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죽음의 전주곡과 어매이징 그레이스/류해욱신부

Margaret K 2007. 5. 14. 21:17

 

  죽음의 전주곡과 어매이징 그레이스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 세계는 경악했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한국 국적의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8년 전 제가 미국에서 사목하고 있던 때, 거의 유사한 사건이 고동학교에서 일어났었지요. 그 때의 강론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 사건의 경고를 잊고 8년 후 같은 사건이 재현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당시 제가 본당에서 했던 강론을 나눕니다.


  망연자실. 지난 화요일 덴버 근교 리틀톤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모두 말을 잃게 됩니다. 인간의 광기는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며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주, 콜로라도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저에게 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자연은 하느님의 손길이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그 손길이 사방에 펼쳐져 있는데 인간은 하느님의 손길과 부드러운 응시에 눈을 감아 버립니다. 참으로 어두운 음계로 울린 죽음의 전주곡이 아름다운 콜로라도 주의 하늘을 덮었고 세계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저는 TV를 통해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예배에서 사람들이 어매이징 그레이스 노래를 조용히 부르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제 마음은 하느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보고만 계십니까? 라고 부르짖는데 오히려 가족들과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매이징 그레이스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이 사건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분명 이 사건은 악입니다. 마치 악의 괴수, 사탄이 그 졸개들을 훈련시키는 훈련장을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하느님께 절규해 봅니다. 하느님, 당신이 이런 사건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마가 마치 키를 까불 듯이 제 멋대로 설쳐대도록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그냥 악의 설침에 희생되어야 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저의 이 절규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프시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분명 악이지만 하느님은 악의 결과까지도 은총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사건은 분명 이 시대의 경고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시대의 문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우리 시대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돌아보아야 하고 우리 시대가 가고 있는 방향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을 바꾸는 근본적인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그것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돌아선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어매이징 그레이스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것에 처음에 더 충격이면서도 그 교훈적인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땅은 원래 땅의 주인이었던(실상 땅은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인디언들이 하늘이 주신 자연을 찬미하며 아름다운 삶을 이루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백인들이 함부로 총을 쏘아대면서 갈취하기 전까지는.

  저는 이미 백오십 년 전에 그 유명한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의 편지에서 백인들에게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그 긴 편지 형식의 연설문 전문을 번역한 바 있는데 그 경고에 해당하는 일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대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빵이나 영롱한 구슬과 같은

  사고팔고 빼앗을 수 있는 물건으로 대합니다.

  때문에 굶주린 이리들처럼

  풍요로운 대지를 게걸스레 삼켜버리고

  황무지만 남겨놓습니다.

  백인들은 마치 생존을 위해

  자기의 꼬리를 잘라먹는 뱀과 같습니다.

  꼬리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우리 삶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도시는 마치 대지의 표면에 박힌 수많은 검은 혹처럼 보입니다.

  그대들 백인의 도시의 모습이 우리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봄에 피어나는 잎새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나

  곤충들의 날갯짓 펄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만큼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앞서 나가려고 합니다.

  소음들이 귀청을 뚫습니다.

  산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연못에서 개골거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디언 추장은 땅을 팔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백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판다면

  그 땅에 한때 이곳에 살며 행복했었던 용감한 젊은이들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어머니들과

  총명한 여인들과 귀여운 아이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인디언들의 행복을 빼앗은 소위 건 칼츄어 (총 문화)가 오늘의 비극을 낳은 것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지만 이 사건을 우리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양의 우리인 학교에서 양이 이리로 변하여 양들과 목자들까지 무차별 공격을 퍼부은 이 사건을 우리는 강 건너 동네의 불구경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누구이신 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른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길에서 우리를 이끌며 따라오라고 부추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솔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소,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인간으로 부르시는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소 하면 우리는 먼저 사제성소, 수도 성소를 생각합니다. 요즈음 결혼도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하여 결혼 성소라는 표현을 합니다. 물론 오늘 성소 주일은 수도자와 사제로 부르는 성소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제성소, 수도자로서의 성소, 결혼 성소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도록 성소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 강론에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말씀드렸습니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바오로만 은총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만 이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입니까? 사랑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도 사랑인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 사랑을 향해 흘러

