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마태오 13,1-9);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birds came and ate it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기와 양식을 내려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무리 많은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무뎌지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홍해 바다를 건너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광야에 접어들자마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고기 냄비 곁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시간만을 기억하며 이집트 땅에서 죽는 것이 더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손아귀 아래서 엄청난 고역을 겪으며 주님께 살려 달라고 외치던 그들이었습니다(탈출 2,23 참조).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고, 그들은 그 구원의 과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치는 조그마한 시련을 참기 싫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두가 큰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기적,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코앞에서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치면 많은 이들이 말씀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코앞에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주님을 원망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계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비로소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계심을 굳게 믿고 당신 말씀에 충실하기를 바라십니다.(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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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서면서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인 것처럼 떠올려집니다. 기도하던 성당, 공부를 했던 강의실과 도서관, 생활을 하던 기숙사, 맛있는 식사를 했던 식당, 신나게 운동을 했던 운동장,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어 다녔던 산책길 등등 모든 곳이 너무나도 익숙했습니다.
성당에 앉아 기도하던 중에 그 당시 제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신부만 되게 해주세요.’라고 참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때였습니다. 제가 신부로 살아간 것을 보면 분명히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가 했던 기도만 들어주신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신부만 되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참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다양한 사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글 쓰는 일과 강의하는 일 역시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만 부탁드렸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만이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삶 전체를 떠올려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끄심에 내 몸 전체를 맡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맡기기 보다는 내 멋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컸던 것은 아닐까요? 그때에는 주님의 선물을 내 안에서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씨는 딱 하나의 열매만을 가져오는 씨가 아닙니다. 어떤 땅에 떨어졌느냐에 따라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즉,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서 많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 철저히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이로써 주님의 좋은 씨가 내 안에서 싹을 틔워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도사가 있었다. 세 사람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 도사를 찾아가 묻지요.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까요?”
도사는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손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라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은 더 묻지 않고 길을 떠났다. 제자가 도사에게 물었다.
“한 손가락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 명 중에 한 명만 급제한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리된다면 그런 뜻이지.”
“그러면 두 명이 붙으면 틀린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한 명이 떨어진다는 뜻이지.”
“만약 셋 다 급제하게 되면요?”
“하나도 빠짐없이 합격한다는 뜻이다.”
도사는 말했다.
“나쁜 점괘가 나오면 낙담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잘 된다고 말하면 경솔해 지는 법이지. 사실 점괘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무조건 맞는 점괘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굳이 이상한 것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함을 기억하면서 스스로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 이유
-전삼용신부-
존 에프 케네디는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와 미국에서 양조장을 경영해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러 아들 중, 하나는 중풍에 걸렸고, 하나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으며, 대통령이 된 아들도 암살당했고,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도 총에 맞아 죽었으며, 상원의원으로 있던 에드워드도 여비서 익사 스캔들에 휩싸여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비참한 생애를 마치거나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본 아버지는, “내가 수십 년 간 술을 만들어 팔아 많은 가정을 불행하게 했고, 분쟁을 일으켰으며, 사람들을 죽게 했으니, 이렇게 죄 값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술장사해서 돈 번 것이 뭔 잘못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전혀 갖지 않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죄책감이 믿음이 되어버리면 실제로 그 죄에 대한 보속이 일어납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우리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나라로부터 일어나야합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가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변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회의 안소니 드 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70세가 된 오늘은 오직 하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청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서는 대통령이 되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나야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술과 쾌락, 권력을 추구한다면 그런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가장 내적인 곳에는 ‘욕구’가 있습니다. 가장 외적인 곳은 ‘말과 행동’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을 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욕구에서 말과 행동이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본성에 관련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길 위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굳고 완고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정작 자신을 변화시킬 요소들은 무시해버립니다.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차가워지는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육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감정은 죄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복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다가도 쉽게 죄에 떨어집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나무가 자라면 숨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가시나무는 세상 걱정입니다. 돈에 대한 걱정이고 ‘소유욕’에서 비롯됩니다. 복음 말씀을 따르려고 하지만 돈이 좋아서 소득의 십분의 일도 주님께 봉헌할 수 없는 처지의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욕구, 즉 삼구(三仇: 세속[돈]-육신[성욕]-마귀[교만])가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한 복음말씀은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 가지 욕구를 조금씩 죽여 나간다 하더라도 사람 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30배, 60배, 100배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삼구는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를 먼저 죽여야지 행동만 변화시키려 해서는 절대 복음말씀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2코린 5,17). 옛 본성은 살아있는데 행동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또 그 죄에 떨어집니다. 내가 죽으려면 내 본성이 죽어야하고, 내 본성이 죽으려면 예전의 욕구가 죽어야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욕구가 죽을 수 있습니다. 나무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빠져나오기 전까지는 불이 나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무가 숯불이 되려면 먼저 이전의 욕구가 성령의 불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변하고 싶다면 행동을 변화시키려하지 말고 욕구를 변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사에 아무리 자주 참여하더라도 계속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면 신앙인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인들의 책을 많이 읽어도 계속 남 판단하기를 좋아하면 그 얻는 지식이 오히려 더 큰 교만만 키울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구이지 행동이 아닙니다. 행동은 가장 속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욕구는 속일 수 없습니다.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신앙인이 아니라 욕구를 변화시키려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행동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야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신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9).”
