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2.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惡)

Margaret K 2007. 5. 16. 23:17

 

 

2.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惡)

  1.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창세 2,16.17). 
  2.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3.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4. 결국 그 사람은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5. 그래서 벌받아야 마땅합니다.

1) 하일성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2) 김찬선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3)  -전삼용신부 묵상글중에서-

  

II. The Evil of Self-will

God told Adam: From every tree of the garden you may eat; bu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you must not eat (Gen. 2: 16-17). Adam, then, could eat his fill of all the trees in the garden, and as long as he did not act against obedience, he did not sin. Adam eats of the tree that brings knowledge of good when he claims that his good will comes from himself alone and prides himself on the good that God says and does in him. And so, at the devils prompting and by transgressing Gods command, the fruit becomes for him the fruit that brings knowledge of evil, and it is only right that he should pay the penalty.

 

 

1) 하일성 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제 2권고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

 

 

1.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순명은 기초가 됩니다.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창세 2, 16,17: 1절)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피조물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관리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그 모든 피조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 성찬 제 43양식에서 교회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돌보게 하시어 창조주 당신만을 섬기며 모든 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왜 이런 금지 명령을 인간에게 내리셨습니까? 하느님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을 모든 조물들의 절대적 주인으로 인정하여, 하느님을 모든 것의 소유자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고 인간은 관리인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사부님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7, 8, 11권고가 그렇습니다. 

-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사람들입니다.(영적 권고 7 중에서)

-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영적 권고 8 중에서)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람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영적 권고 11 중에서)

 

하느님은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그분은 모든 좋은 것들을 인간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명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을 주인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순명을 요구하신 것은 인간을 교만에서 보호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려는 위험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문에 창세기의 악마의 유혹은, 글자 그대로 알아듣기보다 금지 명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순명을 요구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 또한 우리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순명은 그 기초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순명을 요구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제 않으면 당신의 주권을 포기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원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이 영원한 주인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이 영원한 주인이시라는 것은 당신이 절대적 결정권(절대적 주권)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인간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라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바로 우리 생활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순명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하느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

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벌받아야 마땅합니다.(2-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사부님의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죄란 법적이고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거부하며 하느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순명 안에서 섬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되며,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아무 제한도 받지 않으려는 것이며, 한 마디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죄는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입다.(창세기 3,5) 5)'라고 말하는 악마의 유혹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죄였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려는' 아담의 이 죄, 즉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것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도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도 아담처럼, 나에게 선과 악이 되는 것을 내가 결정하고, 다른 피조물들의 주인이 되려는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런 개념은 다음의 두 문장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3절)이 간단한 문장에서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순명에 대한 개념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때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하고 하느님의 선물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자유를 악용하게 됩니다. 인간의 완성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유롭게 섬기면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종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의 완성을 방해하는 것입니다.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악마의 꼬임에 빠져 악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자유스러운 종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을 대항하는 그 세력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결국 순명이란 자기 의지를 자기의 소유로 주장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한다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 외에도 가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가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특수한 표현, 즉 소유 없이란 표현을 자주하십니다. 그리고 순명에 대해 말씀 하실 

에도 가끔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서원하는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인 정결, 가난, 순명이 맨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우리 회칙입니다. 그전의 수도자들도 물론 가난과 정결을 지키면서 살았지만 순명만을 서약했습니다.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제일 오래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1221년의 제 1회칙 1장입니다.

이렇게 순명은 소유없는 우리 생활, 즉 일종의 가난입니다. 순종은 가난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내적 가난, 혹은 마음의 가난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순명은 프란치스칸 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이나 외적인 물건들을 포기하게 하는 순종은 더욱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사부님은 더 많은 희생을 2권고에서 요구하십니다. 

