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Margaret K 2021. 8. 24. 07:45

2021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분으로, 갈릴래아의 카나 출신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5-51)

 

"Do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 특별히 묵상하고 싶은 것은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물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초대합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시자 “나를 따라라.”(요한 1,43) 하고 부르십니다. 필립보는 곧바로 나타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주인공인 메시아를 만났고, 그 사람이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자 작은 시골 마을 카나 출신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며 얕잡아 보고 의심합니다. 사실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타나엘은 “와서 보시오.”라는 필립보의 초대에 응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편견, 생각의 틀을 버리고 나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 구조는 방이 하나여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나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고자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자기 생각의 틀과 편견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는 편견, 내 생각의 틀은 무엇일까요? 나의 기도는 그렇게 만들어진 나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인가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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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0일(금) 저녁에 아버님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가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힘들게 눈을 뜨시고 저와 눈을 마주쳐주셨고, 성호를 긋고 싶으신지 손을 움직이시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좋아보이는 모습에 좀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지만, 다음날 저녁 8시 47분에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작년 어머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시고, 16개월만에 아버님께서도 하늘나라에 가시니 서운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상에 조문해주셔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셨고, 많은 기도를 해주셨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더 열심히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힙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아실 것입니다. 사상을 탄압한 사건으로 실용 서적 외의 모든 책을 태우고,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었지요. 왜 진시황제는 책을 태우고 공부하는 유생을 죽였을까요?

사람들이 독자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찌 히틀러 역시 책을 태웠고,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에도 금서가 있어서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인류 역사 안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꿈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지배자는 그래서 책을 태우고 읽지 못하게 했으며, 꿈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제거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을까요? 또 사람들 모두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를 통해서 함께 성장할 기회를 찾았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던 지도자들은 역사 안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필립보를 향해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렸고, 그 열린 마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권능은 우리 삶 안에서도 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필립보의 말, “와서 보시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보러 갔기 때문에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볼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힘으로 누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로 사랑으로 감싸 안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함께 할 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메리 엘리노어 윌킨스 프리먼).

독이 되는 부모

독이 되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
2.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
3. 아이를 조정하는 부모.
4.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5.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6. 술에 중독된 부모.

이러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 반복적으로 잘못된 연애에 얽히거나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자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훌륭하게 성장하는 자녀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바로 올바른 사회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되지 않을까요?

 이런사람 꼭 옆에 두세요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던 바르톨로메오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인물이었습니다. 필립보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는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며 그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하자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거짓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가 거짓말의 상징임으로 자신은 모든 것에서 진실하여야 함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 묵상을 예수님께서 마음까지 들여다보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르톨로메오도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곁에서 배워 결국엔 피부가 다 벗겨지는 고문을 이기고 사도로서 위대한 성인이 되셨습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곁에 두지 않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엔 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내 곁에 두어야겠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겠습니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며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인정해주는 사람이란 누구겠습니까?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한 독일인 부부가 서른 곳의 병원에 다니고도 절망에 빠져 벤 카슨이란 흑인 의사를 찾아옵니다. 그 부부는 요한과 슈테판이란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 수술을 성공시킨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기를 낳고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아기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견디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두 명의 아기가 다 살기를 원했습니다.

    벤 카슨은 수술 중 과다출혈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아기들 몸 안엔 수술 시간을 버틸 충분한 혈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벤은 시도해보기로 합니다. 물론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흑인 아이가 멀리 독일에서 의뢰가 들어올 만큼 신경외과의 세계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을까요? 아버지 없이 자란 벤은 공부도 아주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었지만 남의 집 청소를 하고 남의 애를 봐주면서 자녀를 잘 돌볼 충분한 시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벤에게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넌 똑똑한 아이야. 다만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 넌 최고야.”

 

    엄마가 하루에도 수백 번 이렇게 말해주는 데에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도 그런 마음이었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고 하지 않고 대학교수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책을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가 믿어주는 것 때문에 어머니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벤은 전교 1등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인종차별이 심할 때여서 상을 받는데도 선생님들은 아버지도 없고 흑인인 벤도 하는데 백인인 너희들은 왜 못하냐며 오히려 벤 앞에서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인턴 때도 흑인이기에 그의 의견은 무시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의사들이 모두 콘퍼런스에 갔을 때 폐엽 절제술을 해야만 하는 응급수술 환자가 들어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격도 없는 그는 수술을 진행하고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의 의사 생활은 거기서 끝났겠지만 숙련된 전문의들도 후유증을 남기기 쉬운 어려운 수술을 인턴이 해낸 것에 모든 의사가 놀랍니다. 

