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3 완전한 순종/III. Perfect and Imperfect Obedience

Margaret K 2007. 5. 17. 00:11
 


 

3.완전한 순종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
2 그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루까 9,24)라고 하십니다. 
3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자기 장상의 손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장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종이 됩니다.
5 그리고 아랫사람의 눈에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자기 영혼에게 더 좋고 더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때라도, 자진해서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희생할 것이며 장상의 뜻을 실천에 옮기도록 힘쓸 것입니다. 
6 사실 이것이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는 것이기에 이 순종이야말로 사랑의 순종입니다(참조: 1베드 1,22).
7 그런데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아랫사람에게 명한다면 순종하지 말아야 되지만, 장상의 곁을 떠나지 말 것입니다.
8 만일 이 때문에 어떤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
9 실상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보다는 핍박을 감수하기를 택하는 형제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에(참조: 요한 15,13)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10 장상이 명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수도자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들은 "뒤를 돌아다보며"(루까 9,62) "개가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잠언 26,11; 2베드 2,22) 포기한 자기 의지에 되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1 이들은 살인자들이며 또한 자기들의 나쁜 표양으로 많은 영혼들을 잃게 합니다. 


1) 하일성 신부 OFM 묵상집

2) 김찬선 신부   OFM 묵상집

 

 1) 하일성 신부 OFM 묵상집

권고 3. 

완전한 순종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영성을 배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글이 바로 이 3권고의 말씀들입니다. 다른 글들은 대부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쓰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칙은 수도회의 인가를 받기 위해서 오랫동안 폰데콜롬보(Fonte Colombo)에 있는 은둔소에서 기도하면서 작성하셨고, 유언은 병중에 있으면서 심리적으로 형제회에 대해 염려하는 가운데 쓰셨습니다. 그래서 유언에는 그분답지 않은 강한 표현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권고 말씀들은 형제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때에 아무 준비 없이 그때 그때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하신 말씀들이기 때문에 사부님의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글입니다.


권고 말씀의 공통점은 두 가지로 , 내적 가난과 형제애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생활에서 특히 순명을 중요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회의 생활에서 입회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순종 생활로 받아들인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성녀 클라라의 회칙 역시 같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칸 생활의 근본으로 가난만을 생각해 왔기 때문에 처음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순종과 가난을 지나치게 분리해 생각해 온 데 반해 성 프란치스코는 순종을 항상 가난과의 관계에서 보았습니다. 



1부: 1~6절

1. 자기 의지의 포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 그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루가 9,24).'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권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프란치스칸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복음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들은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프란치스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적용되는 말씀들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든 것 중에서도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고 더욱더 완전하게 주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자기 장상의 손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3절)


그러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 장상의 손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의지와 뜻을 완전히 버리고 바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뜻과 주장대로 생활해 나갈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 받은 선물 중 가장 고결한 선물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경험으로 알겠지만 자기의 뜻을 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의 뜻과 의지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뜻보다 더 높은 뜻, 즉 하느님의 뜻이 우리 생활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제2회칙 10장 2절에서 이렇게 권고해 주십니다. 


'아랫사람이 된 형제들은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려는, 주님의 뜻만을 따르려는, 주님께 순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인간들을 통해 밝혀 주십니다.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이란, '자기 의지를 완전히 봉헌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며 수도자는 성령의 감도하심으로 하느님의 대리를 행하는 장상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수도 생활 교령 14항). 이러한 순명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큰 신앙심이 요구됩니다. 즉, 장상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믿는 신앙심과, 성령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심입니다.


그리고 장상의 뜻을 거스리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종이 됩니다(4절)


참된 순명은 그저 장상이 명령만을 따르는 것뿐만이 아니며, 또한 장상이 무엇을 지시할 때나 명령할 때만 순명하는 것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순명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습니다. 수도자의 모든 생활과 행동이 순명의 정신에 젖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장상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명령이 없더라도 언제나 그 뜻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순명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즉 그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러니까 장상이 명하거나 원하는 것이 악이 아니고 선 일 때, 그것이 바로 순명의 한계입니다. 순명을 통해 우리가 따르는 하느님의 뜻이 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참된 순명이 됩니다


사부님은 장상에게도 요구하십니다. 장상도 어떤 지시를 내리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발견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부님의 생애에도 자주 나오듯이 순종하기보다 장상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아랫사람은 주어진 대로 또 장상이 원하는 대로 생활하면 되지만, 장상은 그때 그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이 권고에서는 아랫사람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고, 4권고에서는 장상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므로 장상에 대해서는 그때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랫사람의 눈에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자기 영혼에게 더 좋고 더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때라도, 자진해서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희생할 것이며 장상의 뜻을 실천에 옮기도록 힘쓸 것입니다(5절).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장상보다 아랫사람이 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의 표헌대로 '자기 영혼에게 더 좋고 더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때.'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부님은 그런 경우라도 자기 판단과 자기 의견을 따르는 것보다 순명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도 '장상의 명령, 그 일 자체도 선이러면'하는 그 원칙이 적용되지만, 순명하지 않고 보다 큰 선을 얻기보다 순명하는 가운데서 보다 작은 선을 얻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이 옳더라도 양보할 때 정말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 되며,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큰 신앙심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계획하는 것과는 다른 계획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깊은 신앙심으로 하느님 손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심을 키워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수도 생활 교령에서 순명에 대해 말할 때에 신앙심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장상에게 순명하는 것은, 장상이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가 하느님이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상과 의견 충돌이 생길 때도 장상이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대리자임을 믿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기에 이 순종이라말로 사랑의 순종입니다(6절)


사부님은 여기서 신앙심 이외에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제1회칙 5장 15절에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거룩한 순종입니다'라는 내용처럼 우리의 순명은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순종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오로 신학이라 불리는 것으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의 죽음을 받아들이실 정도로 순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순명은 구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명도 이런 구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도자의 순명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명은 하느님은 물론 이웃을 흡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2,5)'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순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순명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수도 생활을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바로 순명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의 주장이 강해지고 그만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명을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하나의 짐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예수님이 지니셨던 바로 그 사랑하는 마음과 자세로 해야 합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뜻헤 대한 신앙과 사랑의 정신으로 겸손되이 순명할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수도교령 15항)'


2. 순종을 통해서 구원에 참여합시다.

