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께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린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불꽃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서네’입니다. 이 낱말은 잡초, 가시덤불, 덤불을 의미하는데, 금세 타고 없어질 듯한 존재라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서네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데,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징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금세 타고 없어질 잡초, 덤불 같은 존재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그들을 태워 없애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는 모세에게 한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 곧 제1독서가 이야기하던 ‘서네’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서네’ 같은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이 ‘서네’임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에서 가장 긴 식사를 하는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비만도가 높을 것 같지만, 오히려 비만도가 가장 낮은 나라가 프랑스라고 하더군요. 건강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먹는 식사는 건강뿐 아니라 행복도를 높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식사할 때에는 식사에만 집중해야 한다면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식사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스마트폰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더 대화는 사라졌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곳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큰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한다고 합니다. 일이나 물건들에 초점을 맞춰서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춰서 사는 삶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와 같은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음에 감사드린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솔직히 당시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훌륭한 집안도 아니고 특별하게 내세울 수 있는 조건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철부지 같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하늘나라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합니다. 바로 내 이웃들, 특별히 세상 안에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이들과 함께 할 때 우리 역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하네다로 가던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서 파리로 비행기가 다시 회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객실 승무원들은 고객들에게 사과했지요. 그런데 앉은 자리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퍼스트클래스 고객: “파리에서 깜빡 잊고 못 사온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말하면서 기뻐합니다.
비즈니스 고객: “내일 꼭 참석할 회의가 있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불평을 하며 인상을 씁니다.
이코노미 고객: 승무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고 합니다.
반드시 이런 것은 아니겠지요. 특히 우리나라의 갑질 문화는 아주 유명해서 위의 상황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어려운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성공해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즉,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돈에도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남겨두십시오. 분명히 삶이 달라집니다.

주님께 선택받는 철부지 어린이
-전삼용신부-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 ‘사인펠드’는 처음에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관행을 벗어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영자들과 전문가들은 사인펠트의 평가서에 ‘빈약하다’와 ‘보통’ 사이에 점수를 주었다가, 그냥 ‘빈약하다’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엄청 많은데, ‘스타워즈’, ‘이티’, ‘펄프픽션’ 등의 수많은 성공작들은 영화 제작 스튜디오 경영자들에게 여러 번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해리 포터’ 등도 출판사들에게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우리나라 가수 서태지가 신인이 검증받는 프로에 나와 전문가들에게 혹평을 받는 장면은 아직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인기 스타들과 전문가들은 서태지가 음악 시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신인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시청자 평가단입니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너무 편협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점수를 먹이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청자 참여단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시청자들의 대표로 ‘선택 받았다’는 생각이 올바른 시각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스’의 애덤 그랜트는 어떤 작품에 대해 가장 평가를 어긋나게 내리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팔아야하는 경영자들, 그리고 그 작품을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내어놓은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의 작품을 과대평가 하는 경향이 있고, 경영자들은 돈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며, 그리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뛰어남을 내세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구상을 하여 자신의 사업이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서 망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확신을 믿고 보증까지 서 주어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만 믿고 투자를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도 이런 심리로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다른 아이들보다 과대평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잘 알아볼까요? 선생님들은 잘 알아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성장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자랍니다. 놀던 아이들이 더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를 변화시킬 역사적 성과를 낸 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도 자신이 전문가라 아이들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교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물을 물로, 산을 산으로 못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일단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교만이 들어서면 그 사람의 판단은 흐려지게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자신이 내리는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처음 책을 쓸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읽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평가엔 교만이 섞여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뱀처럼 나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결국 선악과에까지 손을 뻗치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항상 ‘어린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이란 것이 아직 어린이의 눈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문가들이라 자처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제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드님을 못 알아보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당신의 아드님을 내려 보내셔서 겸손한 이들을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선택받아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지혜는 어린이와 같이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이가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한상우신부-
마음이 굳어지면
아무 것도
헤아릴 수 없는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선(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단순함과 열정의
철부지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힘찬
물결이 되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선(善)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진실로 믿습니다.
철부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히려 철부지들을
생각하여 주시고
철부지들을
선택하여 주십니다.
오히려 하늘
나라의 신비가
철부지들을 통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철부지를
향한 희망이
철부지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게합니다.
철부지의
반항과 실패까지도
껴안아주십니다.
