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5. 아무도 교만에 빠지지 말고 / V. No one should give way to...

Margaret K 2007. 5. 17. 00:20

5. 아무도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1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참조: 창세 1,26),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2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3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더불어 그분을 못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과 죄악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박고 있습니다.
4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참조: 1고린 13,2)
5 모든 이상한 언어를(참조: 1고린 12,28) 해석할 수 있고, 천상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6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 마귀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7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8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참조: 2고린 12,5)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V. No one should give way to pride but boast only in the cross of the Lord.

 

Try to realize the dignity God has conferred on you. He created and formed your body in the image of his beloved Son, and your soul in his own likeness (cf. Gen. 1:26). And yet every creature under heaven serves and acknowledges and obeys its Creator in its own way better than you do. Even the devils were not solely responsible for crucifying him; it was you who crucified him with them and you continue to crucify him by taking pleasure in your vices and sins.

What have you to be proud of? If you were so clever and learned that you knew everything and could speak every language, so that the things of heaven were an open blood to you, still you could not boast of that. Any of the devils knew more about the things of heaven, and knows more about the things of earth, than any human being, even one who might have received from God a special revelation of the highest wisdom. If you were the most handsome and the richest man in the world, and could work wonders and drive out devils, all that would be something extrinsic to you; it would not belong to you and you could not boast of it. But there is one thing of which we can all boast; we can boast of our humiliations (cf. 2 Cor. 12:15) and in taking up daily the holy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1. 하일성 멜키올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2. 김찬선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묵상집

 -1. 하일성 멜키올OFM-

 

사부님의 권고의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공통된 한 가지 내용은 바로 내적인 가난, 마음의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내적인 가난, 마음의 가난의 정신을 당시 형제들의 생활의 여러 가지의 상황에 적용하시면서, 그때 그때마다 올바른 가난의 정신을 가지도록 구체적으로 권고해 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내적인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그리스도의 겸손을 또다시 재현하는 것입니다.(참조: 필립 2.7)

 

지금까지 본 권고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권고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볼 수 없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우리가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제대 위에 대려오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1권고 16~17).'

 

사부님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생각대로나 자기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그런데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 8~9)'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겸손, 즉 내적인 가난입니다. 사부님에게는 인간이 되실 때의 겸손,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겸손이야말로 감동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으시고 전부를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한 형제들의 대답은,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9절)'라는 사부님의 말씀과 같은 응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아무 소유도 없는(1,2 회칙) 가난,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는 가난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비하,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 그리스도와 같은 내적 가난입니다.

 

이와 같은 내적 가난을 다음의 여러 권고 말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하고(2권고), 오히려 순명 안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며(3권고), 장상도 장상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지말고, 오히려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사의 정신과 봉사 자체, 그리고 사랑을 가지도록(4권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권고의 말씀을 보면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쉽게 알게 됩니다. 그가 지녔던 가난에 돤한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겸손, 내적인 가난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마음 자세없이는, 즉 겸손 없이는, 가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적, 물질적 가난은 사람을 교만에 빠지게 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충실하게 잘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외적인 가난을 거의 광적으로 지키는 수도자일수록 자신의 그 가난을 보물같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중세기의 많은 이단자들이 그랬으며, 프란치스코회 내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과 반대로 사부님은 우리보다 가난을 덜 충실하게 지키고 때로는 부자같이 먹고 입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 앞에서 프란치스칸들이 지녀야 할 태도를 권고와 충고 형식으로 묘사하십니다.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나 맛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업신여기거가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각자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업신여기십시오(제2회칙 2, 17),' 이와 같이 겸손 없이는 참된 가난도, 참된 성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덕의 기초는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을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우리에게도 내적인 가난을 잊어버리면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가난만을 강조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영적 형제들 그룹에 속한 많은 형제들이 그랬습니다. 가난의 정신을 잊어버리면서 외적 물질적으로만 지켜지는 가난은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는 오늘날의 프란치스칸들입니다.

 

 

1. 모든 좋은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냈으니(참조:찬세 1,26).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더불어 그분을 못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과 죄악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1절~4절)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창조에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1절). 하느님은 인간의 육신을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혼을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존재케 해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항상 고마운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은 것이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고린 4,7)'라고 바오로 사도의 말과 비슷한 표현으로 프란치스코는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4절)'라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자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랑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나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은혜,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그 능력을 가지고 복음의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마태 25, 13~30) 벌어야 하며,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께 그것을 되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적 가난이란 무엇입니까? 그릇된 본성 때문에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그 사람(2 권고)'은 하느님의 것을 소유하며, 하느님의 소유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기가 하는 모든 좋은 일과,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선한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자기 자신까지 하느님께 바치면서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한 도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더 충실하게 섬기려고, 도구의 역할을 더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인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재능 등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것보다는, 내가 얼마만큼 주님이신 창조주를 인식하고 섬기며, 받은 그 능력으로 그분을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주, 계속 자문하는 양심 성찰이 필요합니다. 특히 능력이 많을수록 더 그러합니다.

 

사부님은 인간의 태도를 피조물과 대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2절).

