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1. 그리스도의 몸 The Admonitions & 1. The Blessed Sacrament

Margaret K 2007. 5. 16. 23:06
 

 
 
 
 
 
 
 

1. 그리스도의 몸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 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 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 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6-9).

   5)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6)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 은 "생명을 주기에"(요한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7)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 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8)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 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 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 람들도 단죄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22.24). 11) 또한 말씀하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주님을 받아 모 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11,29).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 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18)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 (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 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 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테 28,20)하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 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The Admonitions

 

The Words of Admonition of Our Holy Father Francis, as the complete title reads in the Quaracchi edition of the Opuscula, contains twenty-eight rather short exhortations or reminders to the early friars concerning various points of the ascetical life. They form a kind of mirror of perfection for anyone called to follow the Franciscan observance in the various points covered. They are replete with knowledge of human nature and with practical good sense.

 

It is impossible to say how or when exactly the Admonitions were first composed, but it is quite likely that they were not gathered together until after the death of the saint. It is known from the Legend of the Three Companions and from other sources that at the early general chapter meetings of the friars held at the Porziuncola near Assisi St. Francis used to give admonitions, corrections, and precepts to the friars. These Admonitions, as they have come down to us, may be a collection of these sayings and exhortations given at these chapters, augmented by others given at other times. Paul Sabatier preferred to consider them notes of Cardinal Ugolino and St. Francis left over from the original draft of the Rule or not belonging properly to such a Rule.

They should, however, be considered rather as a collection of words of advice given by Francis at various times during his life.

 


 

영적 권고 묵상집 

1)  1권고 그리스도의 몸 -하일성신부-

2)  삼위릴체적인 하느님 관상-  김찬선신부-

 

영적 권고 묵상집

-하일성신부-

 

1권고

그리스도의 몸 

 

사부님의 <영적인 권고>들 중에서 모든 사본들이 첫 번째로 전해주고 있는 1권고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제목으로 성체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깊은 신앙심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권고의 역사적 배경은 당시 성체를 부정하던 카타리파나 다른 이단들을 반박해서 형제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해 주려는 염려에서 생긴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든 사본들이 이 권고를 1권고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1권고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구원 사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비하( Kenosis) 와 그분의 가난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프란치스칸 생활과 깊은 관련이 되고, 기초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부님의 이 권고를 깊이 이해하고, 성체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심을 가지고 묵상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권고의 내용은 한 가지 내용, 즉 성체에 대한 내용이지만 말씀이 길기 때문에 세 부분으로 구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권고의 스타일은 프란치스코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들이 반복되는 스타일이며, 성체 신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이것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스타일입니다.

여기서는 1권고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제1부: 1절~7절/ 제2부 8절~13절 / 제 3부: 14절 ~22절

 

제1부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6~9)."

 

1.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사부님은 예수님의 몇 마디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권고를 시작하시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둘째 문장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 18).'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요한 6,63)'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사부님은 여기서 복음의 여러 가지의 말씀을 묶어 크리스천 생활은 물론 우리 수도 생활까지 위협하는 어떤 위험에 대해 표현하고 주의를 시켜 주십니다.

봉헌된 생활인 수도 생활이란 결국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며 하느님을 위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그 일치 속에서 살기 위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끊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생활의 이상이며 세례의 봉헌을 완전화하는 것이며, 하느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크리스천 생활이고, 수도 생활은 이러한 크리스천 생활을 극단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기에 인간은 그분을 표현하는 말도 부족하고 그분을 상상해 보는 것도 부족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5절)'인간인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으며, 위엄하시고 위대하신 그분과 접촉을 할 수도 없습니다. 불붙은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모세의 공포(출애금 3장)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자인 천사가 어떤 인간에게 나타날 때마다. 신구약을 통해서 첫마디 말은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성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5절).' 우리가 오관으로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하느님의 영이시고 우리 인간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면 나는 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고, 그를 접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지금 나의 곁에 있다는 느낌과 확신을 가집니다.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그의 대답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느낄 수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경우 그 느낌과 체험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못 보는 맹인들이며,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들이고,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벙어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또는 수도자로서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야 하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대화를 해야 하며, 그분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이는 참 어렵고 불가능한 일같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하느님과 대화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세계를 떠나서 물질 세계에로 피난하게 되고, 서로 잘 통할 수 있는 인간들과 접촉하는 활동의 세계에로 도망치게 하는 위험이 바로 여기에서 생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접촉할 때와 달리 우리는 인간 세계에서 거북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어려움과 무거움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당신과 인간적으로 접촉하고 당신을 체험해야 할 필요성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에서 나오시고 영적인 분이면서도 당신 아드님 안에서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분과 대화로써 통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크나큰 사랑 앞에서 넘치는 기쁨과 놀라움 가운데 프란치스코는 1권고의 머리말로 요한 복음 14장 6절에서 9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개념을 표현하셨습니다.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1절~4절)."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주시는 아버지의 계시입니다. 아버지는 그라스도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 세계에 내려오시는 길이며,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가까이하시는 길이고, 한 마디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은 또한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올라는 길이 되십니다. 다음 그림을 보십시오.

↙ 하느님 ↖

↓ 통 ↓

내려오시는 길 ↓ 그리스도 ↑ 올라가시는 길

↓ 해 ↑

↙ 인간 ↘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듣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가 10,23)'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주님을 알게 되고 볼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되며,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위대하시고 볼 수 없으시며 가까이 갈 수 없으신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우리의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마태오 1,23참조)이 되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며 우리와 함께 결합하셔서 우리와 일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에게로 가는 길,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그래서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체험해야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있습니다. 이제 아드님이 인간이 되신 이후로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놓어 있었고 건너갈 수 없었던 그 심연이 메워지고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심연을 건너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7).'

