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7 지식에 선행이 뒤따라야합니다 /VII. Good works must follow knowledge

Margaret K 2007. 5. 17. 01:19

 영적권고

7. 지식에 선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1 사도가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고린 3,6).
2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획득하려고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3 그래서 하느님의 문자(성서)의 정신을 따르기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4 그래서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하는 문자를 모두 자기 육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그것들을 말과 표양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VII. Good works must follow knowledge

 

St. Paul tell us, The letter kills, but the spirit gives life (2 Cor. 3:6). A man has been killed by the letter when he wants to know quotations only so that people will think he is very learned and he can make money to give to his relatives and friends. A religious has been killed by the letter when he has no desire to follow the spirit of Sacred Scripture, but wants to know what it says only so that he can explain it to others. On the other hand, those have received life from the spirit of Sacred Scripture who, by their words and example, refer to the most high God, to whom belongs all good, all that they know or wish to know, and do not allow their knowledge to become a source of self-complacency.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묵상집

 -하일성 멜키올OFM-

 

1.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른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6 권고의 복음적인 생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 7권고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프란치스칸에게 복음은 기초적인 것이고 카리스마 역시 복음에로 되돌아가 복음적 생활을 하는데 있기때문에 이 권고는 우리에게 중요한 권고입니다. 


사부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형제들이게 복음적 생활을 할 것을 자주 요구하셨으며,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도, '장기간에 걸쳐 인내와 가난의 실천에 관하여 말하였고, 다른 모든 규정에 앞서 거룩한 복음을 지키라고 권고하였다(2첼라노 162,216).'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복음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고린 3,6:1절).


이 표현은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글자 그대로 알아듣고 실행하려 했지만 성서의 정신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의 문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정신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선교사의 소개장 관계로 말씀하시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도 그 배경은 다르지만 역시 같은 내용으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소개장을 가지고서야 여러분을 찾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고린 3,1~2,6).' 사부님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으로 7권고를 시작하십니다. 사부님의 의도 역시 바오로 사도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획득하려고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2절).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 시대에는 귀족, 기사 계급에 속하거나 재산이나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닐 경우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부님은 여기서 지식을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중세기의 학문은 주로 신학이었는데, 즉 하느님이 계시하시고 교회에 맡겨 주신 진리에 대한 학문이었습니다. 이 진리는 무엇보다 성서 안에 내포되어 있었고, 그 당시 성서는 모든 학문의 기초였습니다. 사부님은 이 권고에서 자기 새대에 이기주의적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 인정하십니다. 이들은 성인이 되기 위하여,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느님과 보다 더 가까이 하기 위하여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즉 신학 지식을 통해 교회 내의 놓은 지위를 얻고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책을 얻고자 하는 이기적인 동기로써 신학을 연마했던 것입니다.

 

증세기의 교회, 특히 교직계는 주교직이나 어떤 다른 직책을 위임할 때 출신 학교, 가문 등을 고려하였습니다. 이들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획득하려고 공부할 때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했으며, 지식에 선행이 따르지 않아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생활과 분리된 이들의 지식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1 권고 6절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문자(성서)의 정신을 따르기 원하지 않고 말마디만을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3절).

 

사부님은 2절에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3절에서 수도자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서, 신학, 영성 연구 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는 수도자가 너무 많은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성서 연구와 영적 독서를 빠짐 없이 하고 강의나 세미나를 열심히 들으면서도 자신의 생활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보다 더 열심히 봉헌된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알려는, 그럼으로써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식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정신, 곧 주님의 영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말마디만을 배우려는 수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을 찾는, 목적 없는 수도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려는 수도자들 역시 남보다 더 지식있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사람들이며, 결국은 육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은 아닌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책을 보거나 피정을 할 때, 또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그 내용을 자신에서 적용시키지 않고 어떻게 사용할까 하는 이기주의적인 정신과 잘못된 지식욕을 피애햐 합니다. 자신이 배우고 인식한 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전에 자신의 생활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사도적인 활동을 할때 더욱 경계해야 할 위험입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수도자로서, 사부님의 참된 제자로서 생활 안엔서 체험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이것이 진실하고 효과있는 사도적 활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활동보다 생활이 우선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헛된 찬사를 들으려고 설교를 자주 하는 설교자들을 가련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독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매번 다음과 같은 해독제로 치료하였다. "죄인들을 변화시킨 것은 나의 순박한 형제들의 기도였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자신이 그 사람들을 회개시켰다고 자랑합니까?" ...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고 말만 미끈하게 하여 설교자로서보다는 달변가로 칭찬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프란치스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설교에 바치는 설교자들은 시간 활용을 잘못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2첼라노 123, 164).'