셋쩨 권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특히 순종의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우리 시대에 더욱더 적용됩니다. 그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의 순종을 반성해 봅시다.


(1)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한 형제가 의견 주머니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 형제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였다(2 첼라노 102, 140)'

자기 의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주님의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매일 매일 일생동안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이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우리의 전부를 바쳐야만 합니다. 순종의 참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는데 협력하는 것입니다. 


(2) 교회가 하느님의 대리자로 정해 주는 장상에게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끼?

'순명하는 형제는 장상 안에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장상이 부족한 사람이면 부족한 사람일수록 그에게 순종하는 형제의 겸손은 하느님을 더욱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2첼라노 111, 151)

명하는 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면 그럴수록 순종하는 이의 겸손은 더욱 갑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갖고 있는지, 신앙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적으로 복 판단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신앙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주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주님의 맑은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눈먼 사람같이 우리도 새로운 눈, 주님의 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자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 너희가 차라리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대답하셨다.(요한 9,35~41).'


'선생님, 믿겠습니다."라고 한 맹인의 자세가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언제나 자기 눈이 옳고 자기 판단이 나으며 자기 스스로 잘 본다고  하는 사람은,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항상 장상보다 자기 의견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영적으로 눈먼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장상의 결점이나 결함 때문에 순종할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나 새 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열왕 하 5,14).' 시리아 사람 나이만은 자기 의지를 꺾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 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물론 장상이나 책임자 수녀가 말할 때에 노예같이 순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랫사람도 자기 의견을 발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상의 명에 대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봉사자들 중의 누가 어떤 형제에게 우리 생활과 반대되거나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명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악행이나 죄를 짓게 하는 순종인 경우에는 순종의 문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제2회칙 5,2)'


우리는 장상이라는 한 인간에게 순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통해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이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장상의 지시에 대해 지나치게 판단하는 경우와 또 너무  판단을 하지 않는, 두 경우 모두를 피해야 합니다.


장상이 무엇을 물어 올 때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장상을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밝히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를 통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또, 의견 교환 때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을 내세워도 안됩니다. 발표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상대방의 의견도 내 의견 못지 않게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 주고 존중에 주어야 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등지고 자기들의 뜻만을 따르고 생활합니다.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의 완성과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들이나 성직자들이 어머니인 교회에 대해 불순종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많은 고통과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수도자의 순명은 교회의 이러한 아픔을 덜어 주는 것이며 그것이 수도자의 신앙에 의한 순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6~27)'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교회 신비체의 많은 지체들의 불순종으로 교회가 당하는 고통을 신앙에 의한 우리의 순명으로 덜어 주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의 교회도 수도자의 이런 순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라는 말씀처럼 순명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순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10).'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1, 24)'라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순명이 어려울 때에 우리는 순명을 통해서, 순명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으로 미사 성제를 드리고 우리 자신을 희생 재물로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도 생활, 이 순명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힘을 미사 성제에서 얻습니다. 미사가 바로 십자가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순종 생활을 떠나서 돌아다닐 때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죄 중에 머물러 있는 한, 순종 생활을 떠난 그 모든 형제들은 자신이 저주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복음과 자기의 생활 양식을 통하여 약속한 주님의 계명을 굳게 실행할 때 참된 순종 위에 자신들이 머물러 있음을 모든 형제들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들을 축복하시기를 !(제1회칙 5,16~17).'


신앙 안에서 주님의 거룩한 복음에 순명할 때 사부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고, 죄 중에 머무는 것인 줄 알면서도 순명의 자세를 거부할 때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2부: 7~11절


내적 가난의 결정의 바로 순명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치는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이 순명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순명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해방되어 하느님을 위하여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예!" 하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장상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므로 우리는 장상을 통해서 하느님께 순명하게 되며, 순명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하느님의 뜻을 알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따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순명하기 위해서는, 장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신앙의 눈과, 장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신앙으이 자세가 필요합니다.


장상도 인간입니다. 장상이 책임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봉사자들 중의 누가 어떤 형제에게 우리 생활과 반대되거나 영혼의 해가 되는 것을 명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제1회칙 5,2).' 여기서 사부님은 장상이 잘못 지시할 때 아랫사람이 지닐 자세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장상을 통해 하느님께 순명.

여기서 성 프란치스코는 강한 표현들을 사용하십니다.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살인자들입니다'라는 표현들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는 총봉사자란 말을 사용하시면서 이 권고에서만은 장상이란 표현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 프란치스칸 공동체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면 죄인들의 공동체인 것이며 인간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강한 표현들을 보면 사부님 시대의 모든 형제들이 열심히 살았던 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도 역시 살인자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실 만큼 양심의 문제를 일으키거나 순명을 거부하는 형제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아랫사람에게 명한다면 순종하지 말아야  되지만, 장상의 곁을 떠나지 말 것입니다(7절).


