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1. 저자, 토마스 첼라노(Thomas Celano)

Margaret K 2018. 1. 19. 03:16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중 가장 먼저 씌여진 첼라노 전기

1생애, 2생애, 3생애를 모두 한 권으로 묶어 올립니다. 이 책의 번역은 작은 형제회의 이재성(보나벤뚜라) 수사가 했으며, 분도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1. 저자, 토마스 첼라노(Thomas Celano)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의  최초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형제는  중부 이태리의 조그마한 도시 첼라노(Celano)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언제나 토마스 첼라노라고 부른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치가 않다. 바티칸에서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교회」(Eccelesia, 1960)에서 한 작가는 토마스 첼라노의 출생년도를 1185년으로 잡고 있다. 이것이 비록 확실한 것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사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애를 여러 면으로 고려해 볼 때 12세기 말경에 출생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토마스 형제가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시기는 대개 1213년에서 1216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마도 1215년이 아닐까 보고 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제1생애 56번과 57번에서 자기의 입회 시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는 프란치스꼬의 모로코 선교여행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입회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프란치스꼬의 선교계획과 순교에 대한 열망을 꺾으셨다는 해석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그러나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기로 하신 선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꼬가 멀리 스페인까지 여행했을 때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 더는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발병(發病)케 하시어, 그가 떠났던 여행에서 다시 불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어서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꼬가 금방 뽀르찌웅꿀라에 도착하였고, 얼마 안 있어, “교육도 받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 그에게 합세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토마스 형제가 이들 중의 하나였다고 보고 있다. 프란치스꼬가 스페인에서 뽀르찌웅꿀라로 돌아온 시기는 1214년 초()일 것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토마스는 교육을 많이 받은 귀족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다. 어떤 이는 그가 입회하기 전에 이미 신품을 받았으리라 보고 있다.

 

그가 프란치스꼬회 회원이 된 몇 년간의 이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에 관한 소개 자료는 지아노의 요르단 형제 연대기뿐이다. 요르단 형제는 거기에서 1221년에 독일에 형제회를 설립할 때에 그 설립 요원으로 선발된 형제들 중에 후에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전기와 제2 전기를 쓴 토마스 첼라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설립 요원들은 1221년 아씨시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선발되고 나서 약 3개월 후인 1221 9월에 독일로 떠났다. 그들은 10 16일에 독일의 아우그스부르그에 도착하였고, 인솔자는 스페이어의 체사르 형제로서 총회에서 독일 관구의 초대 봉사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이듬해 1222년에 체사르 형제는 관구 총회를 보름즈에서 개최했고, 이 총회에서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마인쯔와 보름즈와 쾰른, 그리고 스페이어의 보호자 형제로 임명되었다. 1223년에 체사르 형제는 자기가 아씨시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올 동안 독일 관구 봉사자 대리로 토마스 형제를 임명하였다. 이 총회는 체사르 형제를 봉사자 임무에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삐사의 알베르또 형제를 임명하였다.

 

토마스 형제는 1223 9 8일까지 독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이유를 요르단 형제는 그가 9 8일에 스페이어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에 그가 보호자 직책에서 물러난 듯하다. 요르단 형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에 독일 관구는 네 명의 보호자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는 이때 임명을 받지 못하였다. 아마도 토마스 형제는 이때에 곧바로 독일을 떠나 이태리로 귀국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은 독일 관구와 관계되는 일에서 오르내리지 않고 있다. 그의 이름이 이태리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조금 지난 후이다.

 

토마스 형제는 성인의 마지막 2년간의 생활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그가 성인의 마지막 몇 년간 특히 1224년에서 1226년간의 생활을 소상하게 적고 있는 것은 자기 경험도 약간은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다른 형제들에게서 성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얻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28 7 16일에 있었던 성 프란치스꼬의 시성식 장면을 묘사한 것을 보면 너무도 세밀하여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시성식이 있기 전에 이미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성인의 생애를 집필하라는 위임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1230년에 토마스 형제는 아씨시에 살았다. 지아노의 요르단 형제가 라인(Rhine) 관구 봉사자 오또(Otto)를 대신하여 총봉사자 빠렌띠(Parenti)와 함께 토마스 형제를 방문한 것이 이때이다. 이때에 토마스 형제가 성인의 유물 몇 점을 독일로 가지고 가도록 요르단 형제에게 주었다. 프란치스꼬의 유해를 아씨시의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건립된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할 때에 그 예식에 토마스 형제가 참석했던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후 14년 동안 토마스 형제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프란치스꼬회 초기 역사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1224년 제노아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봉사자(1244-1247)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리하여 총봉사자는 성 프란치스꼬와 관계되는 모든 자료나 기적들을 모아서 자기에게 보내 달라는 협조를 모든 형제들에게 요청했다. 이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토마스 형제는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 바로 이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몇 년이 흐른 뒤, 1250년 가까이 이르러 토마스 형제는 당시에 새 총장이 된 빠르마의 요한 형제(1247-1257)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에 대한 저술을 또 하나 요청받았다. 이때에 저술된 책이「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Tractatus de Miraculis B. Francisci)이다. 저술 시기는 1250년에서 1253년 사이가 된다. 아마 이때에도 토마스 형제는 제2 생애를 저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씨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성녀 글라라 전기를 쓴 시기인 1255년과 1256년에도 그는 틀림없이 아씨시에 있었다. 성녀 글라라의 생애는 교황 알렉산델 4(1254-1261)의 주문에 의한 저술이었다.

