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4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8. 4. 06:43

2021년 8월 4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마태 15,1-20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대 로마 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세네카를 아십니까? 그는 비록 자신의 제자이고 황제이지만, 옳지 않은 길로 가면서 백성을 힘들게 한다고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올바른 길로만 가려 했고, 그래서 늘 다른 이에게 떳떳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네카에게 와서 지금 누가 당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고자질했습니다. 그러자 세네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제정신으로 저를 헐뜯었다면 혹 화를 내겠지만, 단지 마음이 병들어서 저를 헐뜯는 것이라면 성을 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고를 당한 어떤 사람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응급환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아무도 다가와서 조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환자는 화를 낼까요? 내지 않을까요? 너무 아파서 힘든데, “다른 사람 먼저 모두 봐주신 다음에 천천히 저를 봐주세요. 바쁜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프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세네카는 아프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세네카가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남의 말과 행동에 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귀에 들려서 힘들어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서운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요즘 시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내일 뉴스 1면에 큼직하게 이런 기사가 떴을 것입니다.

‘늘 사랑을 외치던 예수, 마귀 들린 딸로 인해 힘들어하는 불쌍한 가나안 여인에게 막말을 하다!!!’

어쩌면 이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말과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함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상처가 되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딸만 고쳐 준다면, 어떤 막말을 하셔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카를 구스타프 융).

작은 것에 분노하는 나의 쪼잔함.

방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앵앵’ 거리는 소리가 너무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리의 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를 쫓을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파리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또 들어왔습니다. 화가 나서 더 신경질적으로 파리 잡기에 집중했습니다.

잠시 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파리의 앵앵거리는 소리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참을 수 있을까?”

파리의 앵앵거림이 제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신경이 쓰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폭력적으로 변하는 제 모습에 고통과 시련을 참지 못하는 저의 성급함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분노하는 저의 쪼잔함에….

 "거짓말하지 마!" 와" 난 거짓말을 싫어해"의 차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고 새로 태어나게 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이방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며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때 이 여인은 개라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며 자기 믿음을 증명합니다. 믿음은 분명 자신을 낮추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믿지 못합니다.

    반면 믿으면 자아가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으로 타인을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어, 저 사람은 얼만 전만해도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을 못마땅해하고 교정해주려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지 않으니까 가르치려 들고 고치려 드는 것입니다.

    

    “네가 말을 더듬는 것은 네 생각의 속도가 혀의 속도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야.”

말더듬이인 아들에게 말을 더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전 회장 잭 웰치 어머니의 말입니다.

 

    잭 웰치는 미국 최고의 능변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말더듬이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언제나 참치 샌드위치 두 개가 나올 정도로 주문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말 더듬는 탓에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투 튜나’(two tuna)로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이 말에 잭 웰치는 곧 자신감을 되찾고 말을 더듬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여겼고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잭 웰치의 어머니가 아들의 말 더듬는 버릇을 직접 고쳐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들은 더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어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지 자신이 무언가 하게 만들려고 하면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공부하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모는 더 잘하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을 해서 공부를 잘하게 되면 그 공적은 부모에게 돌아갑니다. 부모는 마치 잔소리를 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잔소리는 자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무한으로 긍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왠지 안 될 것 같은 부정이 끼어드니 자신이 개입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을 믿으면 사람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상대를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기다려줍니다.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란 책을 쓴 저자 김민경 씨는 이 책을 통해 부모와 대화 없이 자란 어린 날을 떠올리며, 내 아이만큼은 ‘잘하면 칭찬, 못해도 격려’의 마인드로 밝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녀 교육서를 읽고, 코칭 리더십 등 다양한 강의를 통해 자녀 교육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믿는 만큼 자란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으면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요?

 

    성호가 게임에 빠져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결국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때려주고 싶었지만,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자신도 어렸을 때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고 군것질을 했고 남은 돈을 숨겨놓고 가슴 졸였던 기억을 떠올리니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엄마 김민경 씨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엄마가 안 줄 것 같았어? 내일부터 2000원을 줄 테니까 1000원은 게임을 하고, 1000원은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러나 6시 전엔 꼭 들어와야 한다. 알았지?” 