이 말씀은 다음 글과 비교하면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된 나의 모든 형제들은 구령에 관한 일에 있어서 우리 생활에 반대되지 않는 한 봉사자들에게 충실히 순종할 것입니다.(제1회칙 4,3).' 그러니까 아랫사람의 영혼 구령에 해가 되는 것은 영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경우에 아랫사람은 순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행이나 죄를 짓게 하는 순종의 의 경우에는 순종에  문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제1회칙 5,2).'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들리는 말씀이지만, 실은 순명의 의미와 또한 권한 행사의 목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권한 행사와 순명은 똑같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따라서 실행하는 유일한 목적입니다. 죄, 악한 일은 하느님의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책임자는 명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공동체 내에서는 대화를 중요시합니다. 이것은 공동체 생활의 질서와 사도직의 보다 나은 효과를 위한 것만도 아니고, 또한 순명을 보다 쉽게 만들려는 인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책임자들과 형제 자매들과의 대화, 공동체 내에서 의견 나눔들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보다 더 확실하게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눔, 대화, 의견 교환 등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적어도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각자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뜻을 보다 더 확실하게 찾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조: 클라라 회칙 4,18). 그래서 우리는 이 회합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함께 창조해 나가는 일이기에 인간적인 두려움을 물리치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나의 의견과 달리 결정되었을 때 또한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그런데,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명한다면 '순종하지 말아야 하지만, 장상의 곁을 떠나지 말 것입니다.' 장상의 곁을 떠난다는 표현은, 그룹 지어 돌아다니면서 노동을 하고 사도직을 이행하던 초대 공동체의 순회 생활을 생각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수도원이 아직 없던 단계였으므로 수도원을 떠나기 보다는 공동체를 떠난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장상이 어떤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아랫사람이 장상과 충동할 경우에도 아랫사람은 그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래도 장상은 하느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다시 말해 수도원을 떠나는 경우가 아니면 외적으로 한 집에 사는 장상의 곁을 떠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면에서는 수도원 안에 함께 살면서도 얼마든지 장상과 헤어진 상태에서 살 수 있으며, 사실은 그렇게 사는 수도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또 장상과 맞지 않아서 해결책으로 이동을 요구하는 수도자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이런 일이 없겠습니다만 이런 경우에 사부님의 유언 말씀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그분들 안에서 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유언 9절).'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우리는 책임자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알아 뵙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결점이 있고 죄인인 경우라도 하느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마음으로 장상을 공경해야 합니다.


장상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결핍입니다. 인간적으로 장상을 신뢰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나 그가 하느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미약하고 죄스러운 장상을 도구로 삼아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신앙심에서 생기는 신뢰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은 아무리 비뚤어진 줄에서도 똑바로 글을 쓰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신앙심을 가지고 '우리 생활에 반대되지 않는 한, 봉사자들에게 충실히 순종(제1회칙4,3)'할 때 프란치스코는 축복된 나의 형제라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여러 은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입회한지 한 시간 밖에 안 되는 수련자가 나의 원장이 된다면, 나는 그에게 노인이나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여 복종하듯이 그렇게 순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은혜입니다(2첼라노 111, 151).'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하나의 권고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의무로, 인간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신앙심을 요구하는 의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이 때문에 어떤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8절)


프란치스코는 이런 경우에 순종을 하지 않는 형제 자매는 핍박과 괴롭힘을 당한다고 가정하고,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장상도 감정이 있으므로 선입견, 차별 등으로 아랫사람을 못 살게 굴 수 있습니다. 순명의 의무는 그런 장상 손에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프란치스코는 인내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참다운 자세입니다. 만사를 바라보는 그의 신앙의 눈과 우리의 눈과는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나의 중심으로 인간적으로 자연적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의 신앙의 눈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실 때 그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부당한 명령을 내린 장상은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죄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하는 형제 자매는 장상이 그 위험을 면하도록, 그가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영혼의 해를 입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 때문에 그를 더욱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도움(자비)을 받아야 할 죄인이므로 나의 분노와 미움의 감정적인 대상이 되기보다 오히려 기도와 희생, 사랑과 봉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아랫사람은 하느님 때문에 그런 장상을 내적, 외적으로 떠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침으로써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런 장상은 밉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불쌍한 죄인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장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라는 성 목요일 후렴에서처럼, 당하면서도 사랑한다면 그들 사이에 하느님은 현존하실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실상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보다는 핍박을 감수하기를 택하는 형제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에(참조: 요한 15,13)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9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말씀들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우리도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8),'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은 사랑의 극치이며 우리는 순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순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사부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46).


예수님은 사랑으로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고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십자가상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당신의 순명을 통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새로운 아스라엘인 교회를 건설하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아랫사람이 장상 곁을 떠나는 것은 곧 형제들과 헤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헤어지는 것보다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 나가는 수도자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시고 아버지께 대한 순종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과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이런 수도자는 당신의 순종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희생으로 형제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의 순명과 사랑으로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도자는 모든 어려움과 희생을 하느님의 선에서 나온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부님 표현처럼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장상이 명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수도자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들은 뒤를 돌아다보며(루가 9,62),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잠언 26.11: 2베드 2,2) 포기한 자기 의지에 되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살인자 들이며 또한 자기들의 나쁜 표양으로 많은 영혼들을 잃게 합니다.