 

토마스 형제는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저술하기 위해 아씨시에서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말년을 마르키아 관구의 따글리아꼬쪼에서 보낸 것 같다. 아마도 여기서 그는 바로(Varro)의 성 요한 수도원 글라라회 자매들을 지도했던 듯하다. 그는 1260년에 죽었고, 그 후라도 해도 1260년 근처이다. 그리고 그 수녀원에 묻혔다. 그러나 글라라회 자매들은 이 수녀원을 1476년에 폐쇄하였고, 1506년에 교황 율리아노 2세의 명에 의하여 이 수녀원은 꼰벤뚜알 형제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1561년에 토마스 형제의 시신은 꼰벤뚜알 형제들의 성당 중앙제대 뒤에 안치되었고, 18세기 초에 꼰벤뚜알 형제들의 수도복이 입혀졌으며, 이어서 따글리아꼬쪼 성당의 중앙제대 밑에 안치되었다.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B. THOMAS DE CELANO S.F.D.

SCRIPTOR CRONICAR ET SEQUENTIAE

MORTUOR

(성 프란치스꼬의 제자이며, 전기작가요

장례미사의 연송(連頌)을 쓴

첼라노의 복된 토마스)

 

 

                                 2. 토마스 첼라노의 작품들

 

                      (1)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생애 (Vita prima s. Francisci)

 

1228 4 2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께서는 성 프란치스꼬를 공경하기 위한 성당 건립을 허락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3개월 후인 1228 7 16일에 있을 성인의 시성식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이 발표와 함께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토마스 첼라노에게 이 새로운 성인의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짐작된다. 첼라노 자신도 “위대하신 그레고리오 교황 성하의 명을 받자와”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생애를 쓴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토마스 형제는 형제회 창설자의 제1 생애를 집필하는 일에 즉각 착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작품의 한 필사본에 적혀 있는 주석에 신빙성을 부여한다면, 명령을 받고 나서 7개월 후인 1229 2 25일에 이 저서가 교황께 바쳐졌고, 이어서 공인되었다고 필사본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1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파리 필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영광스러운 교황 즉위 제2 2 25일 복되신 그레고리오 9세 교황 성하께서는 뻬루지아에서 이 전기를 접수하고 확인하셨으며, 출판할 것을 허락하셨다.” 이 파리 필사본이 옳건 그르건간에 이 전기는 1230 5 25일 이전에 완성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아씨시의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안치되어 있던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를 새로 건립된 대성당으로 이장하는 중요한 사건이 바로 1230년에 있었는데도 이것을 수록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께서 어떤 이유로 해서 특별히 토마스 첼라노 형제를 지목하여 그에게 이 임무를 맡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이 임무에 적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소위 식자(識者)였고, 아마도 그는 성 프란치스꼬가 스페인에서 돌아온 직후에 형제회에 입회한 “교육을 많이 받은 귀족들”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하건대, 토마스 형제는 노련한 문필가였으며 또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력적인 예술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다른 문학작품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계기로 교황의 시선을 끌게 되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다.

 

토마스 형제는 제1 생애를 쓰게 된 동기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그 머리말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1 생애는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적 순서에 따라” 프란치스꼬의 청년기와 회두, 수도회 창설, 그의 거룩한 생활과 가르침이다. 1223년 그렉치오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예절을 거행하는 프란치스꼬의 이야기로 이를 마감한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는 역사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2부에서는 프란치스꼬의 마지막 2년간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이 오상과 죽음과 성인의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3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1228 7 16일에 있었던 시성식에 관한 것이고, 뒷부분은 시성식 때에 접수되어 낭독되었던 기적들을 다루고 있다. 끝맺음으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간단하게 독자들에게 청한다.

 

토마스 형제는 자기의 개인적인 체험과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하여 이 책을 저술한다. 위에서 짧게 소개한 그의 일생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실상 성 프란치스꼬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목격자들 중에서 틀림없이 저술 당시에도 살아있던 프란치스꼬의 초기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레오, 루피노, 안젤로가 그들이다. 엘리아 형제에게도 문의할 수 있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귀도 주교, 그리고 글라라에게도 문의할 수 있었다. 물론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도 있다.

 

토마스 형제는 프란치스꼬가 쓴 글들을 접할 수 있었고, 1 회칙이나 제2 회칙, 유언과 태양의 노래, 그리고 성인의 권고와 다른 글들을 여기저기서 인용하고 암시하는 것을 보면 필경 이 글들을 소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죽음을 알리는 엘리아 형제의 편지도 인용하고 있고, 시성식 교서도 인용한다. 그가 시성식 연감(年鑑)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연감은 그후에 분실되었다. 그가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 글라라의 시성식 연감을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가능했다면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도 이를 틀림없이 사용했을 것이다또한 그는 술삐치오 세베로가 쓴 성 마르띠노 전기와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쓴 성 베네딕또 전기도 틀림없이 참작하였을 것이다.

 

첼라노의 이 작품이 성인에 관한 최초의 전기물이다. 이 제1 생애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란치스꼬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며, 성인이 타계한 직후에 저술된 것이고, 교황의 요청에 의한 성인의 공식 전기다.

      

                   (2) 성 프란치스꼬의 제2생애(Vita secunde s. Francisci)

 

1244년 제노아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총봉사자였던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형제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활과 오상과 기적에 관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가 있으며,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집필 중에 있는 그에게 보내라”고 모든 형제들에게 명하였다. 모든 형제들이 이 명에 호응하였다. 특별히 레오, 루피노, 안젤로는 자기들이 겪은 일들과 그밖의 초기 동료들의 경험을 한데 모은 이 자료를 설명서를 곁들여 총봉사자에게 보냈다.