 

    그리고 아내의 유산으로 그는 아이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합니다. 그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33세에 존스 홉킨스 최연소 신경외과장이 됩니다. 그렇게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 수술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도 어머니가 도움을 줍니다.

    “샴쌍둥이 수술 때문에 걱정하니? 넌 할 수 있어.”

  

    그때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수도꼭지처럼 심장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피가 돌지 않아도 뇌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시간 동안 심장을 멈추고 머리를 분리하고 피가 새는 혈관들을 막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벤이 매일 기도를 한다는 한 마디에 부모도 그 수술에 동의합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22시간이 걸린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성공시킵니다.

    수술을 마치고 나와 걱정하는 부모에게 “어느 애부터 보시겠어요?”라고 말할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이후로도 벤 카슨은 엄청난 업적들을 이뤄내며 나이가 들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쟁자가 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영화 제목은 ‘타고난 재능: 벤 카슨 스토리’(2009)이지만 과연 타고난 재능이었을까요? 그에게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그만큼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나를 알아준다는 말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 곧 신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옆에 두십시오.

    벤 카슨은 10달러 지폐에 들어갈 위인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넌 할 수 있다.”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하며 그를 믿어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정받는 만큼 성장합니다. 바르톨로메오에게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곁에는 헛된 꿈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애초부터 그런 꿈은 꾸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사람을 곁에 두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을 옆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다가 누군가 “그런 생각은 교만한 거야.”라고 말해버리면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주려면 나도 분명 그런 사람을 곁에 두었더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화과나무 밑에서 생각이나 하던 한 사람을 알아주셔서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의 기도 꺾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건 교만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장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내가 옆에 두는 사람이 곧 나의 믿음입니다.

 -조재형신부-


요즘은 검색의 시대라고 합니다예전에는 읽고생각하고판단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요즘은 읽기 전에 검색하고생각하기 전에 검색하고판단하는 대신에 검색합니다검색이 쉽고빠르기 때문입니다인터넷이라는 공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모여 있습니다저도 책을 읽으면서 관련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을 하곤 합니다.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이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이야기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검색합니다전 세계 코로나 현황도 실시간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대한민국의 백신 접종 현황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여행가서 머물 장소도 검색을 통해서 알아 볼 수 있고예약도 할 수 있습니다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저는 검색의 시대에는 아직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검색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서울대교구는 98년부터 굿뉴스를 통하여 다양한 신앙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비대면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즘굿뉴스는 신앙에 목마른 분들에게영성의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소중한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가톨릭정보자료실갤러리게시판 등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분당 요한 성당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였습니다그곳에서 본당의 다양한 모습과 본당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가톨릭평화방송은 팬데믹 시대에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미사를 방송과 유트브를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비록 성체를 모시지는 못하지만 방송미사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위로를 받았습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면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신부님들의 인사이동에도 검색은 함께 합니다신자 분들은 검색을 통해서 아직 오지 않은 신부님에 대해서 이미 알기 시작합니다.

 

검색의 시대가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습니다정치인연예인유명인들은 본의 아니게 정보가 노출되기 마련입니다지금은 잊어버린 일들도 검색의 장소에는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젊은 시절에 했던 실수와 허물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상이 공개되기도 합니다수입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비방과 원색적인 내용을 검색의 공간에 올리기도 합니다잘못된 정보왜곡된 정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확증 편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자기가 믿는 것만 검색하려 합니다자기가 검색하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이런 경우 검색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검색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밝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검색을 통해서 옥석(玉石)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검색을 이야기합니다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마귀를 쫓아내고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견디어냈고목숨까지 바쳤습니다그런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그렇습니다신앙은 나의 행위와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회개하고뉘우치는 이들의 허물은 묻지 않으십니다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를 받아 주시며하느님의 도성에 그 이름을 기록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양승국신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전교(傳敎)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전교 대상자를 정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혹시라도 단칼에 거절당하면 어쩌지?’ ‘나도 잘 못사는 주제에 전교는 무슨?’하는 마음에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웃 전교에는 큰 용기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타나엘의 완강한 거부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나타나엘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함께 가자는 필립보 사도의 초대 앞에 나타나엘이 보인 반응은 냉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장 46절) 

 

제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나타나엘의 그런 반응 앞에 즉시 위축되어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 사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끝까지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안내한 필립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지혜와 은총으로 가득한 전무후무한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행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필립보 사도의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초대 앞에 나타나엘은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께로 삶의 방향을 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마지막 카드인 ‘와서 보시오’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과감히 떨치고 사람들에게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한번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어렵사리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왔지만, 정작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보다 큰 낭패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앞서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문턱이 낮은 공동체, 그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꿰뚫어 보아야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와서 보시오.>

 -송영진신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나타나엘이(바르톨로메오 사도가) 필립보 사도를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필립보 사도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 사도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필립보 사도의 말이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믿지 못하면 남을 믿게 만들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도들의 말을 토마스 사도가 믿지 못한

일을(요한 20,25)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일은 토마스 사도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사도들의 증언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만난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마태 28,17).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증언은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 사도는 이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요한 1,43).

