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아빠는 아기를 보고 구토를 했고 엄마도 처음 한 번 보고서는 더 이상 볼 용기가 없어 넉 달이 지나서야 다시 아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죽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생소경이 다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의 처지가 소명을 위한 도구로 보였습니다.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준다면 더 크게 감동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소명을 알면 모든 것이 그 소명에 맞춰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모든 조건을 이용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기부여 강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은 하고 싶다는 소명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도록 나를 부르셨는지 깨달아야 온전히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스스로 하려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나를 왜 창조하셨는지 찾아야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손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말로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입니다(1요한 3,18).
덕을 높이 쌓으려고 애쓰는 한 젊은이가 산골짜기에 있는 고승을 찾아가서 “스님, 이 고통스럽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께서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스님, 그것은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이지만 여든 노인도 다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는 것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겻은 사랑의 열매는 손발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서간을 빌려 이야기 한다면(2.14-17 참조) ‘실천없는 자비는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영적 물질적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이 자비를 살아있도록 만듭니다. 자비는 보기 위해서 눈을 가지고 있고, 듣기 위해 귀를 가졌으며 일으켜 세워 주기위해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말씀 안에는 "보아하니 율법서를 배우고 가르치는 데는 정통해 있으면서 그 내용을 실천하는 일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구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분명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행함으로써 아는 것이 확인됩니다.
이어 율법교사는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 사제가 그 사람을 보았으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를 돕는 일을 도맡아보던 사람으로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은 상태를 확인하고도 그냥 지나쳤으니 더 비정합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아마도 숨어있는 강도들에게 자신도 그렇게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경신례를 담당하는 이로써 부정을 타지 않을까? 오히려 강도로 오해 받지 않을까?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워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일을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람의 후광으로 내가 빛나지도 않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인지 아시죠? "무관심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요한의 첫째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8).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 맞은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고는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간호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떠나갔습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굽니까? 당시 사제나 레위인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취급도 안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며 부정하게 살아간다고, 구원에서 제외된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여겼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돌봤습니다.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당연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묻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가10,3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 안에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을 입에 담기 싫어하는 마음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듣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라!”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말로나 혀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결국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교사처럼(이웃이 누구입니까?) 나 중심으로 생각하여 내게 이웃이 된 사람만을 돕겠다고 작정하면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고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 동족, 인연을 맺은 사람 등 도와주어야 할 사람, 돕지 않아도 될 사람, 돕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구별하면 이웃사랑에 선뜻 뛰어드는 일을 주저하게 됩니다. 사실 여러 모임을 다녀 보면 거기 모인 분들의 성향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색깔이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에 교육수준이나 여러 가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이웃으로 지내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그 생각은 율법교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난 사람의 처지에서 이웃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웃의 개념에 한계를 둘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를 도와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여 "내가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네 도움을 받기 싫다"고 원수의 도움을 거절할 기력이 남아 있다면 그는 아직 절박한 처지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아무런 이득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처지와 상황 안에서도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이웃의 한계가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위험과 오해를 무릅쓰고 또 갖가지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때와 그런 곳에서 피어납니다.
사제와 레위인에게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외면하고 지나가도 될 ‘남’ 이었습니다. 사랑에 관해 많은 말을 해온 그들이 정작 사랑을 증명해야 할 순간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입으로 선포된 사랑이 위선과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결코 그가 ‘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모두를 행했고, 줄 수 있는 전부를 주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희생과 헌신으로 사랑의 마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랑은 말보다 행함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주는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작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소리 높여 외쳐도 이웃을 형제로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시선이 어디 있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자신의 삶에 안주한 상태에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그 안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를 아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알고 있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깨달았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야 마땅합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당신의 모두를 내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해야 합니다. 환자방문이나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 이웃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희망합니다. “행동은 입보다 크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의 표현을 확실히 하는 하루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1.14).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하는 거짓말은
1. 어머니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2. 용돈 적게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에 많이 드릴께요.
3. 어머니께서 하신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4.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군요.
5. 저도 나중에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은
1. 아가야,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한단다.