 

이 편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공경하올 사제이며, 형제이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총봉사자이신”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그 수신인은 총봉사자이며, 발신인은 “한때 지극히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였던, 그러나 쓸모없는 레오 형제, 루피노 형제, 안젤로 형제”로 되어 있다. 이 동료들은 제노아 총회에서 내려진 요청에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 과정을 피력한다 : “비록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지만 그분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터라, 저희가 그분의 많은 행적 가운데 확신하고 있고, 또 우리가 직접 본 것을, 그리고 다른 거룩한 형제들 특별히 가난한 자매들의 시찰자였던 필립보 형제와 리에띠의 일루미나또 형제와 마리그나노의 마쎄오 형제와 공경하올 에지디오 형제의 동료였던 그러면서도 에지디오 형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던 요한 형제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첫 동료로서 기억해야 할 만한 베르나르도 형제에게서 들은 것들 중에서 얼마간을 당신의 거룩한 뜻에 맞추어 보내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인 줄로 압니다.

 

이어서 세 동료들이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이룩하신 기적들과 생활들에 관하여 이미 전기 형식으로 저술된 것들”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빛 밝은 목장에서 모은 꽃송이들”을 모아 보낸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잔꽃송이들이 다른 전기 형식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 “진실에 가득찬 뛰어난 형식 아래 이미 씌여진 전기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생략했으니, 순서에 맞추는 연결된 이야기들은 전하지 않겠습니다.” 어쩐지 이 세 동료들은 단행본으로 새로운 전기 한권이 더 나오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 “만약 이것이 먼저 전기를 쓴 공경하올 분에게 전해진다면, 결코 그분은 이것을 그저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것을 알맞게 다듬어 뒤에 들어오는 형제들에게 하나의 기념이 되도록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발신 날짜는, 그렉치오, 1246 8 11일로 되어 있다.

 

이 일에 관해서 형제들에 대한 총봉사자의 요청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총봉사자 끄레쉔찌우스는 토마스 첼라노에게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하라고 떠맡긴다. 아마도 그는 1244년 총회의 회기중에 이 일을 맡았든지 아니면 길게 잡아야 약 2년 후가 된다. 연대 기록자인 살림베네 형제가 1282년에서 1288년 사이에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있다 : “그가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첫 번째 전기를 쓴 토마스 첼라노 형제에게 발견 안되었던 사료들만을 주로하여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복되신 프란치스꼬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쓰라고 명하였다.” 토마스 형제가 제2 생애 서문에서 이에 응한다 : “지난번 총회에서 거룩한 모임에 참석했던 형제들과 지극히 공경하올 총봉사자께서 하늘이 형제들과 총봉사자께 내리신 신묘한 지혜로 이 작은 자들인 우리에게 분부를 내리시어 우리의 영화로우신 사부 프란치스꼬의 행적과 가르침을 글로 쓰도록 하셨다. 우리는 프란치스꼬와 오랜 접촉을 가졌었고, 상호 친교가 있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그의 언행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을 그저 지나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 거룩한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따르려 한다.

 

성 프란치스꼬의 동료들은 전술한 대로 이 자료들을 1246 8 11일에 총봉사자에게 발송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그것이 토마스 형제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형제가 오직 이 자료에만 의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제1 생애를 완성하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그가 더 모으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그는 많은 것이 더 첨가되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총봉사자의 명()도 성 프란치스꼬와 가까웠던 동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전 형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형제는 세 동료들에게서 받은 자료말고도 글이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까지 자료를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어떻든 토마스 형제는 이 일에 착수했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바, 토마스 형제는 자기 이름으로 집필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자료들을 제공해 준 모든 형제들의 대필자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 그는 머리말과 맺는말에서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꼬와 절친했던 초기 형제들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 더구나 그는 그 동료들과 한 입이 되어 성인에게 바친 동료들의 기도(2 생애 221)에서 계속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토마스 첼라노 홀로 저술한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저자의 눈에 띄지 않아” 먼저 작품에서 누락된 것들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 책의 저자로 밝히고 있다. 그는 작품 전체에 걸쳐 몇 부분을 제외하고 1인칭을 사용한다. 마지막 성인에게 바친 동료들의 기도에서 그는 여러 동료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저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 “지극히 자애로우신 사부님, 지금이나 전에나 당신께 대한 칭송을 정성껏 써 내려온 당신의 이 아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하여 당신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는 우리와 더불어 이 변변치 못한 책을 당신께 바쳐 헌정합니다.” 비록 그 자신도 자료를 제공해 준 형제들의 대필자임을 자처하지만, 저자는 토마스 한 사람이다.

 

2 생애는 제1부 소제목에서와같이 자주 “간절한 마음의 비망록”이라고 불린다. , 자녀들이 사부님의 말씀이나 행적들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씌여진 것으로써 제1 생애와는 달리 완전한 전기 형식이 아니다. 1 생애는 신자들을 위해서 씌여진 반면에 제2 생애는 형제들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제1 생애는 성인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고, 인간적이며 순수하다. 그러나 제2 생애는 벌써 제1 생애를 집필하고 거의 20년이 경과한 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동안 프란치스꼬의 정신에 대한 해석과 회칙 적응 등 갈등이 많았다.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또 법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첼라노는 총장으로부터 제2 생애를 집필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첼라노는 제도화되어 가는 수도회 행정부의 방향에 맞춰 규율, 순종, 질서 등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여기에 뜻을 같이하면서 이러한 현실에 맞도록 성 프란치스꼬의 말씀을 약간 변경시킨다. 또한 옛 수도원의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런 면에서 제1 생애의 자율성과 비교된다.

