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처럼
서문
레스터 바흐 OFM Cap
새 천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기 위해 세계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내일이 세상은 환상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견으로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인 우리들도 새 날을 맞이하여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프란치스칸의 새로운 천년은 다가오는 미래를 맞이하려는 것이 아니고, 지나간 천년을 회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 매일 매일의 오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사는 것도. 지나간 과거를 사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오늘 하루,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다음 날로 또 그 다음 날로 계속 인도해갑니다. 누나인 죽음이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갈 그 날까지.
우리는 오늘을 희망으로 맞이합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칸으로 불리움을 받은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의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힘이 되어 주시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Catch Me a Rainbow Too’ 는 프란치스칸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하나의 돌멩이입니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가신 길을 따라 가도록 안내 해 줄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공부하고, 일하고, 묵상하고, 대화하고, 나누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하느님께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변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합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잘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하루의 일과를 하느님 안에서 계획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두 팔을 쳐들어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시오. 오늘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오늘 일어날 모든 일을 감사하십시오. 사람들과 희망을 나누고 희망할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빛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당신이 빛이 되어 주십시오. 모든 피조물을 통해, 아주 작은 피조물 안에까지 현존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하느님에게 불가능이란 것은 없습니다. 오늘을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일할 날은 오늘 하루뿐입니다.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오늘 하루를, 이웃과 더불어 기쁨을 살고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칸은 생명의 흙으로 사랑의 그릇을 빚어내는 도예가 입니다.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평화와 사랑과 기쁨을 전하십시오.
‘Catch Me a Rainbow Too’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내가 실천하지 않은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으로 인한 고통과 병 중에도 간직했던 마음의 평화, ‘가난 부인’이란 특전을 얻으려는 클라라의 투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를 따르도록 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성소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알고, 우리의 생활로 ‘태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선하신 하느님께 찬미드리고 성실하신 하느님께 소리 높여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입니다.
이 책을 공부하면서, 성서를 통해 묵상하고 깨우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이 책의 말씀들이 당신의 생각을 움직여 1978년에 인가된 회칙에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게 하십시오. 세상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사랑이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방법을 알아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고 세상의 물질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는 아무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놀라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와
능력의 샘이신 성령이시여!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주소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로 살게 하소서.
희망과 기쁨, 사랑과 평화로
그칠 줄 모르는 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 되게 하소서.
성령이시요 ‘작음’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시니,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소서 하느님.
감사를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의 불로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아멘.
지혜서 19, 22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을 들어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을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1장 프란치스칸의 여정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는 프란치스칸 성소는 여러가지 삶의 체험을 통해서 시작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부르심’ 받은 과정을 통해 우리 또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성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여정을 통해 프란치스코의 체험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것이다.
훌륭한 기사가 되어 영광을 누리고 싶은 꿈으로 오래 전부터 기사도에 심취해 있던 프란치스코 죠반니 베르나르도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와 페루지아의 전투에 나가 승리함을써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꿈꾸던 기사와는 반대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전쟁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삶에 대해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감옥에 있는 동안 친구들과 밤이 새도록 즐기던 연회와, 마음대로 돈을 뿌려 대던 멋진 나날을 회상하면서 고향 아시시를 그리워했다. 그 기억들로 인해 감옥생활은 더욱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다. 일년 후 감옥생활을 마치고 그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는 10대의 꿈 많은 기사 소년이었던 프란치스코는 스무 살의 병약한 젊은이가 되어 교황인 아시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주변 동산들을 자주 산책하였다. 태양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스치는 바람도 여전히 감미롭고 향기로웠지만, 예전의 즐거웠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이 허망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기쁘지 않았고,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으로 프란치스코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즈음 브리엔느의 월터 백작이 아풀리아 전쟁을 하기 위해 새로 병사들을 모집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보다 군에 입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군에 지원하기로 하였다. 1205년 23살이 되던 해, 그가 월터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려고 가던 중 스폴레토 계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프란치스코야, 너는 주인과 종 중에 어느 편을 섬기려 하느냐?”