 

피조물들은 그 나름대로 창조주를 인간보다 더 잘 섬기고, 그분을 인식하며, 그분에게 더 잘 순명하고 있습니다.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질서대로 생활하고 움직이며 성장합니다. 하늘의 별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은 자연 질서대로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있는데,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 능력 들을 항상 이기적으로 사용하며 남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그 질서를 오히려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더불어 그분을 못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과 죄악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박고 있습니다(3절).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주님을 십가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과거에도 죄를 지었고, 현재에도 그러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미래에도 죄를 범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는 죄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해야만  합니다. 나의 죄악을 생각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죄를 가난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죄는 하느님의 소유권, 그분 절대권을 빼앗으려는 것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난이란 모든 선과 좋은 것 모두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열렬히 간청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에게 간청합니다. 매사에 자기 자신을 낮추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혹은 여러분을 통해 어떤 때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좋은 말과 일에 대해, 더 나아가 어떤 선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말고, 자만 자족하지도 말며, 혹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것이라곤 악습과 죄악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제1회칙 17, 5~7)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좋은 능력과 좋은 점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랑하기보다는 더욱더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느님의 손에 더 훌륭한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부님이 11권고에서 '복되다'고 하신 그런 프란치스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11권고 4절).' 이런 형제 자매는 하느님께 모든 선을 돌리기에 항상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참조 1고린 13,2) 모든 이상한 언어를(참조: 1고린 12,28) 해석할 수 있고, 천상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성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 마귀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4절~6절).

 

지식이나 다른 능력,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특별히 자랑하기 쉽고, 그래서 위험스러운 성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지식이나 지혜, 능력이 많은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사람, 성인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덕행에 뛰어난 사람인 경우에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형제 자매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은 나보다 노력을 훨씬 더 많이 하면서도 큰 효과가 없는데 비해 나는 얼마나 많은 능력이 있으며 얼마나 멋있는 인물인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게 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을 받을 때가 가장 위험스러운 때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입으로나 표정으로나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내적으로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선물로 받은 능력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교만해질까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칭찬 받기보다는 빈난 받기를 더 좋아하였다. 비난은 사람에게 그듸 생활을 바로잡게 하지만, 칭찬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2 첼라노 140).'

 

우리는 각자가 선물로 받은 능력을 키워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들을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능력이 적고 좀 부족한 다른 형제들을 무시히고 얕보는 이런 일들을 불행하게도 가끔 공동체 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심스럽습니다. 바로 도적이 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랑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지식과 지혜, 능력은 인간을 가지 있게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만약에 그렇다면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악마(마귀)가 모든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고 더 가치가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지식이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많이 받은 사람은 맑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루가 12,48)'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받은 것을 남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받은 능력을 조심스럽게 관리하며 발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회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 방식이며 사람을 평가하는 그들의 기준입니다. 아름다움도, 좋은 가문도 재산의 부유함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도 자랑할 이유나 자랑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우리의 것이라면 곧 죄악뿐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평가할 때나 남을 평가할 때, 그 평가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가치가 있고 공로가 되는 것은 그분이 주신 선물을 얼마나 잘 충실하게 관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남을 위해, 얼마나 잘 사용했는가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 드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아무것도 소유 없는 작은 자로 자신을 인식할 때 비로소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참조: 2고린 12.5)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8절)

 

인간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약점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약점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됩니까?

 

바오로 사도는 '자랑해서는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받은 수많은 선물을 일일이 고린토 신도들에게 말해 준 다음에 '나는...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2고린 12,5)'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랄라디아인들에게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바오로처럼 자랑할 것은 두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는 당신의 사랑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고, 또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자비심을 발견하며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가난을 당신의 구원으로 풍요롭게 하시고,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사랑으로 체워 주십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굳게 하시며, 우리의 약점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도도 참되게 가난한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함께 져야만 하겠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된 우리 모두가 후세에서 영원토록 부르게 될 노래를,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

 

2.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합시다.

 

5권고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도 프란치스코의 동기와 의도를 이미 아셧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분의 의도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가난의 신비를 윌에게 소개해 주시면서 그 신비를 설명해 주며, 그 신비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프란치스칸적 가난은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 몇 가지를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1) 내적 가난과 겸손: 우리는 내적 가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적 가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다까? 진정한 겸손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내가 하느님 앞에서 작은 자라는 것이 어떤 느낌을 느끼게 합니까? 나는 교만의 노예가  되지 않고 교만을 벗어나서 자유를 얻어 누리고 삽니까?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경우에 어떤 느낌을 가지며 어떤 행동을 합니까? 다른 형제 자매가 칭찬을 받고 나는 무시나 비난을 당할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이보다 '내가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게 되는 경우 나의 마음가짐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내적 가난과 겸손에 대해 더 정확한 질문이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따라서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자세와 그런 느낌을 지니게 됩니까? 아니면 내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까?

 

이기심 없이 창조주를 섬깁니까? 내 안에 머무시면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일과 업적과 활동을 알고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선물들을 내 것처럼 느껴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진실한 대답은, 나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멸시를 당할 때나 칭찬을 받을 때에 나의 마음의 흐름과 반응해서 내가 가난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즉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2권고에서 처럼 내가 육신의 정신을 따라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영에 따라서 살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2권고 2절~3절)

 

(2) 감사: 나는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까?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이 자연적이고 자동적이며 본능적으로 고맙게 느껴집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수십 번씩 '주님 찬미합니다. 천주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입으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면서 기도합니까?

 

우리 자신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는 부요하고 풍부한 자임을 인식하면 할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더 생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지성으로 인식하고 또한 마음으로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더 겸손한 자가 될 것입니다.

