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 4. 아무도 장상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IV. No one should claim

Margaret K 2007. 5. 17. 00:17
 


4. 아무도 장상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

 

1"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 형제들에게 대하여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형제는, 그 장상직에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려거든 마치 형제들의 발을 씻어 주는 직책을 위임받은 데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3그리고 발을 씻어주는 직책이 면직되는 데 대해 흥분하는 이상으로 장상직이 면직될 때 흥분한다면 자기 영혼의 파멸을 향해 유다처럼 자기 돈주머니를 챙기는 것이 됩니다(참조: 요한 12,.6). 

 

IV. No one should claim the office of superior as his own.

I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Mt. 20: 28), our Lord tells us. Those who are put in charge of others should be no prouder of their office than if they had been appointed to wash the feet of their confreres. They should be no more upset at the loss of their authority than they would be if they were deprived of the task of washing feet. The more they are upset, the greater the risk they incur to their souls.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4 묵상

-김찬선신부-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제 49호


사랑에 여러 차원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하는 '내리사랑' 아래에서 위로 하는 '치사랑' 위아래가 없는 '이웃사랑' 또는 '형제적 사랑' 등이다 <권고> 4번에서 얘기하는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치사랑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치사랑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드리는 효도도 있고,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존경이 있으며, 종이 주인에게 하는 섬김도 있다. 그런데 효도가 한량없이 내리받은 사랑에 대한 무한 감사의 사랑이고, 존경이 고매한 인품 때문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면 섬김은 주인이나 윗사람의 위치와 권위에 대한 종이나 아랫사람의 복종적인 또는 순종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하인이어야 하고 하심을 가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이다.


프란치스코 당시에는 이태리에도 'Majores'와 'Minores'라는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프란치스코 속했던 Minores를 바꿔 말하면 하인이다. 하인이란 지체가 높은 신분이지만 성덕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그런 존재이거나 하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덕의 차원에서 가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신분적으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는 자들, 싫은데도 낮춰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이는 가난이 덕으로서의 가난 뿐 아니라 실존으로서의 가난이 있는 것과 같다.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은 수도규칙> 6장에서 작은 형제들의 가난, 곧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실제로 장소와 집과 다른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이야말로 가난 중에서도 최고의 가난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요 왕이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극치입니다."(4)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가난과 물질에 있어서도 가난하게 하는 가난이라고 얘기하며 가난의 두 차원을, 곧 '덕행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종종 가난을 얘기하면서 마음의 가난 또는 덕행의 가난을 물질적 가난 또는 실존적 가난과 분리하여 얘기하며 마음의 가난이 중요하다고 얘기하곤 한다. 완화된 가난을 살고 싶거나 가난을 복음의 가르침이나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함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둘을 떼어서 얘기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작음/낮음도 마찬가지다. 덕으로서의 겸손이나 낮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낮은 자, 작은 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회개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자신이 하인인 것, Minores인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프란치스코 당시 자방차지(commune)움직임이 있고, 프란치스코가 속한 상공업자들과 신흥세력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힘을 갖게 되자 Majores와 Minores라는 신분 사회 자체를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는 시도, 우리말로 하면 양반과 상놈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혁명적인 시도가 아씨시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마저 얼마 안 있어 죽어 frederick II세가 어린 나이에 호 ㅏㅇ제가 되었는데 이때 프레데릭 1세의 위임을 받아 아씨시 징역을 통치하던 곤라도 가 이제는 황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인노첸시오 3세 교왕에게 줄을 서기 위해 아씨시를 비우자 평민들(Minores)은 반란을 일으키고 귀족들(Majores)을 아씨시에서 쫓아냈다. 이에 페루지아로 피난을 간 아씨시의 귀족들은 페루지아의 귀족들에게 이 평민들의 반란을 초등에 제압하지 않으면 페루지아의 평민들도 반란을 일으킨 거라는 논리로 아씨시의 평민 군대를 제압하라고 설득을 하였고 그래서 페루지아 구족군대와 아씨시 평민군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프란치스코도 이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이 전쟁에서 평민군대가 패허였기에 프란치스코도 포로가 되어 1년여 동안 감옥에 갇혔고 이로 인해 중병까지 얻게 되었다. 다시 1년 여 병상생활을 하고 간신히 살아났는데 병이 낮자마자 프란치스코는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이번에는 교황군대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기사가 됨으로써 귀족(Majores)이 되기 위한 참전이었다. 말하자면 출세 또는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었다. 신부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이제 신분차별을 없앨 수 없다면 신분상승을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나타나 프란치스코의 이 시도를 막아 이또한 실패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회개의 여정이 시작되었고, 자기에게 하느님의 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수도회를 세우며 '작은 형제들의 회'라고 이름을 지었다.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고 벗어나고 싶었던 minores를 이름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세운 수도회가 덕행 면에서 작은형제들의 수도회이길 바란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신분적으로도 낮은 '작은형제들'의 수도회이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이 어디서건 낮은 위치에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7장에서 얘기 한다.


