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4,13-2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who in turn gave them to the crowds.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가엾은 마음’은 애끊는 마음, 곧 자식의 고통을 보고 내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는 어미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헤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마르 6,34)입니다. 그 가엾은 마음은 예수님을 움직여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저녁이 되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각자 스스로 먹을거리를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어 여자와 어린이들 말고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푸신 선물이 열두 지파인 이스라엘에 풍성하게 흘러넘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께서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베푸신 만나의 기적과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을 먹인 기적(2열왕 4,42-44 참조)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예수님께서 이르시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발뺌하던 제자들은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봉사를 합니다. 제자들도 이제 예수님의 마음,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우리도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길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제 바로 위의 형과 방을 같이 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 때에도 하나의 요와 하나의 이불을 같이 사용해만 했습니다(당시에는 침대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둘이 덮고 자기에 충분한 크기의 이불이었지만, 잠버릇이 험한 저이기에 형과 같이 덮어야 하는 이불을 저 혼자 독차지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추워서 웅크리고 자는 형을 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일까요? 이불을 같이 덮게 한 부모님의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이불을 혼자 독차지한 저의 잘못입니다.
세상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이 정말로 많습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서, 하느님의 침묵에 관해 이야기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다 주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혼자 독차지 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어려움과 힘듦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침묵을 이야기하기보다, 내가 실천하지 못한 사랑을 떠올려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늦게까지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제자들도 피곤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말로써 예수님께 ‘이제 좀 쉽시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 14,15)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보내지 못하시지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또다시 사랑의 실천을 하십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빵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이런 사랑의 본성을 간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을까요?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 실천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가량 되는 엄청난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즉, 이 모습은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커다란 열매를 맺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가능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적을 잘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사랑, 보상을 바라는 사랑을 하고 있어서, 그만큼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세상은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지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사는 이 사람은 43세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고 얼마 못 가 아내와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반대 세력에 의해 감금되어 자유까지 잃었습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 절망에 빠진 그를 보며 사람들은 “저 사람도 곧 죽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절망을 이기고 불후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실낙원’을 썼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존 밀턴’입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비참한 일은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앞을 못 보는 환경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앉는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할 수 있다면서 힘을 낼 때는 절망이 아닌 희망이, 좌절이 아닌 기쁨이 나오게 됩니다.

빵 다석 새의 능력을 최고치로 끌어오리려면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아라
-전삼용신부-
오늘은 마태오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는 다르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장면을 완전히 같은 패턴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물을 받으셔서 감사기도를 올리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패턴입니다. 내가 가진 제물을 감사히 봉헌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 비교도 안 되는 양과 질로 변화시켜 우리에게 다시 주신다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빵 다섯 개는 인간의 오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순수한 인간이나 인간이 가진 능력을 말합니다. 거기에다 물고기 두 마리는 은총과 진리로써 이것이 더해지면 나의 몸을 이웃을 위해 쓰고 싶은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솟구치게 해서 봉헌하게 만들고 그러면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봉헌’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을 이웃을 위해 쓰기 위해 먼저 주님께 감사히 봉헌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귀한 재능으로 돌려주십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일게 만드는 것이 먼저 비우게 만드는 감사의 마음, 곧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파나소닉 설립자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출장을 갔는데 그 지역에 통찰력이 위대한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언가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고 어느 방으로 들어가자 노승이 미리 차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승은 마쓰시다의 잔이 흘러넘치는데도 어쩐지 차를 계속 붓는 것이었습니다.
마쓰시다가 그 이유를 묻자 노승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많은 공부와 경험으로 모든 지식과 능력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채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것이 더 중요하답니다.”
그 이후 마쓰시다는 받은 것에 감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감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직원들을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학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道)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가득 찬 찻잔에는 아무것도 따를 수 없습니다. 그 잔도 쓸모없게 됩니다. 실력이 더 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찻잔을 주님께 봉헌하면 주님은 그것을 마시고 황금 동전으로 채워주십니다. 버리고 비우지 않으면 늘지 않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채워주신 분께 내어드리십시오. 이것이 능력을 키우는 비밀입니다.
위대한 교수가 있는데 학생이 질문하지 않으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학생이 자신의 지식 정도를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며 질문했을 때 교수는 그 사람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분 앞에서 나의 것을 꺼내놓지 못할 때 나의 능력은 제자리걸음이나 그곳에서 멈추게 됩니다. 질문도 하나의 자기 봉헌입니다.