 

(3) 미사와 우리의 봉헌: 미사 성제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미사는 참으로 감사제(Eucharistia)입니다. 미사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우리 자신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봉헌 때에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사람만이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며 감사제라는 미사 성제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풍부히 받게 됩니다. 봉헌 때에 완전한 제물이 되면 될수록, 영성체 때에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더욱 풍부하게 받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그렇습니다. 미사는 우리들에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미사는 우리의 내적 가난을 표현하는가 하면, 다른 편으로는 우리의 가난 곧 공허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채워 줍니다.

 

(4) 십자가의 사랑. 구원의 기쁨: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십자가의 사랑의 체험하고 삽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며, 안정감을 줍니까?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심에 의탁하여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지니고 있습니까? 나의 약점과 결점과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생활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가난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인식한다면, 자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1~4)."

 

 

2. 김찬선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제 51호)

 

 

권고 5번의 전통적인 제목은 <아무도 교만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할 것입니다> 이다. 그러므로 권고 5번의 주제는 교만이나 자랑의 경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자신에대해 형제들은 조심하라는 권고요, 자랑을 굳이 해야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권고란 것이 본래 성령 강림 총회 때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한 권고를 모아놓은 것이기에 이런 취지의 권고라고 해도 좋지만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인간관을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권고에서 프란치스코는 "오 형제들이여"로 시작하지 않고, O Homo" "오, 사람이여"라는 말로 권고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권고의 대상은 형제들에게 단순하게 교만과 자랑을 경계하라고 하는 것뿐이라면 굳이 거창하게 "오, 인간이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단순히 형제가 아니라 인간임을 생각하라는 그러니까 형제들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피조물 가운데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해 얘기하며 "오, 사람들이여'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이 권고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특별히 창조하셨는지 얘기하면서 인간존재의 특별함을 얘기하고, 다른 피조물과 비교를 하고 있으며, 뒷부분에서는 악령과도 비교하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고 인간은 교만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교만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라는, 자랑할 거면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게 됨을 자랑하라는 권고이지만 앞부분에서든 프란치스코의 인간관과 창조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여러 정의가 있을 수 있다. 'Homo'자가 들어가면서 일컬어지는 여러 정의가 있다. 학명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이고 흔히 얘기되는 것이 Homo sapiens, Home Erectus이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뜻에서 Homo Faber, 여행을 할 줄 아는 존재라는 뜻에서 Homo Viator, 유희의 인간이라는 뜻에서 Homo Bonus, 덕을 닦는 인간이라는 뜻에서 Homo Virus등,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관에 따라 '인간은 이런 존재다'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Homo Mysticus는 신부이신 하느님9Deus Mysticus)께 해당하는 말을 인간에게도 적용하는 것이고, Homo Bonus는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얘기하며 "당신은 선이시나이다"라고 수없이 얘기한 그 선이신 하느님(Deus Bonus)을 인간에게도 적용한 것이며, Homo virus도 덕 자체이시고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Deus Virus)을 인간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고 하느님과 유비적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 교회는 인간을 "Imago Dei(하느님의 모상)"라고 얘기한다.

 

프란치스코도 교회의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또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다고 얘기한다.

 

 

1. 프란치스코의 창조론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다면서 중요한 말들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창조론을 내비친다. 이 얘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권고 앞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Attende, o home, in quanta excellentia posuerit te Dominus Deus, quia creavit et formavit te ad imaginem dilecti Filee sui secundum corpus et similitudinem(suam)secundum spiritum)."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Secundum corpus"와 "Secundum spiritum"이라는 라틴말의 의미가 "-을 따라", "-대로", "-을 좇아", "-에 의하여", "-에 준하여" 들의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Corpus를 따라서"와 "Apiritus를 따라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생각이 맞는다면 따라야 할 두 가지 원리로서 ‘Corpus’‘spiritus’가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예를 들어, ‘주님을 따라서라고 하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서 한다는 말이고 그때 주님은 행동의 기준이며 거기를 벗어날 수 없는 원리나 법칙이라는 얘기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따라서 창조한 원리랄까 이치랄까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Corpus’‘Spritus’라고 프란치스코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 육신(courus)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었고 영원히 존재하는 ‘corpus’라는 원리에 따라 또는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것이디. 여기서 몸, 육신은 살덩어리와 다른 것이다. 자동차에서 차체를 영어로 ‘Body’라고 하고, 이 차체에 각가지 기능들이 얹혀서 하나의 완전한 차가 되듯이 우리의 몸, 육신도 단순히 살덩어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모든 장기의 종합이며 영과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것으로서의 몸, 육신이다. 그래서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데 죽고 난 뒤에 부활케 되는 육신은 지금의 이 살덩어리와 몸뚱어리가 아니라 새로운 육신일 것이다. 옛날에는 육신의 부활이 이 세상에서의 육신으로 생각하여 화장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고, 그래서 가톨릭을 반대하던 비밀 결사 단체인 <Free Mayson> 은 가톨릭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화장을 하곤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볼 때 천지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모든 육신/몸의 창조 원리인Corpus가 있었고, 죽어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이 Corpus에 따라 새로운 육신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와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콜로 1,15-18).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고등 종교나 철학에서도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론이 있다. 동양의 주역이나 성리학만 봐도 우리 생성의 원리로서 태극과 이와 기, 음양오행성 등으로 어떻게 모든 것이 생겨났는지 설명을 한다. , 무극인 태극이 있고, 이 태극에서 이와 기가 나오고,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갖가지 우주 만물이 생성 소멸한다. 이런 면에서 기는 우주 만물 형성의 진료이다. 기가 이런 것이라면 이는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원리요 법칙 또는 우주 만물 형성의 원리요 이치요 법칙이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사상 안에 혼백의 이론도 있다. 혼비백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서 혼이 날아가고, 백이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혼과 백이 완전히 날아가고 흩어져 없어지는데 4대가 걸린다고 생각했기에 4대조 조상의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뒤집어 얘기하면 사람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육신을 거느리는 백과 정신을 다스리는 혼이라고 하는 것이 몸에 함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혼백이 나갔다는 뜻이다.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죽음이란 바로 혼과 백 의 해체였다. 주자는 생은 기가 모이고 혼백이 결합하는 것이며, 사는 기가 흩어지고 혼백이 분리되는 것이다고 했다. 율곡 이이도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정백은 땅으로 내려가서 그 기가 점차 흩어져 결국에는 모두가 소멸되어 없어진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누구의 얘기인지 알 수 없지만 입으로 내쉬고 코로 들이쉬는 것은 혼이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 즉 감각적 요소인 백은 정이며, 따뜻한 기운은 혼이 되고, 차가운 기운은 백이 되며 움직이는 것은 혼이고, 고요한 것은 백이다.”라는 말도 있다.1

