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너희는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다.
(마태 23,27-32)
you are the children of those
who murdered the prophe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는, 겉은 아름다워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은(마태 23,25.27 참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다고,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그래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창세 2,7)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숨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고 또한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육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마음은 주는 마음이고, 육에서 온 마음은 받는 마음입니다. 주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기쁨에 넘치고 또한 살리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받는 마음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기에 늘 불안과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분노하게 되고 큰 상처로 남습니다. 이 마음은 죽이는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는 마음이 살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는 마음보다는 받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그 받고 싶은 마음이 커져 탐욕과 방종으로 발전하고 끝내 불법을 저지르고 위선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 이 비참함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순간부터 안경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안경원을 찾아갔더니 저를 담당하는 안경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요. 눈이 좋아지셨어요. 그런데 나쁜 소식도 있는데요. 눈의 노화가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점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다초점렌즈를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초점렌즈가 일반렌즈보다 비싼데, 여기에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압축까지 해야 하니 렌즈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아 불편해도 안경 교체를 미뤄왔던 것입니다.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안경이 바로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안경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랑의 실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삶만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행선언의 주인공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가장 올바르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가장 더러운 죄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들어도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서 더 큰 악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모든 세대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내세운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은 각종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신 “불행하여라”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과거 위선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가장 중요한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딱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꼰대처럼 늙지 않는 1,2,3,4,5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창의 경영연구소의 조관일 대표가 이야기한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부러 자주 웃어라.
웃는 얼굴이 매력 있는 노년의 첫걸음입니다.
2)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마라.
성숙하게 나이 든다는 것은 이해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3) 삼가라, 품격 없는 짓!
나이가 들수록 매너를 지켜야 합니다.
4) 사랑으로 충만하라.
옛추억에 사로잡혀 폼만 잡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합니다.
5) 오늘을 즐겨라.
오늘은 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월이 오늘의 하루를 탄생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오늘을 즐기십시오.
다섯 가지 법칙의 앞 글자를 따서 1,2,3,4,5 법칙이었습니다. 꼰대처럼 늙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이 법칙과 반대로 살면서 꼰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내 안에 족보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속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바로 조상들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적으로 착한 척하지 말고 빨리 자신들이 섬기는 조상들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마태오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지 못하면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조상이 되셔서 사람들이 온전히 당신 자손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처럼 모든 삶을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선조도 전갈이고 자신도 전갈인 것입니다.
만약 이 전갈이 정말 개구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신의 조상이 개구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기 전에는 그런 일은 불가합니다. 그냥 믿으려고만 해서는 조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상이 그에게 자신들이 선조라는 것을 믿게 하려고 주었던 ‘사랑과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엠빅뉴스’에 ‘개 젖 먹는 까치, 울음소리도 멍멍?’이라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호주 퀸즐랜드주 줄리엣 웰스라는 여성은 2020년 9월 어미에게 버려져 죽어가는 아기 까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줄리엣은 까치에게 ‘몰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동물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성껏 돌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반려견 페기 역시 엄마처럼 몰리 옆을 꼭 지켰는데, 일주일 만에 건강을 회복한 몰리는 숲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을 개라고 생각한 듯 개처럼 달리고 개처럼 짖어댔습니다. 함께 인형 놀이도 하고 누워서 장난도 치며 서로를 끔찍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페기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를 낳아본 적이 없는 페기의 몸에서 젖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몰리는 페기의 젖꼭지를 쪼아대며 젖을 먹었습니다. 동물병원 전문의는 “강아지도 까치를 자기 새끼로 여기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몰리는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면 페기처럼 짖어 페기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둘은 하루 종을 껴안고 놉니다.
몰리는 까치들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페기는 다른 개와 함께 새끼를 낳을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몰리는 다시 까치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미로부터 버려져 새로운 족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도 각자 족보가 있고 그 족보대로 살아갑니다. 마태오가 족보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괜히 나의 조상을 원숭이, 혹은 인간이라고 하지 맙시다. 나의 조상이 나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조상은 그리스도이고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이 족보에 들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사랑의 소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한 보통 사람이 머리를 다쳐서 자기가 사이코패스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이코패스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다시 머리를 다쳐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인은 조상입니다. 내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믿음이 나를 만들 뿐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내가 믿는 조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살게 됩니다. 하늘에 영광을 얻으려거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느님을 첫 조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성체 성혈로 그리스도께서 묻힌 무덤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직장에서 존경 받는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상사가 존경을 받을까요?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회사의 실적은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직장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사의 뒤를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매일 일찍 출근하면 직원들도 일찍 출근해야 합니다. 상사가 청렴하면 직원들도 청렴해야 합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피곤합니다. 일의 방향이 자주 바뀌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산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의 몸은 편하지만 회사에서 눈총을 받기 쉽습니다. 다른 부서에 비해서 성과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서는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몸도 마음도 편할 것입니다. 부서는 늘 일정한 성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발을 할 시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알아야 할 지식을 다룬 책입니다.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입니다.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면서 ‘목민심서’의 내용은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특히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라는 내용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서 충실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이른바 삯꾼들,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거짓 지도자들이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으니, 입으로는 사랑이니 봉사니 거품을 물며 외쳐대지만,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궂은 일 한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론대 위에서는 갖은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구체적인 삶은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가르침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 겉과 속에 철저히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그들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과부들의 궁핍함을 덜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등쳐먹고 호의호식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타하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런 면에서 ‘목자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가 보여준 표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구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석상에서 명확히 밝히기까지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테살로니카 1서 2장 9절)
바오로 사도는 그 부담스럽고 바쁜 복음 선포의 길에서도 신자들에게 손톱만큼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천막 짜는 일을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곳 저 곳 젖먹이 같은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밤늦도록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가는 곳마다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달려드는 적대자들과 맞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온몸은 파김치처럼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동료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고생 많다며 한잔 가득 포도주를 따라주며 회포를 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기도했으며,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테살로니카 1서 2장 10절)

