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회개
회개는 복음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조명해 보는 과정이다. 우리는 목적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 복음의 시각은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가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여정을 끝마쳤지만 우리는 아직 여정 중에 있다.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환시로 시작되었다. 기사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복음에 대한 갈망으로 바뀌었다. 그는 성 다미아노와 포르치운쿨라를 수리하면서 회개 과정을 보냈다. 그에게 가난한 삶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은 부유하게 태어난 환경과 친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상반되는 길이었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시작한 그의 삶은 라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을 때까지 18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예수님과 깊은 친교 안에서 지냈고 사랑으로 일치했으며, 끝내 육신에 오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회개 여정의 초기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혼돈스러워 했으나 생애 마지막에는 열정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받아 들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와 같은 경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응답을 잘 나타내 준다. 프란치스코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유언 1~3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상을 받은지 1년 후에 다음 찬미가를 썼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주님, ‘당신은 ‘홀로 거룩하시오며
‘기적을 하시는’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시편 76,15)
당신은 힘세시고 위대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은 분이시며 전능한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거룩한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의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오며 신들의 주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지상 선이시나이다.
당신은 살아 계신 주님이시오며 참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오며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즐거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정의이시오며 절제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당신은 아름다움이시오며 온화이시나이다.
당신은 피난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보호자이시오며 방어자이시나이다.
당신은 힘이시오며 휴식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우리의 믿음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온전한 감미로움이시오며,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나이다.
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세주이시여!
앞부분은 프란치스코가 그의 인생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조명해 보는 내용이고, 끝부분은 하느님은 향한 찬미만 있을 뿐, 프란치스코 자신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중간 부분에는 프란치스코가 갈등 속에 방황하는 것이 보이나. 결국에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믿고 신뢰하며, 성령으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길목에서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지위가 상승되고 있는 상인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중세의 귀족 계급의 권력을 물려받고 있었다. 처음으로 상인 계급이 천대받던 계층에서 권세 있는 세력이 된 것이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포목상인으로 아시시의 영향력 있는 갑부였으며, 그는 성공적으로 잘 되어 가는 사업을 아들 프란치스코가 이어 받기를 바랬다. 한편 그는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의 젊은이들 가운데 인기가 많은 것을 흐믓하게 생각하였다. 프란치스코과 흥청망청 노는 것을 내버려 둔 것은 사업을 물려주는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애초의 꿈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고, 또 기사도에 심취하였다. 그는 기사도의 영광을 꿈꾸었고 그의 꿈을 위대한 삶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 믿었다. 미래는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현재의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시대는 사회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여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성직에 종사는 이들, 사제들, 수도자들, 주교들, 그리고 추기경들, 가장 성스러워야 할 이들이 호화스런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여자까지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주변 도시와 아시시 주민들 사이에는 반란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1198년 로까 마조레의 파멸은 귀족 사회에 반항하는 시민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돈, 권력, 통상 거래, 그리고 땅의 권리에 대한 위태로운 상황이 다가왔을 때 도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대립은 잦은 전쟁으로 분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징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즐거운 연회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의복은 항상 최고급이었고 그가 가진 많은 돈 때문에 연회에서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을 많이 느꼈고 그들을 돕는데 너그러웠다.