 

머리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것이 씌여진 경위와 총봉사자께 헌정한다는 내용을 머리말에 싣고 있다. 이 헌정은 끄레쉔찌우스에게 드리는 기원으로 되어 있다 : “당신의 박식하신 판단으로 옳다고 인정된 것들이 당신의 이름 끄레쉔찌우스와 함께 어디서나 자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를 치게 하십시오. 아멘.” 제2 생애는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비교적 짧고, 1 생애의 제1부에서 다루었던 것과 같은 시기의 이야기들을 내용으로 한다. 프란치스꼬의 본명과 그의 회두, 수도회 창설, 그리고 우골리노 추기경을 형제회의 보호자로 임명한 일 등이다. 그러나 그는 제1 생애에서 이미 내용으로 다른 것을 보충하여 이것을 쓰고 있는 것이 뚜렷하다. 그는 제1 생애에서 다룬 것을 반복하지 않으며, 다만 세부적으로 첨가한다. 2부에서는 구조적이고도 논리적인 배열 안에서 그 주제가 다양하다. 토마스도 자기의 의도를 피력한다 : “우리는 프란치스꼬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상적 규율을 실행으로 옮긴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그가 인간에게 모범을 보이며 거룩한 애정으로 이룩한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완덕의 추구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의지라고 생각하였는지를 신중하게 그려 밝히려 한다.” 그리고 기적들도 그때그때 소개하며 끼워넣었다. 2부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역사적 순서로 돌아가며, 성 프란치스꼬의 질병과 오상, 죽음 그리고 시성과 묘지 이장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이장에 관한 부분이 빠져있다.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지은 대성당으로 이장하는 내용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성식의 생략된 부분을 알려면 제1 생애에서 알아볼 수 있고, 이장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는 전례용 전기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같이 토마스 형제는 제2 생애를 써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장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끄레쉔찌우스는 1247 7 13일에 리옹에서 열린 다음 총회에 개인적인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전임 봉사자는 토마스의 제2 생애를 총회에 발송했다. 이때에 새로 선출된 총봉사자인 빠르마의 요한 형제는 이 책을 그 총회에서가 아니면 적어도 짧은 시일 내에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제2 생애가 씌여진 시기는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자료를 보낸 시기인 1246 8 11일로부터 1247 7 13, 리옹에서 개최된 총회 사이인 것이 확실하다.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보낸 자료들과 관련되어 있는 제2 생애, 세 동료 전기, 완덕의 거울, 뻬루지아 전기간의 상호관계가 지난 90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위에서 이미 말한 세 동료들의 편지는 세 동료 전기의 서문에 사용되었다. 세 동료 전기는 세 동료들의 편지를 서문으로 취하기만 할 뿐이지 그 내용은 세 동료들의 전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18장으로 되어 있는 세 동료 전기는 당시의 전기형식에 따라 씌여진 것이지, 세 동료들이 그들의 편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빛 밝은 목장에서 수집한 잔 꽃송이들”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1894년까지 세 동료 전기의 저자는 레오와 루피노, 그리고 안젤로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이에 의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스타니슬라우스 멜키올이 16세기 사본에서 번역한 이태리판을 1856년에 출판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 16세기 사본은 옛 사본을 필사한 것인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라틴어 사본보다 자료들을 훨씬 더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나 편집자는 이 첨가된 자료들을 필사자가 토마스 첼라노와 성 보나벤뚜라, 삐사의 바르톨로메오와 완덕의 거울에서 뽑아 첨가한 것이라고 밝힌다.

 

폴 사바띠에르가 1894년에 자신의 저서「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출판할 당시에 그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세 동료 전기」는  단편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장이 레오 형제나 그 동료들의 뜻과 달라서 그가 삭제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당시에 여러 형제들이 폴 사바띠에르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사바띠에르의 주장에 동조한 프란치스꼬회 회원 마르첼리노와 테오필로는 멜키올의 이태리 사본을 취하여,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한 다음, 다른 라틴어 사본에서(첼라노, 보나벤뚜라, 삐사의 바르톨로메오, 완덕의 거울) 내용을 발췌하여 첨가시켜「세 동료의 전기」를 새로 출판하였다.

 

1900년에 프란치스꾸스 반 오르뜨로이가「아날렉따 볼란디아나」(Analecta Bollandiana) 잡지에서 원래의「세 동료 전기」는 성 보나벤뚜라의「성 프란치스꼬 대전기」나 베르나르도 베싸의「성 프란치스꼬의 찬미」와  같이 후대에 저술된 책에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세 동료 전기」는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이 후대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기의 작품이 되므로 세 동료들이 직접 쓴 작품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하여 토론이 계속되었으나 오늘날에는「세 동료 전기」가 비록 얼마만큼의 자료들을 1246년의 세 동료들이 기고한 자료에서 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4세기 초의 작품임이 통설로 되었고, 세 동료들의 편지는 틀림없이 그들이 1246년에 총봉사자에게 보낸 자료 설명서인 편지가「 세 동료 전기」의 서론이 되었다. 그러나 원 자료들은 분실되었고 아마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사바띠에르는 1445년으로 기입되어 있는「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의 거울」이라는 제목의 필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정한 형식 없이 자료들을 그저 수집해 놓은 것에 불과하였고, 1504년 베니스에서 첫 출판된 것이었다. 사바띠에르는 이 자료 뭉치에서 그 형식이 세 동료 전기와 비슷하기만 하면, 그것을 누락된 부분일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발췌하였다. 그가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그분과 함께했던 저희”라는 문구를 심심찮게 접하면서부터다. 이 문구는 세 동료들이 총봉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했던 “그분과 오랜 기간 함께 살았던 보잘 것 없는 저희”라는 문구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이즈음에 파리의 마자렝 도서실에서 또 다른 필사본을 만났는데, 그 내용이「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의 거울」의  자료와 같았고, 다만 그 제목이「작은 형제들의 완덕의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바띠에르가 여기에서 저지른 하나의 실수는 이 파리 필사본을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필사본의 연대를 1228년 혹은 1227년으로 잡았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가 모은 자료들을「레오 형제가 쓴 가장 오랜 전기인 완덕의 거울」이 라는 제목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가 잡은 연대는 여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수인 것이 뚜렷해 보였고, 얼마 안있어 1318년으로 되어 있는 또 다른「완덕의 거울」필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의 추측이 들어맞았다.