 

(2)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

사부님은 이 말씀으로 참된 겸손, 내적 가난을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과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행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선행을 우리의 소유라고 주장하지도 말아야 하며 오히려 하느님을 모든 선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내적인 가난과 겸손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서 자랑도 하고, 어떤 때는 과장도 하면서 잘된 일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부님에게는 자기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 선행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와 똑같은 내용이 8권고 3절에도 나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 (참조: 마태 20, 15)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질투의 상대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나 다른 형제 자매를 통해서 좋은 말씀을 하시고 선을 이루실 때 자기 자랑이나 질투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사부님의 이 말씀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11권고 4절의 '카이스르의 것는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는 하느님께(마태 22, 21)' 돌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모든 영광스러운 일과 선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겸손과 가난은 소극적인 덕행이 절대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덕행입니다.

 

(3)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악마입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을 맨 처음으로 거부했던 마귀는 허위적인 약속으로 인간을 현혹하여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느님을 등지게 하려고 늘 인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삶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되며 악에로 향하게 되는데,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선 자체이신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인간은 불순명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종의 상태에서 벗어나 악마의 노예가 되는 상태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세계와 악마의 세계는 타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종이 되느냐 악마의 노예가 되느냐,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래서 벌받아야 마땅합니다.아담과 하와가 무슨 벌을 받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과 가까이 사는 행복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원하는 대로 그대로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불신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한 아담과 하와의 뜻대로 하느님은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받은 벌입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관계없이 살게 되는데 그들은 주님이 없는 그 생활의 고독과 주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그 생활의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피조물들도 인간의 원수가 되었고, 인간도 땀 흘려 먹게 되었으며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 3,17~19).'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교만 때문에 죄를 짓는 우리도 하느님이 없는 생활, 그런 생활의 고독과 불행을 처벌로 받게 된 것입니다.
2. 순명 안에서 주님을 찬미합시다.(1)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순명: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순명하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절대적인 것입니까?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바치면서 정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바칩니까? 나의 생활에 누가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끼? 하느님인가 나인가를 자주 자문해야 합니다. 정말로 누구의 뜻을 따르려고 합니까? 등 우리 양심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특별히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뜻은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서, 수도회 회칙, 하느님의 대리자들, 자신의 양심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때 하느님의 뜻을 찬미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면서, 즉 하느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소유없는, 자기 자신까지 포기하는 이러한 가난 속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을 주인으로 찬미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겸손: 하느님 앞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나라는 것, 나의 존재,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깊이 인식하며 의식하고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거나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자연적, 초자연적 능력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피조물을 올바르게 관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관리인일 뿐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인간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 혹은 영적인 능력 등에 대해서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이 내 것인 양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교만해서도 안됩니다.이렇게 내적인 가난이라고 볼 수 있는 겸손은 각자의 자만심과 자랑 등을 물리치는 것이며,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는 사람입니다.
(3) 죄 앞에서 우리의 태도: 우리는 죄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대항하고 있습니까? 사부님처럼 본능적으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악의 신비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며 죄를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유혹을 당할 때 어떻게 물리치고 있습니까? 특히 공동 생활을 하면서 나의 교만과 자만심을 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 자신의 성격대로 하고 있습니까? 나의 교만한 성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만약 우리가 죄 중에 있다면, 벌받는 것은 마땅한 일(5절)이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 중에 있는 사람의 그 마음에 하느님이 계실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악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아무 소유 없는 가난과 겸손 속에서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죄악이 들어 갈 자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내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고, 하느님은 그에게 중심이 됩니다. 사부님의 2권고의 말씀처럼 참된 행복이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가난 속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한 도구로 인식하고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찾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김찬선 신부의 권고 2 묵상

 

 