이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길이시지만, 그러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올바르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부님은 게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참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쉽게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간성을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동시에 그분의 신성(천주성)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신심과 기도 생활에 있어서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고 필립보에게 하신 책망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예수님을 영 안에서 깊은 신앙심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앙 안에서 보아야만,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살아 계실 때 그분을 만나 보면서도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과 그로 인한 그들의 불행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8절)' 하신 사부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이러한 바라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단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고 안 믿는 데에 따라서 우리들이 판결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때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길이 되시고,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서 올라가는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통할 수 있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하도록 합시다

 

1권고 첫째 부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크리스천 생활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하나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디모 2,5)'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이란 무엇인지, 또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다 깊이 파악하도록 구체적으로 무슨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모습이 우리 마음속에 박히도록 그리스도의 얼굴을 자주 바라봅니까? 우리는 매일 성서를 읽고 있는데, 성서를 어떻게 읽습니까? 성서를 읽을 때 인간이 되신 하느님과 만나게 됩니까? 성서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성서를 의무적으로 읽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는 즐거운 시간이 됩니까? 성서를 읽는데 연구를 하기 위해서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 혹은 남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는 않습니까?

"어두움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는데(2고린 4,6) 이에 대해 감사 드려야 합니다.

묵상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갖게 됩니까? 하느님을 체험합니까? 묵주의 기도를 드릴 때나 십자가의 길을 할 때, 주님의 생애의 가장 중대한 신비를 깊숙히 파고드는 느낌을 가집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길,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이 그리스도이심을 체험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늘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빌어서 사부님이 상기시켜 주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이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언제나 신앙의 눈으로만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영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부드러운 얼굴을 보여 주소서. 우리가 당장 살아 나리다(시편 79,4).'

 

(2) 우리는 항상 보다 더 깊은 신앙심을 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9선물)이기 때문에 온갖 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 신앙심을 더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만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때달을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이미 선물로 받은 이 신앙심을, 구하면 더해 주실 이 신앙심을 외적으로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성체와 말씀, 그리고 예수님을 표시하는 십자 고상 등을 존경심 있게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십자 고상이나 예수님을 표시하는 다른 벽화나 그림 등을 어떻게 모십니까? 성체 앞에서 우리의 몸가짐, 예절, 자세 등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지식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를 많이 안다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그 지식을 그저 전달하기 위해서입니까? 이상과 같은 목적들은 육의 정신이지, 아드님을 영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즉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정신으로 성서를 읽어야만 생명을 주는 주님의 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6절)' 하신 사부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수도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무관심과 영신 생활에 있어서의 습관적, 기계적인 생활입니다.

 

(3)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말씀을 더 잘 인식한다는 것이 이론으로 끝날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지식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에로 우리를 인도해야 합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1고린 6,17).'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보다 깊이 알려는 것은 주님과 사랑 안에서 일치되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일치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에서 나오신 것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계시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사랑이신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러한 위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그 응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표현, 'redamare(사랑을 교환한다. 사랑을 되돌려드린다)'는 아주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자세는 사랑의 응답 외에 다른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영신 생활의 모든 신심 행사(성서 묵상, 십자가의 길, 묵주의 기도 등)들은 주님을 보다 더 깊이 알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은 완전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지식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욱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제 2부

 

1권고 제1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들의 유일한 길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비가 우리 수도 생활에 있어서 기초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제2부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특히 성체 신비 안에서 우리의 생명으로 제시해 줍니다.

 

8 이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들도 단죄 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 11 14, 22, 24).'11또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인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리 11. 29).'

 

1. 성체에 대한 신앙심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8절)

 

프란치스코는 먼저 예수님을 신앙 안에 받아들인 점에 있어서 예수 당시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경우 모든 신앙이 요구됩니다. 주님이 이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그분의 신성은 당신 인성 안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주님의 신성뿐아니라 그분의 인성까지도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믿음, 곧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르시도를 신앙 안에서 받다들이고 영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부님에게 있어서 우리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 생활의 중심이 되는 일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이시고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며, 따라서 단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님이 두 번씩이나 되풀이 사용하시는 단죄 받는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은 유대인들의 불행, 즉,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하고 소리치면서(마태 27,25)'예수님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불행을 기억하면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자기 자신을 단죄(판결)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 역시 단죄 받습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3, 54)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예를 들어 나타나엘: 요한 1,46)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활 안에는 성체 안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심을 위협하는 위험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당에 자주 들어가고, 미사 성제를 매일 드리면서 매일 성체를 영하는 등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주의를 하지 않으면 습관적인 일이 되고 형식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9절)'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체를 모시는 태도로써 성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부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과 같은 판결, 즉 단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란치스코처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 54)'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자주, 그리고 깊게 묵상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수도원 안에 머물면서도 극히 약한 신앙, 때로는 실질적으로 신앙이 없는 수도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신학적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성체에 대해 자주 묵상도 하며 성체 조배도 자주 합니다. 성체에 대한 수많은 강론을 들었고 성체 교리도 잘 가르칩니다. 우리는 정말로 머리로는 성체를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어떤 교의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느님께 의탁하는, 매달리는, 그분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내맏기는 것이며, 마음을 그분께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이란 하느님만을 위해서 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되기를 갈망하며, 실제로 하느님의 것이 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론이 아닌 성체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심을 지니도록, 또한 그 신앙심의 은총을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깊은 신앙심으로 성체를 모셔야 하겠지만, 우리의 신앙심 또한 성체를 통해서 성장한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신앙의 원천이며 우리의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

미사 성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즉 그리스도의 제사,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가 재현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얻어 주신 새 생명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한 몫을 지니도록 최후 만찬 때에 당신의 파스카를 재현하는 미사 성제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성제 안에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성체 안에서 만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 그분의 것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표현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또 성체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심을 우리는 자신의 온전하고 절대적인 봉헌에로, 즉 수도 생활에로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사부 프란치스코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9).'