"모든 형제들은 남의 집에서 봉사하거나 일하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감독관이나 관리인이 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하는 집에서 주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추문을 일으키거나 자기 영혼에 해를 입히는(참조; 마르 8,36) 어떤 직책도 맡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집에 있는 모든 이들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2)


그런데 세상 가운데서는 모든 형제들이 이렇게 하라고 하였지만 수도회 내에서는 장상의 위치를 차지할 형제들이 없을 수 없었고, 그래서 장상의 직책을 맡게 되는 형제들은 위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작음/낮음을 살아야 함을 회칙과 권고를 통해 가르침을 주었다. <인준받은 수도규칙>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사랑과 친절로 이 형제들을 맞이할 것이며, 이 형제들이 마치 주인이 종들에게 하듯이 봉사자들에게 말하고 대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자들은 그 형제들에게 친밀감을 지닐 것입니다. 사실, 봉사자들은 당연히 모든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10,5-6)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영성화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종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도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종과 같이 되는 것은 종이 아닌데 다시 말해서 주인인데 영성적으로 종처럼 또는 종과 같이 되는 것이라면 종이 되는 것은 실제로 종이 되는 것이고, 밖에서 일할 때 관리자, 책임자의 직책을 맡지 않고 말단의 직책을 맡음으로 실제적으로 하인이 됐던 것처럼 수도원 안에서 실제적으로 형제들의 종이 되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그때까지 써 온 장상(Superior/Prelate)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봉사자(Minister)라는 칭호를 쓴 것이 바로 이런 실제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형제들이 관구 봉사자의 빰을 때릴지라도 관구 봉사자는 형제들을 사랑할 것이고, 프란치스코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한다. 형제들이 관구 봉사자를 때리는 그런 상황은 프란치스코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일까? 당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관구 봉사자직을 못하겠다고 팽개치지 말 것이며, 종이 주인에게 수시로 얻어맞아도 거역치 않고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는 형제들이 하도 관구 봉사자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더 이상 관구 봉사자 직책을 못해 먹겠다고, 관구 봉사자를 그만 두고 은둔소로 가겠다고 한 관구 봉사자에게 쓴 편지인데, 이것을 보면 형제들이 관구 봉사자를 때리지는 않았을지라고 적어도 말을 잘 듣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 편지에서 그는 관구 봉사자가 은둔소에 가는 것보다 계속 그런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요, 프란치스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상은 수하 형제를 매로 다스릴 수 있었고 감옥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스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도회 <규칙서> 2장을 봐도 "정직하고 영리한 사람에게는 한두 번 말로 타이를 것이나, 불량하고 고집 세고 거만하거나 불순종하는 이는 매로 육체적인 벌로써 범죄의 시초에 막을 것이니 이는 성서에 ;어리석은 자는 말로써 고쳐지지 않는 다.'하시고 이어서 '네 아들을 매로 때려라, 그러면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다.'고 하시기 때문이다."(27-9)고 얘기한다. 여기서 형제들은 아들이고 아빠스는 아버지이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은 매로써 고쳐줘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유언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형제들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보호자은 단호히 순종으로, 그를 그의 봉사자의 손에 직접 넘겨 줄 때까지 자기 손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감옥에 주야로 갇혀 있는 사람처럼 엄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자는 단호히 순종으로, 그 형제를 전 형제회의 주인이며 보호자요 감사관이신 오스티아 추기경에게 넘겨줄 때까지, 몇몇 형제들을 시켜 그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주야로 지키게 하고 그를 추기경에게 보내야 합니다."(32-3)


