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1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태오 23,1-12)
As for you, do not be called ‘Rabbi.'
You have but one teacher, and you are all broth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 13,1-16; 신명 6,4-9; 11,13-21)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민수 15,38-39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 3,7-8).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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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
복음 요한 10,11-16
밥때가 되면 식사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냉장고 안입니다.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서, 찌개나 국을 만들고 또 여러 반찬을 직접 만듭니다. 사실 처음 직접 해 먹어야 할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인스턴트 음식만 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랫동안 혼자서 하다보니 자유롭게 음식을 하게 됩니다.
처음 요리책을 보고서 요리할 때, 책에 적혀 있는 재료가 다 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요리 순서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리를 계속하다 보니 이런 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물론 맛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맛있다고 하지 않더군요).
저만의 방식이 생긴 것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뚝딱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식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주님과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 방식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이 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방식 역시 주님께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단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도 신부님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딱 1년 간의 사제 생활이었지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자주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만 하려 하고, 진심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고 남은 옳지 않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옳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장 올바른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런 위선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짧은 이 세상의 삶을 사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기심이 들어가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로지 겸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백화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8층에 자신이 사려는 가전제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몇 층 버튼을 눌러야 할까요? 당연히 8층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지하 1층을 누르고서는 왜 가전제품을 팔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층수를 눌러야 정확하게 자신이 가려는 층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긍정적 버튼’을 누르면, 긍정의 층으로, ‘부정적 버튼’을 누르면 부정의 층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버튼’을 누르고는 긍정의 층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만을 찾아내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정적 버튼을 누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즉, 긍정적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긍정의 삶으로 이동시켜 줍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전삼용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에서 행실이 가르침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씀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나타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뒷좌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냄새를 풍기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어제는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은 ‘전기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린이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노트북의 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런 막힘없이 전기는 벽에서 온다고 답하였습니다. 아이의 눈으로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전기는 우리의 벽에 있는 콘센트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물었다고 합니다. 벽에 있는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는 그 질문에는 답을 잘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전선을 타고 오는데 변전소를 거쳐서 옵니다. 변전소의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가면 발전소에서 옵니다. 발전소의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발전소는 석탄 태운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만듭니다. 전기는 전기유도장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커다란 자석과 코일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전기는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석탄은 3억 년 전 식물이 썩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지층을 ‘석탄기’라고 부릅니다. 식물은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광합성은 태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는 태양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태양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까요? 태양에는 수소가 있습니다. 수소는 핵융합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렇게 태양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수소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과학자들은 그것을 ‘빅뱅’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팽창하는 우주는 빅뱅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소는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수소, 산소, 탄소, 질소입니다. 다른 원소는 폭발하는 초신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은 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빅뱅이 있어서 우주의 질서가 생긴 것처럼 태초에 말씀과 하느님이 있어서 우리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저도 제가 태어난 시골집을 가보았습니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이 있습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피난을 가기 좋은 장소였다고 합니다. 김제에서 포졸이 오면 정읍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정읍에서 포졸이 오면 전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면 쫓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주의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알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하느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최고의 과학자들이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하느님이 계셨다고 믿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이 우리는 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비오 10세 교황을 기억하며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룻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찬란한 덕행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양승국신부-
신구약 성경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름다운 장면이 어제 오늘 룻기를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가련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방인 며느리 룻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장 16절)
또한 시어머니를 따라 물 설고 낯선 땅으로 따라온 룻을 어여쁘고 연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흔쾌히 아내로 맞이한 보아르의 관대하고 자상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기 2장 11절)
룻기를 통해 우리는 유다 공동체가 그리도 중요시 여겼던 순혈주의, 선민의식, 율법지상주의가 사실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압 출신 여인들과 결혼한 나오미의 두 아들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이방 여인 룻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결혼한 보아르, 그리고 그 가문에서 탄생한 다윗왕...
결국 이방 여인들도 다윗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하였고, 구세사의 한 축을 당당히 구성한 것을 통해 순혈주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은 보편적이라는 것, 유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만 도구로 쓰시지 않고, 이방인들은 물론, 부당해 보이는 죄인들,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협조자로 선택하시는, 활짝 열린 개방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덕행들과 자질들은 얼마나 가치 있고 찬란한지 모릅니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그녀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인해 남편과 두 아들마저 떠나보낸 불운의 여인 나오미는 팔자를 펴게 되었고, 기울어져가던 이스라엘 가문이 다시금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말에 앞서 바른 행실을 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기를 쓰고 일을 하려고 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 하지만 충실히 채워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해설가로 자처하며 그 지식으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들(perusím)이라는 말에서 왔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허영심을 폭로하신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춘다는 것이다. 끝자리라는 것은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2)
-한상우신부-
때 묻지 않은
가을이
우리에게
오고있다.
실천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이다.
생명의
참모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실천하는
삶이 섬기는
삶이다.
낮추고
비워야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노력과
실천에 있다.
실천이
구원이고
실천이
회개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참된 실천은
우리의
뉘우침에서
시작되며
참된 실천은
낮추고
섬기는
우리의
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의 뜨거운
가르침이다.
하느님을
높이는
실천의
하루이다.
실천이
참된
은총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무릇 높은 사람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방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일화를 발췌해 들려 줍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 ,11)
이삭이라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들에 나간 룻이 "우연히"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고, 보아즈는 룻에게 커다란 호의를 베풉니다. 이방인인 자기를 친절히 대하는 보아즈에게 룻이 겸손히 까닭을 묻자 보아즈는 룻의 사연을 "다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요.
보아즈는 나오미와 룻에게는 히브리말로 '고엘', 즉 구원자 의무가 있는 친족입니다. 한 가족의 가장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경제적인 지원이나 살해에 대한 복수, 혹은 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나오미와 룻의 경우에는 보아즈가 룻과 혼인하고 아들을 낳아서 이스라엘 가문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이 두 여인의 노후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지역의 유지이고 재산가인 보아즈가 이미 룻의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기근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기구한 운명을 당한 채 베틀레헴으로 되돌아온 두 여인 중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이방인이니, 친족으로서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자기 겨레와 부모를 두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날개 밑으로 들어온 룻을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한 듯 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룻 4,14)
룻은 보아즈와 혼인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지요. 보아즈가 품었던 가엾이 여기는 따뜻하고 관대한 마음이 구원 역사를 잇는 다리를 놓습니다. 세상 어디건, 어느 시대건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이들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 제도를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민낯을 군중과 제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즉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많은 규제와 복잡한 조건으로 오히려 백성들의 어깨를 더 무겁게 한다는 사실을 직관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백성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보아즈처럼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이를 측은히 여기고 배려하는 연민을 지니지 못한 탓이겠지요. 짐짓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행동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찬사받기만을 바라는 그들은 예수님 눈에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섬기는 이는 타인의 짐을 대신 져 줍니다.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고 나누며 함께하지요. 섬기는 이는 그를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을 대신해 그에게 손을 내미는 존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가 혈연과 친족 관계 안에서 작동했다면, 예수님은 이를 사랑과 연민의 의무로 방향지어 주셨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상처와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시고 경청하시며 마음 가득 연민과 자비를 품고 계십니다. 그분은 저 위 높은 곳에서 이래라 저래라 손가락질로 평가하고 명령하시지 않고, 가장 아래, 우리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 우리를 섬기며 짐을 대신 져 주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시는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시니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아무리 어렵고 지치고 버거워도 실망하지 말고 힘 내어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이 되어 갑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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