따라서 필립보 사도의 말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단순한 증언이 아니라,

“나는 메시아를 만났고,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증언입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는 말은,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이신 분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와서 보시오.”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의 권고입니다.

이 말도 자신의 믿음을(확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분이 정말로 메시아인지를 의심했지만,

필립보 사도의 확신에 감화되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메시아 예언과 관련해서 나자렛이 언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해서 언급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미카 5,1).

우리는 그 예언 그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나자렛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셨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의 반응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의 면전에서 하신 말씀이고, 따라서 이 말씀은

“너는 진실한 신앙인이구나.” 라고 칭찬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율법학자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신앙인’도 있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당시에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나온 표현인데, 뜻은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 강생을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입니다.

(“메시아 강생을 희망하는 너의 간절한 심정을 내가 알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앞의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필립보가 너를 데리고 오기 전에) 나는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다.”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러면 “필립보가 너를 부른 것은

사실은 필립보를 통해서 내가 너를 부른 것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라,

또 필립보 사도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타나엘이 응답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를 따라라.” 라고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없고,

나타나엘이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말도 없지만,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 속에

그를 제자로 부르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부른 나타나엘의 말에

응답의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당신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 즉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콜로 1,15; 히브 1,3).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함께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요한 17,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욱현시눕-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는 평을 들었던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였다고 전해지며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음: 요한 1,45-51: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절).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즉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한상우신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된다.

신앙과 삶은
거짓이 없는
진실함에서
출발한다.

주님께서는
거짓이 없는
바르톨로메오를
정확하게
알아보신다.

진실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삶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하느님 안에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삶이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거짓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는 없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진실이
무너지면
다른 가치들도
자연스레
무너진다.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은
참된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거짓을
용기있게
내려놓는
것이다.

진실을 만나는
기쁨이다.

진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진짜 우리
자신을
만나게하는
복음의
시작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이 넘치는 어느 만남을 보여 주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필립보의 권유로 당신을 만나러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피조물을 보고 기뻐하시는 창조주의 탄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전형을 보십니다.

"거짓이 없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느님 백성이 되어기기 위해 지켜야 할 지침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머니 배 속에서 지음 받을 때부터 존재의 뼛속까지 하느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께는 숨겨진 것도 감추인 것도 하나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무엇보다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당신의 뜻을 찾는 충실한 자녀이기를 바라십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일상의 중요한 순간을 떼어 하느님 앞에 머무르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삶의 많은 부분을 일로 보내는 이도 있고 돈 버는 데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요. 떠들썩한 유흥과 어울릴 사람을 찾는 이도 있고요. 그 중에는 성실하게 진리를 찾고 말씀에 머무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맑은 신부다움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에 나타나엘이 화답합니다. 그 역시 기쁨에 차서 외칩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를 만난 기쁨입니다. 그 역시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구원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는 예언에  묶여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이 못내 미심쩍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확신에 차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메시아를 고대하며 영적 스승을 찾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행동은 새로운 충격과 각성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시작도 못 했지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실 하늘 나라의 실체는 그들의 기대나 바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묵시 21,10-11)
천사가 묵시록 저자에게 보여 주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제 지역이나 공간적 개념을 넘어 하느님께서 친히 머무르시는 영원한 거처, 바로 교회인 우리 자신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의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공들여 묘사합니다. 매우 값진 보석같은 광채는 그 고귀함과 거룩함을, 수정처럼 맑은 빛은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함을 드러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예견했듯,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습입니다.(에페 5,27 참조)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열두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초석입니다. 초석은 기둥과 땅을 연결하는 주춧돌로, 기둥에서 전해지는 무게를 땅에 고루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지요. 신부인 교회의 신앙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도들 위에 단단히 세워졌습니다. 사도들 위로 긴밀히 쌓아올려진 교회는 그래서 아름답고 진실되며 굳건합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마주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알아보시며 무어라 감탄하고 탄성을 올리실지요? 그분은 우리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 기억하실까요? 또 그때 우리는 이 지상 삶에서 그토록 그리던 주님께 무어라 사랑과 믿음을 고백할까요?

어쩌면 그분께 숨겨진 것 하나 없는 처지에 부끄럽고 송구하고 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주님은 그조차 넉넉히 받아 안아 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떠올리는 오늘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그렇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나누기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진골에서 성골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