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글

영적권고8. 질투의 죄를 피할 것입니다/VIII, Beware the sin of envy

Margaret K 2007. 5. 17. 01:22

 

 

6. 주님을 본받음

1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2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3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VI. The Imitation of Christ

 

Look at the Good Shepherd, my brothers. To save his sheep he endured the agony of the cross. They followed him in trials and persecutions, in ignominy, hunger, and thirst, in humiliations and temptations, and so on. And for this God rewarded them with eternal life. We ought to be ashamed of ourselves; the saints endured all that, but we who are servants of God try to win honor and glory by recounting and making known what they have done.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묵상집

 -하일성 멜키올OFM-

 

6 권고는 프란치스칸 생활의 핵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칸 생활 양식의 목적은 사부님의 말씀대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 양식이며 이상입니다. 이 말씀은 사부님이 자주 사용하는 말씀 중의 하나로, 제1회칙의 시작(1,1). 제2회칙의 시작(1.1)과 끝 부분(12,4)이 모두 이 말씀으로 되 있으며, <성녀 클라라에게 보내신 생활 양식>과 <유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라 사는 것을 선택하셨기에(성녀 클라라에게 보내신 생활 양식 1절).' '그리고 주님이 몇몇 형제들을 나에게 주신 후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

 

사부님에게 있어서 복음을 실행하고 복음에 따라 산다는 것은 복음의 가리침이나 교리, 어떤 지침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부님은 복음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를 조건 없이 따르는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1. 조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 2,2).'사부님은 제1회칙 1장 1절, 22장 2절.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3절. <레오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32절 등을 특히 복음적인 생활을 설명하실 때 성 베드로의 이 표현을 자주 인용하십니다.

 

6 권고의 역사적 배경은, 1220년 모로코에서 우리 프란치스코회에 최초의 순교자 다선 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서, 특히 주교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 왔던 터라. 형제들 중에는 이제 우리도 순교자 성인을 모시고 있는 큰 수도회라고 자랑하면서 박해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신 사부님께서 우리 생활의 핵심에 다시 한번 형제들에게 상기시켜 주시고자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 많은 수도회 창설자들과 교회 개혁 운동 그룹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이상적인 생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은 복음을 기초적인 성서로 택하셨고, 복음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생할을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복음을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여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생활하려고 했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1권고 5절)' 아버지께로 가는 가장 직선적이고 완전한 길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의 이상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요한 14,6)이 되셨는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써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성녀 클라라의 유언2).'

 

성녀 클라라가 유언에서 말하듯이 사부님의 의도 역시 주님이 걸으심으로써 우리의 길이 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1절).

 

어느 형제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깊게 이 말씀을 듣고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깊이 주님을 알고 주님이 행하신 일, 주님이 하신 말씀을 늘 생각하며 묵상하고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잊지 않고 항상 눈앞에 보듯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당신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악마의 세력에서 구속하시어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성 보나벤투라 전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보나벤투라는 철학적인 사상 면에서는 정 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성 토마스가 성 보나벤투라를 방문했을 때 성 보나벤투라는 마침 무릎을 끓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성 토마스가 그에게 당신은 이 많은 지식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십자가를 보여 주면서 여기서 배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생활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람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양들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항상 바라보면서 그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주님을 더 잘 알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인식함은 물론, 나아가서는 주님을 닮고 따르며 그 사랑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없이 사랑해야 합니다(2첼라노 148, 196).'

 

1첼라노 61장, 94,95, 62장 96번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사부님의 열렬한 신심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2절)

 

주님을 바라봄은 능동적인 바라봄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고통을, 물론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생활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생활 중에 주님이 받으신 고통과 박해, 모욕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억울한 오해를 받을 때 쉽게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와 십자가에서 주님이 맛본 굶주림과 목마름을 생각한다면 수도 생활이 요구하는 희생들을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을 것이며, 주님이 광야에서 받은 유혹과 올리브 동산에서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약점이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히브 4,15~16).'

 

죄 이외에는 우리와 같으셨던 그리스도처럼, 그 어떤 경우에도 용기 있게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을 성사, 특히 미사 성제를 통해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주님의 힘과 생명을 받아 주님의 길을 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주님의 수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또 형제 자매들과 함께 그분의 발자취를 밟아 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거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요한 12,26)'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3절)

 

이 말씀으로 사부님은 우리 생활의 실질적인 위험을 지적해 주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에 대해 좋은 강론이나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니며 열심히 묵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들과 그 생애를 다른 이에게 재미있게 이야기햐 주는 것 또한 아닙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부님도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실 정도로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써 주님을 따랐습니다.

 

수도자가 당하기 쉬운 실질적인 위험, 자칫 잘못하면 주님을 입으로만 따르게 되는 위험을 지적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것외에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인들과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이 좋은 교리 수업이나 좋은 강론 등 말만으로 끝난다면 너무도 부끄러운 위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을 본받읍시다

 

(1)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즉, 주님을 좀더 알고 좀더 깊이 알려고 노력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멸시와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생활합니까?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만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모습과 얼굴, 주님의 생활과 말씀과 행적을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또 앎으로써 주님의 사랑에 더 깊이 감사하기 위하여, 또 감사함으로써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치지 않고 주님을 계속 바라볼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 풍부해질 것입니다.