 

: 이 부분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받기 위해 인용한 것이지만 필자가 동양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또 이 말의 원천과 본문을 직접 찾아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인터냇 공간에서 발췌한 것이기에 주자의 말이나 율곡 이이의 말이라는 확실성도 없고, 주자와 율곡의 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원천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이 글을 싣기로 할 대 삶과 사상 편집장에게 필자는 학적인 면에서 권고를 해설치 않고, 그저 필자의 생각과 묵상을 자유롭게 나누는 차원에서 싣겠다고 하고서 게재를 시작하였음도 밝힌다.

 

이런 주장들은 놀라울 정도로 창세기의 창조론과 많이 흡사하다. 이런 흡사함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주와 인간의 창조  또는 생성의 이치/원리를 궁극적으로 찾아 올라가면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를지라도 그 궁극의 이치/원리를 공통적으로 만나게 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창세기가 쓰인 시기와 장소가 주역이 쓰인 시기와 장소가 너무도 달라 둘 사이에 어떤 식의 교류가 있어서 이렇게 흡사함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1장의 <말씀의 창조> 2장의 <숨의 창조>이고, 1장이 성자 그리스도의 창조라면 2장은 성령의 창조이다. 창세기의 창조 얘기를 접한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매우 당황할 것이다. 1장에서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음에도 2장에서 다시 창조되는 얘기를 듣게 되니 말이다. 그것도 깨 차이가 나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있어서 나머지를 마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제관계 전통과 야휘스트계 전통의 차이라고 또 그 차이는 인간을 맨 나중에 창조한 것과 인간을 먼저 창조하고 다른 피조물을 창조한 것의 차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해석과 주장을 반대할 생각이 없지만, 구약이 두 가지 다른 창조 얘기를 함께 실은 것은 그 두 가지 창조 얘기가 모순이 아니라 하느님의 두 가지 창조를 담고 있어서 문제없다고 생각하기에, 함께 실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1장의 창조는 말씀, 로고스 창조인데 이것이 주역의 이발설과 비슷하고, 2장의 창조는 기발설과 참으로 흡사하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어떤 분이신지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고, 알 수 없는 분으로서 오직 말씀으로만 당신을 드러내시고 창조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무위무형인 이와 같은 분 이시다. 이에 비해 2장의 하느님은 인간의 땅으로 내려오시어 땅으로 손수 인간을 빚어 만드신 다음 인간의 코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목에 숨이 통하게 하시는 분이신데 목에 숨이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목숨이고 생명이다. 여기서의 하느님은 내재적인 하느님이시고, 유위유형인 기와 같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에 있어서 원인과 원리와 아치가 있다는 면에서 창세기와 주역이나 성리학이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다면-이 차이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지만-창세기는 하느님이라는 모든 것의 원인자로서 그리고 원리와 이치의 근원이신 분이 계셔서 원리와 이치에 따라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인데 비해 주역이나 성리학에서는 그런 하느님이 명시적으로는 없다는 것이다.

 

2.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창세기와 주역이나 성리학의 비교 차원이 아니더라도 결국 우주와 인류의 기원 문제는 두 가지다. 요즘 흔히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대별하듯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주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세상 창조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함으로써 창조와 지배권을 하느님께 독점적으로 인정치 않고 인간이 공유하려는 시도와 도전은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있어 왔고 아마 앞으로 더욱 그 시도는 많아지고 도전은 강력해질 것이다. 요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역사학적으로 그리고 미래학적으로 깊이 연구를 하고 인터넷 강의나 저서로 인기를 끌고 있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바로 이런 경향과 추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Homo Sapiens’였던 인간이 미래에는 ‘homo Deus’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신인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Homo Deus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에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름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리엔스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까 “homo Sapiense”이었던 인간은, 이제까지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에서 자신을 구원한 인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자 또는 자신을 신과 같이 만들고자 할 것인데 그 방법이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미유기체 합성이 될 것이라고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이다.” 인체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놈 genomegoergo 게놈지도가 모두 완성하면 이를 토대로 인간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였던 질병을 정복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려 할 것이다. 다시 얘기하면 인간은 생명공학, 제약 산업 들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질병을 정복하고 죽음도 초월한 존재의 탄생을 꿈꾸고, 사이보그 공학으로 타고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인간의 도래, 뇌와 컴퓨터의 연결로 비유기체의 합성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신이 되려고 한 인간의 역사는 이것이 처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있었다는 뜻에서 첫번째 인간인 아담에서부터 이 시도를 하고 죄를 지어 그것이 인류의 원죄가 되었다고 그리고 있고, 그래서 원조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신이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3. 프란치스코의 인간학