실속있는 것은 알맹입니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로 표현합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위선자는 겉모습으로는 본래의 인격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위선자’,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저절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가면을 쓰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화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습관적이고 피상적인 머리의 신앙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삶이 시작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실속이 있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 진실하여 주님의 마음에 들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칠한 무덤>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이라는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게(깨끗하게)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 때에 처벌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하얗게 회칠을 한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일이
아니라,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 표시는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 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의 원래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표현은
위선자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회칠을 하는 관습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를 것이고, 하얗게 칠해져 있는 것만 보면서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회칠한 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여기서 ‘회칠한 벽’이라는 말은, ‘회칠한 무덤의 벽’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나는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죄를 지은 적 없다.”,
즉 “나는 무죄다.” 라는 뜻의 자기 변론입니다.
그런데 대사제는 바오로 사도가 감히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뻔뻔하게도’ 자기는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위선자의 말로 판단해서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입으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향해서 ‘회칠한 벽 같은 자’ 라고 말한 것은,
대사제가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일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대사제처럼,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는 누가 위선자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위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가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에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아스라는 이름의 대사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를 향해서 ‘회칠한 벽 같은 자’ 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가 위선자였나 보다.’ 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선자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위선자가 아닌데도 위선자라고 오해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말했습니다(마태 27,63).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언행이 위선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
이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묻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옛날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공경하는 척 하는 것일 뿐이고, ‘위선’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미 살해당했고,
예수님도 박해를 받는 중이었고,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라는 말씀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일을 행함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완전히 채우게 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여서 죄를 가득 채우라는 뜻인데,
‘역설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이 덜 채운 죄를 완전히 채워라.”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뜻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조상들이 했던 그런 짓은 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면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신 것은, 협박이나 으름장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아라.” 라는 호소입니다.
위선자라도 자기의 위선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그러니 회개할 이유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회개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사람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뒤에는,
그렇게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마태 23,37-39).

복음: 마태 23,27-32: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선이 아니다. 죽은 뼈들과 같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의로움이며, 전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다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이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을 욕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기질은 의도를 숨기려 해도, 아무리 가장을 해도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가 안팎으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혹독히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백성들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예와 잇권을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솔선해 지키면서 내면부터 차곡차곡 정의와 사랑의 덕을 채워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롭게 되려고 하기보다 의롭게 보이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왔지요. 그런 이들 손에 쥐어준 율법은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단죄와 심판, 소외의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르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1테살 2,10)
바리사이였던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길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자 신분이 보장하는 명성이나, 허세, 겉꾸밈, 명예 따위를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께만 올인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겉과 속이 일치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알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의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타인에게 충고는 잘 하면서 자신의 편협한 마음 하나 건사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의롭고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인지 자문하면서 부끄러움과 자괴감 사이를 오가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겉과 속의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안내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열쇠는 바로 "말씀"입니다. 전해 받은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머물면 차츰 그 말씀으로 물들어 가지요. 말씀이신 분의 인격을 닮아가고 말씀께서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이 내가 되고 내가 말씀이 되는 일치로 나아가면, 내면에 차오른 말씀이 나의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그러면 겉과 속이 점점 같아지게 되겠지요.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1테살 2,13)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가 걷고 있는 저마다의 인생길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닮아가는 순례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화되고 성화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변형의 도가니이고 용광로이니 녹록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으로도 사랑하고, 말에도 사랑을 담으며, 행동으로 사랑을 증거하는 찐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시공간인 셈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서슬 퍼런 꾸지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아듣고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면에 말씀을 품고 머물러 안팎 모두 참 그리스도인으로 영글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칸들은 성 루도비코 9세 임금 기념일을 지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준 찐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를 기리며 주보 축일을 지내는 모든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성 루도비코 9세 성왕에 대해서

말씀 나누기 - 연중 21주 수요일-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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