 

얼마 후에 프란치스꼬회 회원인 레오나르도 렘멘스 형제가 로마의 꼰벤뚜알 성 이시도르 수도원의 문서에서 14세기「완덕의 거울」필사본을 또 발견하였다. 이 작품은 사바띠에르가 편집한 완덕의 거울과 비교하면 비교적 짧은 편이다. 사바띠에르의 것은 124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이것은 단지 45항목에 불과하다. 이 필사본은 다음과 같은 서두를 취한다 : “완덕의 거울은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그리고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의향에 맞는 참다운 작은 형제회의 회칙과 서원, 생활과 성소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였던 레오 형제의 글에서 발견된 것들과 전기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다른 동료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비교적 짧은 이 작품을 어떤 이는 1246년에 세 동료가 총봉사자에게 보낸 최초의 자료들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사본이 직접 말하고 있듯이 1246년도의 세 동료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일 뿐이다. 렘멘스 형제는 그 서문에 주석을 달아 결론하기를 이 책은 성 보나벤뚜라의 대전기가 어느 정도 형제회 안에서 정식 전기가 된 후에 편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서문에서도 지시하는 바와같이 그 작품은 정식 전기를 보충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 사바띠에르가 출판한 완덕의 거울을 앞서는 것이며, 세 동료들의 최초의 자료에 이어서 이 작품은 자주 최초의 편집판, 혹은 초기 편집판으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바띠에르의 편집판은 후기 편집판이 되며, 최초의 완덕의 거울의 증보판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동료 즉 레오, 루피노, 안젤로의 이름으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봉사자에게 보내진 편지는 그들이 1244년 제노아 총회와 1246 8 11(편지를 발송한 날짜) 사이에 수집할 수 있었던 자료들을 보낸 것이다바로 이 자료를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제2 생애와 기적 모음집을 저술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세 동료 전기는 13세기 말이나 14세기 초의 저서로써 세 동료의 자료와 관계가 없으며, 다만 머리말만 그 자료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뻬루지아 전기는 제2 생애와 같은 시대의 저서로 세 동료의 자료를 일부 인용하였으나, 생애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또한 완덕의 거울은 1318년경의 저서로서 일부는 제2 생애에서, 또 일부는 뻬루지아 전기에서 취한 것이다. 아직도 이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위와같이 결론하고 있다.

 

 

                         (3)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

                               (Tractatus de Miraculis B. Francisci)

                                  프란치스꼬의 제3생애

 

토마스 첼라노 형제의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의 몇 편의 기적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기저기 그때그때 끼워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들은 성 프란치스꼬가 살아있을 때에 이룩한 것들이다. 시성식 때에 채택되어 낭독한 기적들을 다루기 위하여 제1 생애에서는 특별한 장을 마련하고 있고, 2 생애에서도 몇 편이 들어가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미흡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1247년에서 1257년 사이의 총장인 빠르마의 요한이 첼라노 형제에게 이 미비점을 보충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총장들의 역대기 24장에 그 지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이 총봉사자께서는 토마스 첼라노 형제에게 거듭 서한을 띄워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다룬 옛 전기들을 완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냐하면 끄레쉐찌우스 총봉사자의 명에 의해서 저술된 제2 생애는 그분의 생활과 말씀만을 다루고 있지 기적들은 빠졌다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에는 기적에 대한 관심이 컸다. 따라서 사부님의 기적이 알려지면, 그것은 수도회의 명예와 관련이 있었고, 사부님의 명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기적은 곧 프란치스꼬가 거룩한 생활을 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하여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은 토마스 첼라노에 의하여 빠르마의 요한이 총봉사자일 때인 1250년에서 1253년 사이에 집필되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토마스 형제는 다음과 같은 서두의 편지를 동봉하여 총봉사자에게 그것을 보냈다. “수도자다운 당신의 걱정이…”라고 시작되는 이 편지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이 모음집은 1254년 메쯔에서 있었던 다음 총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인정되었다.

이 모음집은 제1 생애나 제2 생애와 같이 2부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고, 19 198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맺음말이 있다. 1장은 형제회의 초기에 일어났던 기적들을 다루고 있고, 2장은 성 프란치스꼬의 오상과 이 오상에 관련된 기적들을 다루고 있다. 나머지 장들은 제6장을 제외하고 성 프란치스꼬가 이룬 각종의 기적들을 취급하며, 약간은 그의 생전에 있었던 기적들이지만 대부분이 사후에 일어난 기적들이다. 6장은 성인이 임종하기 직전에 세떼솔리의 야고바 부인의 방문을 다루고 있다.