 

    이렇게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 빠져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반에서 거의 꼴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2가 되자, 게임 때문에 학교를 자퇴까지 하겠다고까지 말하던 아이가 갑자기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교 1등을 하고,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가 원래 머리가 좋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 엄마가 하는 행동을 통해 믿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엄마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생각에 자신도 자존감이 생기고 그 자존감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제게 신부님도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삶을 판단하여 제 가르침을 적용한다면 분명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가르치면 그 사람의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넌 내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적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는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바라시느냐만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할 때 일일이 지적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걷고 말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범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여 고쳐주려는 행위는 상대를 믿지 못해 상대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렸을 때 제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것은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변화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남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적질과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믿지 못하면 지적하고 믿으면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걸음마를 보여주는 것과 걸음마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말의 모범을 보이는 부모는 있어도 옹알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려 할 때 아이는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믿음은 무한한 긍정입니다. 믿는다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내가 죽었음을 보여주십시오. 물론 믿어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님께서도 유다 한 명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바꾸려 해서 바뀌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조차 바꾸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주일미사를 봉헌하면 신자들의 기도가 있습니다대부분 봉사자가 기도문을 읽고교우들은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응답합니다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인도하고신자들의 기도가 끝나면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청하면서 마무리합니다미사를 봉헌하면서 신자들의 기도 내용을 무심히 듣고 지나가곤 합니다신자들의 기도가 끝나면 예물봉헌과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신자들의 기도에 저의 감정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몇 주 전입니다한 자매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하면서 다 읽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기도의 내용은 가족들의 건강이었습니다기도의 내용 중에 치매로 고생하는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자매님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셨고신자들의 기도는 잠시 중단되었습니다그날 신자들의 기도는 봉사자로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아마도 가족 중에 치매로 고생하는 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기도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던 것 같았습니다그날 신자들의 기도는 단순히 미사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께 청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미사를 봉헌하면서 마음이 울컥했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지난 어머니날이었습니다미사를 잘 마치고어머니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가 있었습니다기도문 중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그 부분을 읽으면서 작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저는 잠시 멈추었습니다곧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문을 읽었습니다그 짧은 시간이지만 미사에 함께하신 많은 교우들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글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글은 감동이 되고기쁨이 되고위로가 됩니다글과 마음이 따로 가면 글은 단순한 글로 남을 뿐입니다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도 마음이 울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축성된 성혈과 성체를 모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였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줄 내 몸이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너희와 많은 이의 죄를 사하기 위한 나의 피다.’ 그날은 큰 감동으로 다가 왔습니다부족한 제가 성체와 성혈을 모시고 기도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부족한 제게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그렇습니다매일 봉헌하는 미사에 마음이 함께하면 신앙의 신비가 됩니다매일 봉헌하는 미사에 습관적으로 참례하면 전례가 됩니다.

 

오늘은 본당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축일입니다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신부님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합니다프랑스 정부는 기차역이 없던 아르스에 새롭게 기차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많은 사람들이 아르스를 찾았기 때문입니다신부님은 찾아온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고그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했고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고 생각합니다신부님을 만난 많은 교우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였고영적인 기쁨을 얻었고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신부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여인의 진심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여인의 겸손은 예수님께도 전해졌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파 누워있는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그렇습니다두려움과 근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두려움과 근심 덩어리입니다사랑과 희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

 -양승국신부-

 

일선 본당이나 사도직의 책임자로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일 중에 하나가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최고급 VIP 고객으로 여기며, 꾸준히 그들 가운에 현존하려는 노력이 사목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본연의 임무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여기 저기 오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책임자로 살다보니 기본적으로 눈도장 찍어야 할 곳도 상당합니다. 여기 저기 가고 싶은 곳도 많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자꾸 자리를 비우게 되고, 거기 맛을 들이다보면 주객이 전도되어 책임감 없는 사목자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님(1786~1859)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는 첫 주임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신자들이라 해봐야 농사짓는 시골사람들 230여명밖에 안 되는 공소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더구나 본당 신자들의 신앙심은 밑바닥이어서 동료 신부들이 다들 부임하기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부임해가면서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두렵고 감지덕지해서 몸까지 떨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제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입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서품 즉시 시작된 가난하고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봐야 5분 내외였답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아니 거부당하고 있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찹찹해지기도 합니다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바로 이 때에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한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그야말로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있습니다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침묵 안에 완성되어 사랑의 외침을 들어야할 일입니다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믿음과 겸손으로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아멘.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반영억신부-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이방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끝까지 간청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어냈습니다. “믿음과 겸손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겸손함이 배어있는 믿음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함께야).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강아지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송영진신부-

 

마태오복음 15장에 있는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으로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의 딸이 마귀 들린 일은, 그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계기’로

작용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그의 딸을 고쳐 주신 일은, 그 여자의 믿음과

변화와는 별개의 일로서,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이야기의 끝에 있는,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는 말씀 때문에, 그 여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겸손하고 끈질기게

간청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이야기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전부 다 살펴보아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1-23ㄱ).”