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계명(명령)을 거스르는 것, 그것도 자유의지로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계명만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주신 그분을 거스른 것이기에 모든 죄는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 즉 거역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지만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거나,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요한 복음과 요한 서간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고,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계명만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순종을 거스르지 않을 때까지는 모든 것을 다 따먹을 수 있었음에도 명령을 거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기 때문이지만 이것은 너무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불순종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는 불순종의 원인을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려는 교만이라고 본다(창세 3,5 참조)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권고 2번에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불순종의 원인으로 명백히 부각하지 않고(교만에 대해서는 권고 5에서 얘기함),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불순종의 원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소유의지> 의 관점과 <소유-선>의 관점, 즉 선을 소유하려는 의지에서 불순종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1.의지의 소유: 인간은 과연 자기의지와 자유의지가 있는가?
프란치스코는 권고 2번에서 원죄와 관련한 창세기 기사 중에서 2,16-17만을 인용한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프란치스코가 창세기에서 불순종과 원죄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이 아니라 2장의 이 부분만을 인용한 이유는 강조점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은총과 선을 후하게 베푸시는 하느님과 인간의 유한성에 프란치스코는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우선 당신이 베푸시는 은총을 얘기하신다. "모든 나무"가 하느님 은총의 정도를 나타낸다. 부족함이 없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가져라!"라는 뜻이다. 이는 엄청난 은총이다.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가지 제한을 두신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모든 것(대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딱 한 가지 제한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참으로 아쉽다. 가질 수 있는 9,999개보다 가지지 못하는 하나가 못내 아쉽고 눈이 자꾸 거기에 간다. 차라리 10,000개 중 100개를 못 가진다면 덜 아쉬울 텐데 딱 하나가 부족하기에 더 아쉽다. 그래서 그 하나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여 9,999개는 팽개쳐 두고 나머지 하나에 집착한다.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이 더욱 좋고 탐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딱 하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대상적으로는 단지 좋아하는 것 하나를 가질 수 없는 아쉬움일 뿐이지만, 눈을 대상에서 주체인 자기에게로 향하면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아쉬움 이상의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주제와 능력에 대한 비애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 자녀가 인형을 정말로 갖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아비가 사주지 못할 경우, 자녀의 편에서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아쉬움, 그것도 꼭 필요하고 비싼 것도 아닌 인형 하나 가지지 못한 것에 불과 하지만. 그것을 사줄 능력이 없는 아비는 자신의 한계와 무능력에 비참함을 느끼거나 분노하거나 절망까지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자신에 대해 분노하거나 절망까지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자신에 대해 분노하거나 절망하기도 하는데, 못 가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자신,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 분노, 절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하나에 대한 아쉬움과 가질 수 없다는 능력에 대한 자기 유한성 인식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내가 가질 수 있는 9,999개도 주어야만 받을 수 있기에 가질 수 있는 9,999개도 근본적으로는 내 것이 아니라는 자기의 가난을 인식하게 된다. 주어야만 받을 수 있는 거지가 자기라는 비참한 자기 유한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9,999개를 보지 않고 나머지 '하나'를 보는 데서 시작한 것이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 은총을 베푸는 자와 은총을 받는 자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하느님을 타자로 인식하게 된다. 즉, 하느님은 은총을 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대로 안 주기도 하시고, 심지어 인간이 무엇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런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에 분노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나는 그것의 주인이다. 나에 대해서든지 다른 것에 대해서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나는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바로 그렇다. 위임받은 한도 내에서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에 대한 소유 금지는 단지 한 개에 대한 소유 제한이 아니라 일체 소유권 없음, 나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억 개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아음대로 하라>는 위임 또는 명령의 한도 내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않고 순명 또는 명령 안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그분의 "생겨라!"라는 명령 한 마디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이 명령 또는 순명 안에 겸손하게 있기만 하면 모든 선을 누릴 수 있을 텥데'라는 아쉬움에서 더 나아가 순명을 거스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따 먹을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우리 인간이 모든 열매를 다 따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느님 명령과 그에 대한 순명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두신 것은 바로 이러한 환상에  대한 하느님의 시험이다. 이 시험을 통해서 환상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고, 환상을 가진 사람은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해서 환상을 깨고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를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얘기하듯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는데도, 그 모든 것은 결국 아버지의 것이며 완전히 나만의 것이 있으리라는 환상과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시험에 빠져 나의 것/나의 몫을 챙겨 나의 세계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니 나의 것은 없다는 악만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환상과 시험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은 아닐까?