사부님은 9절에서 완전한 순명에 머무는 형제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사랑의 복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10-11절에서 불순종이 공동체에 끼치는 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순명을 피하기 위해 핑계와 변명을 찾는 데는 빠르면서도 참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명을 하는 데는 참으로 느립니다. 내가 나를 따르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순종을 피하려고 대는 핑계나 변명 중에 자주 사용하는 것이 자기 의견이나 생각이 장상의 그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수도자들이 참으로 많은데---,' 사부님은 여기서,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주장하는 형제들이 입게 되는 개인적 손해는 물론 공동체에 끼치는 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며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포기란 자기 의지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수도자는 자기의 악 표양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도 하느님을 떠나게 하기 때문에 '살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체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다른 형제 자매의 영혼을 잃게 하는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부님은 경험을 통해내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면 형제적인 공동체도 이룰 수 없음을 아시고, 형제들과 헤어지기보다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명하는 수도자가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므로 이런 수도자를 축복하십니다. 반면에 순명하지 않는 형제는 '살인자'라고 저주하십니다.


2. 장상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위 재목의 내용을 우리 생활에 적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자기의 의견이나 견해만이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너무 지나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이에게 순명해야 하며, 장상이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할 때에도 신앙 안에서 순명함은 물론 사부님 말씀대로 하느님 때문에 그런 장상을 더욱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순명 안에서 형제 자매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수도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 제물이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적 순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2) 수녀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상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끼? 우리는 장상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장상에게도 모든 인간적인 약점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초월한 완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만을  가지기 전에 장상의 모든 지시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 되도록, 장상에 대한 불만이나 비평 등 사랑이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자신과 공동체에 큰 손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점이 많고 이기적인 장상이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고 그의 곁을 떠나지 말 것입니다. 극단적인 해결책이라면 윗장상에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도가 우선적인 해결책이 되어야 합니다.


(3) 장상을 이해하도록 노력합니까?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곧 내 입장을 생각해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입장을 바꾸어, 어떤 것에 대한 불만을 하기 전에 내가 장상이라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해 보는 태도가 필요합ㄴ다.


장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장상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장상 역시 입작을 바꾸어서 아랫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의 모든 문제점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바로 대화입니다. 우리가 장상과 면담할 때 공격하는 자세를 가진다거나 장상 역시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22권고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책망을 들을 때 자기 잘못을 쾌히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고백하고 또한 기꺼이 보속하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22권고 2,-3).'


장상이나 아랫사람 모두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대화와 공동체의 모임이 필요합니다. 장상이 하느님의 뜻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보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 보다 작은 이에게 자주 게시하시기(클라라 회칙 4,13)'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의논하는 공동체의 회합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매일 매일 우리를 분순종으로 이끄는 핑계나 변명에 대해 성찰하고 있습니까? 순명이 어려워질 때 장상이나 아랫사람 모두 상대방을 공격하지 말아야 하며, 다 함께 개방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김찬선 신부   OFM 묵상집


<권고> 2번이 순종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 즉 하느님께의 순종, 하느님의 선과 은총에 대한 순응, 선과 은총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야 함, 그러기 위해서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자기 의지를 버려야 함에 대해서 얘기했다면 <권고> 3번은 프란치스칸 수도생활에 있어서 구체적인 순종, 그 중에서도 장상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얘기한다. 그리고 <권고>4번은 장상에 대한 수하 형제의 순종뿐 아니라 장상도 순종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권고>는 하느님 관상에 대한 권고를 제일 앞에 배치하는데, 앞에 배치했다고 해서 프란치스코가 순종을 다른 것보다 중시하였다는 것이 100%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두가지 관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첫째는 <권고>가 프란치스코가 직접 책상에 앉아 작성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이 순서대로 <권고>를 써내려 간 것은 아니지만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이렇게 배치한 것이 오히려 그 증거라는 관점이다. 사실 프란치스코의 <권고>는 프란치스코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성령 강림 총회와 같은 때 형제들에게 말로 한 권고를 형제들이 기록한 것을 후대에 모아 배열한 것인데 이렇게 배열을 한 것은 프란치스코가 다른 것보다 순종을 강조했다고 후예들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가정을 해보자, 돌아가신 다음 자녀들이 모여서 부모님이 제일 중요시하고 강조한 것은 이것이고, 다음이 이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이처럼 형제들도 프란치스코 사후 그의 권고들을 모으고 중요성에 따라 배열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제들은 왜 프란치스코가 하느님 관상/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권고 1번 다음으로 자기 의지에 포기와 순종을 중시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평소 그리 강조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수도규칙에서 수도생활을 순종생활이라고 하였고,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을 순종생활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준 받은 수도규칙>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시련기 일 녕을 마친 후, 이 생활과 수도규칙을 항상 지키기로 서약함으로써 순종에로 받아들여집니다. "(인준 규칙 2,11)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왜 수도생활을 순종생활이라고 할 정도로 중시하였을까?  <권고>에서 얘기하듯 순종이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프란치스칸 은사와 영성의 큰 줄기에서 중요하고 강조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속지주의와 정주 영성이 지배적이었던 교회 전통과 당시 상황 안에서 그리고 새로운 수도회들을 따로 수도규칙을 가질 수 없으며 기존의 수도규칙을 써야 하는 상황 하에서도 굳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고집하며 따로 수도규칙을 가지려고 한 것은 그가 받은 은사와 소명이 정주 영성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주영성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탁발영성,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이다. 여기서 정주라는 말을 뜯어보면 정주는 정해진 곳에 머무는 것, 또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지 않고 정해진 한 곳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본래 정주영성이 추구하는 것은 장소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해진 대로 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머물건 무엇을 하건 그 결정권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것이고, 자기가 결정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결정하시게 한다는 뜻에서 장상과 공동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는 자기 결정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연히 개인의 자유와 자유의지는 공동체에 의해 희생되기 마련이다. 