 

여기서 ‘티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말과 ‘가나안 부인’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이방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 여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첫 번째 거절’입니다.

‘거절의 이유’는 뒤의 24절과 2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들기 위한 침묵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에도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모습이 나오는데(요한 8,6), 그 경우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또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들기 위한 침묵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변화시켜 주기 위한 무언의 가르침이고,

간청에 대한 응답의 한 방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했을 때, 원하는 응답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의 침묵’만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청을 거절하신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선 먼저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자신의 간청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올바르게 믿고 있는가? 나의 간청은 올바른 간청인가?>

아마도 여자는 자기 딸을 고치려고 처음에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포함해서

우상을 섬기는 종교들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에게서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5,23ㄴ-24).”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두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라는 권고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만 이해하고서 여자를 쫓아버리자고 말합니다.

(돌려보내자는 말은, 쫓아버리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구원’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받게 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딸을 고치는 것, 그것만이 지금 여자가 바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청하지 않은 ‘큰 은총’을,

즉 ‘하느님의 구원’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여자를 변화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고,

또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와달라고 청하는 여자의 말은 그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 ‘간절함’이 믿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세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뜻으로는,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들, 돼지들,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여자의 입장을 생각해서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도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지만,

그 은총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은총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7-28).”

 

마침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말은, “주님, 제가 강아지라는 것을(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로 해석됩니다.

여자가 받은 진짜 ‘큰 은총’은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변화되어서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딸이 나은 것은 그 다음의 은총입니다.

 복음: 마태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이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고 답하신다. 그리고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 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 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모든 본당 신부들의 주보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엔나 사제 기념일 미사의 말씀은 믿음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서 마귀 들린 딸을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대답조차 않으시는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어머니의 애타고 절박한 심경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파견된 것이라고 하시니, 이방 여인의 마음이 적잖이 위축되었을 것 같지요.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지향을 시험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욕적으로 들렸을 법도 한데,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취급을 당하더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하신 가나안 땅 때문에 생긴 일화입니다.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 13,31)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 13,33)
가나안 땅은 이미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수장들을 모아 그 땅을 미리 정탐하게 하신 건, 점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가나안 땅을 확인하고 주님의 권능과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백성이 가나안 땅을 보고 기쁨과 감사로 의기충전해서 행복할 거라 여기신 주님의 기대가 과했던 걸까요?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나머지 열 명의 수장은 가나안의 풍요와 주민들 풍체에 진즉에 기가 죽어 부정적이고 불길한 소문을 퍼뜨립니다.

스스로를 "메뚜기" 같다고 한 처참한 자기 비하는 아직 그들 안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이 형성되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거대강국 이집트의 노예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직 하느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지요.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4,28)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영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우성치고 통곡하며 불평하자 주님께서 무척 언짢아 하십니다. 주님도 단단히 상처받으셨습니다. 당신 백성이 좋아하리라 믿고 기껏 펼쳐 보여주신 선물이건만, 열등 의식에 싸인 백성이 너무 부정적이고 배은망덕하게 반응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일의 정탐 기간을 사십 년의 광야살이로 되돌려 받습니다.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 여겨 주님의 약속을 무시했던 언사 그대로, 그들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지요.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과 구원의지를 불신하고 무시한 자기들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복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탄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린 여인이 예수님의 경탄과 칭찬을 듣습니다. 그 옛날, 당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당신 백성으로 인해 상처 받으신 하느님께서, 지금 굳은 믿음을 고백한 이방 여인으로 인해 치유를 받으신 흡족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여인의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는 바가 실체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여기는 이가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믿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면 이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듣고도 견고했지요. 그래서 믿음은 참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 모상이라는 건강한 자기 인식 안에서 주님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지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지금 여기서 선취하여 누리게 만드는 신비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저희 본당 신부님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부활 18주 수요일-그렇습니다. 그러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