시실 그렇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암시하듯 인간이 다른 피조물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대로 본성을 따르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환상을 가지지도 시험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무한(신-결핌이 없는 선)을 인식하는  이성을, 그 무한을 향유할 감성을, 그 무한을 소유하고 누리고자 하는 의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높이신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인간은 그럴수록 더욱 겸손했어야 했다. 모든 선은 하느님 의지대로 있는 것이지 나의 의지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무한을 인식하고, 누리고,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도 우리의 존재와 같이, 우리의 생명과 같이, 그리고 우리의 손과 발과 같이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시면 없어지게 되는 것임을 인정했어야 했다. 우리의 손을 예로 들어보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주셨으니 나의 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것이라고 하여 하느님 뜻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내 좋을 대로 사용하는 그 손을 하느님께서 언제나 거두어 가실 수 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의 것으로 완전히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 일정한 형식으로 맞기신 것이다.(마태 21,33~43 왕과 소작인의 비유 참조). 이러한 주심 또는 맡김을 사랑이 아닌 횡포로 여기거나 아니꼽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교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질그릇 같은 자신을 보화로 가득 채우시는 사랑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겸손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심은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것인지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게 함이며,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한 고귀한 자유 안에서,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느님의 의지대로(하느님의 말씀대로) 생겨난 모든 것이 선이었듯이 자기 의지를 자유의지로 하느님 뜻에 맞추면(2신자 10 참조) 모든 것이 선일 것이다. 자기 또는 자기 성취를 고집하지 않는 의지는 더는 의지라고 할 것도 없고 하느님의 뜻이 자기의 뜻이기에 처음부터 자기 의지라는 것이 없다. 즉 하느님 뜻만이 있고, 좋으신 하느님께서 어련히 잘 마련하시는 대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에 자신을 맡기는 착한 자녀의 순응만 있을 뿐이다.
2. 선의 소유와 악의 발생형이상학에서는 선을 인간이 욕구하는 것 또는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선험적이든 경험적이든 좋고 싫은 것이 있으며, 자기의 좋고 싫음에 따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선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악인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고, 객관적으로도 선이라 해도 자기가 싫으면 악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악인데도 선이게 된다. 예를 들어 담배는 백해 무익하다고, 악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은 좋다고 하거나 담배의 좋은 점을 얘기하며 굳건히 핀다. 이 경우 담배는 분명 나쁜 것이지만 흡연자에게는 좋은 것이고, 그러니 '악한 선'인 것이다. 아무튼, 형이상학이나 철학은 하느님을 얘기하지 않고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에 선과 악이 인간의 싫고 좋음에 따라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 좋으신 대로,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이 선이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면,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선이 창조되었고, 그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는데, 이처럼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이 선이고, 하느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선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우리에게는 선만 있고 악이란 없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얘기하며 하느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기를 권고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당신 뜻을 맞추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신자 편지 10) 그리고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형제회 편지 50~51)
그러니까 프란치스코는 주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뜻/ 의지와 우리의 뜻/ 의지가 같아지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얘기하는 종심소욕 불유구의 경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사람이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 30살에 자기 체계를 세우며, 40살에는 어떤 미혹이 있어도 불혹이어야 하고, 50살에는 지천명, 곧 천명을 아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고, 60살에는 이순, 곧 천명에 순응하는 경제에 도달해야 하며, 70살이 되면 종심소욕 불유구, 곧 욕심대로 마음이 따라가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함을 얘기한 것이다. 학문을 한다면 이런 학문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학문을 제대로 해도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신앙과 영성을 충실히 산다면 더더욱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이 말씀을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영성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모름지기 30살 정도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기의 뜻을 세워야 하고, 수도생활에 뜻이 있다면 이때까지는 그 뜻을 세워야 할 것이다. 요즘 서른 살이 넘어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이렇게 해야겠다(장가가야겠다), 내일은 저렇게 해야겠다(수도원에 가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성숙한 사람이라면 30살에는 뜻을 굳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뜻을 세웠어도 유혹이 있을 수 있고 그 뜻이 흔들릴 수 있는데, 40살이 되면 이제 그 뜻이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50살이 되면 자기의 뜻이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천명을 아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물론 수도자가 되려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사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안 것이 아니었고, 이제야 비로서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60살이 되어서야 하느님의 뜻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 기꺼이 순명하는 이순이 된다. 이전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느님 뜻대로 하고 싶지 않고 여전히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내(ego)가 아직 있어서 하느님의 명령을 순히 듣지 못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공손하게 듣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침내 70살에 이르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욕망대로 해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의 경지에 오른다. 