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Margaret K 2021. 8. 6. 08:10

2021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마르코 9,2-10)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listen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교 다닐 때,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귀가하는 일과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를 무조건 해야만 했습니다. 두발, 복장도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를 보면 누구나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점에서 신분증 검사를 요청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제게 신분증 검사를 하겠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으로 살고 있지만, 이 어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주 느낍니다.

학창 시절의 규제가 오히려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보호받고 싶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보호받고 있음이 얼마나 커다란 안정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의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른이라고 보호해주지 않으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열심히 살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뒤에,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사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모습이 변하다’라는 동사가 종종 쓰이는데, 모두 영적인 변모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변모는 영적인 변모가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변모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천상 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로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자리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되었을까요? 베드로가 나서서 그 자리에 그냥 눌러살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바로 그 순간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서 편안함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보호 아래 사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열정적으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어떤 박해의 위협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게 변할 수 없습니다.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지그 지글러).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것은 꼭 있습니다.

‘관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 종자, 관심 병자라고도 불립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고, 댓글을 달며, 이목을 끌만한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관종이 되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위기를 이끕니다. 그러나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요?

나대는 것도 그의 고유한 성격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관종의 삶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책임감이 없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대고 주목받으려는 나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면, 나름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가장 큰 가치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종을 무조건 나쁘다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가치로 변화시켜보면 어떨까요? 

 하늘 나라 행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워질 수록 커진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주님의 변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직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코는 높은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옷은 그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사제는 사제 옷이 있고 법관은 법관 옷이 있으며 경찰관은 그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옷이 변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빛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산 높이 데리고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라 믿고 성체를 영했지만, 그전에는 그저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비로소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깨달았을 때 옵니다.

    다시 말해 산에 오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당신 피임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직접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져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을 시키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고 아들은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버지나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한 달을 버텨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어 불을 껐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는 재산의 가치를 모를 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큰 선물을 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주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됩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흘리실 피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게 해 준 것에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섬길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싸워 이겨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이 쉬웠을까요? 하지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방법이 있는데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가치를 묵상하고 나도 이웃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씻기 위해 흘리는 피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본 어떤 선생님은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습니다.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입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그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교사로 불립니다. 밤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마약중독, 매춘, 야쿠자와 관련이 있던 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자 야쿠자 두목이 “손가락 하나를 두고 가라.”라고 협박하였고 오사무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학생을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일본인도 아니고 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오사무씨는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등 숱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13년 동안 밤거리에서 학생과 만났고 50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한 소년의 미래를 위해 내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밤거리에서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선생님 희생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그만큼 덜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만큼 우리 행복은 커집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올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는 방법입니다.

 -조재형신부-


세상을 3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첫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이 세상에서는 고전 역학의 법칙이 적용됩니다뉴턴의 물리학입니다뉴턴은 관성의 법칙동역학의 법칙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힘과 운동을 설명하였습니다두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로 가는 세상입니다우리가 살아갈 세상입니다이런 세상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됩니다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세상입니다빛의 속도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빛의 속도로 1년을 다녀온 사람에게 지구에서의 시간은 100년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세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세상입니다이런 세상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하는 세상입니다양자역학이 적용됩니다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관찰자가 보면 물질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도 3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첫 번째 삶은 감각적인 삶입니다우리는 보고듣고만지고냄새 맡고맛보면서 살고 있습니다대부분의 생명은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인간도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욕망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몸도 함께 있습니다생로병사의 삶을 받아들입니다두 번째 삶은 이성적인 삶입니다. ‘?’라는 질문을 던지는 삶입니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을 슬퍼합니다원하지 않는 만남을 괴로워합니다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에 안타가워 합니다감각에 종속되는 몸과 마음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라는 질문을 통해서 철학과학문학예술건축이 발전하였습니다. ‘?’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았습니다예언자들은 ?’라는 질문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세 번째 삶은 깨달음의 삶입니다. ‘?’라는 질문의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삶입니다감각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짜라투스트부처마호메트는 깨달음의 삶을 살았고그 삶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성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3가지 차원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첫 번째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예수님의 옷도 변하였습니다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세 번째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베드로 사도는 천막을 3개 지어서 지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과거의 예언자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주름진 얼굴이지만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근심과 걱정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우리들도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기도의 산봉사의 산희생의 산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욕심시기질투원망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거룩해 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가족들이 알아주고이웃들이 알아주고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았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곧 “그분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이요,

말씀의 능력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무엇보다도 먼저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아멘.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체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마르 8,31),

베드로 사도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에만 놀라서

예수님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르 8,3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꾸중’ 가운데에서

최고로 가혹한 ‘꾸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즉 제자로서 스승이 가는 대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우선 당장 편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을 포함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응에 무척 놀랐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정말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사심을 품고서 한 말도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에 놀라서 그것을 말린 것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시자 제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뒤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르 8,34).