2. 생일상은 뭘?
3. 내가 얼른 죽어야지.
4.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서로의 다른 마음은 어쩔 수 없어도 하느님 안에서 하나되도록…..
@@@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
1.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따라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 내 주위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일 좀 덜할걸.
대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애들을 이미 다 커버렸고 배우자와의 관계조차 서먹해졌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내 속을 터놓을 용기가 없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다 정 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다. 감정에 충실할걸.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다들 죽기 전 얘기하더라고 한다. "친구 ㅇㅇ를 한번 봤으면.."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 이였었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겁이나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내 기준에 충실 하지 못하고 남 눈치를 보면서 남의 인생을 살았다. 남에게 잘 보이지 말고 내가 행복해야 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순하게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독서와 복음을 모두 종합해보면 가장 중요한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며, 그 계명은 높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계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고 내가 실천하고자만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지키며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단지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만은 아니다.
제1독서: 신명 30,10-14: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어,
제1독서의 신명기 30,10-14는 하느님의 말씀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접근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것 같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항상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의 체험은 이 어려운 계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만 주실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2독서: 콜로 1,15-20: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2독서(콜로 1,15-20)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서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15절), 즉 아버지의 모습과 개념, 그리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까지도 보여주는 완전한 하느님의 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마음 그 자체로부터 사랑의 샘이 솟아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수의 인격과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모상이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완전히 낮추신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그 계명을 항상 실천하여 지켜가야 한다.
복음: 루카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구약에서 ‘이웃’이란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을 말하였다(레위 19,33-34).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집단의 그룹의 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듯이 축소되었다. 예를 들면, 바리사이, 에세네파, 열성당원, 헤로데 당원 등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테두리를 없애시면서 사랑의 개념을 무한히 확대시키신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떻게 만나든지 간에 그를 만나게 된 사람 모두에게 ‘이웃’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이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0-35절).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그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그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사마리아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유다인들에게 괄시를 받는 사람이었기에 그 강도 사건에 말려들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의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주며, 또 자기 일처럼 처리한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35절). 참으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이 역할 분담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명백한 어떤 쟁점이 있다.
1.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형식주의적인 전례, 결실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고 구원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사제와 레위인의 잘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두 계명 사이의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일치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데 있다.
2. 선을 어떤 일부 사람들에게만 편중시키는 사회적 종교적 차별주의와 민족적 편견을 반대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는 외국인이며,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지 못한 사랑의 행위를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실천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선은 국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하게 되는 낯선 모든 처지에서 창조적 능력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 했듯이 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대하셨다.
이 비유는 실제로 아주 지극히 실천적인 어조로 끝을 맺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6-37절).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비유는 상처 입은 사람이 반쯤 죽어 길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웃에 대해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가 실제로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즉 목전에 두고서도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참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비록 하느님의 드높은 ‘성전’에서 내려오시지만 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던 그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마리아 여행자가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본다.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 목적이 우리를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는 그 사람의 상처 위에 포도주 즉 말씀의 포도주를 붓고 그 깊은 상처가 포도주의 기운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름을 섞어 바른다. 그처럼 그는 자신의 온순함과 박애정신으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비난을 견뎌낸다.... 그 다음 그 사람을 여관으로 옮겨간다. 그는 그 여관의 이름을 모든 사람들의 거처요 피난처인 ‘교회’라고 붙여준다...”(Severo D'Antiochia, Omelia, 8,9).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폭발적인 힘을 찾게 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라는 마지막 말은 이 사랑의 실천이 더 이상 생각으로나 시도해불 수 있는 비현실적인 것이거나 공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역사와 체험 즉 우리 모두를 위해 자유롭고 인정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신(요한 8,48) 그리스도의 역사를 다시 시작케 한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 37)
-한상우신부-
착한 이웃이
참으로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착한 이웃은
신분과 지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모두는
자비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비는 실천으로
실천은 자비로
하나가 됩니다.
자비는 착한
이웃으로
드러납니다.
착한 이웃은
돌봄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먼저
다가갑니다.