이 말은 이순의 단계에 서는 하느님의 명이 귀에 거슬리지는 않아도 아직 하느님 뜻과 다르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경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 하느님 뜻과 내가 원하고 욕구하는 것이 다른 경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악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두 가지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싫어할 때와 하느님 뜻을 거슬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좋을 대로 소유할 때, 즉 구체적으로 죄를 지을 때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권고 2번에서 하느님의 선을 거부하는 악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을 하느님 뜻을 거슬러 소유하는 죄의 악 또는 죄악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그런데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은 선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만족하면 악이란 없을 터인데 인간은 왜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 선을 소유하려드는가? 프란치스코는 창세기의 해석 그대로 악마의 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악마의 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리고 있지 못하는 선에 대한 일깨움이다. 한마디로 결핍된 선, 또는 선의 결핍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꾀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선에 만족하고 그 선을 그저 누리고 있었는데, 누리지 못하는 선이 있음을 악마가 일깨우고 난 다음에는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만 선으로(좋아) 보이고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은 덜 좋은 것이거나 싫은 것이 된다. 그리고 누리지 못하는 선이 있음은 그 선이 하느님 소유이기 때문임을 알고는 자신도 하느님처럼 그 선의 소유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악마란 이미 주어진 선을 선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존재, 싫증 나게 함으로써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 끊임없이 더 나은 선, 더 많은 선을 탐내게 만드는 존재. 탐내게 함으로써 탐나는 것을 가지지 못할 때 불만을 품게 만드는 존재, 탐나는 것을 소유하려 들게 하는 존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같은 소유자가 되려는 교만을 부추기는 존재이다. 
이는 새로운 스마트 폰이나 냉장고가 나오면 지금까지 좋다고 쓰던 것이 싫어지고 새것을 사고 싶은 것과 같다. 우리말에 싫증이란 말이 있다. 거의 틀림없이 '싫어하는 증세'의 준말이고, 좋은 것을 싫은 것으로 만드는 병증, 그래서 선을 악으로 만드는 병증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싫증이 나는가? 우리가 새 냉장고를 보지 않았다면, 새 스마트 폰 광고를 보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것들을 가지고픈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만족하며 쓰던 냉장고와 스마트폰은 계속 만족스러운 것이고 선일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물건이 나오고 그것이 있음을 광고가 일깨워주건 혹은 누군가 일깨워주건 일깨워주는 순간 그것을 소유하고픈 마음에 그것은 선이 되고 이미 소유한 것은 악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이 왜 그리 많은가? 새 장난감을 보는 순간 기껏 잘 갖고 놀던 장난감에는 싫증이 나고 오로지 새 장난감에 눈이 꽂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담과 하와에게 따먹지 못하는 나무의 열매가 탐스러웠던 것처럼 아이는 못가진 장난감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탐내기 시작하면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이제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뱀은 무엇이고, 누구일까? 수많은 광고이고, 홈쇼핑 광고이고, 동창 모임에 명품 들고 나가는 사람이고,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세뇌하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아닐까?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악마의 꾐에 속아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뱀이든 악마든 하느님 밖의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뱀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악마도 악신이 있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저지른 원죄의 원조는 하느님께 있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소유하고 싶게 만드셨고, 그것도 무한하신 하느님처럼 무한히 어떤 한계도 없이 소유하고 싶게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고 피조물이기에 우리의 유한성을 아니꼬워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늘 유한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만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앞서 탕자의 비유 얘기처럼 모든 것을 잃고 생고생을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야 자기의 착각을 깨닫고 유한성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을 주시는 대로 지니려는 자세는 좋은 선 하느님의 착한 자녀다운 자세이며 이때 선은 선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유한성에 분노하여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한 사람은 선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지니게 된다. 곧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대로만 지닐 수 있는 선은 거부하고 나의 선을 지니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된 것이기에 자기 선을 지닌다는 것은 창세기 표헌처럼 하느님과 같이 되려 하는 것, 선의 소유권을 자기가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착각이고 이 시도의 결과는 유한성의 체험이요 악을 알게 되고 체험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그에게 악을 알게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선이란 하느님에게서만 나오고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와 악습뿐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인간은 선을 더 소유하려 할수록 악을 더 알게 경험케 되고, 더 높은 선을 소유하려 할수록 더 큰 악을 경험케 된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요, 반기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는 아쉬움에서 출발하여 가질 수 없는 자신에게로 시선이 옮아가고, 무엇을 가질 수 없다는 소유의 한계에서 한계(명령, 순명) 아래에 있는 존재의 한계로 시선이 옮아가면서 존재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한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누릴 수 있어도,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없는 한계, 명령, 순명 안에 있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내 좋을 대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열매를 포기하고 자유를 선택할 정도로 자유를 무엇보다 좋아한다. 순종은 이 자유를 자유의지로 포기하고 하느님께 명령 아래 자기를 두는 것이다. 권고 3번에서 프란치스코가 말한 것을 원용하면 하느님의 명령(뜻)에 따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을 때 자기 전부를 바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제 목숨을 살리기 원하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루가 9,24)는 복음을 인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순명과 생명을 연결하고 있다. 순명 때문에 목숨을 잃지만, 사실은 순명 때문에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창세기나 한자어의 구조에서 똑같다. 한자어에서 명은 생명(life)과 명령(command)의 두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생기라'는 하느님의 명령(말씀)에 생명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떠나서는 아무리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해도 잃을 것이며 당신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순명이 이러한 것이기에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이 순명을 중요시하였고 수도생활의 시작을 순종생활로 받아들여짐으로 표현하였다(미인준 회칙 2,29 참조). 프란치스코는 순종을 가난의 정수요 절정으로 보았는데 다음 권고에서 이런 순종을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십자가 현양 축일-모든 것을 선으로 만드는 최악