움브리아 지방의 아시시와 페루지아 지방간의 권력 쟁탈전에 프란치스코는 기사로서 참전하여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사가 되는 업적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피로 물든 치열한 싸움은 아시시를 황폐하게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아시시 시민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옥 생활은 참혹했으며 이것은 전쟁터에서의 승리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젊은 청년 프란치스코가 포로생활에서 풀려났을 때, 건강상태는 나빴으며 어머니 피카 부인은 그가 다시 건강해 질 수 있도록 극진히 간호하였다. 감옥 생활의 체험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점점 연회에서 전과 같은 즐거운 느낌이 들지 않았고 갈등으로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과감히 브리엔느의 월터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그가 입대를 결정하였을 때 그의 가족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프란치스코가 스폴레토 계속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신비로운 소리로 “프란치스코, 너는 주인과 종 중에서 어느 편을 섬기려 하느냐?”라는 물음이 들려왔다. 그때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비로운 소리는 “아시시로 돌아가라. 네가 할 일을 거기에서 말하여 주리라.”(세동료 2,6)하고 말하였고 기사 지망생이었던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른 계시가 없으므로 그는 계속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가족과 친구들의 반응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변명은 “주님의 그 어떤 음성이 나를 돌아오게 만들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버지 상점에서 일도 하고 동산을 거닐기도 하였으나. 빈번히 아버지 피에트로와 말싸움도 하였다. 흔히 그는 아시시의 성 바깥벽을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방황하였다. 그는 기도도 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러나 깊은 고뇌에 빠지고 혼자 있고 싶어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자 그의 친구들은 그가 결혼할 어떤 여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여인’은 친구들이 상상하는 존재와는 전혀 달랐고 아주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 존재’는 프란치스코를 아시시의 가난한 이들 가운데로 이끌었고, 그가 오래 전부터 갈망해 오던 것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는 ‘그 존재’를 너무도 사랑하여 심지어는 ‘그녀’를 나의 ‘가난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너는 내가 이르는 대로 행하여라”라는 기다리던 계시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의 ‘여인’은 그를 가난한 이들에게로 이끌어 주었고, 그는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그가 시골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한 나병환자 앞을 지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나병환자를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동전 몇푼을 주려고 했을 뿐 결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두려움은 그의 마음 속에서 또 다른 감정과 갈등하고 있었다. ‘어서 말에서 내려와 나병환자를 포옹하여라!’ 아니,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결국 생각과 믿음이 일치되어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뛰어내려 나병환자를 포옹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유언 참조). 다시 길을 떠나며 나병환자가 있던 자리를 뒤돌아보니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사건으로 회개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1205년에 간섭받지 않기 위해 집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기도하던 중 그는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세동료 5,13)그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여러 벌의 옷과 말을 팔아 성 다미아노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포르치운쿨라)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동안 주님의 뜻을 몰라 궁금해하던 것을 버리고 할 일이 생겼음을 알았던 것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마을 사람들과 그의 가족의 반응은 프란치스코가 미쳤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나병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 위해 기부금을 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가난을 나누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피에트로는 너무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에트로는 그의 아들의 말도 안되는 행동은 끝나야 한다고 외쳤다. 피에트로는 아들이 가난한 이들과 나병환자들과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 그의 사업에 지장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피에트로는 아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뿌리는 것과 석수장이처럼 노예로 일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피에트로는 시 법원에 도움을 호소했으나 프란치스코는 자신은 이제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에 교회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들은 구이도 주교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법적으로 프란치스코는 패할 것이 자명하였고 주교도 그럴 것이라 말하였다.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버지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그의 새로운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벗어 그의 아버지 발 앞에 놓았다. 군중 앞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선 채 “앞으로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1첼라노 6,15)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프란치스코의 앞길을 인도하였다.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누군가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되었다. 주님과 그의 복음이 프란치스코의 ‘길’이 되었다.
대부분 우리는 결정하는 과정에서 고뇌한다. 그러나 한번 결정을 하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 우리가 선택을 한 후에는 우리의 힘을 모아 선택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힘쓴다. 멈춤과 진행, 암흑과 광명, 좌절과 희망은 회개로 나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법정에서부터 시작된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회개의 삶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회개의 과정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니다.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잘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과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내가 되었다.이를 테면 선생님들, 이웃들, 영화 배우들, 운동 선수들, 신부님들, 친구들, 배우자들, 부모님들, 아이들, 시인들, 작가들, 직업인들, 병자들, 축복들, 세계적인 사건들, 가난, 부유, 상실감, 사고, 실패, 성공, 졸업, 승진, 배신, 적 등,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고, 사람과 사건들에 대한 반응과 감정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회개란 복잡한 존재인 ‘나 자신’에게서 건전한 길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어느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은 회개를 명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로서 회원은 자기 성소 때문에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 변화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복음은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이 회개는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회칙 제 7조)
회개는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인 외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현실과 상상에 의한 아픔에 대해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변화된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이해함으로써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하느님의 단죄라고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고, 인간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흑(黑)이 아니면 백(白)이라고 단정했다면, 앞으로의 삶의 많은 부분이 회색(灰色)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회개의 목적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 문제의 만능 해결사가 되겠다고 하지는 않으셨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초기 회개의 과정에서 이 가르침을 습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직자들에게 권고하였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5~9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꼭 간직하시고, 그분의 권고를 온전한 정신으로 채우십시오. 주님은 착하시므로 찬양들 하십시오. 여러분의 행동으로 그분을 찬미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온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여러분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주님 외에는 전능하신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생각과 모습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일에만 몰두하면 복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산사태와 같다. 탐닉에 지배를 당하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멀어진다.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에 계속 매달리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표지를 쉽게 놓치게 된다.
