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8. 26. 06:49

2021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마태오 24,42~51)

 

 "Stay awake!
For you do not know on which day your Lord will come.
Be sure of this: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the hour of night when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have stayed awa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떨리는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렇게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흔들림 사이에서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생생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방황과 고통의 시간을 겪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낭비라 생각할 뿐 아니라 억울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과 결점을 통하여 오히려 일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하느님 안에서는 이 약점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바람 속 나뭇가지의 떨림처럼 우리는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악(惡)을 선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다시 희망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릴 때 인간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나 자신도 갈팡질팡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른 이를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언제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식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 경험한 일들 안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을 곱씹어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아버지 하느님께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그 감정이나 행동의 뿌리를 볼 수 있고 정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의식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데도, 즉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죽음이 마치 커다란 불행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를 물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둘러쌓여 기도받으며 죽는 것을 원합니다. 그에 반해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은 ‘고독사’라고 하더군요. 죽었음에도 아무도 찾지 않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을 제일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외로움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요? 우울증 환자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외로움의 공포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로움과 죽음을 뛰어넘어 다른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죽음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성인·성녀들이 직접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공포가 아닌 희망으로 보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과 더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 있으면 될까요? 아무런 생각 없이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깨어만 있으면 괜찮은 것일까요? 주인이 늦게 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집을 비워놓고 있는 것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어 준비한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면서 단지 깨어만 있다고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논문을 싼 사람이 행복하다면 앎을 뛰어넘어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일들이 참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깨어 준비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될 것 같다고 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인생이 굴러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일 때, 가장 힘이 세다(강송희).

당신이 없는 불행을 택하겠어요.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은 퇴임 후 5년이 지난 1994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레이건은 몇 시간 동안 갈퀴로 수영장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긁어모아 깨끗하게 청소하면서 너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 아내 낸시 여사는 이 행복해하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어서, 밤에는 수영장에 낙엽을 깔고 아침에 남편에게 “여보, 수영장에 낙엽이 가득 쌓였어요. 이것 좀 청소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레이건은 이를 다시 깨끗이 치우며 기뻐했지요.

레이건과 낸시 여사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사랑의 힘이 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레이건은 기억력을 잃었지만, 아내 낸시만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이건은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자 낸시 여사는 레이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있다면 좋아요. 당신이 없는 행복보다 당신이 있는 불행을 택하겠어요. 부디 이대로라도 좋으니 10년만 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으로 나의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다목적 댐처럼: 기쁨의 발전기를 수시로 점검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음’이란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인지 살피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지금 어떤 느낌일까요? 기쁠 것입니다. 사랑하면 항상 기쁩니다. 하느님께서 기쁨 자체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만약 사랑을 실천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분명 다른 기쁨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는 사랑이 아님을 증명할 것입니다.

     

    다목적 댐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람은 댐처럼 아래로 사랑을 전해주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전기가 생성됩니다. 그것처럼 그냥 사랑을 내어주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만약 전기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내려보낸 물을 받는 것들에게서 자신의 기쁨을 뽑아내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고장 난 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최광현 작가의 『가족의 두 얼굴』에 나오는 사례들입니다.

     진혁 씨는 상담을 하며 자신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혁 씨의 아버지는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했지만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공부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었고, 주위에서도 공부만 했었다면 분명 합격했을 것이란 말을 합니다.

    진혁 씨는 셋째였는데, 아버지는 진혁 씨를 임신했을 때 왕관을 받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진혁 씨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아들로 여겼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혁 씨도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고시 공부에 지친 진혁 씨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다시 시도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진혁 씨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또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 죄책감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저 맛있는 물고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깨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앞에 가서 자신은 셋째를 가장 사랑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나야합니다.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연화 씨는 가족의 무게를 항상 등에 업고 다니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4남매의 장녀로서 술과 도박, 친구들을 너무 좋아해 언제나 집 밖으로 나도는 무능한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건강을 잃어버린 어머니 때문에 연화 씨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화 씨의 고생은 교육대학을 나와 선생님이 되고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동생들이 뚜렷한 직장을 잡지 못해 수입이 변변찮았기 때문입니다. 남편 눈치를 보면서 부모의 치료비를 대며 친정을 돌보느라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자기를 위한 옷 한 벌을 제대로 산 적이 없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이젠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하지만 연화 씨는 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젠 제 자신을 멈출 수 없어요. 제가 없으면 친정 식구들이 다 무너지지 않을까 너무나 불안해지는걸요.”