 

최선을 욕심 부리면 최선 아닌 모든 것이 악이 되고 죽게 되지만

최악을 바라보면 최악이 아닌 모든 것은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애기한 선을 소유하려다 악을 알게 되는 이치입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http://www.ofmkorea.org/ofmhomily/14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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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그분은 모든 좋은 것들을 인간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죄는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세기 3.5)

 

죄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죄였습니다. 

자기가 주인인양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을 체험하게 하는 나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선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으면 선을 체험하는 것이고 

먹으면 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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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은 빛이며 악은 어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과 은혜론: 

http://www.aspire7.net/reference/augustinus-3.htm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미셀러니

https://books.google.com/books?id=1Wk-CgAAQBAJ&pg=PT279&lpg=PT279&dq=%EC%96%B4%EB%91%90%EC%9B%80%EC%9D%80+%EB%B9%9B%EC%9D%98+%EA%B2%B0%ED%95%8D&source=bl&ots=uk2IQfQ4E0&sig=M510CMKBdk8PfU7Uf82EbjN-VW4&hl=en&sa=X&ved=2ahUKEwjhjKPUuIveAhXqmeAKHcIHA5kQ6AEwFHoECAAQAQ#v=onepage&q=%EC%96%B4%EB%91%90%EC%9B%80%EC%9D%80%20%EB%B9%9B%EC%9D%98%20%EA%B2%B0%ED%95%8D&f=false

어두움은 빛의 결핍인 것처럼 악은 사실상 선의 결핍니다.

어둠은 빛의 결핍이다사물을 비추는 빛을 얻기 위해서는 광원이 필요하지만어둠을 만들기 위해서는 빛만 제거하면 된다그런 점에서 어둠은 실체가 아니다.

 

인간 영혼에 속한 악이든 사회에 속한 악이든 악은 선을 증진함으로써 약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다실체와 현상으로서의 악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앙은 기독교 신학뿐 아니라 서구 사상ㅇ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죄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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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죄는 불순종입니다.

둘째 죄는 책임전가 입니다.