 

모음집에 들어 있는 기적들이 대부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중의 3분의 1은 이미 제1생애에서 취급한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취급하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그의 사후에 일어난 기적들이기 때문에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198항목 중에서 41개 항목이 생전에 이루신 기적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이 제1 생애와 제2 생애에 이미 수록된 것이며, 20여 개만이 새로운 것들이다. 이 항목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20여 개의 기적들을 제3 생애로하여 이 책의 마지막에 첨가하였다.

 

        (4) 여타 작품들 

 

①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전기(Legenda Sanctae Clarae Assisiensis)

 

알렉산델 4세가 새로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첫 번째 한 일이 글라라를 1255 8 15일에 시성한 것이다. 관례에 따라 그는 성녀의 전기를 집필케 하였고, 그 집필된 저서가 오랫동안 성 보나벤뚜라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그 문체가 첼라노의 초기 작품들의 특성을 그대로 닮고 있어 이제는 누구도 그 저자가 첼라노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머리말은 교황 알렉산델 4세께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 “성하께서 이 부족한 저에게 성녀 글라라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것을 기초로 전기를 쓰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그녀의 시성을 위하여 수집한 자료와 칙서를 이 전기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음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확실치 않은 기록에 의지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동료들에게 의지한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동정녀들의 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구도 직접 본 사람들을 빼놓고,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를 써서는 안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전기는 1255년에 착수하여 대략 1년내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② 성무일도용 전기 (Legende ad Usum Chori)

 

베네딕또 형제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생애를 요약하여 성무일도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줄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첼라노가 이에 서신으로 답하는 모습을 제1항에서 볼 수 있다. “베네딕또 형제여, 그대는 저에게 우리의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꼬의 전기를 발췌하여 그것을 9개의 독서로 일목요연하게 배열해서, 우리의 성무일도에 넣어 모든 형제가 소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베네딕또 형제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리스에서 1221년부터 1237년까지 관구봉사자로 지낸 아레쪼의 베네딕또 형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첼라노를 만나게 된 것은 1230년 아씨시에서 개최된 총회, 즉 성 프란치스꼬의 이장(移葬)이 있을 때가 아니었나 싶고, 그 자리에서 제1 생애를 요약해 달라는 요청을 한 듯하다.

 

이 짧은 전기의 작가는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나의 전기에서”라는 구절만이 등장하여, 이를 첼라노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 전기가 제1 생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어휘나 구절이나 문장이 제1 생애의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발췌한 것이고, 1 생애를 집약하여 짧게 요약하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도 제1 생애와 제2 생애의 저자와 그 다루는 솜씨가 동일하다.

 

이 성무일도용 전기에서 새로운 조목들이 조금 발견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프란치스꼬가 운명한 때를 정확하게 기입하고 있다 : die sabbati in sero(토요일 밤에). 또 하나는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지은 대성당으로 프란치스꼬의 시신을 이장했다는 부분이 들어 있다. 1 생애의 집필을 완성할 때까지는 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제1 생애에서 누락된 것이다. 반면에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저자가 몰랐던 몇 가지 새로운 기적들이 첨가된다. 이 기적들은 후에「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 」을  쓸 때 더 길게 나열된다.

1230년이나 아니면 1231년에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③ 진노의 날(Dies irae)

 

장례미사에 나오는 잘 알려진 고도의 시적인 연송(蓮頌), “진노의 날”의 저자가 토마스 첼라노로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사다.

 

 

               3. 1생애와 제2생애, 3생애의 문학적 특성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쓴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는 현대적 의미의 전기가 아니다. 또한 그는 성인을 낱낱이 연구하여 기록할 생각도 없다. 1 생애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프란치스꼬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온전히 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제1 생애 64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외에 우리가 아무리 장황하게 이야기를 해도 다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의도했던 것은 그 시대가 알아들었던 중세적 의미의 전기, 즉 성인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성인이라는 어휘였다. 그는 자주 프란치스꼬의 인간적인 측면을 희생시켰고, 그 결과로 프란치스꼬의 생활 안에서의 초월적인 요소를 강조하게 되었다. 중세의 전기작가인 그는 어떤 면에서 성인의 거룩함에 손상이 갈지도 모르는 인간적인 측면을 피하려고 주의를 하였다. 동시에 그는 평범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까지도 초월적으로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렇다고 중세의 작가들이 모두 서툴고,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보고 이해한 것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전기 형식을 따랐던 것이고, 따라서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며, 인간적인 면을 자주 생략하는 것이다. 반대로 현대 전기 작가들은 인간적인 면만을 내세우고 초월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중세의 전기작가들이 더 믿을 만할는지도 모른다.

 

성 프란치스꼬의 세 전기를 볼 때, 그 저자인 토마스 첼라노는 문학적으로 매우 기술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문학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의 문체는 정력적이고 힘차며 고상하고 또한 시적이다. 그는 상징적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은유와 직유, 그리고 언어구사가 능란하다. 그는 대조법과 차이법을 이용하여 좋은 효과를 본다.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성서구절들을 인용하며 이곳저곳에 고전문학가나 그리스도교 초기 문학가들의 문구를 집어넣는다.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치밀하게 운을 맞추는 그의 각고의 노력이 매문장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을 볼 때, 토마스 첼라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학가라 아니 할 수 없다.