이 비유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는데,
나중에 보니 어떤 땅은 길이 되어 있었고, 어떤 땅은 돌밭이 되어 있었고,
어떤 땅은 가시덤불이 되어 있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고,
좋은 땅으로 유지된 곳에서만 많은 열매를 맺었다.”
농부가 씨를 아무렇게나 뿌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정성을 다해서 좋은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랬는데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좋은 땅이 길, 돌밭, 가시덤불로 변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할 때, 당시의 농사법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시의 농사법이 중요하지도 않고,
비유의 뜻과도 맞지 않습니다.
만일에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나중에 길이 되든지 돌밭이 되든지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막 뿌렸다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의 책임은 땅이 아니라 농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런 뜻이 아니고,
길, 돌밭, 가시덤불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땅’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때,
하느님께서는 ‘좋은 세상’과 ‘좋은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랬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고, 카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라고 만드신 것은 아닌데, 하느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인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만일에 악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선을 선택할 자유도 없는 것이고,
그러면 악을 행해도 죄가 되지 않고, 선을 행해도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에도 ‘좋은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배반자가 되라고 유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유다 자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연결해서 생각할 일은 아니고,
‘나의’ 선택에 관한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나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직접 뽑으신 왕입니다(1사무 9,17).
왕으로 뽑힐 때만 해도 사울은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당신이 하신 일을 후회하셨습니다.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11).”
‘후회’는 ‘전지전능’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가 그럴 줄 몰랐다.” 라는 뜻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울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사용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사울은 ‘좋은 땅’에서 ‘돌밭’으로 전락한 경우입니다.
솔로몬 왕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 밧 세바가 아들을 낳자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주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이라 하여
그의 이름을 여디드야라고 부르게 하셨다(2사무 12,24-25).”
젊은 시절의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비들과 후궁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1열왕 11,3).
솔로몬은 그 자신의 죄로 지혜도 잃었고, 하느님의 사랑도 잃었습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1열왕 11,9-10).”
그의 죄와 어리석음은 왕국 분열과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좋은 땅’에서 ‘길’로 전락한 경우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좋은 땅’에서 ‘나쁜 땅’으로 변질된 경우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하느님의 권능을
생생하게 체험했고, 엄청난 은총 속에서 살았던 그들인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판관 2,11).
그리고 구약시대 내내 하느님께 불충실했고,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주로 먹고사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좀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좋은 땅’에서 ‘가시덤불’로 전락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태어날 때부터 성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성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면서 자기 스스로 악의 길로 걸어가기 때문에 악인이 됩니다.
좋은 땅도 방치하면 황무지로 변하고, 나쁜 땅도 잘 개간하면 옥토가 됩니다.
성인이 거의 다 되었다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고,
악인으로 살다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만하지도 말아야 하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꿈꾸는 백배의 열매! 관건은 토양입니다!
-양승국신부-
누구나 꿈꾸는 백배의 열매! 관건은 토양입니다! 씨나 모종은 영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땅에 뿌리고 심어야지, 시멘트나 아스팔트 위, 자갈밭이나 잡풀더미 위에 뿌리고 심어서는 허사입니다.