프란치스코도 하느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야 하고 (2 신자 편지 10)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의지를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언>에서는 이렇게 강하게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총봉사자가 나에게 정해 주고자 하는 다른 수호자에게 기꺼이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수호자는 나의 주인이기에 순종과 그의 뜻을 벗어나서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게 무엇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의 손 안에 매여 있기를 원합니다"(유언 27`8)


그러나 이것은 공동체에 의해서 강제되거나 법의 규정에 의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스스로 포기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이나 맹종이나 굴종이기 때문이며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순종은 더욱더 아니기 때문이다. 법적인 것을 싫어했기에 프란치스코는 수도규칙조차 쓰려 하지 않았고, 복음의 권고를 살면 되지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형제들의 수도규칙과 생활은 이러합니다. 즉,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인준 규칙 1,1)라고 하였다. 법보다 더 완전한 복음이 있는데 복음의 권고를 우리가 스스로 살아가면 되지 따로 법으로 무엇을 정하거나 규칙으로 무엇을 정하고, 그것대로 반드시 하도록 훈련(discipline)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신 율법주의의 문제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권고대로 철저히 살고자 함이었다.


자유, 이것은 프란치스칸에게 법이나 규정보다 중요한 가치이고, 이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사랑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무리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셔도,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고 해도 사랑은 스스로 하느는 것이지 요구한다고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는 더더욱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이미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누가 돈과 권력으로 자기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도 몸은 차지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사랑은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고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프란치스코가 순종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 같지만 자유를 중시하기에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고, 앞서 얘기했듯이 순종이 복종이나 굴종 또는 맹종이 아니게 하기 위해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 곧 자유를 성숙하게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은 자유가 자기 좋을 대로 또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과 같기에 자유와 순종은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유와 순종이 반대되지 않고 자유는 순종이 참 순종이게 하고, 순종은 자유가 참  자유이게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히려 영의 사랑으로 자진해서 서로 봉사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거룩한 순종입니다."(비인준 규칙, 5,14~15)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바란 것은 장상과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함부로 순종의 이름으로 명하지 말 것이고(2첼라노 152 참조)), 개인은 하느님의 뜻을 공동체와 함께 이루기 위해 자유를 가지고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성숙한 공동체와 개인의 고나계이다. 미성숙한 공동체와 개인일수록 개인은 자기 자유만을 강조하고 고집하고, 공동체는 개인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이제 이런 배경을 가지고 <권고>에서 얘기한 프란치스코의 순종을 보자.


1. 순종과 전 자아 포기


프란치스칸 수도자의 완전한 순종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신 복음 말씀을 인용한다.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 두 말씀을 인용한 다음, '자기 장상의 손 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자기 영혼과) 자기 몸을 잃는 사람입니다."라고 얘기한다. 이를 볼 때 프란치스코는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영혼과 자기 몸까지 잃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장상에게 불순종하면서 모든 것을 버렸다거나 자기 영혼과 몸을 포기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복음 말씀대로 집과 토지와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부모와 형제, 배우자와 자녀를 다 버렸다 해도 장상에게 불순종하면 다 버린 것이 아니고 정작 버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는 이처럼 순종, 그중에서도 장상에 대한 순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순종하는 것이 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고, 그것도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이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영혼과 몸까지 잃는 것이라고 본 것인가?


우선 프란치스코는 장상에 대한 순종 이전에 어떤 순종이건 완전한 순종이라면 자기 전부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서 누가 완전한 순종을 한다면 어떤 명령이 떨어지든 그대로 따라야 하고, 그것이 가진 것 전부를 내놓으라는 명령일지라도 그대로 따라야 완전한 순종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기 전부는 세 가지, 첫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소유물), 둘째는 자기 영혼, 셋째는 자기 몸인데, 이 중 어느 한 가지를 버리지 못하거나 잃지 못한다면 그만큼 불완전한 순종이라는 얘기다. "자기 장상의 손 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영혼과 자기 몸을 잃는 사람입니다."(권고 3,.3)


여기서도 프란치스코의 특징이 나타난다. 곧 프란치스코는 여러 곳에서 전인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전인격성과 전존재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나병환자를 만난 뒤 자신의 회개에 대해 전에 역겨웠던 것들이 이제 단맛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몸과 마음의 단 맛"으로 바뀌었다고 굳이 언표하고, <권고> 15번에서 평화를 얘기하면서는 "마음과 몸에 평화를 간직하는" 겟에 대해서 얘기하고, 같은 맥락에서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는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거룩한 순종은 자신의 모든 육신 및 육의 의지를 부끄럽게 하며,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들에게까지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높은 데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만큼 그들이 육신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15-18)


그러므로 완전한 순종을 하는 사람은 우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명령에 따라 다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이다. 버리라는 명령에 따라 99개는 버리고 1개를 못 버렸다면 99개를 버린 것만큼 대단한 순종을 한 것이기도 하지만 1개를 못 버린 것만큼 불완전한 순종이라는 얘기다. 이럴 경우 99개를 버린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도 그렇고 프란치스코도 다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99개는 버릴 수 있지만 1개는 도저히 내가 버릴 수 없는, 내게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순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의 개수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내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수억 개라도 버릴 수 있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쓰레기와 같기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어느 노 사제가 동료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하느님 앞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진 것을 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사제관에 돌아오니 담배 한 보루가 남아있었는데 이것마져 줘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결국 주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돈으로 치면 더 비싼 것을 포기했어도 골초인 노 사제에게는 몇 푼 안되는 담배가 제일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었고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인용한 루가 복음의 말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33) 는 것의 의미를 자세히 봐야 할 것이다. 루가 복음의 주님께서는 14,33절의 이 말씀에 앞서 14,27절에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부자 청년에 얘기에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가 18,22) 하고 말씀하시는데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가 되어 따라나서지 못한다. 제자란 스승이신 주님을 따라야 제자인데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으면 그 하나 때문에 따를 수 없다는 얘기다. 포기란 주님을 따르기 위한 포기인데, 떠나지 않고서 어떻게 주님을 따를 것이며, 집을 포기하지 않고서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우리가 가는 것은 우선 떠나가는 것이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며, 목적지를 향해 잘 가기 위해서 목적지를 잘 아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느님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려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신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버려야 하지 않는가?