 

그래서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하는 문자를 모두 자기 육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그것들을 말과 표양으로 돌려 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4절)

 

3절에서 하나의 위험으로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4절에서는 긍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식 면에 있어서도 올바른 정신, 즉 내적인 가난의 정신을 심어 주고자 했던 사부님은 형제들이 공부함으로써 내적인 가난을 잃을까 두려워했으나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생애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어느 날 가난한 어떤 형제의 어머니가 수도원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한 권의 성서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당시 책값은 비싸기 때문에 사부님은 그 성서를 그녀에게 주면서 그것을 팔아, 먹을 것을 사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결론짓기를, 우리가 성서를 읽기만 하는 것보다 그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성서의 정신을 지니고 실천할 것을 말씀하시는 7권고에서 우리는 세 가지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영신 생활에 있어서 갖고 있는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항상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자세를 통해 내적으로 풍부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나이 든 수도자 중에 영적 독서 등 영신 생활의 성장을 위해 더 이상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생명이신 주님 말씀을 되풀이해 듣고 자주 그 말씀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을 완전히 알고자 노력할 것이며,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가였던 보나벤투라는 이 공부의 목적을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2) 자신의 지식, 수준이 다른 자매들보다 높다고 하여 우월감을 갖거나 자기 자랑, 교만에 빠진다면 그 지식을 자기 육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되고 맙니다.

 

(3)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 역시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더 인식하도록 합시다.

 

이 권고도 프란치스칸 생활이 요구하는 가난(내적 가난)의 한 중요한 부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부님이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형제들에게 지식에 있어서도 올바른 가난의 정신을 심어 주시려는 마음뿐, 지식 그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권고입니다.

 

(1) 우리 수도 생활 안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주님을 더 깊이 아는 데 게으르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좀더 깊은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만족은 죽음의 표시이고, 노력은 생명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아니 완전히 그분을 알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지식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살아 있는, 생활한 사랑입니까? 우리는 성서를 알기 위해, 신학 공부를 위해, 한 마디로 주님께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더 그분을 알고 싶어할 것이고,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분을 사랑하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2) 우리 생활 안에서 주님을 보다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습니까? 성서 낭독, 묵상, 영적 독서, 강의, 그룹 토의 등의 시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으며, 주님을 알고 맛보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의무로 느끼고 되도록 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성서는 나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복음을 살아 계신 주님의 말씀으로 돋고 있습니까?

 

(3) 나의 모든 것을,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말고 표양으로 되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나의 지식, 능력 등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기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적인 가난과 겸손입니다. 인간은 관리자입니다.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것은 프란치스칸적 가난과 겸손의 표현입니다. 즉,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자세와 감사하는 자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모든 지식과 능력은 말과 표양을 통해 남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피사귀는 풍성했지만 열매는 하나도 없는 무화과ㅏ나무의 비유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서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보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없디 있겠느냐?' 하였다(루가 13,6~9)'.
겉은 아름답지만 열매는 하나도 못 맺는 나무처럼, 지식은 많지만 실천하지 않는 수도자는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와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은 모든 권고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는 내적 가난의 의미와 함께 이러한 가난을 강조하셨습니다.
2권고와 3권고의 내적인 가난의 절정인 자기 의지까지 포기하는 순명, 4권고의 장상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는 봉사의 정신, 5권고의 자랑하지 말고 모든 좋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는 겸손, 6권고와 7권고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 특히 지식을 말로나 표양으로 되돌려 드려야 하는, 바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정신 등이 그 예들입니다.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내적 가난이라 생각됩니다. 즉, 사부님은 모든 권고 말씀을 통해 내적 가난을 말씀해 주십니다.
'마음의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