셋째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죄였습니다

자기가 주인인양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을 체험하게 하는 나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선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으면 선을 체험하는 것이고 

 

먹으면 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하느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을 따르는 것이 선하고 그에 거스르는 것이 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참된 진리이시며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물론 어떤 면에서는 선악을 구분하는 지식을 본성 내에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선악에 대한 지식과 그 기준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아는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느님께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한에서, 그 지식에 의존하여 인간은 선악을 압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어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사람이 마치 하느님처럼 자신의 본성을 따라서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필요한 것을 요구하라고 하시는 하느님께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한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시어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이 말은 솔로몬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하고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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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빈 배’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이야기합니다만약 어떤 배가 자신이 탄 배 앞으로 다가온다면 부딪히지 않도록 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래도 다가와 부딪힌다면 매우 화를 낼 것입니다그러나 이는 배에 사람이 탔을 때 만을 전제로 합니다만약 빈 배가 다가오고 있다면 그 배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빈 배가 자신에게 부딪혔을 수도 있는데 무조건 사람이 타고 있다고 판단해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렇게 선과 악의 단순구조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아담과 하와처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그들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자신이나 옆의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다만 선악과나 생명나무 두 나무 가운데 하나를 먹을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나니 이제 사람을 선악구조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알게 된 지식은 ‘사람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분별할 줄 몰랐을까요알았습니다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것을 먹는 것이 ‘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렇다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일까요이젠 순수하게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아니라어떻게 하면 선하게 보이고 어떻게 하면 악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선과 악의 이중 구조로 심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 안에는 선도 들어있고 악도 들어있는데 그것들을 무시하고 사람 자체를 선악 구조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신들을 판단해버립니다그래서 알몸인 것을 부끄럽게 느꼈던 것입니다이것 자체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증거가 됩니다또한 아담은 하느님도 하와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나쁘다고 판단하게 되고 자신에게 그 열매를 먹게 만든 하와 또한 악하게 판단해버립니다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사람이 아닌선한 사람 혹은 악한 사람으로 사람을 결정지어버리는 것이 선악과의 영향인 것입니다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사람을 선악구조로 판단하지 말고 사람을 쉽게 선악구조로 판단하지 말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두 소녀가 바다에서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정말 크고 예쁜 조개껍질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두 소녀는 동시에 그 조개껍질로 손을 뻗었습니다그리고 서로 먼저 자기가 먼저 보았으니 자기 것이라며 소유를 주장했습니다물론 목소리가 큰 쪽이 그 조개껍질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그 조기껍질을 차지하지 못한 소녀는 상대를 안 좋은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말도 안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각자 조개를 줍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개껍질을 빼앗긴 소녀 눈앞에 반짝반짝 진주가 들어있는 조개가 놓여있었습니다그 소녀는 진주를 재빠르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개를 주웠습니다그러다가 또 동시에 이전보다 더 예쁜 껍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물론 이번에도 목소리 큰 소녀의 손이 먼저 그 껍질을 덮쳤습니다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그 껍질을 쉽게 양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자신 안에도 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또한 그것을 주어도 될 만큼 귀한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자신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친구를 선악구조로 판단하는 것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에덴동산에 공존하듯이 모든 사람 안에는 선과 악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완전히 선이기도 어렵고 완전히 악이 되기도 어렵습니다하느님에게나 악마에게 완전히 점령해버리기 전까지는 선악구조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어쩌면 부자 청년처럼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이럴 때가 가장 위험한 상황인 것입니다선악과를 먹어 악이 자신을 거의 점령해버리면 자신은 싸우지 않고 정체되어 있으면서 타인 또한 자기식대로 선하거나 악한 사람으로 판단해버립니다왜냐하면 자신이 싸우지 않기 때문에 타인 안에서도 그런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은 타인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믿고 사람 자체를 판단하지 않습니다선도 보고 악도 봅니다선악을 분별할 줄 알지만 그래서 사람을 선악으로 구분 짓지 않습니다성모님께서 뱀을 밟고 계시는 이유는 선악을 구분 못해서가 아니라 악이 당신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항상 당신 발밑에 악이 꿈틀대고 있고 까딱 잘못하면 당신도 물릴 수 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그래서 천사가 나타났을 때 몸을 움츠리며 두려워하셨던 것입니다성모님마저도 그럴진대 우리가 어떻게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에 자신도 타인도 완전히 선하고 완전히 악하지 않아서 그런 선택의 가능성을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