전문직 농부들의 좋은 토양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은 엄청납니다. 미리 미리 양질의 퇴비를 확보해 놓습니다. 부족하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준비합니다. 아깝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퇴비를 투척합니다. 뒤집고 또 뒤집습니다. 방해되는 돌들은 골라내고 또 골라냅니다. 그 결과가 좋은 토양이며, 그런 땅에 작물을 심을 때,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 한 가지!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주 우리 인생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가끔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해 봅니다. 육적으로는 아주 건강하고 멀쩡한데, 내적으로 심각한 질환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육적인 영양 상태는 만점인데, 정신적·심리적·영적으로는 완전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 없고 멀쩡합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고, 잘 돌아다니고...그러나 영혼과 정신, 마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다보니, 그저 허깨비처럼 몸만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영혼이 사라진 존재로서, 동식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순간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할 때 순식간에 다가오더군요. 한 인간 안에 영육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해야되는데, 영혼과 정신이 죽어있으니, 결국 반쪽만 살아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토양을 어떻게 비옥하게 조성할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기본에 충실해야겠지요.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육체도 건강하지만,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과 정신도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겠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한 인격체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보완하고 지지할 때, 그 인생은 활짝 꽃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각자 인생의 나무에는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수고와 땀의 열매
-반영억신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 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좋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열매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 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얼마 되지 않는 수확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이라고 살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 노력하자.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 8)
-한상우신부-
씨앗과 땅은
하나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셨던
수 많은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받아들이고
자라게하는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어있어야 합니다.
비어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상황을 탓하지
않는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은
씨앗을 끝까지
신뢰하듯 말씀을
끝까지 품고
믿고 또 믿습니다.
믿음은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씨앗과 땅은
하나가 되어
열매를 맺는
믿음의 길을
걷게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길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열매의 길입니다.
믿음은 끝내
열매를 맺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믿음의
길은 언제나
풍요롭습니다.
풍요로운 말씀의
길입니다.

영원하신 말씀
-이종훈신부-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불평한다. 여름이니까 덥고 겨울이니까 추운 거라고 생각하면 좀 불편하기는 해도 참을만하고 덜 시끄러울 텐데. 덥고 춥고 비가 오고 지진이 나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과학이 발달해서 하루 이틀 전에 그것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이 고작이다. 세상이 끝남을 알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조용히 그 시간을 맞는 것 말고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디서는 생겨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다. 정말로 영원한 것은 없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고 그분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예수님의 삶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같지 않지만 그분은 마음과 말과 행동이 하나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분의 말씀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았는지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말했다.
성경은 투박하고 거친데도 스태디 베스트셀러다. 아마 세상 마지막 날까지 성경을 이길 책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같은 말씀을 여러 번 읽지만 읽을 때마다 다르게 들린다. 말씀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세상이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읽지만 사실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읽는다. 말씀은 나의 마음을 비추고 삶을 인도한다.
단순히 숨 쉬며 살아있음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나의 삶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는 내 육체가 만들지만 그것이 먹을 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영이고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 열매는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음식점 앞에 진열되어 있는 플라스틱 모형처럼 먹을 수는 없을 거다.
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해 농부는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도 늘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하늘이 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를 자라고 키우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다. 땅 속에 씨앗이 패고 줄기와 잎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그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내 안에서 그렇게 자란다. 나는 거기에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가장 편안한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뿐이다. 오늘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도 아무 것도 할 게 없음을 아는 마음이 되는 거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예수님, 주님께서 뿌린 씨앗이 제 안에서 자랍니다. 어렸을 때는 수박씨를 삼키면 제 안에서 수박이 자라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머니 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게 도와주소서. 아멘.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모여든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이스라엘의 파종법은 이랑과 고랑을 짓고 구멍마다 몇 알의 씨앗을 넣는다든가, 알맞은 생장 조건에서 미리 씨를 심어 싹을 틔운 뒤, 모종을 심는 우리네 파종법과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너른 밭 어디에나 씨앗을 무턱대고 마구 뿌려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길에 떨어져... 돌밭에 떨어졌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마태 13,4.5.7) "길"은 잘 닦여진 도로라기보다, 사람들이 밭을 가로질러다니면서 다져진 부분이고, "돌밭"은 흙 입자가 고르지 않아 비교적 알갱이가 굵은 흙덩이나 작은 돌들이 모여 있는 부분일 겁니다. 또 "가시덤불"은 밭 가장자리에 자생한 가시나무와 밭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생겨난 그늘로 흙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으나 가시들 때문에 발아한 싹이 제대로 성장을 할 수 없는 장소를 가리킬 겁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죽을 게 뻔한 곳까지 뿌려지니 낭비가 될 게 뻔한데 개의치 않습니다. 딱 좋은 땅에만 뿌리면 더 경제적이고 시간도 절약할 텐데 왜 이렇게 마구잡이로 파종을 할까요?