그러니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가톨릭 교리와 수도규칙에 어긋날 경우에는 관구 봉사자가 아주 엄한 장상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외의 경우에는 때릴지라도 형제를 사랑하라고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얘기하고, 수도규칙에서는 형제들이 봉사자를 종 대하듯 대할 수 있도록 봉사자는 친밀감을 지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봉사자가 지녀야 할 친밀감은 형제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대할 수 있게끔 하는 친밀한 감정 그러니까 격의 없는 감정이다. 그런 감정을 형제들에게 대해 가짐으로써 형제들도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엄중한 조처를 취할 수도 있는 장상을 어려워하지 않고 대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2. Maternal Leadership/모성적 리더십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수도규칙에서 봉사자들에게 실제로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형제들이 종을 대하듯 자신을 대할 수 있도록 봉사자들이 친밈감을 가지라고 하였지만 봉사자와 형제들 간에 프란치스코가 정말로 형성되기를 바란 친밀감은 주인과 종 사잉의 친밀감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친밀감일 것이다. 사실 주인과 종의 충성관계보다는 모자간의 애정관계가 더 친밀감을 지니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연인간의 애정관계보다 더 편한 친밀감이 모자간의 애정관계에 있다. 엄마는 연인보다 더 모든 것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신뢰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연인 사이에는 보자 사이의 신뢰감이 없다. "수 틀리면 깨질 수 있다." 는 분안과 긴장관계가 언제나 있다. 부모자식은 끊을 수 없지만 부부는 등 돌리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밖에서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아주 나쁜 짓을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이라고 해도 엄마는 나를 받아주고,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모질게 해도 엄마는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하실 거라는 신뢰심이 있고, 그래서 종에게 하는 것처럼 엄마에게 함부로 할 정도로 편하고 친밀하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사랑 중에서 아랫사람이 되어주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고 이것이 진정 섬기는 사랑이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Sustineo'.이다. <권고>18번에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밑에서 부축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면서 기도 살려주고, 자라게 하는 Sustineo'의 사랑이다. 프란치스코는 밑에서 섬기는 이 어머니의 사랑을 수도규칙에서도 얘기하고, 편지에서도 얘기한다.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9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을 사랑하고 기르듯이(참조:1데살 2,7), 각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11)


그리고 <인준받은 수도규칙>6장에서도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상호간에 한 식구임을 서로서로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서로 간에 거리낌 없이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가 병이 나면 다른 형제들은 남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7-9)


그리고 레오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얘기 한다.


"레오 형제, 그대의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하며 평화를 빕니다. 나의 아들, 나는 그대에게 어머니로서 말합니다. 우리가 길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모든 것을 간단하게 이 글로 정리하여 권고 합니다. 형제에게 이렇게 권고하니, 의견을 물으러 나에게 올 필요가 없습니다. 즉, 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또 그분의 발자취와 가난을 따르는 데에 있어 그대가 보기에 어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주 하느님의 축복과 나의 허락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영혼을 위하여 그대에게 또 다른 위로가 필요하여 나에게 다시 오기를 원하면 오십시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생각한 봉사자(Minister) 직책의 가장 완전한 수행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는 것보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섬기듯이 섬기는 것이다. 리더쉽으로 얘기하면 Maternal Leadership이다. 그러면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어머니가 자녀를 섬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충성과 복종의 종과 자비와 보살핌의 어머니의 차이가 아닐까? 어머니는 충성심과 복종심으로 자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과 사랑으로 자녀를 섬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어머니처럼 형제들에게 대하는 것을 얘기할 때 <사랑하고 기르는 것>을 계속 같이 얘기한다. 기른다는 것은 동물을 기르고 식물을 기르듯 내리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자라도록, 성장하도록 사랑을 베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섬김은 위의 존재이지만 스스로 아래로 내려와 형제들이 성장하도록 사랑으로 보사라피는 것이다.