하는 강렬한 내면의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길로 발길을 되돌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기쁨과 희열과 환희를 주던 것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것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졌다. 스폴레토 계곡에서 들었던 내면의 물음이 자꾸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말씀은 프란치스코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아발견을 향한 우리의 여정 또한 프란치스코가 겪었던 삶의 여정과 비슷할 수 있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내면의 느낌들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내면의 감추어진 두려움과 잠재된 능력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도 언제가는 표면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도 있다. 심지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조차 때론 혼란스러워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무력감과 좌절감 즉 감당할 수 없는 불안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일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엄격한 율법주의 자가 되거나 또는 자신을 합리화함으로써 잠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사람들은 삶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보다는 기술의 발달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를 우상화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람들과 시귀거나 친해지는 것을 꺼려한다. 또 교회 신자들의 비판이 두려워 하느님을 찾는 척하면서도, 동시에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돈을 벌어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 바란다. 우리는 삶이 괴롭거나 고통스러우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한탄하면서도 고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온갖 일과 활동에 전념한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있는 공허함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을 해친다 해도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감추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감추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겉으로 떠들고 외치면서 기분 좋은 것처럼 행동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울해진다. 마음의 모든 것을 감추고 자신을 위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울해진다. 마음의 모든 것을 감추고 자신을 위장하면 할수록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느껴진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갈망하던 평화가 오겠지 하고 희망을 걸지만,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나병환자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보다 재물을 중요시했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자 오히려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변화하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마치 한 몸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확신도 없었으나 마음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자 아버지로부터 “정신차려!”라는 심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번뇌하고 아주 괴로워하였다. 행여 아버지와 불가피한 상황까지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친구들도 지난 날 그토록 놀고먹기를 좋아하던 프란치스코가 변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끝내는 아버지로부터 협박을 당하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했고 더 큰 두려움과 번민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그를 집으로 끌고 와서 지하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과 번민에 빠져있던 그는 하루 하루가 무척 괴로웠다.
이와 같은 프란치스코의 투쟁 과정이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 일어나는 사건은 다르지만 인간적 갈등이나 느낌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선과 거룩함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와 이기심 사이에서 투쟁하고 견디기 힘든 갈등을 겪어야 한다. 건전한 자애심과 진정한 자존심을 향한 여정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눈앞에 보이는 성공이 없으면 바로 두려워하고 뒤로 물러서고 만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닌 두려움과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임을 믿는다.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은 자아발견의 여정을 선택함을 뜻한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그분 아드님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1고린토 1,9)라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하심을 거역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응답을 통제할 수는 있다. 우리가 프란치스칸으로 불림 받은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프란치스코를 우리의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베드로’나 ‘데레사’중 한 명이 될 수는 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여정이 비록 프란치스코와 비슷하다 하더라도 성인이 우리를 감화시켰던 힘을 반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자취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과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었고, 그가 하느님과 복음에 응답하였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참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순종을 제시하였다.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나는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를 감화시켰던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고 우리도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하며 하느님께 응답하게 될 것이다. 나를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부르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이다. 따라서 재속 프란치스코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과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신념을 갖고, 다른 이들을 복된 프란치스칸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인간 삶의 여정에서
우리의 삶은 수많은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프란치스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은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여 이 땅에 살게 하시고 당신의 선을 피조물과 함께 나누신다.”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3) 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훌륭하게 창조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 뇌에서 신호를 보낼 때마다 신체 일부가 움직이는 그 신비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경이로운가!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과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 하나 하나에 귀기울여 보라. 이 모든 경이로움은 인간이 풀어야 할 수학공식이 아니라 새로 발견되어야 할 신비로움인 것이다.