다음으로 프란치스코는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을 "자기영혼과 자기 몸을 잃는 사람입니다."(3절)라고 얘기한다. 앞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자기 영혼과 자기 몸을 잃는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혹, 자기 몸을 잃는다는 것은 생명을 바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육신을 잃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잃지 말아야 할 것, 오히려 구해야 할 것을 잃는 것이 아닌가? 옛날 교리문답 1조에서는 인간이 태어나고 사는 이유를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영혼을 잃는다니 무슨 뜻인가? 그래서일까? 카에탄 애써 비판본에는 "자기 영혼"은 빠져있고, 파올라찌 비판본에는 '자기 영혼"이 괄호 안에 들어있다. 실제로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은 수도규칙>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형제들은 주님께 지키기로 약속했고 영혼과 우리 수도규칙에 반대되지 않는 모든 일에서 자기 봉사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인준받은 수도규칙 10,2) 영혼 구원을 위한 순종이기에 구원과 반대되는 순종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준받은 수도규칙>은 성좌의 인준을 받은 법적인 문서요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것이 확실한데 비해 <권고>는 형제들이 받아 적은 것을 후대에 편집한 것이기에 순종을 위해 자기 영혼을 잃어야 한다는 <권고>의 말은 맞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편집본에 자기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은 그만큼 프란치스코가 전부를 바치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카에탄 애써의 비판본처럼 "자기 영혼"은 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파올라찌 비판본을 따른다면 원문 "animam suam"을 달리 이해하면 졸을 것이다. 라틴어 "Snima"에는 육신/몸에 반대되는 것으로 서 영혼이라는 뜻도 있지만, 공기, 바람, 숨, 목숨/생명, 정신이라는 뜻도 있으니 자기 목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이것은 복음의 말씀에 잇닿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의 포기와 선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가 18,22)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가 9, 23~24)이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주님을 따르는 두 가지 정식이 있다. 소유물의 포기-소유물의 나눔 -주님 따름(1정식) 과 자기 자신의 포기-자기 십자가 선택-주님 따름(2정식)이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1 정식에서 가져온 것이고, "자기 영혼과 자기 몸을 잃는 것"은 2정식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소유물과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진정 자기 전부를 잃는 것이고, 그럴 때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한 것인데 프란치스코가 얘기한 ,animam suam"은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자기 목숨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복음을 보면 두 가지 목숨이 있는데, "자기 목숨"과 "목숨"이 있으며, 구해야 할 목숨이 있고, 잃어야 할 목숨이 있다. 잃어야 할 목숨은 복음은 "자기 목숨"이라고 하고, 구해야 할 목숨을 그냥 "목숨"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숨을 구해야 하는데 자기 안에 갇힌 목숨은 자기를 깨야 구할 수 있고, 그래서 자기 목숨은 잃어야 한다. 자기 안에 갇힌 목숨은 마치 화분과 같고 새장과 같다. 꽃이 아름다워 화분에 심고, 새가 예뻐 새장에 두고 키우는데 그것이 사랑하기에 그리하지만, 실제로 가두는 것이고, 자유를 뺏는 것이며, 활기를 잃게 하는 것이고, 결국 죽게 하기에, 사랑하는 것이지만 사랑이 아니듯 "자기목숨"은 자기 안에 갇힌 목숨이며 결국은 죽게 될 것이다.


이 "자기"가 깨지고 죽어야 한다. 이 "자기"는 어떤 때는 자기 취향, 자기만족, 자기 주장, 자기체면, 자기애, 자만심, 자존심, 자기 자랑, 자기 의지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강했던 프란치스코의 경우,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역여운 일"(유언1)이었다고 하는데, 그에게 싫고 좋은 것이 있음은 자기가 살이있기 때문이고, 죄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싫고 역겹고 두렵기까지 한 나병환자, 그래서 살살 피해만 다니던 나병 환자에게 주님께서 친히 그를 데리고 가셨고, 껴안게 하심으로 마침내 자기를 깨고 회개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회개하기 전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바로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육의 의지"이다 다시 인용하면 이렇다


거룩한 순종은 자신의 모든 육신 및 육의 의지를 부끄럽게 하며,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들에게까지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높은 데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만큼 그들이 육신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15-18)


그러니까 <권고>에서 "자기 몸"이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는 '자신의 모든 육신'이고 , <권고>에서 '자기 영혼"이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는 "육의 의지"이다,


이 "육의 의지"를 꺾기 위한 중요한 한 방편으로 프란치스코는 자기 육신/몸의 억제를 평생 철저히 한다. 예을 들어, 그는 수없이 단식함은 물론 먹게 될 때도 맛을 없애기 위해 재나 물을 타기도 했고 목이 마를 때도 한잔의 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반 잔만 마셨다. 그래서 그는 건강을 잃었고 시력도 잃었다. 이렇게 한 것은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얘기한데로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기 위함이고, 형제들과 심지어 다른 피조물에까지 순종하기 위함이다. 