 

프란치스코의 생각도 당연히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생겨난 인간만이 이런 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다른 피조물과 비교하여 얘기하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모든 피조물보다 높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함에 있어 오히려 다른 피조물만도 못하다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생각나는 것이 바로 시편 8편이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느님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서 인간은 하느님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이 아니지만, 하느님도 아니라는 관점이 그 하나이고, 하느님이 아니지만, 짐승도 아니라는 관점이 다른 하나이다. 그게 그것인 것 같지만 많이 다르다. 짐승이 아니지만, 하느님도 아니라는 관점은 인간이 잘났지만 하느님이 아니니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이고, 하느님이 아니지만 짐승도 아니라는 관점은 인간이 자기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지만, 짐승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보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곧 육을 따라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모습(imaginem)으로, 영을 따라서는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시고 지어내셨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존귀하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봤듯이 하느님은 두 가지 원리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고 지었다는 말씀인데, 두 가지 원리란 몸성과 얼성, 또는 그리스도성과 성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몸이 있고 얼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몸은 이런 몸이지만 우리 몸의 원형인 그리스도라는 태초의 몸이 있고, 죽은 다음 우리는 원형인 그리스도의 몸을 따라, 지금의 몸과는 다른, 또 다른 몸으로 있을 것이다. 몸은 얼의 그릇이요, 개체적 존재를 구체화하는 존재의 틀이다. , (spirit)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비 물질적인 존재이고, 비 물리적인 힘으로서 내재적으로도 힘을 발취하지만 다른 존재에게로 향하고, 다른 존재의 몸 안에 들어가 머물며 거기서도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으로 말하면 성부에게서 영이 나와 그리스도께 머물고, 그리스도에게서 영이 나와 성부께 머무는 것이며, 이런 삼위일체적 하느님으로부터 주님의 영, 곧 성령이 나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와 한 존재를 이룬 것이 각 인간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인간의 몸은 물론 모든 지체의 원천인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 창조의 의도대로 품위를 지녀야 한다.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비하하는 것도 겸손이 아니다. 다른 존재와 비교하여 열등감을 가지고 자존감을 잃는 것도 겸손이 아니다. 그러니 은총 지위에 있는 존재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먼저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은총의 수혜자임을 늘 자각하며 사는 것이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사제 형제들에게 여러분의 품위를 생각하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품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짐승처럼 생존 본능적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추구하고, 천상 것을 늘 추구하여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분의 모상인 우리도 완전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침승에게는 본능만이 있고 자기들의 세계가 있을 뿐이지만 인간에게는 모상인 자기들의 원형인 하느님을 늘 인식하고, 그리워하며 추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은 기도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우리 인간 존재의 대상으로 두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제 두 번째로 짐승도 아니지만. 하느님도 아니라는 관점을 보자. 인간이 신적인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지어내신 것이기 때문이니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품행은 짐승과 같이 개차반이면서 마치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 양 뽐내곤 한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다른 피조물들을 들이대며 은총을 더 많이 받아 더 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오히려 악습과 죄악을 즐기면서 주님을 못 박기만 할 뿐이라고 질타한다. 이것은 다른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잘 인식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것에 대조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고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과 섬김과 순종과 다르다.

 

먼저 인식을 보면 프란치스코가 다른 피조물들도 하느님을 인식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우리 인간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다른 피조물들의 인식과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다른가? 솔직히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인식이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아무리 프란차스칸이고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한 말을 옹호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필자의 생각에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인식이 없는 것 같고, 적어도 인간과 같은 하느님 인식은 없음에 틀림이 없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얘기하는가? 무한에 대한 인식이 없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한에 대한 인식이 다른 피조물들에게 없음을 뭘 보고 알 수 있는가? 다른 피조물, 특히 동물에게 무한 욕구가 없음을 보면 무한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 필요만 따지면 천억 원이 필요치 않는데, 인간은 필요를 넘어 무한히 욕심을 부린다. 사실 10억만 있어도 필요를 다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다 욕심이다. 이런 인간과 달리 다른 피조물들은 필요한 만큼만 소유한다. 그러면 다시, 왜 다른 피조물은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인간은 무한을 소유하는가? 그것은 다른 피조물들은 무한이라는 관념이 없는데 비해 인간은 무한에 대한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능력의 차이이고, 이것이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식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무한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을까? 그것은 무한을 욕심내라는 것이 아니라. 또 아담과 하와처럼 무한하신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욕심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선악과를 따먹을 생각이 없었다. 욕구 이전에 생각조차 없었다는 말이고 알기 전에는 욕구도 욕망도 욕심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선악과가 있다는 것을 뱀이 알게 해 준 뒤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인식하고 의식하기 시작하였고, 알고 나니 따먹고 싶은 욕망도 생겼고, 따먹어야겠다는 의지와 욕심도 생긴 것이다. 하느님을 비롯하여 모든 선을 우리는 알고,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는데 알고, 욕망하고, 소유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비슷하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감사하고 영광을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알게 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해야 하는데, 알게 된 무한을 자기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들처럼 섬기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4. 프란치스칸 주의주의

 