미사 성제에서 희생 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아버지께 봉헌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 자기 자신을 바치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의 봉헌! 이런 의미에서 성체가 수도자의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크리스천들에게도 그렇습니다만,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된(교회 헌장 44번)'우리 수도자에게는 특히 성체 안에서 희생 제물로 봉헌되시는 그리스도가 더욱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믿고 안 믿는 것이 우리 구원에 결정적인 것이 됩니다. 믿지 않으면 단죄 받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들도 단죄 받습니다.(9절)

 

이와 반대로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 14,22. 2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0절 -11절)."

 

우리 신앙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통하여 성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양육되고 성체는 또한 우리가 구원될 희망의 보증이 됩니다. 여기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위한 새로운 계약의 피, 즉 주님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미사 성제를 드릴 때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맺으신 영원한 계약은 새로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 구원의 약속,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와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당 영복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일치되리라는 우리들의 희망은 미래에 완성되지만 이미 성체의 신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이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가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9).'

 

처음에는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같이 들립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시는 주님의 영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오로의 말씀, 즉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로마 5,5)'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면 사부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를 이루시는 사랑이며, 삼위를 일체가 되게 하는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6,19).'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와 일치시켜 줍니다. 이러한 일치, 즉 성삼위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 사랑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체 때에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시고 우리들은 다만 성령을 힘입어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뿐입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12절)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는 대단히 의미 심장한 표현으로 사부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실 때에 우리가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세입니다. 이 사랑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정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는,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삼위를 지니고 계시지만 완전한 일치가 되는 일체를 이루십니다. 하느님의 본질과 생명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르 사랑 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이렇게 사랑이란 성령께 마음을 완전히 개방해 드리고 성령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신약의 제사인 미사 성제를 거행하며 성체를 받아 모실 때에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머무시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체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9).'하고 주님의 영을 모시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즉 죄 중의 상태뿐만 아니라 무관심하고 (성체에 대한 별 관심 없이)습관적으로 영성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충고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사랑의 성사인 성체를 받아 모신다면 우리는 단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성사인 성체는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그 크나큰 사랑에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가 분명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은 것입니다.(1요한 3,14).'

 

2.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도록 합시다.

 

사부님의 이 권고는 성체에 대한 자신의 단순하면서도 확고한 신앙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체에 대한 새로운 교리나 새로운면을 보여 주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신앙심을 반성하기에 좋은 묵상 자료가 됩니다. 우리들도 사부님과 같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성체를 바라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신앙: 성체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적, 외적으로 이러한 신앙심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적으로 : 우리는 보고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축성된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도록,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가장 절대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 전부를 주님께 희생의 제물로 바쳐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체에 대한 신앙과 말씀에 대한 순종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외적으로 : 우리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몸가짐이나 다른 모든 외적인 것, 예절 등을 정성되이 지키고 있습니까?

인간의 외적인 것은 내적인 마음가짐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적 마음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외적인 몸 자세나 옷차림, 성가나 다른 예절 등 외적인 예모를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영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는 우리들의 신앙심을 외적으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2) 희망 : 주님의 몸인 성체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기초가 됩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대로 성체는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북돋아 줍니까? Futurae gloriae nogis pignus datur(미래에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보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라는 교회의 옛 기도문에서 처럼 성체는 우리가 영복을 얻을 보증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성체를 영합니까?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후세에 좀더 가까워진다는 우리의 희망이 성장합니까? '이것은 내 몸이며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성체를 통해서 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까? 매일 거행하는 미사 성제를 지낼 때마다 좀더 가까이 우리의 목적지에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나에게 성체는 하느님이 인류와 맺어 주신 계약의 표시가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후세를 바라보면서, 후세의 생활을 갈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신약의 제사인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희망은 우리들에게 가난의 정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은 그런 가난한 사람만을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충만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워 둡니다. 따라서 가난한 삶만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사랑 : 우리 안에 머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 즉 사랑의 성령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떠한 사랑으로 성체를 영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라는 육신의 정신이 점점 작아지고, 주님의 영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성 보나벤투라 말대로 사랑하는 님을 닮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미사 성제를 지낼 때마다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까?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 세례자 요한의 말에 따라, 주님이 우리 안에서 커지도록 우리가 매일매일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9:13절)."

 

제3부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 (요한 9,35) 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하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고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구원의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늘 강조하시는대로,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셨고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활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신 길을 발견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길, 우리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하게 되고, 그뿐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명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새로운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와 그 구원 사업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1권고를 시작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인성과 신성을 지니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자세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자세이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신성'인 성체 안에서 우리가 걸을 수있고 또 걸아야 할,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요한 6, 47).'