봉헌은 나의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능력을 높여주시기는 아주 쉽습니다. 세상에는 벼락을 맞거나 어떤 충격을 받고 갑자기 위대한 능력을 갖추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1994년 미국 뉴욕에 살던 토니 스코리아는 공원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전화를 하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피아노를 조금 칠 줄은 알았으나 갑자기 즉흥연주까지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2002년 미국 워싱턴에 살던 제이슨 패지트도 술집에서 나오다가 시비가 붙어 두 남자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모든 사물 안에서 기하학적 문양을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건설업자 토미 맥휴는 51세에 심한 뇌출혈로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그 이후 굉장히 유명한 시인과 화가가 되었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앨런 스나이더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천재다. 그런데 우리 뇌 안에 핸드 브레이크가 걸려 있다.”
[출처: ‘하루아침에 천재가 된 사람들?’, 유튜브 채널, ‘사피엔스 스튜디오’]
이처럼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꽉 잡혀 있는 핸드 브레이크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재능의 벼락을 맞기 위해서는 벼락 치는 곳에 내 자신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의 자기 봉헌이고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되는 길입니다.
미국의 ‘프록터 앤 갬블’(P&G)사는 18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생활에 밀접한 제품들을 판매하며 꾸준히 성장한 기업입니다. 프록터 사장은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것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직원이 실수로 기계 작동시간을 잘못 세팅하는 바람에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부서 책임자는 담당 직원을 심하게 질책했고 직원은 책임지고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록터 사장은 이 모든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려고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잘못 응고된 비누를 분석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게가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사장은 “비누가 물에 뜨면 목욕할 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목욕 환경은 강가가 주였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 비누를 놓치면 찾을 수 없었습니다. 프록터 사장은 이 제품을 ‘아이보리’라는 제품명으로 출시했고 회사가 발전하는 초석이 된 제품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봉헌할 수 없고, 이런 예처럼 은혜를 주어도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주신 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면 그분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여기까지 되면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받은 재물의 십 분의 일도 감사하게 봉헌하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다시 받아서 나누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이 배부를 수 있고 정작 이득을 보는 것은 그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것에 감사해서 이웃을 위해 내어주려는 마음만 있을 때 그것을 한 광주리씩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마취제, 환각제, 항생제, 진통제, 혈압약, 항암제와 같은 약이 있었습니다. 마취제와 진통제는 인류를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항생제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로 인한 병에서 인류를 구하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암에 대해서도 많은 약이 개발되었습니다. 항암제는 크게 3단계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1세대를 세포 독성 항암제라고 합니다. 암세포를 공격해서 죽이는 효과가 있지만 정상세포도 죽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2세대를 분자표적 항암제라고 합니다. 암세포만 공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습니다. 3세대를 면역항암제라고 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합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처럼 위장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속인다고 합니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위장된 암세포를 찾아서 없애도록 한다고 합니다.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노력해 왔던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저의 삶에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결정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이었습니다. 큰길가에서 우연히 버스를 탔습니다. 내렸는데 제가 생각했던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눈앞에 파출소가 보였습니다. 저는 파출소에서 하루를 보냈고, 아버지께서 다음날 파출소로 오셔서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셨습니다. 맛있는 국밥을 사주신 경찰아저씨가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파출소로 들어간 것이 정말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하면서 신학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손자들 중에 한 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던 할아버지의 유언도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철학은 식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신학은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성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결정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우리는 외적인 이유 때문에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IMF'와 같은 ’국가부도‘의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질병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외부에서 오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들도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 불신과 두려움은 마치 항해중인 배에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그래서 서서히 침몰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들의 영혼까지 배부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영적인 충만함을 더욱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000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굶주린 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까지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장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선한 야채, 싱싱한 고기, 맛있는 반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좋은 음식들을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이 바로 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운 여름 뜨거운 햇빛아래서 땀을 흘리는 농부들의 수고가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빵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빵을 많게 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릴 때, 우리들 또한 주님처럼 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신앙에서 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신앙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있는 것, 그것을 보는 눈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보는 눈이 바로 지복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러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손에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올려놓아야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8억 2,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겪고 있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아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교회의 얼굴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더 있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34).
루카복음을 보면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말은 없고,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9,11).
세 복음서의 기록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설교를 하시고, 병자들이 다가오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빵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설교’의 연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빵’을 통해서,
즉 배불리 먹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 14,15)”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에만
몰두하셔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군중은 어땠을까?
예수님의 가르침도 듣고 병도 고치고 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고 불평했을까?)
요한복음의 내용과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느라고 사람들의 육신의 배고픔과 피곤함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신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빵의 기적’을 작정하셨다고 생각됩니다(요한 6,6).
