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16 마음의 깨끗함/XVI. Purity of heart

Margaret K 2007. 5. 17. 01:40
16. 마음의 깨끗함

 

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2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XVI. Purity of heart.

Blessed are the clean of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Mt. 5:8). A man is really clean of heart when he has no time for the things of this world but is always searching for the things of heaven, never failing to keep God before his eyes and always adoring him with a pure heart and soul.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묵상집

 -하일성 멜키올 OFM-

 

 16권고도 산상 설교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권고 말씀을 보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묵상해 보겠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대해 성 프란치스코는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뵙는 것, 바라보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된 사람이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의 표현으로 하느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늘 기도하기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라는 축복 속에 살게 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찾고 하느님 안에서만 자기 완성과 자기 만족감을 찾는 사람은 정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쁨에 넘친 프란치스코처럼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습니다. "Deus Meus et omnia(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하느님을 뵙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인간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 열망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은총의 선물을 원죄 이후로 잃게 된 우리가 에덴 동산을 향해 갖는 일종의 향수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었던 선물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하느님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죄를 지으면서 자기 중심이 되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낯선 분, 모르는 분이 되시며 갈수록 점점 더 모르는 분이 되십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만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을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기에 성 아우그스티노가 ''당신 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우리 마음은 안식을 찾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듯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먼저 인간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면서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인간은 또 다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이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과 일치를 다시 이루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천국에 생활을 하나같이, '하느님을 직접 뵙는 복(Visio veatifica)'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직접 뵙는 복은 그리스도의 재림(Christus 의 Parusia) 때 이루어지겠지만, 이 지상에서 이미 믿음을 통해 구원된 우리는 그 복을 미리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 안에서, 기도 안에서, 특히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온갖 이기심에서 해방되고 구속된 사람은 사부님처럼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뵙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뵙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성 보나벤투라가 가르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그림자, 하느님의 거울, 하느님의 형상, 하느님의 모상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름다운 것 안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은 당신 작품인 창조물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특히 가장 뛰어난 작품인 인간 안에서.


모든 인간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신 프란치스코를 또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도.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신 인간의 대표, 즉 인간이 되신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성 프란치스코의 존경스러운 태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 그리고 나환자들에 대한 그분의 존경과 사랑의 태도는 이러한 신앙심과 신앙의 눈으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은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갈망 속에서 늘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신 것입니다. 사부님은 늘 하느님을 뵙고자 열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고, 열렬한 기도 생활 역시 이런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또 그분과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열망, 그리고 말씀 안에서, 복음 안에서 그분과 통하고 싶어했던 열망을 감안할 때 우리는 사부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이시라는 것은 앞서 1권고에서 다룬 테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 생활의 어려움, 깜깜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가까이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 생활의 어려움과 깜깜함을 우리는 체험합니다.사부님이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느껴지는 인간적 인물이 되십니다. 나의 생활 속에서도 나의 마음속에서도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고 실제로 우리는 그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할 때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을 직접 뵙는 듯한 느낌을 갖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신앙의 눈에 의한 은총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세가 많아 일을 못하시고 하루 종일 성체 앞에서 보내시는 노인 형제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께 하루 종일 성당에서 뭘 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하신 그분의 대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뭐, 별것 안합니다. 착하신 하느님께 이런 말씀만 드립니다. '당신은 여기에 계시고 그리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둘 모두 만족합니다."


또 성질이 아주 급한 신부님이 한 분 계셨는데 미사를 굉장히 빨리 드립니다. 그래서 한 번은 미사가 끝나고 그분께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그렇게 빨리 미사를 드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Good lovers don's need to much time to communicate. (진짜 연인들끼리는 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는 대답을 듣고 웃었습니다만 오늘까지도 이 훌륭한 대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특히 묵상할 때 여러 가지 말들을 만들어 가면서 하지만 실상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짧게 할수록 좋다는 말은 아니고 우리의 기도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묵상 방법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수도자들은 묵상할 때 아주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활동을 많이 합니다. 먼저 준비 단계, 성찰, 독서, 성상으로 어떤 장면을 연상, 거기에 대하여 생각, 다음 결심 등 아주 복잡하게 머리 속으로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묵상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럼 성령이 언제 활동하십니까? 그렇게 되면 내 기도하는 생각으로 인해 성령께서 활동하실 아무런 여유도 주지 않게 되고 맙니다.


물론 묵상에는 방법도 필요하고 또 각자 나름대로 순서를 세워야겠지만 지나친 활동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묵상하니까 묵상이 끝나면 쉬 피곤을 느끼게 되고, 묵상 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즐겁고 기대되는 시간이 되어야 할 묵상 시간이 오히려 지겹고 지루한 시간이 되어 그 시간을 피할 필계거리를 쉽게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묵상하겠다고 미루다 결국 기도를 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아닙니까?


사부님은, 하느님을 신앙 안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하신 조건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서이다.' 즉 하느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마음이 깨끗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정결한 사람이란 한 마디로 하느님만을 찾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사부님은 마음이 깨끗함을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십니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지상적인 사물들을 등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과 성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구원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 구원, 즉 은총과 협력하지 않는다면 이기심과 자애심에 가득 찬 옛 생활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 생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의 협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씨앗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이 은총의 씨앗을 싹트게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며 그것은 우리 일생의 과업입니다. 이런 일생의 과업을 신학자들은 '은총과의 협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움의 은총은 물론이고 생명의 은총까지도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이 주시는 은총에 두리가 협력하도록 초대하시지만, 자유롭게 협력하지 않으면 그 은총은 싹트지 못하는 씨앗처럼 우리 마음속에 묻힌 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서 임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개방해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항상 그렇하듯이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부님이 깨끗한 마음, 정결한 마음이란 이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란 십계명 중 여섯째 계명을 거스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높은 차원을 의히합니다.






































 

 

 

16. 마음의 깨끗함

 

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2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XVI. Purity of heart.

Blessed are the clean of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Mt. 5:8). A man is really clean of heart when he has no time for the things of this world but is always searching for the things of heaven, never failing to keep God before his eyes and always adoring him with a pure heart and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