이 성체 안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그분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그리고 우리가 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할 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빵을 억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프란치스코는 성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더 풍부히 얻을 수 있도록 권고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9).'

이렇게 성체와 가난을 아름답게 연관시켰습니다. 미사 성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이기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 전부를 주신 것처럼 미사 성제가 거행될 때마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참되게 가난한 자로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겸손한 자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면서 자신을 비우는 가난한 자로서 미사 성제에 참여할 때, 이런 자세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더 풍부히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1권고 제3부에서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항상 계십니다'라고 계속하여 권고하는 것입니다.

 

1.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비하

 

이 말씀은 당시 카타리파 이단에 대한 반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의도는 항상 유익합니다. 분석해 가면서 각 문장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한다 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14~15절).

 

프란치스코는 생명과 구원의 성사인 성체를 먹고 마심으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며 영적인 죽음과 영원한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면서 열렬하게 '언제까지나, ' '왜?'하고는 두 가지의 위험스러운 태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굳은 마음을 가지는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세입니다.

굳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지 않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마음이 굳은 사람은 바로 교만한 사람, 하느님을 등지고 자기 자신만을 믿는 사람,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또 자니친 자애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위험스러운 둘째 태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실제로 중세의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카타리파가 이런 오류에 빠졌습니다. 이 권고의 역사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이단에서 형제들의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카타리파의 이단적인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신 권고이지만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체에 대해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 생활이 기계적인 것이 될 때, 또한 우리의 영성체가 습관적인 것이 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이 두 가지의 위험에 대해 강력히 주의를 시켜 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시다(16~18절)

 

이 말씀에서는 1권고의 실질적인 결론, 우리 생활에 적용되는 결론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적인 가난이라 할 수 있으며, 좀더 풀어 말하면 겸손하신 그리스도, 즉 인간이 되실 때(육화의 신비)와 마찬가지로 성체 안에서 매일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겸손 속에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먼저 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 아버지의 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위대하신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고 영원히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좌에서 나오시고 아버지의 품에서 나오시어 성모의 태중에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써 겸손과 비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필립 2, 6~8).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이러한 비하를 감격과 놀라움 속에서 묵상합니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므로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1첼라노 84).'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육화의 겸손, 비하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안에서도 계속됨을 발견하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아버지의 오른편 어좌에 다시 앉으신 그리스도는 매일매일 성체 안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겸손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매일 아버니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성체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가 이 지극한 사랑 앞에서 '굳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신앙에 넘치는 마음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외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여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시편 61).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참조: 1베드5,6: 야고 4,10).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6~29).'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부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 즉 그리스도의 생활은 제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활 전체가 미사 성제였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와 십자가상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예수님은 그 겸손과 비하의 길을 지금도 매일매일 다시 걷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 그리스도와 같은 비하, 그리스도와 같은 순종으로 우리 자신들을 아버지께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8절).'

성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신비는 우리들에게 '믿고 순종하는(2고린 9,13).' 신앙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세로 성체를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19~21절).

 

프란치스코는 여기서도 요한 복음 6장을 배경으로 해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당신 피를 음료로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제자들과 믿은 사도들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며 성체를 믿도록 권고하십니다.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요한 6,60,63)'고 대답하셨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떠났는데 사도들은 예수의 말씀을 믿었고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6~69)'하고 고백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믿지 않은 제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도들을 비교하면서, 성체를 약속하시고 후에 성체 성사를 세우신 주님의 말씀을 믿는 절대적인 신앙심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으니, 당신 인성 안에 감추어진 천주성과,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숨어 있는 당신의 몸과 피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요한 6,42).'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주님도 사도들을 믿고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개방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고 순종(2고린 9,13)'하는 신앙심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인성뿐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시요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보는 우리들도, 그것이 살아 있는 진실된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임을 보고 굳게 믿도록 합시다'라고 하신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성체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심을 가질 때, 우리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봉헌할 수 있으며, 우리를 조건 없이 주님께 개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바로 이러한 신앙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의 존재가 완성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1권고 제1부에서 인용하신 주님의 말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은 영적인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 말고, 주님을 영적으로, 즉 깊은 신앙심으로 바라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성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믿는 이들과 함게 계십니다. 그분은 어좌에 앉아 계시면서도 매일 매일 성체 안에서 당신의 비하와 겸손의 완성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성체 안엔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이시며, 아버지를 계시해 주시는 진리이시며, 우리를 생활케 하시는 생명입니다.

 

2. 성체가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권고를 읽어 가면서 성체에 대한 사부님의 깊은 신심을 보았습니다. 구원 역사에 있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업적 중 성체가 그 절정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인 성체가 우리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1권고 제3부를 시작하는 질문(언제까지나? 왜?)을 갖고 잠시 묵상하며 우리 생활에 적용하겠습니다.

 

(1)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주님께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십시오(열왕 상 3,()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개방된 마음, 신앙심이 깊은 마음,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님께 청합시다. 그러면 사부님에게 생활 중심이 된 성체가 우리에게도 중심이 되겠고. 폐쇄적인 마음을 갖지 않을수록 더욱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개방된 마음일수록 더욱더 쉽게 그리고 깊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시고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지만, 그러나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며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체 안에서 '나는 세상 끝날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2)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

사랑은 진리에로, 신앙에로, 신뢰심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더욱더 봉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과 하나가 되어 사랑 안에서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참조:1베드 1,14~16), 우리도 사부님과 같이 미사 성제의 가치를 인식한다면, 성체가 우리 각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즉 성체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각 공동체의 생활에서 미사를 그날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야 하며, 형제들이 함께 바치는 미사는 형제들의 일치를 외적으로 나타내고 내적으로 형제애와 서로간의 일치를 창조하는 가장 기쁘고도 즐거운 사건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형제들이 모인 공동체가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자기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끝으로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없이 사랑해야 합니다(2첼라노 196)'가로 하신 말씀이 우리 모두의 자세가 되었으면 합니다. 