여기에 프란치스칸 주의주의의 씨앗이 있다.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있다고 할 때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정하는 데 이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주지주의이고, 의지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주의주의이며, 감정 또는 감성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주정주의라고 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차원이라면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느냐에 따라서 역시 주지주의, 주의주의. 주정주의가 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면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창조주를 그대보다(인간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라고 함으로써 하느님 섬김하느님 인식과 하느님께 대한 순종’, 이 세 가지를 중요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곧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하느님께 더 잘 순종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감성과 의지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따져야 한다고 프란치스코는 본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의 예를 드는데 주님을 아는 것 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성이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악마가 우리 인간보다 주님을 더 잘 알고, 천상의 일과 지상의 일 모두 우리 인간 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지주의를 경계하였고, 도미니코 성인이 수도회를 합치자고 할 때 그 제의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가 도미니코의 제의를 거부한 것은 도미니칸이나 프란치스칸 모두 탁발 영성이라는 면에서 같지만 합칠 수 없는 중요한 차이가 두 수도회 간에 있다고 본 것인데, 바로 주지주의와 주의주의이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이전까지 우리 교회의 대세였던 정주 영성과 비교할 때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탁발 영성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일치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도미니코의 주지주의 영성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에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차이를 신학적으로 알고서 그 제의를 거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알수 있었던 것은 도미니코회가 ,설교자들의 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교를 중요 사도직으로 삼는 수도회이고, 설교가 중요 사도직이니 성직 중심이고 회원들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도미니코회는 이단들과 싸워 교회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이단과 싸우고 이단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기위해서는 신학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하고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라고 이름 지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형제들이 작은 형제들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글을 아는 사람이 성직자와 귀족들뿐이었던 당시 형제들은 글을 모르기 원했으며

 글을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당시 하층민들처럼 손수 일하며 먹고 살기를 원했고 어디에서든지 높은 직책을 맡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회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형제들은 남의 집에서 봉사하거나 일하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감독관이나 관리인이 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하는 집에서 주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같은 집에 있는 모든 이들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형제들처럼(또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 처럼) 동냥을 하러 다닐 것입니다"(비인준 규칙 7,1-2.8)

 

그러므로 형제들이 작은 자로서 살기를 바랐던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설교하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으며 설교를 하더라도 지적인 설교가 아니라 행동적인 설교를 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설교는 이론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간결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형제도 거룩한 교회의 구범과 규정을 어기면서, 또 자기 봉사자의 허락 없이 설교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자는 아무에게나 분별없이 이를 허락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형제들은 행동으로 설교할 것입니다"(비인주 규칙 17, 1-3)

 

"형제들은 주교가 금하면 그 주교의 교구에서 설교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회의 총봉사자의 시험을 거쳐 그로부터 설교의 직책을 받지 않았다면, 형제들 중 그 누구도 사람들에게 감히 설교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나는 설교하는 형제들에게 권고하며 충고합니다. 설교할 때 그들의 말은 백성들에게 유익하며 감화를 줄 수 있도록 숙고 되고 순수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들은 간결한 설교로 그들에게 악습과 덕행, 벌과 영광을 선포할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간결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준 규칙 9장 전체)

 

사실 프란치스코가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소명의 뜻을 확실하게 깨달았을 때 그는 이교도나 이단에게 가는 것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 들어가 허물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허물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며, 그래서 자기와 형제들이 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회개와 복음을 실제로 삶으로써 행동으로 사람들을 회개와 복음적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가 허물어진 것은 이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 복음의 삶을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그래서 신자들의 회개와 교회의 쇄신도 다시 그리스도의 그 가난과 겸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많이 <아는 것>을 경계한 것은 이런 교회적이ㅣ고 시대적인 거창한 소명 차원도 있지만 그것 이전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 있아 아담과 하와의 최초의 역사,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죄의 역사는 알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느님처럼 되는 것,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첫 번째 죄이고 불순종의 죄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권고 2번에서부터 의지의 문제를 다루고, 그리고 이후 이러지는 주제중의 하나는 안다는 것과 겸손과 순종의 관계이다. 선과 악을 알려고 함은 하느님처럼 도ㅚ려는 교만과 같은 말로 성서에서는 이해된다.

 

앎에서 두가지가 있다. 사람의 앎이 있고 힘의 앎이 있다. 그중에 사람의 앎은 이렇다. 사랑하기에 알려고 하고, 사랑하기에 알고, 사랑할수록 많이 알게 된다. 이럴경우,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은 동의어이다. 이것은 사랑의 이치이기에 인간이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경우에 더 그러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사랑 이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거나 사랑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우리 인간은 사랑을 조금 가지고 있고, 그 조금 있는 사랑으로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만 존재가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하느님만이 존재 자체가 곧 사랑이시다. 그러기에 사랑할수록 사랑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는 사랑할수록 많이 알게 되지만, 아는 것의 경우는 안다고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알수록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으로 알기에 많이 알고 속속들이 알지만 사기꾼은 사기 치기 위해서 아는 것이기에 많이 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많이 안다고 많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으로 알 경우에는 많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지만 사랑이 없는 앎은 힘이나 재물이아 지위나 명예나 심지어 지식 자체를 더 소유하기 위해서 알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이 없는 앎의 문제 중에 재물이나 지위나 심지어 지식 자체를 소유하기 위한 앎의 문제를 권고 7번에서 다룬다면 권고 5는 힘의 앎, 교만한 앎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말이 있듯이 아는 것은 힘이다. 이것은 주먹 세계에서 완력이 센 사람이 그 세계의 두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울줄 아는 사람,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곧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두목이 되는 것과 같고 이런 면에서 아는 것은 분명코 힘이다.