제1독서에서는 광야살이에 슬슬 지쳐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평이 들립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에 끌고 왔소?"(탈출 16,3)
제3자인 우리가 들어도 하느님이 참 억울하시겠다 싶은 불평입니다. 이집트인들의 억압에 못 살겠다고,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이들이 당시의 노예살이를 풍요로운 안정 상태로 각색하고 있고, 이집트 탈출이 "광야에서 우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는 목적으로 탈바꿈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못할 말이 없다지만 이런 고의적 왜곡은 모세에게는 물론 이미 하느님의 마음에 너무 큰 생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탈출 16,4) 그런데 하느님은 마치 그들의 불평을 못 들으신 듯,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하십니다. 양식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든 상관치 않으시고 모두에게 양식을 주려 하십니다. 여전히 원망에 싸여 있는 이에게도, 삐딱하게 꼬여 있는 이에게도, 이집트 땅을 힐끗대며 양다리를 걸치는 이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헤픈지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 씨 뿌리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비유의 뜻을 풀어 주시는 대목에서 알게 되겠지만 씨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어주시는 하느님에 비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씨를 사방팔방 무턱대고 뿌리시네요. 애초에 좋은 땅만 겨냥해 씨를 뿌렸다면 손실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하느님은 말씀을 내리실 때,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주실 때, 터전의 상태를 일일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즉 좋은 땅에만 기회를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길이건 돌밭이건 가시덤불이건 씨를 품을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설령 손해와 낭비가 되더라도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말씀을, 아드님을 헤프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척박한 곳에서 싹도 틔어보지 못하고 죽는 여느 씨처럼 말씀이신 예수님도 어느 땅을 만나느냐에 따라 하릴없이 생명을 잃으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얼마나 헤프십니까! 씨앗만이 아니라 외아드님까지, 당신 자신까지 다 내어주시니 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늘 좋은 상태의 땅만은 아니었을 그동안 내게서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튕겨져 나갔고, 은총이 유실되었고, 성체로 모신 예수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지요... 그럼에도 우리를 제외하지 않으시고 다시 풍청풍청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은 그야말로 대책없는 낭비꾼, 사랑의 낭비꾼이십니다.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 16,4) 꼭 하루 분량만 거둬들여야 하는 만나는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의탁, 순명의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는 대목과 일맥상통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지의 때를 위해 여분의 것을 비축해 놓으려는, 믿음 없고 탐욕스런 인간 본성상 잘 지키기 어려운 요구 중 하나일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탈출 16,15)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만나,구약 시대 이후 예언자들을 통해 백성에는 내리신 말씀, 말씀의 육화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눠 주신 가르침, 예수님께서 남기신 성체, 그리고 오늘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말씀...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뿌리시는 씨는 태초부터 인류가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았던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상태와 상관 없이 꾸준히, 변함없이, 신뢰 가득한 손길로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은 손익을 계산할 줄도 모르시는 헤프고 바보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열매를 보고 수익을 기대해 씨를 뿌리시는 게 아니라 어느 조건의 땅이건 그렇게 씨가 뿌려지고 쌓이고 또 쌓여 썪고 거름이 되면 언젠가는 좋은 땅이 되리라는 걸 기대하시기에 그리 하십니다. 열매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이신 겁니다.
언제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천년도 하루같은 그분께 인간이 정한 시간은 크게 의미가 없으니까요. 땅의 경계가 바뀌고 지질이 바뀌고 지형이 바뀌면 언젠가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씨 뿌리는 분의 손길에 우리를 활짝 펼쳐놓고, 뿌려지는 씨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존재적 기다림의 시간이 나중에 "어느새!"라는 탄성과 함께 이미 이루어진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낭비꾼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불평을 하는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258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3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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