 

 

                                               4. 역사적 가치 


 

지난 90년 동안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성에  관하여 토론이 수없이 많았다. 의견들이 분분했으나 가장 극렬한 혹평은 폴 사바띠에르와 그에 동조하는 자들의 평가였다. 사바띠에르는 제일 먼저 토마스 첼라노가 제1 생애에서 총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고, 또한 로마 교황청의 특권을 바라는 형제들을 프란치스꼬가 반대했다는 사실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사바띠에르가 결론하는 것은 토마스가 당시에 엘리아 형제 밑에 있었고, 따라서 엘리아로부터 호감을 사려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빼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에 엘리아가 총봉사직을 맡고 있었고, 또 그는 총회를 소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공사중이던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을 위하여 교황에게 특전을 요청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이것들이 내용에서 빠진 이유를 교황과의 관계로 본다. , 첼라노는 당시에 교황 그레고리오 밑에서 지배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교황이 전기의 내용으로 넣을 것과 뺄 것을 그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평가는 확실한 것이 못되며, 그 증거를 제1 생애에서나 그 당시의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첼라노의 의도는 성인이신 프란치스꼬의 모습을 형제회를 초월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었지, 결코 형제회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누락된 부분들도 성인의 모습과 관계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토마스에 대한 또 하나의 비난거리는 그의 말에 앞뒤가 맞지 않아서, 역사가나 전기작가로서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난거리는 그가 제1 생애에서 다루는 엘리아에 대한 관점과 제2 생애에서 다루는 엘리아에 대한 관점이 판이하게 다른 데서 연유한다. 사실 그 상황은 이렇다. 실제로 엘리아가 언급되는 것은 제1 생애에서 6개 항목이다. 언급될 때마다 매번 엘리아에 대한 좋은 느낌이란 배경 안에서 토마스는 기록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프란치스꼬가 죽기 6개월 전 시에나에 머물고 있을 때 많은 치료가 필요했었다. “엘리아 형제는 급히 서둘러 먼 곳에서 달려왔다.” 그가 도착하자 거룩하신 사부님이 많이 좋아져 그와 함께 시에나를 떠나 꼬르또나 근방의 셀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프란치스꼬가 엘리아 형제에게 아씨시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다음 토마스는 이렇게 적는다 : “이 착한 아들은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토마스는 시종일관 엘리아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다. 1 생애에서 언급되는 엘리아는 어디나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제2 생애에서는 이와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없다. 프란치스꼬의 총대리로서 두 번 등장하지만 한 번은 누구인지 희미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단순히 “또 다른 형제 하나가” 라고 언급할 뿐이다. 이어서 토마스 엘리아가 프란치스꼬의 오상을 보려는 호기심을 채우려고 얼마나 기회를 노렸는지 모른다고 서술하면서, 그가 프란치스꼬가 살아 있을 때에 성인의 옆구리 상처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마지막에 첨가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제1 생애에서 한 가지 사건을 놓고 첨가하는 마지막 논평이 너무도 차이가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 상처를 보기에 합당했던 엘리아는 행복하였다.” 제2 생애 전반에 걸쳐 흐르는 엘리아에 대한 느낌이나 어조가 차갑고, 그를 얕보는 듯하다.

 

그가 엘리아를 보는 태도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엘리아는 형제들과 좋은 사이였고, 교회와도 좋은 사이였다그는 프란치스꼬를 대신하여 총대리직을 능력있게 효율적으로 수행하였다. 사실로 말해서 그는 프란치스꼬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존재였고, 그도 프란치스꼬를 존경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엘리아에게 많이 의지하였고, 반대로 엘리아도 프란치스꼬글 깊이 존경하였으며,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1 생애에서 이것은 너무도 뚜렷하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죽은 다음 엘리아는 성인을 기념하는 대성당을 건축하는 책임을 교황으로부터 맡게 되었고, 이 일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건축자금을 각 관구에서 형제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고집함으로써 엘리아는 다른 형제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일만 해도 형제들은 엘리아를 이해해 줄 수 있었고, 또 이해하였다. 건축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형제들은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심각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총장으로서의 엘리아의 사생활이었다. 그는 사치스러웠고, 개인용으로 저택을 두 채나 가지고 있었으며, 말을 탔고, 자기 입맛에 맞추려고 개인 요리사를 두었으며, 형제들과는 거의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등 말썽이 많았다. 더구나 그는 누가 보아도 확실할 정도로 총회를 개최하기를 꺼려하였다. 결국 알렉산더 헤일스, 요한 로쉘르, 하이모 화베르샴 등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그를 반대하고 일어나, 1239년 그를 총장자리에서 해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뒤이어 엘리아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미 파문당한 프레데릭 2세에 동조함으로써 그 역시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244년 제노아에서 있었던 총회에 출두하여 해명을 하면 파문을 철회하겠다는 교황청의 성의를 묵살하고 그는 출두 명령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재차 파문당하였다.