3. Servant/ Steward Leadership/집사처럼 섬기는 리더십


그렇지만 <권고>4에서는 어머니의 자식 섬김을 얘기하지 않고 종의 주인 섬김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앞서 <권고>3번에서 장상에 대한 수하 형제의 순종을 강하게 얘기했기에 이제 수하 형제들에 대한 장상의 순종을 얘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순종은 하느님께의 순종이고, 하느님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뜻은 장상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수하 형제들을 통해서도 나타나기에 장상도 수하 형제들을 섬길 뿐 아니라 형제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들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과 봉사자는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형제들을 섬기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과거 주인과 종, 양반과 하인이 있을 때 그 종이나 하인처럼 아무런 권한도 없고, 그래서 시키는 것만 해야 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권한을 가지게 된 사람은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도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형제들을 그저 밑에서 떠받들기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심지어는 프란치스칸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똑 같은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평등하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상이 공동체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인사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보할 수 없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 했다. 지원자를 받아들일 권한, 형제들을 선교지에 보낼 권한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렇다면 장상의 직책이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직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며, 장상들은 마치 주인이 자기 하인에게 대하듯 형제들이 자기를 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앞서 얘기한대로 어머니적인 다스림 (Maternal Leadership)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통 아버지가 위에서 판단하고, 명령하고, 교정하고, 나무라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에 비해 스스로 종처럼 밑으로 들어가 받들고, 부축하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키워주고, 자라게 하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도 형제들의 잘못을 교정해주는 것에 대해 얘가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의 봉사자요 종인 형제들은 자기 형제들을 방문하고 권고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줄 것이며, 그들의 영혼과 우리 수도규칙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것도 명하지 말 것입니다."(미인준 규칙, 4,1: 인준 규칙, 12,1)


그러니까 봉사자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형제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인데, 다만 그러기 위해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잘못을 고치라고 아버지처럼 심판자적이고 고압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겸손과 사랑으로 바로잡아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겸손과 사랑'인데 이것이 바로 어머니적인 것이다.


사실 아버지적인 사랑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아서 그렇지 잘잘못을 정확히 판단하고, 잘못하는 사람을 분명하게 꾸짖고, 옳게 교정하는 것은 보통의 사랑이 아니고,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화가 나서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판단하고, 남에게 요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화가 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의사가 병자의 병을 정확히 진단을 해야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을 알아야 환자를 잘 치료해 줄 수 있듯이 아버지적인 사랑도 형제들의 교정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랑이다.


그런데 아버지적인 사랑과 통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프란치스코가 어머니적인 사랑과 통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첫째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 겸손하기가 쉽지 않고, 위에서 군림하지 않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명령하고, 요구하고, 꾸짖지 않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더러운 것을 나무라고 네가 씻으라고 요구하고, 요구대로 씻지 않으면 더럽다고 버리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우리는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러우면 깨끗하기를 바란다. 가까울수록 더 깨끗하기를 바란다. 사실 가시도 멀리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고, 가까이 있을 때 찔리는 법이듯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러워도 문제가 없거나 참을 수 있지만 가까이 있을수록 괴롭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하고,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것이 되려면 깨끗해야 하기에 깨끗하기를 바란다. 사실 깨끗한 것은 좋은 것이고, 깨끗하기를 바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특히 죄에서 깨끗하기를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란다면 그것을 좋은 것이다. 문제는 깨끗하게 되도록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씻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죄를 씻으면 좋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씻으라고 요구하고 그런데도 씻지 않으면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고 한다. 그런데 어머지적인 사랑은 마치 어린 아이를 엄마가 씻어주고 코 닦아주듯 더러운 것을 몸소 씻어주는 것이다. 더러움을 오히려 껴안는 것이고, 자기가 더러워지면서 씻어주는 것이다. 물이 그렇고, 행주가 그렇고, 쓰레기통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두 번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자칫 권한을 가지고 봉사하기보다 권력을 형성하기 쉽기 때문이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그 권한을 봉사가 아니라 남을 자기 좋을 대로, 또는 자기 뜻대로 주므르고 좌우하는데 쓰는 것이 보통의 권력이고 권력 의지이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4번에서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장상의 직책과 권한을 지닌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 직책을 자기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직책과 권한을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쓰도록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책임이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울 것이며, 그것을 가지게 된 것을 절대로 자랑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잃게 된 것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며, 권고의 말대로 오히려 그것을 잃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권한을 행사할 경우에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주무르고 좌우하는, 곧 권력으로 행사하기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한 것으로 행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세례 축일에 주님께서 당신이 먼저 세례를 받음으로 모든 의로움을 이루셨듯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종이다. 종 중에서도 부당하고 쓸모 없고 죄인인 종이다. 그래서 권한을 행사하는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해야 한다. 자기가 권한을 행사하여 자기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기에 무엇을 할 때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식별을 할 것이다. 성소자를 받아들일 때, 교정을 행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자기의 입맛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자신에 대한  영적 식별을 하고, 내가 하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식별해야 한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내가 하려는 것이 이미 있어서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하려는 것은 없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것을 하려는 자세다. 첼라노 ,제2생애>를 보면 '프란치스코는 요청을 해서 허락을 받는 것도 순명이지만, 요청 없이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거룩한 순명이라고 말하였다. 둘 다 좋지만 후자가 더 완벽하다고 그는 말하였다."(152)고 하는데, 내 뜻, 내가 하려는 것이 아예 없고 오직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하려는 자세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의 자세이다.