 

그런데 거듭 얘기 하지만,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것이 아니고 힘이 센 것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힘이 없거나 약한 것보다 힘이 있고 센 것이 좋지 않은가? 문제는 아는 것과 아는 것의 힘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사랑을 목적하지 않은 것이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칼이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칼을 사용하는 사람도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문제는 사랑이 있고, 그래서 사랑으로 칼을 쓰면 마치 의사가 칼을 가지고 사람을 수술하여 살린다든지 엄마나 요리사가 칼로 음식을 맞있게 만들어 가족을 건강하게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강도나 폭력배의 손에 캉이 쥐어지면 그의 사랑 없음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의 욕심과 악의로 인해서 칼로 남을 죽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사랑 없는 앎과 힘은 인간을 교만하게 할 뿐이고 폭력적이거나 이기적으로 지식과 힘을 쓰게 됨을 프란치스코와 주의주의는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다 알아!' 하고 말함은 '내가 너를 다 알기에 나는 너를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으니 너는 까불지 말고 내 밑에 꼼짝 말고 있어!' 라는 교만한 말과 같다. 내가 무엇을 안다는 말은 무엇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다. 앎으로서 나는 군림하는 자가 된다. 물리적 힘을 많이 소유한 자보다도 더 강자가 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지기 좋을(마음)대로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등식 또는 연결이 이루어진다. 많이 앎-교만-불순종-힘으로 남위에 군림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하려고 함-십자가를 거부함

 

 

5. 지식-악마적인 힘

 

이상의 연결은 악마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라고 프란치스코는 단호하게 얘기한다. 한 마리의 마귀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합친 것보다도 천상의 일과 지상의 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한다. 

 

"뿐만 아니라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함께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대는 아직도 악습과 죄를 즐기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1고린 13,2) 가지고 있고, "모든 언어를(1고린 12,28) 해석할 수도 있고, 또 천상 일을 날카롭게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할지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의 마귀는 그 모든 사람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권고 5,3-6)

 

실제로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친 악령들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아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기의 앎을 드러낸다. 그런데 왜 자기가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내세우는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으면 받들어 모시면 되는 것인데 왜 안다는 것을 내세우는가? 이것은 받들어 모시겠다거나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나름대로 주님을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한다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데 우리 인간도 그렇고 악령도 인식하기는 잘하지만 섬기고 순종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를 괴롭히려고 왔냐고 관계를 거부한다. 사실 악령이란 하느님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 너무도 잘 알지만 자기를 괴롭히는 자로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래서 거부하고 반대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악령이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 힘의 과시이고, 예수님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고 복종시키고자 함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꿰뜷고 과거의 일을 다 맞추는 점쟁이나 악령을 만나면 꼬리를 내리고 그 하수인이 된다. 악령은 같은 시도를 예수께 한 것이다. '예수야, 나 너를 다 안다. 그러니 나에게 굴복하던지 그러지 않으려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으니 나를 떠나라! 너와 나는 도저히 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악령들은 어떤 악령들인가? 광애에서 예수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친 악령의 아류들이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예수를 조롱하던 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악령의 아류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시작과 끝에 악령은 대담하게도 창세기의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굴복시키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한 번 능력을 발휘하여 네 마음대로(사실은 내가 하라는 대로)해 보아라! 하느님의 아들이 무엇 하러 그리 쫄쫄이 굶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 돌이 빵이 되게 하는 너의 능력을 발휘해 보아! 무엇 하러 십자가에 달려서 그리 생고생을 하느냐? 그런 모습을 보고 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니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너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잘알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알면서도 관계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면 잘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알면서도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더 큰 거역이고 불순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랑 없이 아는 것이 다일 경우는 존재를 소유하고, 좌우하고, 억압하기 십상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러니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랑이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랑이 중요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음직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약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마침내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랑이 중요하다.'

 

 

6. 지식의 힘과 사랑의 힘

 

거듭 말하지만 사랑이 없이 많이 아는 것은 인간을 교만하게만 할 뿐이다. 교만을 여러 관점에서 얘기하고 정의할 수 있지만, 자기(ego)의 관점에서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관점에서 교만을 지독한 '자기집중' 또는 '자기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자기애가 강하며, 자기주장이 강하고, 심한 경우 자기밖에 없거나 자기밖에는 모른다. 자기의 밖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지독하게 자기만 보기에 자기만 있고, 자기의 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래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은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만 있고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교만이 극에 달한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어른도 없으며 그래서 순종할 수가 없고, 자기 좋을 대로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불순종은 교만이 극에 달아 하느님도 어른도 없는 안하무인의 불순종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 곧 보통 사람의 불순종은 자기 좋을 대로 하다 보니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도 있다. 그런데 자기 좋을 대로란 자기 좋아하는 것은 하고, 자기가 싫어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의 쉬운 표현이다. 그러기에 자기 좋을 대로 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싫어하는 것, 곧 십자가는 지는 것은 싫다.

 

그런데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않는 것이 아니라-못하는 것, 십자가 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실은 약한 것이다. '자기(Ego)가 강할 뿐 고통에 약한 것이다. 참으로 강한 사람은 고통에 강한 것이고, 고통에 강하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악의 경험이고, 악이란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매우 주관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악으로 경험하거나 악이라고 규정해 버리지만 많은 경우, 내가 싫어하는 것이 마치 입에 쓴 약처럼 나에게 좋은 것, 곧 선인데 내 몸 전체에게 좋은 것, 선은 마다하고 내 입에만 좋은 그런 선만 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적, 정신적으로 약한 것이고, 이렇게 심리적, 정신적으로 극히 약한 사람이 악령에게는 먹잇감이다.