 

(2) 우리 생활을 통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고 있습니까? 진실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와의 일치를 요구합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주님과 일치 이외의 다른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길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일치되고 그분이 걸으신 그 길을 겅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우리의 가난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제물이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가난의 극치입니다. 사부님이 자주 사용하신 표현대로 알몸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아무 조건없이 따르는 것이며, 그 사랑의 신비를 매일매일 기념하는 미사를 통해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평지 29).' 

 

나에게 주신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질 때, 그럴 때일수록 주님을 따르려 노력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고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고 하신 말씀처럼 생명이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자신의 성격이나 소임 때문에, 또는 다른 형제 자매 때문에 어려움이나 갈등을 느낄 때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표시가 되겠습니다.

 

모욕, 오해, 무시를 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받아들입니까? 여러 가지 굶주림(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때,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권리를 박탈 당할 때 등)을 느끼거나, 내외적인 두려움이나 갈망을 느낄 때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사부님이 지적하시는 부끄러움을 우리도 느낍니까?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성인들의 덕행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복음적인 생활이 바로 우리의 이상이고 항상 이 이상을 향해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수록(프란치스코)OFM
                                                                                          
1 사도가 말합니다 :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12,3).” 2 또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3,12).” 3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질투하면,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1. 가난의 창
 프란치스칸 영성의 심연에는 항상 ‘가난 정신’이 깔려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가 ‘가난 정신’을 추구한 것은 가난 속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와 영생의 삶을 발견하고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통하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누구보다도 외적으로 가난하게 사셨지만, 그 ‘외적 가난’이 궁색함이나 남루함으로 전락해버리지 않고 ‘거룩한 가난’, 또는 ‘복된 가난’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난정신이 철저하게 ‘내적 가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적 가난이 전재되지 않은 외적 가난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금방 생명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영적권고를 통해서 함께 수도생활을 하는 형제들에게 내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명하게 될 제8권고인 ‘질투의 죄를 피할 것입니다’ 역시 성 프란치스코의 내적가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알아듣기 어려운 영적권고입니다.

2.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누구나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제8권고를 시작 하십니다. 즉 이러한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인용하신「시편」14장 1절의 말씀을 성 프란치스코가 재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전의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말할 때 성경의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원죄와 여기서 비롯된 개개인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교가 끊어지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내맡겨져 파멸의 구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느님 면전에 올바르고 가치 있고, 타당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요한16,13) 주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12,3).”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확연히 깨달아 알고 있었던 프란치스코는 제1회칙 2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고 최고 선이신 우리 창조주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감미로우시며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인자하식 무죄하식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 회개한 모든 이들과 의로운 모든 이들과 하늘에서 함께 기뻐하는 모든 성도들의 모든 용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의 샘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라고 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모든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왜, 형제를 질투하면 안 되는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창세기」1장 2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다’고 하신 말씀은 곧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의 인간은 하느님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것입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불안전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그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려고 오신 분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하고 거룩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실 때, 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완전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라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공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구원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시켜 그 간격을 메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산다(갈라2,20).”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코는 제8권고 후반부에서 “누구든지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질투하면,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고 권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행이 무언가를 잘해서 얻어진 결과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게 해주시고 좋은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을 도구 삼아 하느님 친히 모든 선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활동하시는 성삼위 하느님의 활동적인 현존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이치를 훤히 꿰뚫어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행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하지 않고, 찬미와 영광을 즉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좋은 결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내가 무엇을 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항상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다’는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우리는 선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형제 자매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분 역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맡겨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신 대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능력이나 은혜를 받은 형제 자매들을 질투하는 것은 마치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가 있는 것처럼 따지는 결과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20,1-19)’를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오전 아홉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각각 포도밭에 와서 일한 품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일꾼들은 나중에 온 일꾼들보다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으나 똑같이 받게 되자 그들은 질투하여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그때 주인은 말하기를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20,13-15)?”하고 대답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포도밭의 품꾼처럼 질투할 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고 따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한평생 성실하게 주님을 섬겼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 따질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내 자신 안에서나 타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선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미하는 일인 것입니다.
4.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은사를 지녔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1코린7,7).” “사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1코린12,18).” 교회의 몸에 딸린 각 지체는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 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 몸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4,16).” 따라서 하느님만이 자선을 베푸시는 자선가이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직분과 능력과 힘을 당신 은총에 따라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가졌다고 불평하며 서로 비교한다면 너무도 인간적이고 저속합니다. 꽃이나 나무들은 서로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꽃은 다른 꽃이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가졌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다른 나무가 자기보다 키가 크고 몸집이 커서 햇빛을 가린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존재 그자체로 만족하며 각자의 본분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시는 ‘내적 가난’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가난한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도구인 자신을 이끄시는 손길에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되이 하느님의 계획과 의향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한 것(마태5,3)”입니다.

5. 질투심을 이겨내기 위하여
 모든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선한 일을 이루시고 말씀하시기 위해 인간을 항상 도구로 쓰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요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주님이 형제 자매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에 대해서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한 좋은 일을 좋은 일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능력과 선행 모두를 그대로 인정하되, 그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때 비로소 참된 가난과 겸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께서 유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이 이 모든 선한 일을 나를 통하여 행하신다’ 고 마음속 깊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교만을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생활이 되도록 좋은 습관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