우리 안에서 약함과 강함이 공존한다. 때로는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느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약할 때나 강할 때나, 하느님을 느낄 때나 느끼지 못할 때나 언제나 항상 곁에 계신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우리 삶의 역설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므로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게 된다. 우리가 절망의 끝에 매달려 있다고 느낄 때가 바로 하느님 안에서 새 희망으로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뜻하신 대로 우리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불완전하고 오류를 저지르고, 쉽게 실패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부족한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 진실로 훌륭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인 나 자신을 복음이 아닌 길을 선택하여 잘못 사용할 수도 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했습니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트기는 했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 가운데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숨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기름진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백 배나 맺었습니다.”(루가 8,5~15참조) 이처럼 좋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랄 수 있도록 땅을 갈고 가꾸는 일은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갖가지 학대를 받는다면 자신의 존엄성을 잊고 방어적인 삶으로 되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악조건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충만하며 언제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너는 나쁜 사람이며, 멍청하고, 서투르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면,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괴적인 일인가. 하느님께서 주신 존엄성이 온갖 부정적인 말들에 의해 묻혀 버린다 해도,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이웃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인간 본연의 소중한 모습을 찾게하고 빛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곤란해 한다. 흔히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스타일의 옷을 입고, 특유의 말씨를 쓰며, 특별한 생활 방식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사고싶은 물건을 마음대로 사며 자신의 부를 즐긴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은 부를 즐기는 것이므로 우리가 따라가거나 흉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은 마음의 양식에는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 내면의 기쁨과 평화가 흔들려서는 안된다.
물질에 대한 우선적인 가치 부여의 결과는 삶의 다른 부분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효율성만을 생각하게 되고, 참된 우정보다는 이익을 먼저 챙기며, 오랜 시간 노력해서 얻는 일의 대가보다는 즉각적인 보상에 더 관심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다. 따라서 순간적인 해결만을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흔히 하느님의 존재가 소중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가족 관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즉 부모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생에 대한 생각과 접근 방식의 타당 여부를 묻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그들의 삶을 답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장한 후에는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인생에서 위기의 순간들은 우리를 황폐화시킨다. 고통, 죽음, 배반, 상처, 실패, 포기, 이혼, 우울증, 질병, 실직 등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믿음 을 깨트린다. 그와는 반대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은 우리를 자극시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든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삶은 그대로 멈추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내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변화하기를 거부한다면 겉으로는 살아있지만 안으로는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천하를 손에 쥘 것만 같은 젊은 날의 환상은 온갖 질병에 의해 조금씩 깨어지고, 어제는 정답이었던 것이 오늘은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또 교묘하고 잘못된 광고는 우리의 희망을 흐리게 한다. 바오로 성인은 우리에게 넓은 길보다는 좁은 길로 걸어가기를 다음과 같이 권유한다. ‘여러분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시오. 배운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튼튼히 세워지고 믿음으로 굳건해져 넘치는 감사를 드리시오.”(골로사이 2, 6~7)
형제회의 입회를 결심하며
재속프란치스코의 입회는 자신의 삶에 여러가지 변화를 요구하는 등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결정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갖고 오랬동안 기도한 후에 올바른 결정을 하는 것이 좋겠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해서 서서히 알고 배우게 되겠지만, 입회는 프란치스칸 삶을 살고자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
프란치스칸 영성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훌륭한 양성지침과 양성교재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삶들이 양성과정을 소홀히 사고 프란치스칸 생활양식만을 선택하려 하지만 회원이 되기 위한 초기 양성과정은 매우 중요하므로 헌신적인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초기 양성기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1.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을 따르려는 성소가 있는지 충분히 탐구하도록 한다.
2. 재속 프란치스코회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교육기간을 갖게 한다
3. 형제회와 지원자, 그리고 입회자 상호간의 친교를 통하여 건전한 공동체로 발전시킨다.
4.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과 회헌,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그리고 프란치스칸 전통 등을 가르치고 알게 해 준다
5. 하느님의 부르심과 응답을 시험해 보는 과정을 마련해 준다.
6. 지원자와 입회자가 프란치스칸에 관한 모든 것들을 탐구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7. 초기 양성기는 지원자와 입회자가 재속 프란치스코의 부르심에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8. 함께 기도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양식은 마술처럼 한순간에 성스러움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단순히 입회한다고 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려는 부르심을 마음 속 깊이 느꼈을 때 비로소 응답하는 것이다. 성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서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재속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고 해서 반드시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입회를 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프란치스칸은 아주 인간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완벽하게 자선을 행하는 형제회도 아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애써 노력하며 서로 도와주려고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변화하며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공동의 목표와 확고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변화와 성장을 당연하게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고받는 격려가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영의 친교가 있으며 애정과 동정심이 있다면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일치된 마음으로 생각하여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시오.”(필립비 2,1~2)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및 간추린 역사
1978년의 회칙은 재속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삶을 내포하고 있고, 재속 프란치스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회칙은 세계 각국에 있는 재속 프란치스칸과 협의한 후에 쓰여졌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비록 회칙 그 자체로는 변화될 수 없지만, 회칙은 영적 성장을 위한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회원들은 회칙을 살아감으로써 세속에서 프란치스칸 정신을 드러낸다.
