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9. 사랑/IX. Charity

Margaret K 2007. 5. 17. 01:24


9. 사랑


1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참조: 마태 5,44; 루가 7,27).
2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3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태우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

 

 

IX. Charity

 

Our Lord says in the Gospel, Love your enemies (Mt. 5:44). A man really loves his enemy when he is not offended by the injury done to himself, but for love of God feels burning sorrow for the sin his enemy has brought on his own soul, and proves his love in a practical way.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묵상집

 -하일성 멜키올OFM-




9 권고에서는 우리 생활에 아주 중요한 테마, 즉 형제적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특히 나와 맞지 않는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와 같은 내용이 사부님 글에서 자주 나오는데 예를 들면, 제1회칙 5장 13절과 11장 5절, 제2회칙 10장 10절, 3 권고 8절과 11권고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도자로서 또 프란치스칸으로서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생활을 온전히 따르는 복음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히 따르며,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같이 그리스도의 길로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합낟.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 산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시김이나 자애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착하고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는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 5,42)'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격적으로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심판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마태 12,36)'이란 말씀을 어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고 하신 말씀을 기꺼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욕심 없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당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시오(마태 18,21)'라는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성적이고 침묵을 잘 지키는 사람 같으면, '언제나 기도하라(루가 18,1)'는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이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쉽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을 몰랐어도 그와 비슷한 생활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무신론자, 또는 비신자 가운데서도 우리가 놀라운 정도로 인간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책임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 나라를 위해서 생명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얼마든디 찬아 낼 수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그렇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라면, 우리도 그런 선행을 할 때에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성격을 따르는 것인지, 착하게 살려는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복음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사부님은 9권고에서 우리의 복음적 생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생활, 심지어 내적 가난의 생활을 평가하는 틀림없고 아주 확실한 기준을 지적해 주십니다.


1. 복음적인 사랑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참조: 마태 5,44: 루가 6,27:1절).'


복음의 중심 가르침인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삶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는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4~48)'고 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도 동족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긴 했지만,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나 이방인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분명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이 명령은 새로운 요구로서 복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레위 19,18: 마태 5,43)'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기도 합니다. 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고 있거나 나를 괴롭히는, 그리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멀리하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복수하려고 기회를 노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입니다.


수도자 중에서도 이런 구약의 정신에 따라 사는 삶이 있습니다. 혹시 나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정신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살고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활동을 많이 하고 나눔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며 열심히 한다 하여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이 아닙니다.


비록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나의 친절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자매일지라도 사랑으로 대햐야 합니다. 여기서 대해서는 루가 복음 17장 11절과 23장 34절, 사도행전 10장 38절, 마태오 복음 5장 45~48절과 25장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2~4절).


사부님은 여기서 아주 실질적인 예를 들면서 원수에 대한 사랑이 수도 생활을 통해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부님은 인간의 심리를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부패와 부정에 대해서, 교회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우리 공동체의 부족한 것이 대해서, 나와 함께 사는 형제들의 죄라든가 그릇된 사상이나 성격, 행동에 대해서 자주 얘기하고 괴로워하며 서러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위에 있는 그러한 부정이나 죄악에 대해 서러워하는 동기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봅니까? 내가 죄를 짓는 어떤 형제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슬퍼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반성해 봅니까? 그 형제의 장래가 염려되어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 형제의 생활에서 일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돌봐 주지 않았다는, 그럼으로써 책임자로서 실패했다는 느낌, 그 형제를 생각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곤란해진 내 입장 등 어딘가 나의 생활에 위협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직접 어떤 불의의 행동에 부딪치게 될 때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자애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베드3.9).' '악에서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21).' 이 권고에 적용되는 복음 말씀처럼 어떤 형제 자매가 잘못한다 해서 나도 똑같이 잘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악에서 굴복하는 것입니다.


2. 공동체 내의 형제적 사랑


(1) 수도 생활을 하는 가운데 원수가 된 형제 자매나 원수 같이 여겨지는 형제 자매는 없겠지만, 나와 맞지 않는 형제는 있을 수 있고 또 사실 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러한 형제 자매에 대한 각자의 태도, 나의 태도를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형제를 사랑합니까?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이라도 합니까? 아니면 나도 똑같이 그를 미워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직 구약의 법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란 구약의 법을 따르는 내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중상하고 어렵게 만드는 형제 자매에게 행동으로써 사랑을 보여 줍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을 베풉니까, 아니면 악으로 갚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자매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며 이것은 복음적 생활을 하려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형제 자매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자주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형제 자매들로부터 행동이나 말로 어떤 해를 당할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자애심이나 자존심, 자만심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화를 냅니까? 아니면 그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을 진심으로 슬퍼합니까?


자신도 잘못 살면서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형제 자매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화를 낼 때는 그 분노의 동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되어 화를 낸다면 참으로 육적인 사람이지만,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고 따라서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된 그를 위해 슬퍼한다면 영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 아니면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이 하느님 편인지 스스로의 편인지, 즉 누구를 중심으로 사는지는 어떤 피해를 당할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매를 비난하거나 단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그의 부족함을 도와주시도록 청하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사부님 말씀대로 행동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는 행동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하기에 앞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그를 도울 수 없는 경우라면 그를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참다운 형제애라 하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성인을 찾아와서 현대인들의 죄악과 타락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자 그는 '다른 이들이 죄짓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만이라도 죄를 짓지 맙시다.'라고 응답했다 합니다.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잘못 사는 형제 자매를 볼 때 비판하기보다는 '나라도 잘 살아야 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2) '그리고 분노와 흥분은 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애덕의 장애물이 되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제2회칙 7,3).'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나 맛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각자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업신여기십시오(제2회칙 2,17).'


이 말씀들처럼 잘못 사는 형제 자매를 볼 때 그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생활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분노와 흥분은 이기심과 자만심의 표시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장애물이 되어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참된 프란치스칸으로서 또 참으로 가난한 자로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잘 쓰지 않는 말 중의 하나가 자비입니다. 어떤 형제 자매의 잘못 사는 생활을 볼 때, 좀더 심한 표현으로 구제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 수도자에게 남아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자비입니다. 결국 9권고의 내용은 자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3) 사부님은 <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어떤 형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관구장에게 그가 어떻게 그 형제를 자비로써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놀라운 조언을 하십니다.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하고, 또 형제들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든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는 사람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주 하느님과 나에게 할 수 있는 참다운 순종이 됨을 아십시오. 나도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순종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그대에게 주시는 것 외에 형제들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말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십시오(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3~8).'


우리도 공동 생활을 하면서 어떤 형제 자매가 변화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부님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태양의 노래 10~11).'


공동 생활을 하면서 함께 사는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잘못 사는 형제 자매들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우리도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