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3)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이 이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사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이 사는 가장 북쪽 지역입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일정을 바꾸시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난 여행을 시작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거짓 신이나 생명이 없는 우상들과 달리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두 번 나오는데, 이때의 교회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불러 모으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교회’(Ecclesia)라는 말은 ‘밖으로’(ex)라는 단어와 ‘모으다’(clein)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불러 밖으로, 곧 당신에게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파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목숨을 다하는 애끊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부활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이 말씀은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나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수난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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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개막했습니다. 인천에 살았던 저는 당연히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슈퍼스타즈’를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못했습니다.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놓치고, 땅볼 타구를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내고, 투수 앞 평범한 땅볼인데도 이상한 쪽으로 던져서 타자와 주자 모두를 살려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결과는 15승 65패라는 프로야구 역대 최저 기록을 세웠습니다.
1983년, 꼴찌팀 삼미가 2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30승을 올린 장명부 투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그마치 427이닝을 던졌습니다. 현재 규정 이닝이 144이닝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혹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뒤 장명부 투수의 성적은 시원찮았습니다.
야구를 딱 한 해만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미래가 없는 것처럼 미련하게 야구를 했다고 장명부 선수 본인이 생전에 후회했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가 지금 한순간만을 살 것처럼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 시간도 만만치 않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만이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으로 말했지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베드로를 보고서 이제는 말해줘도 되겠다 싶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밀을 미리 말씀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한순간만을 바라보며 살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래를 보지 않으려는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의 걸림돌인 사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한순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든 시간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느 노작가의 자기 체험이 담긴 글을 읽었습니다. 50년 전, 이 노작가가 20대일 때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불안한 감정이 밀려 들어와 죽을 것 같은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혼자서 전철을 타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도 ‘마음 편히 먹으라’라는 말뿐, 어떤 조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 증상이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50년 전 당시에는 전혀 병명도 모른 상태에서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자기에게 다가온 공황장애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
둘째,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
셋째,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이어져도,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별안간 찾아오기 위해 필요한 전단계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꼭 있습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의 잔디가 아무리 좋아도 교만의 잡풀을 뽑지 않으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봅니다. 이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니 교만해지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기가 부모가 없다면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교만해져서 구원자는 수난을 당해야 한다는 말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의견을 제시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 생각이 하나의 의견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사탄이 되어버립니다. 사탄도 그랬고 뱀을 믿었던 첫 조상들도 그랬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이래라저래라 의견을 드릴 수 있도록 교만해지면 안 될 것입니다. 옹기가 옹기장이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어떻게 따질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 성장시키다가는 이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증가할수록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죄가 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순종’합니다.
한 번은 레오날드 우드(Leonard Wood) 경이 프랑스 왕을 방문했습니다.
왕은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므로 다음 날 만찬에 초대한다는 기별을 보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 날 궁전으로 갔고, 한 홀에서 왕을 만났습니다. 프랑스 왕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그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레오날드 경, 나는 이곳에서 당신을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 기대도 못 했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레오날드 경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소. 하지만 경은 나의 초대에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잖소.”
비로소 사태를 이해한 레오날드 우드 경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왕의 초대에는 결코 가타부타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순종만 있을 뿐이죠.”
우리도 주님 앞에서 항상 이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왜 불순종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감사의 봉헌’을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순종하게 되고 그러면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감사하지 못하게 될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언제 가장 감사하게 될까요? 추수철입니다. 열매를 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주님께서 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돈과 배부름과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감사하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고 그러면 불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릭 엔스트롬(Eric Enstrom)입니다.
어느 날 아주 백발이 성성하고 세상사에 몹시 지쳐 보이는 야위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보잘것없는 신발 먼지떨이를 팔러 왔습니다. 그 노인은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사진관에 들어와 잠깐 쉬고자 했습니다.
몹시 시장했든지 미안하지만 차 한 잔 얻어 마시자 해서 빵과 스프를 조금 주었더니 테이블에 앉아 소박한 빵과 스프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사인 엔스트롬 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기도를 드리는 초라한 그 노인이 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엔스트롬 씨는 그 노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인은 세상의 것들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구나.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비록 그 노인은 가난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소박한 감사기도 속에서 그 노인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노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흑백사진을 보고 엔스트롬 씨의 딸, 로다 앤스트롬 나이버그도 큰 감동을 하여 이 사진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감사기도’ 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유화작품 ‘은혜(The Grace)’입니다. 삶에 지친 노인이 빵 한 조각과 스프를 가지고도 감사기도를 드리는 이 이미지는 2002년 미네소타 주 사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기도와 감사는 둘이 아닙니다. 사진작가는 가난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잔디밭의 교만을 뽑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순종도 둘이 아닙니다. 하루에 어느 정도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사람 앞에서 당당한 것이 교만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교만한 것입니다.
제가 사는 영성관 앞쪽은 성지 땅입니다. 성지 땅이 워낙 넓어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잔디밭에 잡풀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관리장님이 열심히 잔디를 깎았지만, 며칠 뒤엔 여전히 잡풀이 함께 올라와 있었습니다.