현 회칙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쓰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가 머리말로 되어 있다. 비록 이 편지의 연대(1213~1222년 사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각과 ‘아시시의 회개자들’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 편지의 중요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12, 13세기의 유럽은 회개자의 모임들이 흔히 있었다. 회개자들은 때때로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선사업을 하고 특별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자신을 성화시키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런 삶들 중에 몇몇은 매우 극단적이고 이단적이고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건하고 정통적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당신의 첫 제자들을 선교 여행지로 보냈을 때도 그 형제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다.
남자 수도회인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여자 수도회인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세속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굳건한 신뢰를 받아들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들은 폭력을 거부하였고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스러운 방법을 강구하였다. 즉 복수 대신 화해의 길을, 독단적인 힘의 남용보다는 믿음의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그들은 최초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으며 초기 명칭인 ‘회개의 형제 자매회’라 불리웠다. 그 당시에 그들이 세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는데 병역 징집에 대한 거부는 전쟁 중이었던 그 당시에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처음부터 프란치스코 3회와 긴밀하게 형제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프란치스코회와 재속 프란치스칸은 긴 역사 속에 언제나 가족으로 변치 않는 유대관계를 지켜왔다. 초기 프란치스코 3회는 그 자체 조직에서 운영을 해 왔으나. 1215년에 열린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교회 내부에 개혁을 이루어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공의회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 양성을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도록 하였고, 교회 내의 여러 변화의 움직임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89년 프란치스칸이었던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작은 형제회의 관할 하에 두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회칙을 만들었다. 1289년의 회칙은 1883년까지 효력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를 연구해 보면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의 기복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부침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883년에 있었던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 변경은 축복이기도 했고,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1800년대에 이탈리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재산과 세속적인 권위를 잃었다.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교회 재산을 몰수한 정당과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로 인해 교회는 서서히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 변화는 당시 교회의 많은 정책과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83년 교황 레오 13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새 회칙을 인가하였다. 그 회칙이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새로운 지침이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당신의 교회정신을 반영하기도 한다. 회칙은 사회운동, 정치적 참여, ‘불건전한’ 오락과 ‘세속적 세계’와의 지나친 접촉은 금지하였다. 즉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외부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자체가 내부적으로 경건한 사회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일부 회원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보다는 기도를 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였고, 세속에 영성을 전달하기 보다는 기도회에 나가기를 선호했다. 1883년에 인가한 회칙은 폭넓은 복음적 삶보다는 개별적 신앙심을 고무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 방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입회가 수월해 회원이 수적으로 팽창했으나 생명력 있는 프란치스칸 정신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위의 설명들과 같이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모든 교회를 대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황 레오 13세는 폭넓고 예언적인 사회적 안목을 담은 회칙을 여러 차례 반포했고, 여러 형제회에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회원들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까지 깊숙이 다가가 끊임없이 전하기도 하였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초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나. 다시 말해 회원들이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졌지만, 사회 속의 그들의 역할은 애매모호하고 불 명확하여 이제는 우렁찬 목소리를 잃어버린 종이 호랑이가 되어 버렸다.
20세기에 와서
20세가에 들어와서 사회와 교회 안에서 변화의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세계 대전, 경제 공황, 각종 폭력행위들, 베트남 전쟁, 허물어져 가는 공산주의의 독재정치, 테러리즘, 기술 성장과 통신의 발달은 우리 사회의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연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해방신학, 신학과 윤리에 대한 새로운 주장, 사회운동과 세계 속에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위한 관심, 여성 해방 운동, 미국 내 성직자들의 부족, 새로운 선교활동과 일반 신자들의 교회 활동 등은 가톨릭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1883년의 회칙은 변화되고 있는 세상과 교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의 재속 형제회와 재속 프란치스코회 위원회에서는 새 회칙을 개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수년간에 걸쳐 계속되었고 1회, 2회, 그리고 율수3회의 도움을 받았다. 여러가지 기본적인 택스트를 만들어 검토하고, 충분한 협의를 거쳐 새 회칙을 제정하여, 1978년 6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칸은 이 회칙을 ‘바오로 회칙’이라고 부른다.