 

 

 

권고 1번:심위일체적인 하느님의 관상

- 김찬선신부 -

 

권고의 제목은 프란치스코 친히 붙인 것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붙인 것인데, 후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리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 제목을 다르게 붙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권고 1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은 만날 수 있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요 당부이다. 더 풀어 얘기하면 유한하고 육적인 인간이 어떻게 하면 무한하시고 영적인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권고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을 세 단계로 얘기하고 있다. 1)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보는 것, 2)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 3)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 모든 보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이라고 얘기함으로써 삼위 일체적인 하느님 관상을 얘기하고 있다 권고 1은 프란치스코적인 하느님 관상의 전형을 얘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리스도 예수와 하느님 관상

 

권고1의 앞부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느님 관상에 대한 얘기이면서 동시에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론이라해도 괜찮을 것이다. 여기서도 프란치스코는 복음과 서간의 말씀을 인용하며 자기의 얘기를 한다

 

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 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본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고 '하느님은 영이시며'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다. 어느 정도로 초월적이냐 하면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분이기에 아무도 그분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초월성은 거리상의 떨어져 있음인가? 당연히 아니다. 프린치스코가 하느님을 부를 때 자주 '지극히 높으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때 높으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다른 곳, 공간적으로 우리가 영영 그리고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에 게시다는 것인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우리의 믿음과 반대된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고,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시권과 가청권 안에 들어도지 않으시니 하느님은 너무나 멀리 계신 분이시다. 가까이든 멀리든 공간적으로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고, 한계 안에서 들어오신 것이며, 우리의 감각에 포착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나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그분의 소리는 들을 수도 없으며, 그분의 냄새는 맡을 수도 없고, 그분을 만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래서 공간과 감각의 측면에서 그분은 차라리 <무-없음>이시다.

 

진정 하느님은 무 이시다. 그러나 상대적인 무, 곧 유의 반대로서의 무가 아니라 절대적인 무이시고, 우리는 한계가 있는데 비해서 한계가 없는 뜻에서의 무이시다. 유한한 우리에 비교해서 무한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우리의 거리감은 공간적인 차이가 아니라 크기의 차이다. 우리 인간과 피조물의 차이는 유한성의 정도 차이이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차이이다. 무한히 크신 하느님은 그 무한함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시며 그래서 피조물의 찬가에서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 온갖 영예와 영광과 찬미는 홀로 당신께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라고 노래하듯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다. 아니 부를 수 없다. 무릇 이름이 있다는 것은 어떤 한계 안에 있으며, 규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하느님은 한계를 넘어 어떤 규정도 불가한 분이시기에 이름 지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분이시다. 

 

거듭 얘기하지만, 하느님은 무한히 크시기에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한계적이고 장소적인데, 즉 무엇이 어디 있다는 식인데, 하느님은 무한히 크시기에 어디를 초월해 계시고,  어디를 초월해 계시기에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 이렇게 계시는 분은 차라리 아니 계신 분, 장소적으로는 아니 계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계신 곳에서 전 방위적으로 무한히 이어진 또는 펼쳐진 존재(Extension)이시기에 어디에도 계시고, 어디에도 아니 계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의 앎 밖에 계신 분이시기에 또한 신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유한성만큼이기에 그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고 그래서 차라리 모른다고 함이 맞다.

 

하느님은 이렇게 초월적인 분이시기는 하나 또한 내재적인 분이시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한한 우리가 무한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는 없지만 원하시기만 하면 무한이 유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있는 것이며 무한히 큰 것 안에 유한한 작은 것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고, 전능하시기에 또한 사랑이시다. 지혜서가 얘기하듯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11,23~4).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시고자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오실 수 있고, 하느님은 사람이시기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갈 필요 없이 만날 수 있고 그래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인간의 이 유한성 안에서 들어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시고,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의 앞부분에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주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길이란 두곳을 연결하고 통하게 하는 것으로서 연결통로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길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이룰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그리스도 예수라는 길이 계시기에 불가능하던 하느님과 만남이 가능해진 것이다.

 

유한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뵙는 것은 하느님의 엄위로운 초월성과 인자하고 겸손하신 내재성을 둘 다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내재적 초월자요, 초월적 내재자이신 하느님을 봐야 하는데,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반대로 하느님의 내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느님 체험/만남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느님의 내재성 또는 육화는 하느님의 지극히 겸손한 낮추심이 아니라 차별성 없는 인성에 불과할 뿐이고, 반면에 하느님의 그리스도성과 하느님의 예수 그리스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나와 아무런 연결통로가 없고 하느님의 초월성은 사랑의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수백억 광년 떨어진 별에 불과할 뿐이다.