이에 다시 형제가 그런 육신에 대한 당신의 관대함과 아량을 무엇이냐고 육신의 도움 없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이런 육신이 힘들 때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이 올바른 처사냐고 조심스레 말하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자기 육신에게 고백한다. "육신 형제여,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오, 보시오. 이제 당신의 원을 기쁘게 채워 주겠습니다. 당신의 하소연에 그때그때 대처하겠습니다."(2첼라노 211) 그러니까 프란치스코는 그때까지 당나귀 형제라고 부르던 육신 형제라고 부르며 육신에게 용서를 청하고 자기 육신과 화해를 한 것이다.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순종은 자기의 것 전부와 자기 전부를 바치는 것이고, 육신마저 영에 순종하며, 대상도 장상 뿐 아니라 형제들과 길짐슴과 들짐승까지 누구에게나 순종하는 것이었다. 진정 자기를 버리는 것은 소유는 물론이고, 직의 의지와 주장과 고집과 좋아하는 것과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자기를 버리기만 하였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서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포기이고 목숨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2. 순종과 믿음

프란치스코 자신이 실천하였고, 형제들에게 이상으로 제시한 순종이 이러하지만, 문제는 이것을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것을 장상을 통해서 할 때 종종 장상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저 인간을 보기 때문에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자기가 더 좋은 것을 본다고 주장하며 <권고 > 2번에서 포기한 자기 의지에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더 좋고 유익하다고 자기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분명 '더 좋고 유익하다"고 얘기하지 않고 "더 좋고 유익하게 보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장상의 명이 곧 하느님의 뜻일까?'라는 의심과 함께 같은 인간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라면 그의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내 생각과 판단이 옳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하느님께는 어쩔 수 없이 복종하지만 같은 인간에 대해서만은 복종하기 어려운 교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은 아니지만 인간들 위에는 군림하거나 적어도 인간 아래에 있고는 싶지 않은 교만이며, 그 교만이 자기 생각이 좋고 유익해 보이게 하고 불순종하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대단하지 않으면, 그리고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보지 않으면 장상의 손안에서 자기 전 자아를 순종에 넘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내가 보기에 인격적으로 아주 형편없을 경우, 또는 예를 들어 나와 동기일 경우 남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하느님만을 보지 않으면 순종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그래서 이렇게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잃는 것이 되는 것이며 믿음의 눈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은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는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시편 139,12)는 믿음과 하느님께서는 악을 가지고도 선을 행하신다고 할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구약의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와 형제들의 시기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가지만 그것이 인간의 소행, 곧 악행이 아니라 그런 악행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게획이요 업적이라고 요셉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고 하여 형제들의 시기 질투를 결코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변할 수 없는 악행이지만 그 모든 인간들의 선행과 악행을 가지고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3. 순종과 사랑

그러기에 장상의 명령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고 유익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데, 프란치스코는 더 나아가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 단지 내가 하려는 일이 내가 보기에 선한 일이고, 장상이 명한 것보다 내 영혼에 더 좋고 유익하더라도 "기꺼이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므로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순종이 됩니다."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부수적으로 제기되는, 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는 장상의 명령이 안 좋게 보이거나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한 경우이다. 장상이 명한 것이 실제로 악한 것/ 안 좋은 것과 악하게 /안 좋게 보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장상이 명한 것이 악하게 보이는 것이냐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한 것이냐에 대한 식별이 필요하고, 장상의 명령이 분명히 악이고,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명령일 경우 프란치스코의 답은 명확하다. 순종하지 않아도 되거나 더 적극적으로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관련한 프란치스코의 언급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관련한 프란치스코의 언급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영혼과 우리 수도규칙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것도 명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랫형제들은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 형제들은 주님께 지키기로 약속했고 영혼과 우리 수도규칙에 반대되지 않는 모든 일에서 자기 봉사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인준 규칙 10,1-3)


만일 봉사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어떤 형제에게 우리 생활과 반대되거나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명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범죄나 죄를 저지르게 하는 그런 순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봉사자요 종들의 손아래에 있는 모든 형제들도 봉사자요 종들의 행동을 신중하고 자세하게 살필 것입니다.그리고 만일 봉사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 생활의 정도에 비추어 영적으로 살지 않고 육적으로 사는 것을 형제들의 목격한다면, 그리고 세 번째 권고 후에도 스스로 고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장애를 무릅쓰고라도 성령 강림 총회 때에 전 형제회의 봉사자요 종에게 알릴 것입니다."(비인준 규칙 5,2-4) "그러나 만약 장상이 아랫사람에게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하도록 명한다면, 그 장상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를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권고 7)


진리에 어긋나고, 불의하며, 악한 것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장상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규칙에 명확히 어긋나는 것이면 무제가 없는데, 명확하지 않은 경우나 특히 자기 영혼에 반대되는 경우에 자기 영혼에 반대된다고 자기가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자기 영혼에 반대되는 것인지 식별이 필요하다. 어떻게 식별을 해야 하나? 어떨 경우 장산에 대한 나의 불순종이 우리 수도규칙과 자기 영혼에 반대되지 않기 위한 것인가?