1978년의 회칙은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양식을 선포하고 있으며, 재속 프란치스칸이 사회 정의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앞장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제 15조). 그리고 기도와 관상(제8조)으로 평화의 전달자이고 완전한 기쁨의 선포자(제 19조)로 형제적 화합을 위해 노력하도록 격려하고 잇다. 1978년의 회칙은 재속 프란치스칸에게 현세의 제반 문제들을 복음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해설이나 설명이라도 재속 프란치스칸의 서약만큼 직접적이고 효과적일 수는 없다. 프란치스코회나 클라라회, 율수3회 등은 프란치스칸 정신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와 결합하고 있다.
회칙 14조
선의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을 더욱 형제적이고 복음적인 것으로 건설하도록 불리운 회원은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더 완전한 인간이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크리스천의 봉사 정신으로 자신의 책임을 힘껏 완수해야 한다.
<프란치스칸 공부>
1182
프란치스코 죠반니 베르나르도네는 아시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포목상인으로 거부였으며, 그의 어머니 피카 부인은 프랑스 남부 출신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산 제오르지오에 있는 교회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학식을 공부하였다.
1198
프란치스코가 16살이 되었을 때 아시시의 중산층과 시민들이 귀족에게 봉기하여 봉건 제도 하의 권력의 상징인 로까 마죠레 성체를 공격하였다. 프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상인 계급이었고, 클라라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1202
아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기사의 영광을 꿈꾸며 꼴레스트라다의 치열한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아시시가 패하자 그는 전쟁 포로가 되어 붙잡혔다.
1203~ 1204년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나 병든 젊은이의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1205년
희망은 계속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기사가 되기를 꿈꾸며 월터 백작의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스폴레토로 가던 도중 아시시로 되돌아가라는 환시를 보게 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하던 이 시기를 프란치스코는 힘들게 보냈다.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 하던 중, 프란치스코는 십자가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듣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입을 고쳐라…”라는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수리하였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에서 생활하였다. 몇몇 동료가 동참하자 그는 간단한 회칙을 써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 인준을 받았다. 그들은 움막에서 살았고, 음식은 동냥하며 연명하였으며, 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 아시시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첫 동료들은 퀜타발레의 베르나르도, 카타니아의 베드로, 에지디오 등이었다.
1212 년
아시시의 클라라가 프란치스코가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녀는 가난함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 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의 회’(가난한 클라라회)를 창설하였다.
1209~ 1221 년
이때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창설되었고,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를 저술하였다(첫 번째 편지).
1221 ~ 1223년
프란치스코는 수도회 형제들을 위한 좀 더 긴 회칙을 썼다. 이 회칙이 분실되자, 프란치스코는 또 다른 짧은 회칙을 작성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준받았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을 여러 나라에 선교하러 보냈다. 1219년에 그는 근동과 성지, 시리아로 가는 동료들과 동행하였다. 그곳에서 술탄 멜렉 알 카밀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술탄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1224년
9월에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았다.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으며 눈병 또한 악화되고 장에도 이상이 생겼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피조물을 찬미하는 ‘태양의 노래’ 를 저술하였다.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프란치스코는 운명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 시편 141편을 듣고 있었다. 운명하기 직전 그가 ‘태양의 노래’에서 말한 대로 자매인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44세였고, 회개한지 스무해 째 되는 해였다. 그의 유해는 처음 그가 다니던 성 지오르지어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230년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토론 주제>
1. 양성기간 동안 자신의 삶을 평가해 보자. 다음 질문은 자신을 돌이켜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부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 가장 불행했던 기억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이를테면, 가난한 삶들, 인종이 다른 사람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 부자들, 병자들, 자체 부자유자들에 대해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권위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복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다음의 것들은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교회, 성서, 감정과 느낌, 스포츠, 학교, 독서, 사회운동, 일 권력, 중독, 등등. 당신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기쁘고 성취감을 느끼는가? 당신은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가 가장 힘이드는가? 당신의 삶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고 그 중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싶은 부분만 나누시오
2.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3. 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어떤 경험이나 느낌들이 당신의 것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유를 적으시오.