 

 

2, 성령으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봄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보게 하는 것이 성령이시다. 하느님께서 초월과 내재를 자유롭게 그리고 동시적으로 넘나드심이 바로 영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하시기 때문이다. 영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존재,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물질성, 지구성, 우주성, 유한성 안에 들어왔다가도 거기서 벗어나기도 하며, 안에 있으면서도 매이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이다. 초월에서 와서 내재하기도 하고, 내재하면서도 쉽게 초월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이 하느님의 영만이 이러한 영의 능력으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가늠하고 존재를 꿰뚫을 수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꿰뚫어 보고, 그리스도도 영이시기에 초월자이면서도 예수 안에 내재해 계심을 성령은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초월성을 얘기한 다음 "하느님은 영이시며--- 영 안에서가 아니면 뵈올 수 없고 ---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한다.

 

반면, 주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지 않아 그저 육신의 눈으로 보면 초월과 내재를 아울러 보는 능력이 없기에 우리 안에서 분열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진정한 초월의 실재는 보지 못하고 내재적인 현상만을 보는데 비해, 우리의 이성은 초월을 인식하고 감성은 선을 무한히 누리고자 욕구를 부추겨 의지가 특별히 저지하지 않는한 가능치도 않은 초월을 자신의 힘으로 이 내재적 세상에서 소유하려는 육의 영/정신을 갖게 된다. 주님의 영은 초월절 실재를 갈망하고 보고 만나고 그리하여 초월적 실재를 실제로 누리게 하는 데 비해 우리의 허황된 육의 영/정신은 우리를 교만에 머물게 하고, 유한한 자신이 초월을 소유하려 집착하지만 결국 헛물만 켜게 하고, 죄만 짓게 한다. 

 

그리하기에 여기서 우리가 지녀할 할 중요한 덕이 겸손이고 물리쳐야 할 악덕/악습이 교만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보지 않고, 아니 보지 못하고 자신의 초월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교만이고, 자신의 유한성을 보고 초월적 실재를 볼 수 있는 주님의 영을 주십사고 청하게 하고 또 오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겸손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자신이 초월자가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불가능한 초월에 집착하고 몰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자신의 초월에 집착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유한성에 갇히는 것이다. 될 수 없는 것을 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되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자기라고 착각을 하는 일종의 정신병적인 망상이다.  

 

이것은 자신의 현실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현실의 자신은 외면하고 대신 자신을 기만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가공의 초월적 자기를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자기라고 착각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얼마나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가공의 자신을 초월적으로 만들어야만 하나!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을 용서하면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인데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로 도망치려다 더 갇히는 것이다. 도망쳐 버리고자 하나 그럴 수 없기에 그럴수록 오히려 더 자신에게 갇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인 교만은 이토록 자신에 갇힘으로 자기 밖의 존재와는 담을 쌓고 자신에 대한 지독한 집착으로 자기 밖의 존재는 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이 남을 무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런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중에도 없다고 하며, 또 이런 삶을 일컬어 인하무인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밖의 엄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과 남으로부터 한 번도 제대로 인정과 존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정과 존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함으로 자신의 무가치를 가리려 하나 자신은 이미 쓰레기고 남도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교만은 자신을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하고 남의 진면목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과 남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당연히 아무도 믿지도 못하게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까지도 포함된다. 믿음이란 자기가 보고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초월을 인정하고 신비 차원을 인정하는 것인데,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교만한 사람에게는 자기 이상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고, 자기가 모르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마련이다. 자신의 터무니없는 초월적 망상은 사실이고, 초월적 실재는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자기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의 유한성을 덮기 위해 초월성을 망상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초월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며, 주님의 영 대신 그런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육의 영/정신 때문에 초월적 내재를 부정하고 내재적 초월을 부정하는 것이다.

 

교만은 또한 마음을 굳어 버리게 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어떠한 감동도 허락하지 않는다. 교만이 깨지지 않는 한 이런 굳은 마음은 "언제까지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라고 시편을 인용하여 프란치스코가 한탄하듯이 이미 굳어지기 시작한 벽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굳어지고 화석처럼 변하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자기가 철옹성처럼 단단하고 강하다는 얘기인데, 그것은 진리마저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자기 안에 가두어 아전인수를 하고 밖의 진리는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음) 누구도 깰 수 없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사랑보다도 자기 원칙이 강하며,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어떠한 것에도 감동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교해서 겸손은 봐야 할 것은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는다. 겸손할수록 정확하게 실재를 본다. 먼저 자신을 본다. 자신의 유한성을 보고, 죄성도 본다. 그러니까 겸손은 한편으로는 자기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생명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겸손하게 내려오시는데 그분을 얼마나 알아보지 못하는지 그 죄성을 잘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유한한데도 초월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엄청난 죄의 경향성과 실제로 죄를 짓는 자신의 죄성을 깊이 들여다본다.

 

그러나 겸손은 자신의 유한성과 죄성만 보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베풀어진 풍성한 은총도 본다. 이렇게 보잘것없고 죄인인 자기에게 갖가지 은총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은총을 본다. 그렇지만 교만이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겸손이 보게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성령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겸손하다 해도 겸손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까지 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겸손이 자기 유한성과 죄성을 인식하면서 더불어 자기를 비우고 주님의 영을 영접하게 함으로써 그 주님의 영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만하였을 때는 내재성 안에서 초월을 보지 못하고, 인성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하고, 낮추심 안에서 높으심을 보지 못하고 무시하였는데, 이제 겸손의 초대를 받은 주님의 영은 예수가 얼마나 당신을 낮추어 오신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아보고 그 겸손에 감탄하게 한다. 겸손이 겸손을 알아보는 것이고, 겸손이 주님의 영을 모셔 들어 초월과 내재를 알아보는 것이다. 겸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보고, 예수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진리임을 깨달아 안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임을 알아본다. 그리스도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서 모든 것이 창조될 때 하느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셨다. 그리스도는 생겨난 모든 것의 원천이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게 생기고 그렇게 있게 되며 그렇게 움직이는 원리이시고 진리이시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원리이시고 진리이신 말씀과 다르게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도 부지하지도 못한다. 모든 존재의 진정한 이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움직이는 진정한 이치, 이것이 진리가 아닌가?