우리 영성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교만의 잡풀이 믿음의 잔디를 뒤덮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전부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잔디와 함께 자라는 교만의 잡풀을 뽑는 시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도 기도가 없었기에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음을 기억합시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산보를 다니면서 꼭 챙기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보온병입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차를 넣고 다닙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레몬을 넣은 시원한 물을 넣고 다닙니다.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차는 몸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여름에 마시는 시원한 물은 더위에 지친 갈증을 시원하게 씻어 줍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봉성체를 다니면서 성체를 받아 모시기 힘든 어르신들을 보았습니다. 성체를 영하기 전에 한 숟가락의 물을 드렸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신 후에도 한 숟가락의 물을 드렸습니다. 어르신에게 한 숟가락의 물은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봉성체를 다니면서 한 숟가락의 물을 넘기지 못하는 분들을 보곤 했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한 숟가락의 물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맛보는 마지막 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80년대에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습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내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여기서 목마름은 단순히 갈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재와 억압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목마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이 목마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목마르셨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의 변절입니다. 은전 몇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반입니다.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갔던 제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의 희생, 헌신, 사랑, 나눔을 목말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는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편하게 살던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길어지는 광야에서의 삶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은 해소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욕망의 목마름은 해소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물을 마시면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물은 어떤 물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아는 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였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교회의 신비는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먼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바로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바위 위에, 곧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 우리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자신만을 챙기는 일로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우리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다 겪어내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때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희는 왜 나를 따라다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너희는 왜 나에게 기도하느냐? 너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기 때문에”(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또 삶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말에는,
하느님 외에는 모두 ‘죽은 신’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죽은 신’은 생명력이 없는 신이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신이고,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신이고, 사람들의 사정을 볼 수도 없는 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짜 신’입니다.
그래서 ‘죽은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이기도 하고.)
미신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살아 계시는’ 신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신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 자체이신’ 신입니다.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이(마태 7,21)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기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죽은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은
중요한 신앙고백이 됩니다.
‘그리스도’ 라는 말은,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라는 고백은
우리 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 16,18).
(우리 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되는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라는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도(마태 16,19)
그의 신앙고백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라는 신앙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20).”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영구적으로 침묵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침묵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라는 신앙은 아무에게나 전해 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고,
믿고 깨달아야 할 ‘진리’인데,
우선 먼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마태 4,17).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을 때에도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마태 10,7).
사도들이 “예수님이 곧 메시아” 라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 강림 후부터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겪기 전인데도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7).
하느님께서 그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그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다는 말이 나오고,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말리다가
크게 혼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마태 16,21-23).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특별한 은총을 주신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심과 욕망을 따르면,
또는 욕심과 욕망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믿는 대로 살아야 한다.”,
즉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믿기는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따르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다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에 있다면, 믿음도 없이 따르는 것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마태 16,13-2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신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먼저 제자들의 생각을 묻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아마 사람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비교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이 말씀은 줄곧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당신과 함께 많은 표징을 일으킨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라고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즉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베드로라 부르시며,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라고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무엇을 언짢아하시는지 드러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외칩니다. 방금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고 나서 큰 칭찬을 받고, 교회의 반석이 되리라는 선언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은 터입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즉각적,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베드로의 단언이 예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합니다. 그는 말씀이신 분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영이 일깨워주신 대로 예수님의 신원을 발설하기는 했으나, 그 신원에 깃든 사명을 아직 내면화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구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짧은 순간에 칭찬의 천국에서 꾸지람의 지옥까지 곤두박질 친 형국이랄까요. 물론 베드로가 스승을 사랑하는 줄 모르지 않지만,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자의 사명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사안위와 번영, 성공과 자기영광을 추구하도록 방향을 바꾸고 싶어하는 건 사탄의 의도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에게도, 사탄에게도 쉽사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피조물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주님의 꾸지람이 들립니다. 이번에는 민족의 영도자인 모세를 향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광야에서 물 없는 곳에 이르자 백성이 또다시 모세에게 몰려와 대듭니다. 모세는 주님께 여쭈어, 그분이 이르시는 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백성에게 물을 내어주었지요.
이 과정의 어느 대목이 주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합니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주랴?" 하고 외친 모세의 표현에서 그 주체가 '주님'이 아닌 "우리" 즉 모세와 아론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자기들의 힘처럼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아니면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단 한 번만 쳐도 주님께서 충분히 기적을 일으키셨을 텐데,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고 못 미더워 두 번이나 두드린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주님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총애하는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파스카 여정의 종결 매듭을 다른 이에게 넘기십니다. 모세로서는 참 송구하고 안타깝고 서운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정하셨으니 되돌릴 방도는 없습니다. 파스카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의 안타까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배웁니다. 그분은 당신 뜻에 우리가 겸허히 머무르며 순종하기를 바라시지요. 비록 그분 뜻이 당장 인간적으로 손해와 고통과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늘 말씀의 결말에도 당연히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계속해서 줄구장창 잘 나가기만 했다면 복음은 그저 베드로의 위인전이나 성공담으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널뛰듯 오르내리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에게 열린 은총과 실패의 가능성을 볼 수 있으니까요.
또 이스라엘을 이끈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 역시, 파스카 여정의 주체가 오직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각인시킵니다. 파스카는 모세의 업적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며, 오랜 세월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 삶 안에서도 진행 중인 여정인 셈이지요. 파스카의 완성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던지는 이의 몫이 될 것입니다.
삶 속에서 종종 우리 각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무리 험하고 불편해 보여도, 혹 아무리 달콤하고 풍요로워 보여도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은 무조건, 무조건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10)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권고의 선물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8주 목요일-돌대가리는 아닌지, 걸림돌은 아닌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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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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