 

엘리아의 이러한 생활을 볼 때, 그에 대한 토마스 첼라노의 태도 변화도 전혀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토마스가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엘리아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성 프란치스꼬의 좋은 친구이자 신임을 얻는 제자였으며, 6년 동안 프란치스꼬의 총대리였고, 프란치스꼬에 대한 그의 친절과 관심은 그의 행정수완만큼이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토마스 첼라노가 제2 생애를 집필하게 되었을 때, 엘리아는 벌써 형제들의 지지를 잃었고, 폭력적인 통치자였으며, 형제회를 저버렸고, 이어서 파문까지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가 엘리아에 대하여 변치 않고, 호감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엘리아에 대한 토마스의 가장 적합하다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제2 생애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이다. 사실 제2 생애에서 엘리아와 프란치스꼬와의 관계 묘사는 약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안되었던 것은 모든 형제들이 알고 있듯이 이미 엘리아는 나락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제1 생애에서 엘리아를 묘사한 것과 같이 제2 생애에서도 묘사했다면 이는 전 형제들에게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다. 특별히 차이점이 보이는 것은 임종시에 프란치스꼬가 엘리아에게 내린 축복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토마스 첼라노를 비난한다든가 그의 정직성을 의심한다든가, 아니면 역사가로서의 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려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상황의 변화에 충실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꼬리를 무는 불미스러운 일들과 파문으로 엘리아는 이미 자신과 프란치스꼬와의 관계에 먹칠을 하였으므로, 프란치스꼬를 주제로 하고 있는 제2 생애에서 엘리아를 재등장시켜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엘리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그의 글에 들어갔다 해서 그것이 역사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실추시킬 정도는 아니다. 비평가들의 말에 따른 선입견 없이 이 전기를 읽는 독자들은 오히려 이러한 사실적이고도 정확한 기록 안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와 초기 형제들의 생활에 관한 토마스의 설명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꼬의 전기작가로서, 그리고 형제회의 역사가로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5. 1생애와 제2생애,3생애가 처했던 운명

 

시간이 흘러 성 보나벤뚜라가 총봉사자가 되었을 때에도 토마스 첼라노의 저서들은 그대로 있었다. 이외에도 몇 편의 짧은 전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첼라노의 성무일도용 전기와 제1 생애를 기초로 하는 율리아노 스페이어의 짤막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도미니꼬회 회원인 바르톨로메오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그리고 헨리 아브란취의 산문시로 되어 있는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등이다.

 

이러한 단편들은 그 나름대로 제 몫을 하고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에 관한 정확한 것이 못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사실 토마스 첼라노의 세 권의 책과 여타의 작품들 역시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서 완벽한 것은 못된다. 그것들을 함께 모아 놓아도 단일한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전기들은 결과적으로 후대에 창설자의 생애와 행적에 혼란을 가져오는 온상이 되었고, 성 프란치스꼬를 있는 그대로 알아내는 데에 어려움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형제회의 장상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적당한 시기에 조처를 취했다.

 

1260년에 나르본에서 총회가 개최되었고, 당시의 봉사자였던 성 보나벤뚜라는 형제들로부터 현존하는 전기물들을 대신할 만한 성인의 객관성있는 생애를 집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성 보나벤뚜라는 이러한 청탁에 대해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 서론에서, 총회에서 계속해서 요구해 오지 않았더라면 자기로서는 성인의 생애를 쓸 생각이 없었고, 또한 자기는 그만한 자격과 능력도 없는 지라 집필을 거절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보나벤뚜라는 총회의 청탁을 수락하여 1262( 1263)에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탈고한다. 과락키 편집자들은 1263년 삐사 총회에서 이 전기가 받아들여졌고, 이어서 34권을 복사하여 각 관구장들에게 배부하였다고 한다.

 

3년 후 1266년 빠리 총회에서 다시 새 전기에 관한 토론이 있었고, “과거에 있었던 성 프란치스꼬의 모든 전기물들은 없애도록 한다”라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사항은 외부에 퍼져 있는 전기물에도 해당된다고 결정하였다. 그후 보나벤뚜라 총봉사자가 쓴 이 전기는 그것이 성 프란치스꼬의 측근자들의 입을 통하여 들은 것을 직접 옮겼다는 이유로 성 프란치스꼬 전기의 표준판이 되었다.

 

어떤 동기가 이러한 결정 뒤에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토마스 첼라노의 작품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후 오랜 기간을 그의 작품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차츰 필사본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1 생애는 모두 합해서 20개의 필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완벽한 것은 그 중에 다섯 개였으며, 네 개는 거의 완전한 상태였다. 이들 필사본 중에 여덟 개가 씨토 수도원에서 발견되었고, 세 개가 분도 수도원에서 발견되었으며, 한 개만이 프란치스꼬회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씨토회에서 필사본들이 발견된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안되는 것은, 1259년에 성 보나벤뚜라의 요구로 씨토회 회원들이 그들의 총회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축일을 전 씨토회에 받아들였고, 성 보나벤뚜라가 그들에게 제1 생애의 복사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의 여러 수도원을 위해서 여러 권을 복사하였고, 또 이렇게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프란치스꼬회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빠리 총회의 결정사항에 하등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도회 회원들도 제1 생애를 그들의 전례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제2 생애와 기적 모음집은 제1 생애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고작 제2 생애의 완벽한 복사판은 두 개 있을 정도였고, 기적 모음집은 한 개뿐이다.

 

18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토마스 첼라노의 작품들이 여러 종류 나왔다. 1768년에 예수회의 꼰스딴띤 쑤이스겐에 의하여 성인들의 행적이라는 제목으로 제1 생애가 처음 출판되었고, 1806년에 제1 생애와 제2 생애를 한데 묶어 꼰벤뚜알의 쓰떼판 리날디 형제가 출판하였으며, 1904년에 에드워드 엘렌꼰이 더 좋은 판을 내었으나, 가장 좋은 판은 1926년 성 보나벤뚜라 연구소의 프란치스꼬회 회원인 과락키 편집자들이 펴낸 것이다(AD CLARAS AQUAS, FLORENTIAE-QUARACCHI A PP. COLLEGII S. BONAVENTURAE). 이것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