이것이 바로 '집사'의 자세다. 집사는 종이지만 주인의 집안일을 주인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종이고, 주인의 종들을 다스리는 종이다. 이 집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의 충성과 맡겨진 일에의 충실성이지만 맡겨진 일, 그러니까 주인이 맡긴 일이 다름 아니라 주인의 종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며, 주인의 종들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종들이 주인이 원하는 일을 충실히 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종들이 건강하도록 종들에게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루카 12,42 참조). 그러니까 군대로 말하면 옛날 부대장이 사병들의 먹을 것을 떼먹는 것이 흔하던 시절에 정직한 부대장과 군수장교가 그렇게 하지 않고 정량을 제 때에 지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집사인 봉사자가 형제들에게 줘야 할 정해진 양식은 영적인 양식이고, 제 때란 하느님의 때이다. 


영적인 양식이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봉사자가 형제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준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종종 하느님의 사랑보다 자기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려고 한다. 이것은 봉사자가 형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것 못지않게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인간적인 사랑을 주지도 하고 반대인 경우에는 미워하기도 하는데 봉사자는 그래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눠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형제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양식을 제 때에 주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이고 충고할지라도 하느님의 때에 줘야 한다. 그런데 봉사자들은 종종 조급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욕심이고 당연히 사랑이 아니거나 사랑일지라도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사랑이 되는 때가 실은 사랑의 때이고 하느님의 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나의 사랑이 그에게 사랑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줄탁동시, 또는 줄탁동기라고 표현하는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안에서 병아리가 알을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닭이 쪼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쪼기도 전에 급한 마음에 어미닭이 껍질을 일찍 쪼아서 깨는 것은 태아가 조산으로 죽게 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제자가 깨달음을 얻는 것도 이와 같다. 스승은 제자의 깨달음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아야 하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듯이 제자가 깨달음의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신호를 보내면 그때 그것을 알아채고 할이나 방으로 그 깨달음을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제자의 깨달음의 때를 알아야 한다. 봉사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 앞에 부당하고 쓸모 없는 종이고 그러한 종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장상은 이제 하느님의 종일 뿐 아니라 이제 더 나아가서 형제들한테도 종이 된다. 그래서 형제들이 자신을 종처럼 여기고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낮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지체의 더러움을 씻어 주시고, 바울로 사도가 천하다고 생각되는 지체일수록 더 품위 있게 꾸미고 볼품없는 지체일수록 더 곱게 꾸민다고 얘기한 것처럼, 장상은 공동체 모든 형제들이 품위 있고 고귀하도록 자신을 낮추어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봉사를 한다. 


그러므로 봉사자가 종처럼 형제들을 섬긴다는 것을 종합하며, 1) 형제들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이요, 2) 형제들이 원하는 것을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들어주는 것이며, 3) 그러나 형제들이 원하는 것/양식이 하느님의 원하시고 정해준 것과 다를 경우에는 형제들이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히신 것과 일치하도록 교정을 하여 주고 영적으로 올바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며, 4) 교정을 하고 올바르게 자라도록 해 주되 어머니가 스스로 종이 되어 자녀를 가르치고 기르듯이 형제들을 그렇게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자가 형제들을 종처럼 섬긴다고 해서 형제들의 속된 욕구와 요구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참으로 주인처럼 고귀하게 되고, 주인답게 살아가도록 섬기는 것이다. 봉사자가 슬기롭고 충실할 뿐 아니라 거룩한 집사가 되어 형제들을 섬길 때 형제들은 거룩한 주님처럼 또 다른 주님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 <권고> 4번의 가르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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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거의 도달한 제자에게 스승이 큰 고함으로 깨닫게 하는 할이나, 죽비 같은 것으로 한 대 내리쳐서 깨닫게 하는 방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하고 도도송을 읊게 한다고 하는데, 할은 임제 선사가 처음 시작하였고, 방은 덕산 선사가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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