아픔을
싸매어주고
상처를 소독합니다.
말씀은
착한 이웃으로
우리가운데
육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너를 살리는 것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비의 실천이며
착한 이웃으로
서로를 돌보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안에
서로를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고마운 이웃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주일 되십시오.
착한 이웃이
되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자신임을
잊지맙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전체에 "말씀"의 거대한 움직임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 에너지는 마치 대양 심저에서 움직이는 해류 같고, 하늘 위 공기와 바람을 품고 흐르는 대기와 같으며, 온 우주를 가득 메운 하느님의 현존 같습니다.
제2독서를 먼저 봅니다.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부분으로, 사도 바오로의 입을 빌어 우주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요약하고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그리스도는 "시작"이시고 "만물의 으뜸"(콜로 1,18)이 되십니다.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하신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콜로 1,20) 화해를 이루십니다. 세상 창조부터 인류의 구원까지 모든 순간에 관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그분"의 자리에 "말씀"을 넣어 읽어도 어색함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아버지의 말씀, 육화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분은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모든 것은 말씀으로 생겨났고, 그 말씀은 어느 하나도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하느님의 의지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말씀께서는 당신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말씀과 백성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신명 30,14)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부 종교 기득권층과 식자층이 말씀을 사유화하면서 말씀이 본래 지향과 달리 점점 문자 안에 갇히게 됩니다. 또 단순 소박한 대중에 맞추어 해석하고 적용해 준다는 것이 말씀의 원뜻과 의미보다 형식에 강세가 붙이는 오류를 낳게 되었지요. 결국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린 채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은"(마태 23,13 참조)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습니다.
문자로 박제가 된 율법과 예언들이 멀게만 느껴진 군중은 말씀을 힘들고 어렵다고 여기게 되고, 누군가 들려 주고 해석해 주어야만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여기서 말씀과 인류의 거리감과 괴리감이 형성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신명 30,14) 있다는 근본 원리는 변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깨워 주신 것이 바로 이 관계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어 현존하신 말씀께서 말씀의 완성을 몸소 보여주셨으니까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당신을 시험하려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너는 실제로 말씀에 어떤 색깔을 입히고 어떻게 온도를 올리며 어떤 감촉을 이식했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실상 살아 계신 말씀 안에는 판에 박힌 단 하나의 답만 있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은 듣는 모든 이의 실존과 만나 새롭고 다채로운 불꽃을 일으키는 신비이니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근본 정신의 진수를, 저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유다 민족이 이방인 혼혈이라고 열외시켜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진정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이는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거기에 매여 마음에 온기를 잃어버린 사제나 레위인이 아니라, "가엾은 마음"(루카 10,33)이 이끄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라면 그가 누구건, 아무리 소외되고 배척받는 죄인이거나 보잘것없는 이라도 상관 없다는 걸 일깨워 주십니다.
비유 속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에게 베푼 기름, 포도주, 노새, 여관, 돌봄, 두 데나리온, 등은 그의 내면에 일어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형체를 입고 드러난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시간, 그의 정성, 차도를 위한 당부와 약속 역시 진정 말씀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이 뼈와 살을 입은 육화일 것입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공허한 것은 잠시 소리와 공기의 파장으로 귀를 울릴 수는 있지만 형체와 움직임으로 연결되지 못해 이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기에 누구의 마음도 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골자는 귀와 머리에서 멈추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는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말씀을 지켰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누군가의 이웃이 되고, 벗이 되어 주는 것은 귀와 머리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는 말씀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육화되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자비를 베푸는 것는 사랑이며 자비이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분을 대신하면서 결국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 아타나시우스 교부는 신화(神化 Deificatio)를 이야기하며 "사람의 하느님됨"의 진리를 엿보게 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 모상성을 꽃피워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자비 자체, 사랑 자체가 될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이야말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과 같이 호흡하며, 그리스도를 옷 입고, 말씀을 사는 길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말씀과의 관계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하나되는 은총을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복음환호송) 아멘.

사랑비만이 되지 않으려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3751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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