철부지의 순간과
철부지의 기도도
아름답게 받아들이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결코 우리 힘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선(善)하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철부지와의
믿음의
관계안에서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감사 기도로 시작합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0,25)
철부지! 세상이 인정하는 지혜와 슬기를 갖추지 못한 이들, 공식적으로 지혜와 슬기라고 일컫는 학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 당장 시급한 생계유지에 매달리느라 현학적인 이슈는 떠올리기조차 버거운 이들, 누구에게도 지혜와 슬기를 청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한 단순하고 소박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가 열리고 있는데 대해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당대의 내노라 하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최고의회 의원들에 속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투박한 당신 제자들이 한 걸음씩 아버지의 진리 안으로 다가가는 과정에 스승인 예수님께서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마태 10,27)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를 알 수 있는 특권은 예수님께 달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이들만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곧 "철부지"입니다. 그가 세상 지혜와 슬기로 가득 차서 자기의 앎을 주장하는 세상의 학자가 아니라 "철부지"라서 예수님이 그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부르심 장면으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무렵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탈출 3,1) 그런데 이 첫 구절이 이미 탈출기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백성을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시나이로 갔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려워 주저하는 모세의 모습이 이어지겠지만, 그런 그의 망설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은 이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 3,12)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이루어집니다.(탈출 24장 참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40년을 살다가 살인죄로 도망쳐 미디안 땅에서 목자로 40년을 삽니다. 그리고 80세가 되어서 부르심을 받고 파라오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요. 그렇게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둔 채 숨을 거둔 때가 120세(신명 34,7 참조)입니다.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탈출 3,3)
하느님께서 타오르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길로 나타나시자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이방인이고 살인 죄인으로서 낯선 곳에 몸 붙여 산 긴 세월은 그를 보다 단순하게 낮추어, 신비에로 다가갈 줄 아는 이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탈출 3,4)
주님과 모세의 시선이 서로를 향합니다. 모세는 놀라운 광경을 보기 위해 떨기나무 속 주님께 다가가고, 주님은 당신을 보러 오는 모세를 보십니다. 관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다가서는 순간은 찰나인 듯 영원합니다. 물리적으로 좁혀질 듯한 거리나 시간도 무한대로 이어집니다. 이 "봄"이 교차하는 가운데 말씀이 등장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이 말씀은 "봄"을 "앎"으로, 그리고 "참여"로 확장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모세에게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를 당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탈출 3,11)
모세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조심스레 아뢰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집트 왕자, 의협심에 불타올라 살인을 저지르는 자, 동족을 가르치려 들던 이의 톤이 아닙니다. 미디안의 40년은 그를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하고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은 철부지에게 온갖 지식과 처세술을 채워 똑똑해지라고 재촉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처세술을 비워내고 다시 철부지가 되라고 초대하지요. 모세는 그렇게 되기까지 40년이 걸렸고 마지막 비움이 완성되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더 닦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도 체험하듯이 삶에서 우리에게 허락되는 약함, 죄스러움, 낯설음은, 강하고 결백하고 능력 충만할 때보다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철부지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모자라고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 철부지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상에 감추어진 신비가 꾸밈 없고 단순한 마음으로 불길을 향해 다가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에,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외치는 날이 오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철부지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김찬선신부-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왜 이들이 어리석은가 하면 모르는 것을 모르고
아는 것만 가지고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안다고 할 때 정확하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아는 것 하나를 가지고 안다고 하고 심지어는 다 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는 것이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하나 외에는 다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가 다인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알라고 하는 것이고,
자신을 모른다는 것도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지 못하거나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라고 하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많이 있고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많이 있음을 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겸손한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아는데 비해
교만한 사람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없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어떤 현상을 일으킵니까?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 자기가 모르는 것은 없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발전을 합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면
나는 하느님 존재하는지 어떤 분인지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내가 모르니 그런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에서 땅만 파서 먹고 사는 사람이 서울에 어마어마하게
큰 빌딩이 있고 그 안에서 몇 만 명이 기거하며 일한다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큰 집이 있을 수 있냐며 그런 집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지 어찌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까?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슬기롭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로 알게 된다는 거지요.
인간의 지식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신비,
곧 신만이 알고 우리는 모르는 신적인 비밀이라고 하는데
이 비밀을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우리만은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하십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9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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