1. 우리는 흔히 편견이나 태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를 허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백인이나 흑인 아니면 중국인, 그 외 어느 인종집단이든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다고 믿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후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믿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렇지만 내 친구 중에는 안 그런 사람도 있어” 라고, 이것은 의미 없는 변화이며 복음적인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내적인 태도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그저 우리의 편견에 대한 예외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2. 살면서 경험한 것들이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아버지가 현대 자동차를 좋아하면 자녀도 그것을 좋아한다. 친구가 나에게 체크 무늬가 잘 어울린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믿는다. 크고 작은 영향이 살아가면서 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때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책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역사적 사건들과 질병이나 스트레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계속 변화하지만 흔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모른 채 변해간다. 그저 변화에 실려갈 뿐이다. 우리는 눈덩이와도 같이 삶의 언덕에서부터 구르기 시작하면 도중에 많은 것들을 묻히면서 내려간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거절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묵상하지 않는 삶의 양식이며 깨어있지 않는 변화와 회개일 뿐이다.
3. 요나와 같이 우리는 가끔 마음에도 없이 행동을 바꾸곤 한다. 누군가를 증오했지만 지금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과 어떤 상황에서 부딧히게 되면 마음 속에는 증오가 일어나게 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무도 눈치챌 수가 없다. 이것을 ‘잠수복 회개’ 라고 부른다. 잠수복을 입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피상적인 변화일 뿐이다.
회개는 삶을 통하여 계속되는 과정인데, 반성과 결심,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반성은 삶의 여러가지 문제를 명확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결심은 삶의 새로운 부분과 과거를 함께 조화시켜 준다.
저항과 공포는 변화와 회개에 있어서 장애물이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고 있는 반면, 미래에 무엇이 닥칠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변화와 회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들에 반발하고 두려워한다.
사도행전은 많은 변화의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9장에서는 사울의 변화 과정(사도 9,1~19)을 읽을 수 있다. 사울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종교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울은,
- 써러지도록 매질을 당했으며,
- 눈부신 빛으로 인해 장님이 되었고,
- 희망과 권한도 없어졌으며,
- 마을과 거처로 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 결백이 입증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열정적으로 헌신하였고,
-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같은 이야기에서 아나니아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따랐고, 하느님께로부터 환시를 받았다.
- 사울을 만나도록 초대되었고,
- 사울의 명성 때문에 저항하였고,
- 단순하게 ‘행하여라’ 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 행동하였다.
- 사울에게 “사울, 나의 형제”라고 불렀으며,
- 사울의 첫 크리스천 친구였고,
- 그리고는 그는 떠나갔다.
위의 두 회개의 과정은 각각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 과정도 다르고 시작하는 부분과 끝도 다르다. 그러나 하느님은 두 사람을 똑같이 부르신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흔히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고, 긍극적으로 과거의 두려움과 저항을 뛰어넘어 변화된 우리의 모습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준다. 회개한 프란치스코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다간 것처럼.