제자들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훌륭한 일이긴 한데,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사람들의 사정’에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한 것은,
사실상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한 제자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 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은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또다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6-17).”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터이니 너희가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로 알아들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저희는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무(無)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어떤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6,9).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어떤 아이가 자기 것을 내놓는 것을 본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것을 모두 모아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시킨 이야기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회개시킨 것도 기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는
단순하게 ‘기적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일’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려고 하는 기적에 참여한 일,
또는 그 기적에 응답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 14,18-21).”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사람들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그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실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신의 지시를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터이니 너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은 교회의(신앙인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조욱현신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배를 타고 가셨다. 이렇게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역시 외딴 곳에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떼어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한상우신부-
나눔의 빛이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
나눔의 빛이
바로
섬김의 빵이다.
기쁘게
주는 것이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생활속의
나눔이 바로
생활속의 참된
진리이다.
나눔의 빵은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을
치유한다.
나눔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은총의 통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눔이다.
나눔은
회개의
참된
실천이다
절절한
사랑이
나눔이다.
공동체의
생명은
나눔으로
성장한다.
삶의
이야기는
나눔의
이야기다.
복음이
있는 곳에
나눔의 빵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눔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에게는
나눔이 있다.
나눔이
살 길이다.
나눔이
복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은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 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또다시 주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고기며 이집트에서 먹던 생선과 야채들까지 떠올리며 우는 소리를 하는데, 그것들이 "공짜"였다고 회상합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힘들다 해도, 이집트인들에게 착취당했던 시간과 노동력과 생명의 부당한 대가였을지도 모를 그 음식들을 "공짜"로 추억하다니, 주님과 모세 입장에서 보면 참 배은망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듯하지요.
광야 생활 초기에 한창 배를 곯을 때는 하늘에서 이슬과 함께 내리는 만나가 놀랍고 감사했지만 이제는 질린 듯 보입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뭔가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는 건 나무랄 수 없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감사를 잊은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망각한 것 같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삶의 많은 것들을 주님의 은총으로 누리면서도 어느새 당연하게 여기며 더,더,더 탐욕하고 요구하는 우리에 습성을 성찰하게 됩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발견합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17)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 반응은 좀 관료적이라고 할까요? 애초에 군중을 해산해 각자 스스로 알아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그들은 냉정하고 이성적이지요.
사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니, 제자들 계산이 틀린 건 아닙니다. 군중의 수가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었다면 그들에게 딸린 일행까지 합쳐 어마어마한 수의 무리였으리라 짐작이 되니까요.
제자들은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자라는 부분만 쳐다보고 있으면 늘 그 상태에서 정체될 수밖에 없지요. 완전히 흡족히 채워지는 충만함은 하늘 나라에서나 누릴 수 있는 상태기에,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모자라고 부족하고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은 한, 관점을 달리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마태 14,19)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의 그것과 극명히 갈립니다. 그분께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지요. 예수님은 비록 미소하고 보잘것없는 양의 먹거리지만 감사히 받아 먼저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올리십니다.
빵의 기적은 논리적 계산에서가 아니라 감사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얼만큼 가졌든 원래부터 내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니, 하느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이 말씀에는 광야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굳은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참밀은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바위틈의 석청은 꿀같이 달콤한 주님의 말씀을 가리키지요.
주님은 당신을 믿고 의탁하는 이들에게 육체를 지탱할 양식도 주시지만,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 또한 마련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나눠주신 이상, 당신과 함꼐 영원히 행복하실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우리는 심각한 소유의 불균형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신이 소유한 바를 자꾸 타인과 비교하다 보면 만족과 감사를 잊기 쉽지요. 자칫 오늘 말씀 속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제자들처럼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며 스스로를 박탈감과 열등감, 열패감으로 주저앉힐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시는 물적 영적 은총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더 충만해질 수도 있고, 더 빈곤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걸 가졌더라도 탐욕과 불평에 싸여 산다면 여전히 비참할 것이고,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고 찬미한다면 "전부"이신 주님을 소유한, 진짜 복된 존재일 것이니까요.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일을 지냅니다. 저희 작은형제회의 요람인 작디작은 아씨시 천사들의 성마리아 성당이 전대사를 수여하는 대성당급 성당이 된 것을 기념하는 용서(죄사함)의 축제날이지요. 이 축일은 작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웅변적으로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듯하여도 감사의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넉넉한 수 있음을 깨닫고, 무한경쟁과 투기로 내모는 이 세상에서 숨가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이처럼 고요히 말씀 안에 들어와 기도하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감사와 찬미의 제사로 주님께 올려드리며 오늘도 충만하고 흡족하시길 기원합니다. 기적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답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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