     

    연화 씨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 자체로 기쁨의 보상이 있습니다. 연화씨는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형제들의 인정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보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인정받기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중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사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보상이 있습니다. 힘들면 사랑도 멈추어야합니다.

     

    대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는 남자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남자에게 주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의 자취방에 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며 사랑하는 남자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여자가 먼저 취직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취업이 되지 않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진출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였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비를 대고 헌신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남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여자는 이제 고생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는 남자로부터 그만 헤어지자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왜 여자를 떠나려 했었던 것일까요? 여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빚을 아주 많이 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빚을 떠안고 결혼해서 평생을 갚아나가야 할 부담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나쁜 놈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무작정 잘해준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떠나가게 하고 싶다면 한없이 잘해주어라.”라는 말도 있듯, 잘해주면서도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갖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내가 더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사랑하는 데서 충분한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랑을 하면서 ‘내 사랑이 사랑이 맞나?’를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가짜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으로 기쁜가?”입니다. 사랑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전기가 생성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는데 우울하다, 그래서 다른 보상을 원한다, 하는 것은 본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 내가 고통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누가 보답을 바라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으로 기뻐야 하는데, 오늘 복음처럼 먹고 마시고 때리는 등의 또 다른 기쁨을 찾는다면 그것이 깨어있지 않은 삶입니다. 양식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기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데 힘들다면, 그래서 다른 보상을 찾는다면 당장 멈추십시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기쁨이 생성되도록 고장 난 발전기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댐과 같습니다.

 -조재형신부-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Consuetudo est altera natura.)’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신학교 라틴어 시간에 배웠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납니다. ‘우리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는 3가지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키보드나 마우스를 통해서 입력(질문)합니다. CPU(중앙처리 장치)에서 계산()합니다모니터를 통해서 답을 찾습니다컴퓨터는 우리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하기 마련입니다질문이 틀리면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제가 함께 했던 복음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사랑하면 사랑 할 일이 생깁니다기뻐하면 기뻐 할 일이 생깁니다원망하면 원망 할 일이 생깁니다미워하면 미워 할 일이 생깁니다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있습니다능력재능업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그러나 좋은 습관은 누구나 얻을 수 있습니다이것은 경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하였습니다원칙이 있는 사람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사람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사람더 큰 결실을 추구하는 사람먼저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사람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입니다친구들과 호기심에 담배를 배웠습니다그때는 어른이 되면 당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곧 어른이 되니 미리 배워보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그때는 버스에서도비행기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매점을 운영했는데 매점의 주 수입원도 담배였습니다쉬는 시간에는 강의실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15년간 담배를 피우던 1995년입니다본당 청년이 은단을 주면서 담배를 끊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당시 사순시기였기에 저는 사순시기 동안은 금연하기로 했습니다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순시기가 끝났어도 계속 금연할 수 있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금연하고 있습니다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청년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5년 전인 1996년 저는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주교님께서 미국에 가서 교포사목을 하고공부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저는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도 배우면서 미국에 갈 준비를 했으면 좋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송별회를 이유로 매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습니다나중에 주교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셨고미국에 가는 것도 취소하셨습니다저는 그때부터 10시 이전에 술자리를 마쳤습니다일찍 들어오니 일찍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저에게 새벽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저에게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행복하여라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단순히 잠들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의식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마음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저는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바오로 사도가 그런 습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언제나 기뻐하는 사람늘 감사하는 사람은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은 늘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준비, 가장 중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 더니 요즘 피정객들을 위한 침실 준비에 노하우가 생기고, 무엇보다도 스피드가 붙었습니다. 손님들 나가시고 나면, 즉시 환기부터 시키고, 사용하신 침구들을 세탁합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고, 침구를 세팅한 다음,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거울, 변기, 바닥을 반짝반짝 닦아줍니다. 예민하신 분들을 위해 방향제를 살짝 뿌려주고 나면 끝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초스피드로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면, 저는 마지막으로 사용하실 손님들 입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머리카락이나 이물질로 인해, ‘침실이 이게 뭐야? 이거 청소 하나도 안 되었잖아?’ 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면서 준비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준비는 지극정성, 환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잘 준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존경과 친절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귀가하는 아이에게 컵라면 하나를 툭 하나 던져주며, ‘저녁 먹어라!’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 많은 어머니는 아이가 초인종을 누르기 전, 지극정성으로 진수성찬을 준비해놓을 것입니다. 준비는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준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도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44절)