묵상
언어는 같은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리스어로 회개란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이는 “방향을 바꾸다, ~로부터 멀어지다. ~로 가까워지다. ~부터 느슨해지다. 포용, 성장, 성숙, 진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마음의 문을 닫는 것, 선입견, 기분이 언짢은 태도, 난폭함, 비관, 이기적인 마음, 옹졸함, 인색함, 나누는 것을 거절하는 것, 자기 중심주의, 그리고 복음적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 많은 것들”등을 버리려고 한다. 프란치스칸적인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 다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하는 것, 이해와 동정의 태도, 용서, 우리 자신의 성장과 다른 것에 대한 희망, 각기 다른 생각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 폭력에 대하여 관대하게 맞서는 것, 원수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들을 포용한다.
프란치스칸은 “어려움, 생각, 경험, 기도, 신앙, 기쁨, 슬픔, 축복,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을 나누는 능력”을 추구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그들의 사랑을 예수님과 프란치스코의 사랑에 비추어 본다. 우리는 눈을 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프란치스칸은 죄를 인정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아직도 사랑의 관계에서 서먹서먹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는 쉽지만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는 어렵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 회유, 그리고 성령의 힘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내 영혼이 새 생명으로 치유되기를 간구한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변화에 따른 어려움을 이겨내고 올바로 보도록 도움을 주신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기에 우리도 이웃을 사랑으로 용서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신다. “시몬, 시몬(당신의 이름을 넣으시오) 보시오, 사탄이 그대들을 밀알처럼 키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돌아오거든 형제들을 굳세게 하시오”(루가 22, 31~32)
프란치스코를 따르라는 부름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아빠(Abba)’로부터 사랑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인내, 사랑, 그리고 우리 ‘아빠’의 치유와 용서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응답은 작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신다. “너의 삶에 복음적 가치를 일치시키는 일을 계속하여라 회개하여라!”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단죄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는 영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해방했습니다.
다음의 질문은 회개에 대한 개인적인 묵상을 도와줄 것이다.
- 당신의 삶의 어떤 일들이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변화 과정과 유사한가? 사울의 삶과는? 아나니아의 삶과는?
- 회개 메타노이아(metanoia)의 참 뜻이 무엇인가?
- 당신 또는 우리 중의 누군가가 완벽한 진리를 알고 있는가?
- 우리는 어떻게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가?
- 하느님께서 초대한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 당신은 묵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가?
- 갈등과 혼돈이 회개를 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만약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예수님에게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엇이며 왜 그것을 숨기는가?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함과 충실함으로 부르셨는가?
-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변뿐만 아니라 그 이유도 제시하시오
개인적인 묵상은 내적인 자아와 교류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면서 자신을 잘 아는 것은 그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칙>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편지” 를 읽으시오
회개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신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주님의 이름으로!
1. 회개하는 이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마태 22,39) 하고, 악습 및 죄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육신을 미워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행하며 항구하는 남녀 모든 이들은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들인지!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고"(이사 11,2), 주님이 그들을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요한 14,23), 그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12,50).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마태 12,50)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이 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모시는 것은 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그러한 정배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 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 만한 그러한 형제와 그러한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 이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참조: 요한 10,15)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 맡겨 주신"(요한 17,6) "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요한 17,11)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참으로 믿었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요한 17,6) "나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요한 17, 8∼9) 그들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요한 17,17), "그들을 위하여 나도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간구합니다."(요한 17,20)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요한 17,11) 이들도 거룩해져 "하나가 되게 하소서."(참조: 요한 17,23) 그리고 "아버지,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시고"(요한 17,24), "당신의 나라에서"(마태 20,21)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하소서."(요한 17, 24) 아멘.