이에 대해 <권고 3>은 장상에게 불순종하더라도 장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또 "만일 이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핍박을 견디는 이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기에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권고 3,8-9)라고 얘기한다. 장상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로 인해 핍박을 받더라도 장상을 사랑하고,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 불순종은 자기애에서 비롯된 불순종이 아니고 진정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한 불순종이며, 사랑의 불순종이지만 완전한 순종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랑의 순종을 완전한 순종이라고 보는데 교회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는 같은 사랑의 순종을 보았다.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확신하는 교회 쇄신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가서 허락을 받고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허락을 받긴 하였지만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도 형제들도 설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유언 25-26 참조). 그런 그가 이몰라 교구에 갔을 때 설교의 허락을 청하지만 주교는 자기 교구의 설교는 자기가 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며 나가라고 한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 저쪽 문으로 돌아와 왜 다시 돌아왔나고 묻는 주교에게 "주교님,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이쪽 문에서 쫓아내면, 그 아들은 저쪽 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2첼라노 14)라고 답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순종을 보인다. 자기를 내쫓는 주교를 아버지로 존경하고 끝까지 사랑 안에 머문다. 그럼으로써 그는 나가라는 명령, 자기 교구에서 나가라는 명령에는 불순종하였지만 교회를 쇄신하라는 하느님 뜻에는 순종한 것이다.


4. 순종과 자기의지의 포기


<권고>2번에서 자기의지를 자기 것으로 삼는 악에 대해 얘기한 프란치스코는 3번에서도 자기의지를 소유하는 악에 대해서 얘기한다. "사실 자기 장상들이 명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본다는 핑계로, 뒤를 돌아다보며 토해낸 자기의지로 되돌아가는 수도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살인자들이며 또한 자기들의 악한 표양으로 많은영혼을 ㅇ맇게 합니다.(권고 3,10)."


<인준 규칙> 10장에서 "하느님 때문에 자기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단호히 얘기한다. 순종을 자기의지의 포기로 분명히 얘기하는 것이다. 자기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면 그것이 완전한 순종이고, 자기의지를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면 그것이 가장 완전한 순종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생각하였다. 하느님 때문에는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때문(propter amorem Dei)인데, 이것은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by God's love)' 자기의지를 포기한다는 뜻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for the love of God)'자기의지를 포기한다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며,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에 따르면 이것은 "아버지의 뜻에 당신 뜻을 맞추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순종에 의해 초기의 형제들은 순종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순종 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고 첼라노는 1생애 15장에서 초기 형제들의 순종을 전한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순종 할 채비가 되어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백지수표와 같은 것이다. 백지수표를 내미는 것은 거기에 얼마를 써도 좋다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얼마든지 다 OK, 좋다는 뜻이 아닌가? 장상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어떤 명령이건 따지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뜻이고, 명령을 듣고 난 뒤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르지 않고, 마음에 들면 자기의지나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듣기 전에 미리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요청을 허락받는 순명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장상과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헤아리고 장상과 하느님 뜻에 맞을 때 실천하는 순종보다 더 완전한 자기의지의 포기이고 순종이다(2첼라노 152 참조). 하느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 뜻대로 하는 것과 비교하면 자기의 뜻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헤아리며 하느님 뜻에 맞게 하는 것도 대단히 훌륭한 순종의 자세이지만, 아예 하느님의 뜻만 있고 자기의 의지가 없는 것이 더 완전한 순종의 자세라는 것이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 라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기다리다가 명이 떨어지면 즉시 실천하는 것이 더 완전한 순종의 자세라는 것이 첼라노가 보는 프란치스코의 완전한 순종이다.


또한 첼라노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장상이 불완전할 수록 그에 대한 순종이 더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인격적으로 더 훌륭하고, 영적으로 힘이 있으며, 합리적인 장상이 명할 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의 주도권과 자발성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장상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순종은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 스스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봤듯이 프란치스칸의 자유 안에서 순종을 해야지 그것이 복종이나 굴종이 아니고 완전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갓 들어온 수련자가 장상이 된다 해도 노인이나 생각이 아주 깊은 사람에게 순종하듯이 순종하겠다고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순종하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한다.(2첼라노 151: 대전기 6,4 참조)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시체와 같은 순종을 완전한 순종으로말했다고도 전한다. 이것이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고,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한 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프란치스코가 말했다면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했을 것이다. 시체는 자기 의지가 없다. 이런 옷을 입어야겠다는 의지나 저런 색깔의 옷을 입기를 원한다거나 하지 않으며 어디에 놓이길 원하지도 않을 정도로 완전히 자기의지가 없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시체러럼 자기의 의지가 없을 정도로 자유의지로 자기의지를 포기하기를 바랐을 것이다(2첼라노 152 참조). 같은 곳에서 프란치스코는 선교와 순교가 가장 완전한 사랑의 순종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지를 포기한 형제들이 자기가 장상이 명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핑계이고, 포기했던 자기의지를 다시 자기것으로 삼은 것이며, 이것은 자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쁜 표양으로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것이라고 <권고> 3번의 끝부분에서 얘기한다. 순명은 생명이고 불순종은 죽음이라고 그는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번 <권고>2번 해설에서 얘기했듯이 하느님의 명령에 생명이 있기에 명령에 순명할 때는 살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는 죽는다는 것이다. 




수 that is against his conscience, the subject should not spurn his authority, even though he cannot obey him. If anyone persecutes him because o

f this, he should love him all the more, for Gods sake. A religious who prefers to suffer persecution rather than be separated from his confreres certainly perseveres in true obedience, because he lays down his life for his brethren (cf. Jn 15:13). There are many religious who under the pretext of doing something more perfect than what their superior commands look behind and go back to their own will that they have given up (cf. Prov. 26:11). People like that are murderers, and by their bad example they cause the loss of many sou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