이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라는 말은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은, 또는 듣고서 좋아했을 말씀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모두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때문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려고, 그래서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의 뒤를 더욱 잘 따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2-4).”

 

여기서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말은,

그 영광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세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은 ‘첫 번째 체험’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두 번째 체험’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9,31),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구약시대 전체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5-7).”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영광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소망을 차단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은 제자들의 ‘세 번째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해 주신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앞의 34절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고 영광으로 직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나 모든 신앙인에게나,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마르 9,9)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 꼭 십자가를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단련과 정화를 위해서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신 시청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마르 9,2-10: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경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영광의,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안에서 고통을 통해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변모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 3)

-한상우신부-


변모의 시작은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는
관계의 여정을
걸어간다.

변모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시작은
사랑의 참된
시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새로워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숙의
본질이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다.

실행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변모로
이어질 수 없다.

십자가도
회개도
실행이다.

사람이
되어오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된다.

거룩한 변모는
관계이며
실행이다.

예수님께서는
새하얗게
빛나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다.

거룩한 변모는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성숙의
여정으로
되찾게되는
우리의
본모습이다.

사랑은
정신의
승리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다니 7,9)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다니 7,10)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다니엘 예언자가 본 꿈의 환시 장면입니다. "연로하신 분"은 성부 하느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성부에게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성령이시니, 장엄하고 숭고한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를 읽어 보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네 짐승들의 환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오늘의 대목이 나옵니다. 혐오스런 광경에 이어지는 영광의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되지요. 놀라는 예언자에게 환시 속에서 천사가 먼저 등장한 네 짐승들과 나중의 천상 거룩한 법정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지만,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현장은 황제나 대사제의 대관식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언어와 민족과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삼의 하느님을 섬기며 그 빛을 받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높은 산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본 빛이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의 흰빛이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이 꿈의 환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 성인들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성부 하느님은 목소리로, 성령은 구름으로 성자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이 역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과는 달리, 이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을 거셨지요. 제자들은 관조자나 관찰자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분리된 어느 곳에 영광스러이 따로 떨어져 자리하시지 않고, 하늘을 뚫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구체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소개와 명령으로 간결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러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소개장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무슨 신분이나 타이틀, 직업이나 주거지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 아드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분'라는 자격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존중받고 섬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독백에 그쳐서는 안 되는, 명백히 응답이 요구되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응답과 실천을 통해 이 말씀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말을 듣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을 거셔서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을 관상하는 오늘, 그분의 영광에서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가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형제와 이웃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고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경청하며 이 사랑을 확인하고 키워나가야 하지요. 그리하여 예수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실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현실이 되시고 실재가 되어 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빛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사랑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제가 아는 분들의 모습이 변하여 안타깝고 애잔합니다.

주름이 늘어가고 쇠약해져 가고 초라해져 갑니다.

특히 저의 육신의 형제들은 제가 막내이기에

다 저보다 나이가 많고 육신은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니 그분들을 보면서

곱게 늙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늙고 어떻게 변해야 고운 것인지 주님 변모 축일에 생각게 됩니다.

 

우선 겉모습이 변하는 것을 거부하지 말고 긍정해야 하는데

쭈글하고 초라하고 초췌한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오히려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 긍정하는 것이겠습니다.

 

인자한 모습이란 물론 화장이나 성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자한 내면의 외적인 표출이기에 나이를 먹어도 가능하고

어쩌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좋지만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닮는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변모되어야 할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라면?

그리고 거룩하게 변모되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처럼 타볼산에 올라야겠습니다.

북한산이니 백두산을 자주 오르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건강하게 할 뿐 주님을 닮게 하지는 못하니

우리는 타볼산에 올라야 하는데 타볼산은 주님이 오르신 산이고,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곳이지요.

 

그렇습니다.

늙어갈수록 우리는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늙어갈수록 이 세상에 더 집착하고 이 세상 것들과 씨름하지 말고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산 위에서 살면 좋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요즘 저는 아직도 한심합니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하는 것에 아직도 관심이 가고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 끄려고 하면서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 있으면 좋겠다고

베드로처럼 헛소리 하지 말고 어서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시고

당신도 내려갈 것이니 우리도 같이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마음은 하늘에 두지만 사랑은 아직 이 세상에 두라는 말씀이고

이 세상에 애착하지는 말되 이 세상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한 마디로 애착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한 마디로 마지막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 마지막 사랑,

이것이 오늘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불꽃이 그냥 그리고 시나브로 사그라들지 말고

회광반조마냥 불꽃을 마지막으로 태우라는 것이고,

애착이 아닌 피 흘리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앞서 타볼산을 내려가 해골산으로 오르시고,

당신을 닮고자 한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Imitatio Christi이자 Sequela Christi라고

다시 말해서 당신을 닮음이자 당신을 따름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