2. 회개하지 않는 이들
그런데 회개 중에 있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않으며 악습과 죄악을 일삼고 욕정과 자기 육신의 나쁜 욕망을 좇아 다니며, 하느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육적인 욕망을 가지고 세속의 걱정과 살아갈 근심에 싸여 세상을 육적으로 섬기는 남녀 모든 사람들(참조: 요한 8,41), 악마의 짓을 그대로 하고 악마의 자식들이 된 이들은 악마에게 붙들려 눈이 멀었습니다. 참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참된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기에 영적인 지혜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들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다한 그 재주도 다하였다."(시편 106,27) 그리고 "당신의 영을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나이다."(시편 118,21) 그런 이들은 악을 보고 알아채며 알면서도 행하여, 고의로 자기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눈을 뜨십시오, 소경들이여, 그대들은 우리 원수들인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게 속았습니다. 죄를 짓는 일은 육신에 달콤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육신에 씁니다.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모든 악습과 죄악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기"(참조: 마르코 7,21)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승에서도 내세에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오랫동안 소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속았습니다. 그대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모르고 있는 그 날과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쇠약해지고 죽음이 다가오고 결국 육신은 쓰디쓴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람이 죽든 보속을 할 수 있는데도 보속을 하지 않고 회개와 보속 없이 대죄 중에 죽으면, 당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시련 중에 마귀는 그의 몸에서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재능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1역대 1,12)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고 이들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은 나중에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더 많이 줄 수 있었고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던 재산을 벌지 못했으니, 그의 영혼은 저주나 받아라. 벌레들이 시체를 먹어 버립니다. 이리하여 그는 짧은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을 잃고 끝없이 고통받을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참조: 1요한 4,16) 부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읽어 달라고 자주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영과 생명이니" (요한 6,63) 거룩한 행동으로 끝날까지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참조: 로마 14,10) "심판날에 헴바쳐야 할 것입니다."(참조: 마태 12,36)
해설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만이 편지를 모든 사람에게 쓸 것이다. 이 편지의 연구 결과 두 가지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첫째 편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 편지는 프란치스코의 영혼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말한다.
1. 한 사람이 예수님의 영혼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배우자, 형제,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의 배우자로 결합하게 한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과 결혼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 말과 행동, 태도와 사랑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편지는 예수님께 기꺼이 응답한 사람에 대한 기쁨에 찬 내용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랑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졌다. 이 편지는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는 바로 그 확고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 반면에 프란치스코는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눈이 멀고, 귀먹은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죄악의 거미줄에 걸리게 된다. 죄는 시련을 불러오고 소유욕이 그들을 옭아매며, 그들이 죽을 때에는 친척들까지 불평을 하게 된다. 죄악에 빠진 사람들은 참된 지혜를 어리석음과 바꾸는 것이다.
편지는 프란치스코의 영감에 대하여 몇 가지 것을 보여준다.
1) 프란치스코는 글을 쓸 때 성서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느님의 영감은 프란치스코에게 소중하였던 것이다.
2) 하느님의 신실한 말씀은 복음과 은총이 된다
3)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결합하고 우리 서로서로가 결합한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인하여 놀랄만한 은총을 받는다.
4) 우리는 깊은 사랑을 예수님께 받았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신다.
5) 회개의 방법을 무시하는 것은 죽음을 가져온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그릇된 가치로 빠지는 것, 매사에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어 이런 것들에 현혹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까지도 잃게 되어 기쁨을 모르게 된다.
6)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라. 만약 당신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면, 도움을 청하라!
프란치스칸으로서의 부르심에는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우리는 억지로, 별 의미도 없이 내용도 없는 형제회에 부름을 받지 않았다. 가끔 이 부르심은 우리가 직면하는 그릇된 자신과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해심 부족 때문에 혼란한 여정이 되기도 하지만, 기쁨, 자기 발견의 계기, 또한 우리의 삶에서 놀랄만한 하느님의 창조적인 방법에 대한 경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우리는 이 길에서 인간적인 감정과 응답에 직면하기도 하는데, 그 때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로마 14,7~8
무릇 우리 가운데는 자신을 위해 사는 이란 없으며 자신을 위해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산다면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다면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공부>
성 다미아노 십자가
1205년에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였다. 십자가에서는 그에게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십자가는 성 다이아노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칸의 마음 안에 아주 특별한 장소로 여겨진다.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는 서기 1100년경에 그려진 유사한 여러 개의 십자가 중에 하나이다. 세리비안 수도자들에 의해서 이 십자가들은 움부리아 계곡에 소개되었다. 이 십자가 중의 하나가 다미아노 성당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1257년에 ‘가난한 클라라회’가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떠나갈 때, 그들은 십자가를 함께 가져갔다. 원본은 현재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성당에 소장되어 있고 복사본이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있다.