  다시 제게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당신 사랑 안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성소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가? 양떼가 착한 목자의 인도에 따라갈 때만이 양떼 안에, 혹은 양떼의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듯이 우리도 인간 아담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따라 살 때만이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알 수 있는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도둑이며 강도인 자들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부르는 소리처럼 크지도 요란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습니다. 그분에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침잠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고요 가운데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끄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목자와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들로 나가 풀을 뜯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 때만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만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 목자이시며 문이신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 세상 안에서 계속하도록 당신이 손수 뽑으신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어 가르치셨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아 교회를 건설하고 땅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갈 사제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주일을 맞아 그 사제들을 위해,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 나갈 관대한 마음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사제들이 됩니까? 많은 분들이 내 아들은 안 되고 다른 가정의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지요.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우리 가정에서 사제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에서 사제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 공동체에 사제성소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 모든 신자들이 이 지향을 지니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각 기도회와 레지오 마리애 뿌리시디움들도 이 지향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누가 공기를 팔 수 있단 말인가?
                             -시애틀 추장의 노래

     

                                           시애틀 추장의 영감으로
                                             태드 페리(Ted Perry) 지음
                                                          류 해욱 옮김 

 

대지의 한줌의 흙일지라도
나의 사람들에게는 거룩합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솔잎과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
어두운 숲 속을 휘감는 안개와
때로는 맑게, 때로는 소곤대는
숲 속의 곤충들도
나의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 안에서
성스럽습니다.

나무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숲 속의 길이
붉은 사람들의 기억을 실어 나릅니다.
백인들은 죽음의 사자와 함께 별들을 걸을 때면
그들이 태어난 땅을 잊겠지만
우리는 죽음의 계곡을 걸으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않나니
땅은 우리 붉은 사람들의 어머니인 까닭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육신을 거둔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대지를 휘감아 도는 강과
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들판과
바람이 밀어내는 연못의 반짝이는 물결,
화려한 색깔의 새들을 사랑하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이며
대지 또한 우리의 분신입니다.
향기를 내뿜는 꽃들이 우리의 자매이며
사슴과 말과 독수리가 우리의 형제입니다.
산꼭대기에 솟아있는 바위
초원을 가로지르는 시내
발정으로 달아오른 조랑말과 더불어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입니다.

하여 그대 워싱톤의 추장이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을 때
그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시애들의 추장은
그대가 지니고 있는 생각을 헤아려봅니다.
마치 백인형제들이
계절의 순환을 헤아리는 것만큼 분명하게.
나의 말은 마치 별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대 워싱톤의 추장은
우정과 선의가 담긴 전갈을 보냅니다.
친절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의 제안을 숙고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지는 우리의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숲 속과 춤추는 시냇가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시내를 흐르는 물은
물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피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대에게 땅을 판다면
그대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땅이 우리에게 거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야합니다
이 땅이 거룩하다는 것을.

호수의 맑은 물에 투영되어 있는
모습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삶을 스쳤던 사건과 기억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재잘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는
선조들이 들려주는 음성이며
형제인 강들은
부드러운 팔로 우리의 카누를 띄어줍니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대는 기억하여야 하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강은 우리의 자매이며
땅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을.
하여 그대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똑같은 친절로서 강을 대해야 합니다.



시애틀 추장의 노래-2


나 시애틀의 추장은
그대 워싱톤의 추장이 보낸 제안을 고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숙고할 것입니다.
우리 붉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백인들 앞에서
늘 뒤로 물러났습니다.
마치 떠오른 아침햇살 앞에서
산기슭에 머물던 안개가 달아나듯이.

우리에게 우리 선조들의 유골은 거룩합니다.
언덕과 나무들과 더불어
그들의 무덤은 거룩합니다.

백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대지의 어느 부분은 특별하다는 것을.
그들에게는
대지의 어느 한 부분도
단지 옆에 있는 다른 부분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대지로부터 가져가기 위해
밤에 나타나는 배회자일 뿐입니다.
대지는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쟁취하고 짓밟고는 떠납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무덤을 두고 떠나며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하여 선조들의 무덤과
아이들의 생득권은 잊혀집니다.

그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빵이나 영롱한 구슬과 같은
사고팔고 빼앗을 수 있는 물건으로 대합니다.
하여 굶주린 이리들처럼
풍요로운 대지를 게걸스레 삼켜버리고
황무지만 남겨놓습니다.

백인들은
마치 생존을 위해
자기의 꼬리를 잘라먹는 뱀과 같습니다.
꼬리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그대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도시는 마치
대지의 표면에 박힌 수많은 검은 혹처럼 보입니다.
그대들 백인의 도시의 모습이 우리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눈을 찌르는 햇살처럼.

백인들의 도시에는
봄에 피어나는 잎새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나
곤충들의 날갯짓 퍼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만큼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은 항상 앞서나가려고 합니다.
소음들이 귀청을 뚫습니다.
산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연못에서 개골거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붉은 사람이라 알지 못합니다.
나는 연못을 가로질러 달리는 바람과
한낮의 소낙비가 씻어준
바람의 싱그러운 내음새를 좋아합니다.