  

살다보면 수많은 준비를 하게 됩니다. 식사 준비, 여행 준비, 수술 준비, 이사 준비, 시험 준비...그런데 가장 궁극적인 준비, 가장 중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열심히 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어떤 것일까요? 입에서는 항상 진실되고 거룩한 말이 흘러나와야겠습니다. 귀로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 경건한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눈은 지속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마음은 성령의 불로 활활 불타올라야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반영억신부-


깨어있는 삶이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의 관계 안에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늘 준비하고 삽니다. 사실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깨어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인생의 연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잠든 사람이 있고, 깨어나는 사람이 있으며, 깨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깨어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24,42-51: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 있으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종말의 때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종말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분을 만나게 되고, 확실히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뵙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고 있었다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늘 노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죽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늘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3절)

 

우리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45절)의 모습이어야 한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지혜롭거나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야 ‘동료 종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기 위해서는 슬기가, 어려울 때 양식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그러한 종에게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7절)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이다. 이 종이 하늘의 보물을 받는 것은 이 지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영예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영예를 입은 것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못된 종”(48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종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판을 전혀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여기에서 주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또 다른 직무를 받지 못할 것이다. “

 

그를 처단하여”(51절) 라는 것은 영으로부터 자녀 됨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웃음거리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벌 때문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온 마음을 바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되어, 더욱더 충만한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

-한상우신부-


가을을
맞이하기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삶이 바로
준비하는
삶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삶은
삶의 기본에서
출발한다.

삶의 기본은
정직과
감사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준비하는 삶은
우리의 생활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복음은
우리의 생활을
반성으로
새롭게한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한다.

준비는
하느님을 향한
충실한
사랑이다.

아름다운
준비가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우리자신을
보게되는
준비이다.

준비
그 자체가
은총이다.

우리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맞아들이는
준비이다.

이것이
삶의 기쁨이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결국 우리를
위한 준비이다.

준비는
겸손이며
선택이다.

이와같이
계절도
준비하며
바뀌고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의 만남의 날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예수님은 길을 떠났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태도를 비유로 우리에게 삶의 자세를 일깨워 주십니다. 종은 언제든 주인이 오면 맞이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생각하지도 않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
이러한 무지는 한편으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번번이 헛탕을 치더라도 만약의 때를 대비해서 늘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기와 탄력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물리적으로 지금 당장은 부재하시지만,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곁에 있는 듯, 해야 할 바를 미루지 않게 되니까요. 언제일지 모르니 언제나 최적의 준비 상태를 갖추고 살다 보면 삶에 질서와 균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마태 24,45)
예수님은 주인이 현존하건 부재하건 그분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종을 충실하고 슬기롭다고 칭찬하십니다. 그 종은 마음 안에서 주인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행복하여라."라는 축복과 찬사는 미래형이기 이전에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 종의 삶에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조화로이 공존합니다. 그의 마음, 영혼, 말, 행동이 주인이신 분께 정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향한 사도 바오로의 칭찬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1테살 3,7-8) 
자신이 온갖 노력과 애정을 쏟아 그리스도를 전해 주었던 신자들이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사도를 뛸 듯이 행복하게 합니다. 이제는 신자들 덕분에 사도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사실 말씀의 봉사자로서 이만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더욱 분발하여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얼굴을 마주 뵙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이 복음 속 비유처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나설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일상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무지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깨어서 주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준비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성체, 사람과 사건, 관계와 자연을 통해 이 세상을 꽉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는 이만이 그런 주님을 감지하고 알아차려,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뜨거훈 해후는 먼 훗날의 일이기 이전에 지금 여기서 우리를 전율시키는 터치이고 접촉이며 일치입니다.

"행복하여라, 착하고 슬기로운 종!"
우리가 삶의 어느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건 각자의 마음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 를 맞이하시며 행복에 겨워 날아갈 듯 기뻐 뛰실 겁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기뻐할 것이고요.

그리고, 기쁨은 부족하나마 지금 여기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려 애쓰는 우리가 미리 앞당겨 누리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이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것이니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1주 목요일-게을러서도 방탕해서도 안 되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