 

고통을 견딜 강한 사랑이 없는 사람, 그래서 고통을 무척 두려워 하는 약한 사람은 사십 일이 아니라 하루 단식에서 금세 유혹에 넘어가 단식을 포기하듯, 쉽게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다. 이것이 강신부에서 볼 수 있는 무병을 통한 신들림이다. 강신무란 모계를 따라 무당이 되는 세습무와 달리 참으로 내림굿을 통해 신이 내린 무당이다. 그런데 아무도 무당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잡신들은 자기가 먹잇감으로 삼은 사람을 무병을 가지고 괴롭히는데 처음에는 거부하던 사람도 계속해서 무병으로 괴롭히면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신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약함이 악함을 받아들이는 구조이다.

 

그리고 약한 사람이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비슷하다. 약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더라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진 사람은 내게 오라는 주님께 달려가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그 십자가를 지기에 안식을 누리지만, 약하기에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싫고 두렵기 까지 한 사람은 그 고통을 방어하고 거부하기 위해 마치 안간힘을 쓰듯 악을 쓰는 악바리가 된다. 그래서 고통을 주는 사람을 거부하고, 그러나 거부해도 나에게 밀고 들어오면 악으로 또는 깡으로 밀어내려고 발버둥 치거나 악독하게 대항을 한다. 그러니까 고통을 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겸손하고 온유하게 견뎌낼 힘도 없는 약한 사람이 악으로 고통으로 거부하다가 괴악한 사람이 되거나 악령을 받아들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에 약한 사람은 자기(Ego)가 강하다. 그리고 자기가 강하다는 것은 좋고 싫음에 민감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죄 중에 있었기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쎴다고 한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무렵에는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유언 3)

 

그리고 전기에 의하면 나병 환자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두려워 하였다. 그런데 두려움이란 극단적으로 싫어함이 아닌가?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워하지 않지만 너무도 싫으면 만날까 두렵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만큼 프란치스코는 싫고 좋은 것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싫고 좋은 것이 있는 것이 왜 진인가? 물론 프란치스코가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느님의 계명을 알면서도 자유의지로 어기는 몬래 의미의 죄가 아니고 자기 중심성(Ego)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싫고 좋음의 기준이 나이고, 내가 싫어하고 좋음의 기준이 나이고,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 따라 대상은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하니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이유로 자기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쓰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린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반면 사랑할 경우 내가 좋아하는 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내가 싫어하는 악(여기서의 악은 죄의 악이나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악이 아닌, 우리가 인간이 싫어하는 것으로서의 악임)은 자기가 소유한다.

 

그런데 이랬던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은총으로 좋은 것은 포기하고, 싫어하는 것을 껴안는 회개를 하였을 때, 자기가 껴안은 나병환자가 실은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병 환자 뿐 아니라 내가 싫어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이 달려계신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십자가, 그래서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 계시다는 것을 깨닫자 싫어하던 것이 단맛으로 바뀌었으며, 그래서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오상을 받을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프란치스코가 거리를 눈물로 채웠다고 얘기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더 숙고해 보자, 즐거움이 선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고통은 악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이미 얘기했다. 쉽게 얘기하면 즐거움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누림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또는 고통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겪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 그래서 내 스스로는 원하지 않고 타의의 의해서 겪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거져 겪는다고 할 뿐 아니라 고통을 당한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런데 순종이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요, 내 뜻(좋을)대로 무엇을 하지 않음이라면, 순종은 하느님 뜻대로 내가 움직여지도록 자기의 약함을 껴안음이며 내 좋은 것과 반대되는 것, 곧 고통을 타의에 의해서 겪게 되더라도 그것을 껴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는 약함에서 순종으로 넘어간다. 자기 힘으로 자기 좋을 대로 하는 사람이 하느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의 힘을 다 빼고 약함을 스스로 선택하고 더 나아가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것은 강한 데도 약함을 껴안고, 내 좋을 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유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프란치스코는 분명히 말한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약령들을 쫓아 내는 기적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와 반대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1고린 12,5)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참조: 루카 14,27; 갈라 6,14)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권고 5, 7-8)
모든 선은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의 것이기에 선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시체와 같고 약함 그 자체이며,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저 모든 악과 악습과 죄악들이다(2신자 69). 사랑과 선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기에(참조: 지혜 11-12) 아무런 선도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그래서 아무런 선도 누릴 수 없는 유한성이 바로 우리의 것이고, 반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 밖에는 없고 그래서 죄악과 고통을 감당해야만 하는 약함만이 우리 인간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히 우리가 같이 진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복음 말씀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바꾸어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자랑거리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은 것이며, 이는 우리를 당신 사랑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느님 사랑 덕분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약함과 고통을 껴안는 것은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요 은총이다.
이상의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아는 것은 분명 힘이지만 사랑이 없는 앓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위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힘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에는 약하고 자기(Ego)가 강할 뿐이다. 반면 사랑의 힘은 자기는 약하고 밑에서 십자가를 지는 힘을 강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주님을 잘 알지만 관계를 거부한 악령과 달리 그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일 때는 자기의 약함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힘을 입게 해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까지 되고 그래서 더 자기의 약함과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 자랑스럽게 된다. 주님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는 약하지만 주님의 십자가까지 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자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