공기는 우리 붉은 사람들에게 소중합니다.
짐승과 나무들과 인간 모두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쉬는 까닭입니다.
백인들은 그들이 숨쉬는
공기가 오염되는 것을 개의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병상에 있던 사람들처럼
그들은 냄새에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대는 공기가 우리에게
그리고 나무와 짐승들에게도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람은 인간에게 첫 숨결을 주고
마지막 숨을 받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대에게 땅을 판다면
그대는 초원의 한 곳을 떼어
성스러운 곳으로 삼아
들꽃들의 향기를 맡으러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3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의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그대들 백인들도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로서 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들었습니다.

대초원에 수많은 버펄로들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지나가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아 죽인 것입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짐승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우리는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살생을 합니다.

우리가 그대에게 땅을 판다면

그대들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짐승이 없는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땅속에 사는 벌레조차도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

인간이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합니다.

만약 모든 짐승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도 외로움 속에서 죽어갈 것입니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기를 호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 독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 결정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지금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의 무덤가를 거닐 권리를 지녀야 합니다.

백인들이 그들 무덤의 신성함을 더럽혀서도 안 됩니다.


쏟아지는 햇빛과

내리는 비를 맞을 수 있도록

무덤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물은 푸른 새싹 위로 부드럽게 떨어질 것이며

우리 조상들의 마른 입술을 촉촉이 적셔 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그대에게 판다면

그대는 그대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딛고 있는 발아래의 땅이

우리가 걸을 때 더 사랑스럽게 응답한다는 것을.

그것은 우리의 삶과 더불어 땅이 풍요로워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십시오.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땅의 아들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만약 사람이 땅에 침을 뱉는다면

땅도 사람에게 침을 뱉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땅이 백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백인이 땅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가족을 묶어주는 핏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뱀들을 죽인다면

들쥐가 번식하여 우리의 곡식을 망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땅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땅의 아들과 딸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인간이 인생이라는 올을 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그 안에서 하나의 실날일 따름입니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4



낮과 밤이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백인들이 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나의 사람들이 내게 묻습니다.

그 생각이 우리에게는 생소한 까닭입니다.


어떻게 그대는 하늘을 사고 팔 수 있으며

땅의 따뜻함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붉은 사람이 한 장의 종이에 사인을 하여

그것을 그대 백인에게 주었기 때문에

땅이 이제 그대의 것이라서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공기의 맑음과

물의 반짝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대는 그것을 우리에게서 사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언젠가 스러져버릴 힘을 믿고

백인들은 자신들을 신들로 생각합니다.

어머니인 땅과

누이인 강과

형제인 붉은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할 수 있는 신이라고.

그러나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와 형제를 사고파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나무를 태우듯 자기의 아이들을 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낮과 밤이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제의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며

나의 사람들이 그대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대가 제공하는 보호지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부족이란 인간이 만든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왔다가 갑니다.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백인들도 역시 사라져 갈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모든 종족보다 먼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들이 만든 오염 속에서 질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

그들을 이 땅에 데려다 준

그리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이 땅을 지배하게 해 주신

신의 힘으로 불타올라

그들은 환히 빛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운명이 우리에게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펄로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때

야생마들이 길들여질 때

숲 속의 비밀스러운 모퉁이들이

사람들의 자국으로 더럽혀질 때

곡식이 익어가는 언덕의 시야를

전선들로 가릴 때

생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숲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대에게 우리의 땅을 판다면

그 땅은 한때 이곳에 살며 행복했었던

용감한 젊은이들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어머니들과

총명한 여인들과

귀여운 아이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대들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걷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 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대들이 만약 산과 강과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홀로 외로움 속에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때에

땅은 그런 일들을 당할 것입니다.

땅을 사랑하는 우리의 죽은 영혼들은 

더 이상 다시 돌아와

그들이 사랑하던 것들을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들 백인들은

눈을 찌르는 한낮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혹독한 외로움 속에서

그들 자신들이 만든 황무지를 걷게 될 것입니다.


백인들의 신은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짐승과 숲과

붉은 사람들을 지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우리 붉은 사람들에게는 신비입니다.


만약 우리가 백인들이 꾸는 꿈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긴긴 겨울밤 아이들에게 심어준 희망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내일을 향한 눈동자 위에 타오르는

그네들의 열망들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우리가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꿈은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꿈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길을 걸을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우리의 땅을 팔라는 그대의 제의를 고려할 것입니다.

우리가 합의를 한다면

그대가 약속을 한 보호구역을 보장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

짧은 날들을 살게 될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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