 

3. 성체 안에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봄

하느님의 겸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제에 의해 성사가 되기까지 하신다. 말씀으로 인간을 생겨나게 하신 분이 인간의 말에 순종하여 우리에게 오신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이렇게 겸손한 오심을 인간이 알아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사람의 아들들이여, 언제까지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 보심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대려오십니다."(14-19). 사람의  손, 정확히 얘기하면 사제의 손에 의해 하느님께서 움직여진다는 것도 진리인데 왜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진리가 겸손의 진리이고 사랑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진리이다. 모든 존재와 움직임의 근본 이치이신 진리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하고 움지여야 진리에 부합하는 것인데, 모든 것을 있게 하고 움직이시는 분이 인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도 진리라는 것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의 큰 사랑은 물과 같아서 모든 것과 모든 곳을 빈틈없이 채우고 존재의 모양대로 담기고 채우기에 겸손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은, 참되기만 하다면, 사랑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 사랑은, 참되기만 하다며, 사랑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자기 사랑을 갈망하고 요구하게 되기를 먼저 갈망하며 스스로 낮추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을 갈망하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겠다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교만이고, 사랑일지라도 교만한 사랑이어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거나, 자기와 신분의 차이가 나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면 그 사랑을 내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욕으로 생각할 것이다. 머슴이 주인 마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교만한 주인마님은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머슴이 주인마님을 사랑하는 것을 언감생심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욕인 그 사랑을 주인마님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응답한다면 그 사랑은 그 얼마나 낮추임이고, 반면에 그 사랑은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 주인 마님은 낮아지고 머슴은 높아지는 것이다.

 

말씀에 의해 창조되고,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을 낳으신 분(마리아)이 말씀이신 분(예수 그리스도)에게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라는 뜻으로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하고 말씀하시자 말씀이신 분이 그렇게 하심으로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말씀이신 분은 말씀에 순종한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말씀에 말씀께서 말씀으로 순종하시고, 성모 마리아의 말씀에 말씀께서 순종하시듯 사제의 말에도 순종하여 말씀도 하시고 존재를 움직이신다. 그래서 사제의 말은 사실 말씀이신 분의 말이고 그래서 사제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신 대로 말씀이신 아드님께 구하면 말씀께서 무엇이든 다 이루어주시고,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 15,16)고 하신 대로 말씀을 통하여 구하면 아버지께서도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 당신을 위해서는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요구하면 그렇게 하시고, 당신의 생각대로라면 아직 움직이실 때가 아니지만 성모 마리아께서 요청하시니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다.

 

사제의 말씀에 말씀께서 움직이시어 제대 위에 내려오시고, 사제의 말씀에 말씀께서 함께 계시어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신다 . 말씀에 의해 하느님께서 발생하시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어찌 불가능하다 하고, 어찌 믿을 수 없다고 하는가? 말씀께서 살과 피를 취하여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 무엇을 취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고, 어찌 믿기 힘든 것인가? 우리의 아무런 갈망과 요구가 없어도 자존심 내세우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스스로 오셨는데 우리의 요청에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사제가 죄인이기에 믿기 어려운가? 죄인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당신을 낮추시고, 죄인의 사랑을 갈망할 정도로 죄인을 사랑하시는데 하느님은 죄인을 싫어하시고, 싫어하는 자의 말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교만한 사람은 이 사랑의 신비와 낮춤의 신비를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성사란 사요적인 것인데도 그에게만은 성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성사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이상한 노름일 뿐이며, 성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겸손은 경계를 넘나드는 영을 받아들이고 그 영으로 육신의 눈에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관상(Contemplation)이다 이것은 묵상(Meditation)과 다르다. 묵상은 기본적으로 생각(Thinking)과 상상(Imagination)의 작업이다. 현세적 실재 안에 초월적 실재가 현존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비교해서 관상은 모든 실재와 대면하고 모든 실재를 보며, 현세적 실재 안에 초월적 실재가 현존함을 본다. 예수라는 형제적 실재 안에 그리스도라는 초월적 실재가 실재함을 보고, 모든 존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관상을 통하여 현세적 실재를 떠나지 않고도 초월적 실재를 만나고 오히려 현세적 실재를 매개 삼아 초월적인 것들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나 관상은 현세의 것들이 초월적인 봄, 영적인 봄의 시작이다.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총제적인 만남이요, 실재와 실재의 대면이며, 그래서 초월적 존재가 현세적인 것들 안에 살아있는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당신 자신을 참된 살로서 거룩한 사도들이게 보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관상하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라고 사도들의 관상에 대하여 얘기한 다음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고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고 굳게 믿도록 합시다."라고 얘기한다. 사도들의 관상을 얘기하는데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 베드로가 그분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 뵙고 믿음을 고백했다고 하지만 사실을 돌아가신 다음에야, 더 정확히 얘기하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이중적 실재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지체에서 몸과 머리를 보는 것, 부분에서 전체를 보는 것, 한없이 낮추어진 분에게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보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죄스러운 존재에서 지극히 거룩한 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것중에서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엄연히 사효적 성사는 발생하였는데도 인효적으로 성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성사 안에서 이중적 실재를 관상하기까지는 사도들과 같은 과정과 궤적이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방식에 있어서 일련의 전이(Transitions)와 변형(Transformation)이 있었고, 그에 따라 사도들의 관상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육화하신 그리스도 예수: 두 실재의 합일 -돌아가신 예수의 그리스도: 두 실재의 분리- 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상징적 실재와 실재의 새로운 합일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시고 돌아가시고 밥이 되시는 것 안에 일관되게 있는 것이 무화의 사랑이다. 이 무화가 낮춤(겸손)의 형태를 띠고, 수난의 형태를 띠며, 내어줌(봉헌)의 형태를 띠지만 공통적이고 일관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무화의 사랑이 현존 방식을 달리 하였고, 현존 방식의 변화에 땨라 어떻게 사도들의 그리스도 관상이 달라진 것일까? 그것은 지상성과 유한성 안에 있고 그것에 머무르려는 우리를 당신의 초월적이고 영원한 현존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마치 어미와 자식이 한 몸이었다가 분리된 사랑의 두 실재가 되고, 두 실재의 사랑이 변화되어, 즉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이 자식의 성장에 따라 변화되고, 어미의 사랑에 따라 자식의 사랑이 변화되어 초월적 사랑의 일치로 나아감과 같다.