십자가의 중심에 자리한 초상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수직으로 달려 계시며, 눈을 뜨고 세상을 지켜보고 계신다. 예수님은 몸에 깊은 상처를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서 계시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신성하고 강한 그리스도와 상처를 입은 인간적인 그리스도를 결합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다른 인물들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 다음으로 큰 초상들은 다섯 증인들이다. 왼쪽부터 성모 마리아, 성 요한, 오른쪽은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백인대장 순이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그림 아래에 적혀져 있다. 작은 증인들 왼쪽 아래 있는 로마병사는 예수님 손에서 흐르는 피가 팔꿈치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 그 병사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순간 한쪽 눈에 치유의 기적을 받았다. 오른쪽에 있는 로마 병사는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던 사람이다.
십자가 양쪽 예수님의 양손 끝에 예수님의 죽음에 경탄하는 세 명씩의 천사들이 그려져 있다. 십자가의 수직 기둥 밑에는 6명의 초상이 있는데 대부분 그들은 움브리아의 수호 성인다. 그들은 성 요한, 성 미카엘, 성 루피노, 사도 요한, 성 베드로, 성 바오로이다.
십자가 제일 윗 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왕과 같은 의복을 입고 계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리의 왕이 되심을 보여준다. 에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10명의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계신다. 십자가 가장 위쪽에는 하느님께서 오른손 두 손가락을 벌려서 축복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의 오른쪽 종아리 근처에는 새 종류가 그려져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수탉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이것을 불멸의 상징인 공작이라고도 한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는 프란치스칸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프란치스칸 생활 양식의 서약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한다. 다음의 ‘성 다미아노 십자기 앞에서 드리신 기도’는 양성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자주 사용한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토론 주제>
1. 프란치스코(또는 사울과 아나니아)의 변화와 회개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본 후 당신의 말로 직접 그 과정을 설명해 보시오(사도 9,1~20 참조)
2. 당신이 답한 질문 1과 당신의 회개 과정을 비교하시오. 프란치스코(또는 사울과 아나니아)와 당신 사이에서 어떤 공통된 부분이 있는가?
3. 당신의 삶 안에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당신의 회개를 더디게 하는 ‘나병환자’ 즉 ‘두려움과 망설임의 대상’ 이 있는가? 그들이 당신의 변화(내적이든 외적이든) 에 도움을 주거나 혹은 방해를 하는가?
4. 변화와 회개는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당신은 무엇을 버려야 하고 없애야 하고 포용해야 하고 바꾸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을 회개로 이끄신다고 느끼는가?
5. 재속 프란치스코 회칙의 바탕이 되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설명하여 보시오. 두려움, 매력, 혼동, 싫음, 도전, 확신 등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 감정과 이유를 말해보시오.
<성서 묵상>
+ 루가 14, 16~24
루가의 이야기는 초대를 거절한 것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이 이야기 속에 있다고 가정하고 당신의 삶에서 주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때를 이야기해보자. 그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누구와 일체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주님께서 당신을 회개로 초대할 때 당신을 변명할 내용을 적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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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회개
-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환시로 시작되었다. 기사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복음에 대한 갈망으로 바뀌었다. 그는 성 다미아노와 포르치운쿨라를 수리하면서 회개 과정을 보냈다
- 그는 회개 여정의 초기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혼돈스러워 했으나 생애 마지막에는 열정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받아 들였다.
- 집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기도하던 중 그는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세동료 5,13)그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 그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동안 주님의 뜻을 몰라 궁금해하던 것을 버리고 할 일이 생겼음을 알았던 것이다.
-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꼭 간직하시고, 그분의 권고를 온전한 정신으로 채우십시오. 주님은 착하시므로 찬양들 하십시오. 여러분의 행동으로 그분을 찬미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온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여러분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주님 외에는 전능하신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5~9)
-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복음적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 많은 것들”등을 버리려고 한다. 프란치스칸적인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 다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하는 것, 이해와 동정의 태도, 용서, 우리 자신의 성장과 다른 것에 대한 희망, 각기 다른 생각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 폭력에 대하여 관대하게 맞서는 것, 원수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들을 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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