4. 당신은 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설명하시오.
5.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함으로써 형제회에 어떤 도움을 주고 싶은가?
<성서 묵상>
+ 시편 131
시편을 읽고 묵상한 느낌에 대해 나누시오 이 시편을 읽고 기도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순례의 노래. 다윗]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제1장 프란치스칸의 여정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부르심’ 받은 과정을 통해 우리 또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성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여정을 통해 프란치스코의 체험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것이다.
- 1205년 23살이 되던 해, 그가 월터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려고 가던 중 스폴레토 계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프란치스코야, 너는 주인과 종 중에 어느 편을 섬기려 하느냐?”하는 강렬한 내면의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길로 발길을 되돌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기쁨과 희열과 환희를 주던 것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것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졌다. 스폴레토 계곡에서 들었던 내면의 물음이 자꾸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말씀은 프란치스코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자아발견을 향한 우리의 여정 또한 프란치스코가 겪었던 삶의 여정과 비슷할 수 있다.
-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자 오히려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변화하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마치 한 몸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우리는 위선과 거룩함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와 이기심 사이에서 투쟁하고 견디기 힘든 갈등을 겪어야 한다. 건전한 자애심과 진정한 자존심을 향한 여정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눈앞에 보이는 성공이 없으면 바로 두려워하고 뒤로 물러서고 만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닌 두려움과 불확심함에도 불구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임을 믿는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은 자아발견의 여정을 선택함을 뜻한다
- 우리가 프란치스칸으로 불림 받은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프란치스코를 우리의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기 위함이다.
- 프란치스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어떤 것은 기름진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백 배나 맺었습니다.”(루가 8,5~15참조) 이처럼 좋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랄 수 있도록 땅을 갈고 가꾸는 일은 우리의 일이다.
-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든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해서 서서히 알고 배우게 되겠지만, 입회는 프란치스칸 삶을 살고자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 많은 사람들이 양성과정을 소홀히 하고 프란치스칸 생활양식만을 선택하려 하지만 회원이 되기 위한 초기 양성과정은 매우 중요하므로 헌신적인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양식은 마술처럼 한순간에 성스러움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단순히 입회한다고 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려는 부르심을 마음 속 깊이 느꼈을 때 비로소 응답하는 것이다.
- 프란치스칸은 아주 인간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완벽하게 자선을 행하는 형제회도 아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애써 노력하며 서로 도와주려고 할 뿐이다
- 이 회칙은 세계 각국에 있는 재속 프란치스칸과 협의한 후에 쓰여졌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비록 회칙 그 자체로는 변화될 수 없지만, 회칙은 영적 성장을 위한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회원들은 회칙을 살아감으로써 세속에서 프란치스칸 정신을 드러낸다.
- 현 회칙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쓰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가 머리말로 되어 있다.
- 남자 수도회인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여자 수도회인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세속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굳건한 신뢰를 받아들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들은 폭력을 거부하였고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스러운 방법을 강구하였다. 즉 복수 대신 화해의 길을, 독단적인 힘의 남용보다는 믿음의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그들은 최초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으며 초기 명칭인 ‘회개의 형제 자매회’라 불리웠다
- 1289년 프란치스칸이었던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작은 형제회의 관할 하에 두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회칙을 만들었다. 1289년의 회칙은 1883년까지 효력을 유지하였다.
- 1883년 교황 레오 13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새 회칙을 인가하였다.
- 20세기에 와서 1883년의 회칙은 변화되고 있는 세상과 교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의 재속 형제회와 재속 프란치스코회 위원회에서는 새 회칙을 개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수년간에 걸쳐 계속되었고 1회, 2회, 그리고 율수3회의 도움을 받았다 여러가지 기본적인 택스트를 만들어 검토하고, 충분한 협의를 거쳐 새 회칙을 제정하여, 1978년 6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칸은 이 회칙을 ‘바오로 회칙’이라고 부른다.
- 1978년의 회칙은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양식을 선포하고 있으며, 재속 프란치스칸이 사회 정의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앞장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제 15조). 그리고 기도와 관상(제8조)으로 평화의 전달자이고 완전한 기쁨의 선포자(제 19조)로 형제적 화합을 위해 노력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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