 

더 풀어서 얘기하면 본시 어미 안에서 한 실재가 시작되어 한 생명으로 탄생하기까지 어미와 아기는 두 실재의 한 몸과 같이 있었다. 어미 안에서 생성과 성장을 계속한 아기는 이제 독립적인 몸을 가지게 되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는 되지 못하고 어미의 지극한 사랑이 있어야만 생명과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이다. 이때 어미와 아기의 사랑의 관계는 피부 접촉적이다. 신체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이다.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채우지 못함은 물론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기에 지근거리에서 그 필요를 파악해야 하고, 사랑도 실체적으로 표현해야만 어미의 존재와 사랑을 느끼고 심리적, 존재적 안정을 느끼게 된다. 이때부터 어미와 자식의 사랑의 관계는 자식의 성숙 정도만큼 오감적이고 물리적인 데서부터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마찬가지이지만 자식이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충당하고 심리, 정서적으로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물리적, 정서적, 정신적 지원을 줄이거나 하지 않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육체적, 물리적으로 완전히 이별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일치를 살아간다. 이때 어미가 남긴 말과 사랑이 담긴 물건은 어미의 사랑을 기념도 하고 실재케 하는 표지가 된다. 이렇게 떠남으로 영원히 현존한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일치 안에 있엇던 우리 인간은 사랑의 본질, 즉 사랑의 또 다른 특성에 따라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실재하게 되었다. 사랑은 본질상 자신을 대상화하고 대상이 된 자신을 사랑한다. 대상화라는 분리도 일치와 마찬기지로 사랑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사랑이 본질이신 하느님의 삼위이며 일체의 신비이다.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대상화하시어 영적으로 분리하시고 영적으로 일치하신다. 사랑으로 대상화된 성부와 성자가 계시고 성부와 성자 사이의 분리와 일치를 이루시는 사랑의 성령이 계신다. 이는 사랑이 소유적 일치가 아니라 무화적, 존재적 일치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랑의 원리로 그리스도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함께 당신 사랑의 대상화 하셨는데, 천지의 창조와 개인의 탄생 이후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제 일치의 여정이고, 점점 더 영적인 사랑의 여정이다.

 

유한성과 지상성을 지닌 우리 인간, 그래서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 아기인 우리 인간에게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와 사랑으로 오셔서, 점차 영적인 일치로 인도하신다. 인간의 유한성에 동참하시고 아픔과 배고픔도 헤아리시어 병을 고쳐주시고 빵도 주시지만 그러면서 못 알아들을 말씀도 하신다. 눈에 보이는 그 빵이 아니라 당신이 진짜 빵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가 살아계신 한, 다시 말해서 눈앞에 있는 한눈에 보이는 빵과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는 별개의 두 실제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생명의 빵이 되려면 예수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영원히 우리에게 사시고, 예수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육체성(물성, Body)을 입으신다.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이때 부활하는 육신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살덩어리가 아니다. 이 살덩어리는 금방 썩어 없어지고, 없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르지만 새로운 육신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는 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육신을 입으신 것이 빵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방법이 성체성사라는 것을! 그것은 천지창조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생기라 하시고, 그렇게 명령에 순명하여 생긴 것이 생명이듯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말씀에 순명하여 빵을 새로운 육신으로 입으시고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어 제대 위에 내려오신다. 사도들은 빵을 떼시는 모습을 보고 이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더 완전하게는 성령을 받음으로 이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사제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육신도 아니고, 이제는 빵을 육신으로 입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다. 보잘것없고 죄지은 사제라면 그 사제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의 더 기막힌 낮춤이고, 빵을 육신으로 입으시어 우리의 밥이 되심은 더, 더, 더 기막힌 낮춤이시다. 이것을 본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탄복하올 위대함과 지고의 장엄에 대해 감탄한 다음, 극치의 겸손과 겸손의 극치에 대해 또 한 번 감탄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공손함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진정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주님의 영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이제 사도들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의 겸손이시고 사랑이신 성체를 제대 위에 빵에서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