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7. 19. 09:00

2021 7 19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 12,38-42)

 

At the judgment, 
the men of Nineveh 
will arise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he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하루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늘 같은 날짜에 오던 용돈이 이번 달에는 오지 않았다며, 혹시 자식이 송금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확인차 전화하신 듯하였습니다. 자식은 바쁜 일 때문에 용돈을 보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나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게 했다며 더 미안해하십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자식은 약간의 용돈으로 표현합니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마음입니다.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하셨다 해도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표징을 보여 주어야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표징을 일으킨다고 수군거렸던 그들이(마태 12,24 참조), 이번에는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실체라면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표징일 뿐입니다. 표징은 실체보다 더 크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그 표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수화기 너머 자식의 목소리가 부모님께는 또 다른 표징이 될 수 있듯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표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의지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과 기적이 먼저입니까? 표징을 먼저 요구하는 우리라면, 점집을 찾아가 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며 원망하고 돌아서는 우리는, 용돈을 주지 않는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며 떼쓰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표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과학자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의 조화를 이룬 나비의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비 품종 개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열정적으로 실험을 반복하던 중에, 한 고치에서 유전자적 대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나비가 되어 부화하는 날, 그는 전 직원을 불러 모아서 고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나비를 함께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른쪽 날개가 그리고 그다음 왼쪽 날개 대부분이 나왔습니다. 날개 색을 보면서 성공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왼쪽 날개가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보니 왼쪽 날개의 끝이 고치의 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비도 힘이 빠졌는지 퍼덕이는 빈도수가 점점 줄었습니다. 실패로 끝날 것 같아서 과학자는 작은 칼을 집어 구멍을 아주 조금 잘라내었습니다. 그제야 나비는 고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날지 못했습니다. 과학자의 피조물을 살리려는 행동이 그만 나비의 힘을 무기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며 하느님의 침묵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일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으시는지, 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이고 표징이 아닐까요?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놀라운 기적과 표징을 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이를 배불리 먹이시는 등 이제까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기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보잘것없는 나자렛 출신의 목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시면 믿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과 기적을 직접 듣고 본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분명히 놀라운 기적과 표징은 쉼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먼저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남을 자기처럼 망가뜨릴까 염려된다(성 아오구스티노).

증명사진

어느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고, 원하는 날짜에 맞춰서 글을 써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작가 소개와 사진 한 장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써서 보낼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사진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제 사진이 없는 것입니다. 겨우 증명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찍은 것입니다.

이 사진을 유심히 봤습니다. 지금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이메일로 보냈더니 곧바로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신부님! 사진이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으로 한 장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직원들에게 20년 전 제 증명사진을 보여 주며, “지금과 똑같지 않아?”라고 했더니 절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보니, 20년 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동안 제 얼굴을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늙어갔는지도 몰랐나 봅니다. 지금의 나를 봐야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즉, 과거를 반성하고 더 나은 나를 향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자야가 지옥이라 느낄 때 구원자가 보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드시며 당신을 믿는데 표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할 마음도 없고 남방 여왕처럼 지혜를 배울 마음도 없다고 질책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니네베 사람들과는 반대로 지금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배워 구원자를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코만도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동시에 출연하여 탈옥 불가 감옥을 탈출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이스케이프 플랜’(2013)입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탈옥 전문가입니다.
직접 감옥에 들어가 약점을 찾아내 탈출한 뒤, 탈출 불가능한 감옥으로 재설계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면 50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선불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스탤론은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괴한의 습격을 당하고 눈을 뜬 곳은 얼굴을 가린 채 중무장한 교도관들이 있으며 24시간 감시되는 유리로만 만들어진 수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간수들 마음대로 사람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제 스탤론은 돈은 둘째치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 감옥을 살기 위해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입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스탤론은 깜짝 놀랍니다. 그 감옥은 땅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계속 움직이는 커다란 배였던 것입니다.

     

    남은 중요한 일은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조 헬기를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아널드가 도와줍니다. 결국, 둘의 협동 작전으로 둘은 감옥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널드의 딸이 자신에게 50억을 주며 탈옥을 부탁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탈옥을 가장 잘하는 스탤론을 그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탤론은 그 불가능한 곳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감옥이 그가 쓴 책대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감옥이라 그 약점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옥이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감옥에서 수감자들은 당연히 그 압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줄 압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 감옥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탤론에게 희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널드는 그에게 희망을 둡니다. 왜냐하면, 탈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곳에서 탈옥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탈옥하는 법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은 물고기 뱃속과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커다란 물고기는 자아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법칙을 상징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요나가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된 것 때문에 자신들도 회개합니다. 이 세상이 악에 지배받고 있고 오직 하느님의 명을 따름만이 참 자유의 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요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이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마치 물고기 배 속처럼 무덤과 같은 곳임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그곳에서 탈출할 줄 아셨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더 무슨 표징이 필요합니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무덤과 같은 감옥인 이 세상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감옥으로 보이는 지혜만 있다면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분을 믿고 도와드리면 됩니다. 이 세상이 감옥임을 볼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그 감옥을 설계한 분은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바타’(2009)는 지구가 살기 어려워지자 남의 행성을 빼앗아 자원을 강탈하려는 인간과 자신의 행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나비족과의 싸움을 그렸습니다.

     전직 해병대원이었지만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제이크는 자신의 아바타에 들어가 나비족을 염탐합니다. 그러다 동물들에게 쫓겨 죽을뻔한 여자 아바타를 만납니다.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점점 나비족의 문화에 스며들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몸만 나비족이 된 배신자 아바타를 나비족은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격이 거세지자 어쩔 수 없습니다. 믿어보는 수밖에. 그렇게 그는 나비족을 인간으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이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고 그 악과 싸워야 함을 안다면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그 악과 싸우려고 하고 또 그 악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실하지 않으니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과 사탄과 싸우신 것만으로도 참 지혜이시고 희망입니다. 이 세상이 가라앉는 배, 혹은 그 안에 설치된 감옥임을 안다면 탈출구를 아는 사람처럼만 보여도 무작정 따라나설 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고 그 감옥에서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겨 하늘 나라로 탈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나를 구해줄 자격이나 표징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냥 이 세상이 탈출해야 할 곳이 아니라 천국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알라스카에서 빙하를 보기 위해서 경비행기를 2번 탔습니다가는 날은 날씨가 좋아서 어려움 없이 빙하를 볼 수 있었습니다문제는 돌아오는 날에 있었습니다비가 내리더니 안개가 자욱했습니다결국 돌아오는 날에 경비행기는 운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다시 숙소를 얻어서 하루를 지냈습니다다음 날 새벽에 공항에 갔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서 경비행기를 탈 수 없었습니다그때부터는 우리의 마음에도 풍랑이 불고안개가 자욱해 졌습니다주일에 본당 미사를 못 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오후가 되어도 경비행기는 운항을 하지 못했습니다항공사에서 옆에 있는 항공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그곳은 큰 비행기를 운항하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날씨에도 충분히 운항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우리는 친절한 공항 직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옆에 있는 항공사로 가서 표를 새로 마련했습니다경비행기는 안개 때문에 올 수 없었지만 큰 비행기는 안개를 뚫고 왔고우리는 무사히 귀환 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우리는 2일을 더 머물러야 했습니다처음에는 걱정도 되고짜증도 났지만 더 머물렀던 시간이 제게는 더 좋았습니다바쁜 일정 때문에 이야기 할 시간이 적었는데 모처럼 선배와 후배가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미국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하였고가족들의 이야기도 하였고사목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현지에 있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숙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신부님께서는 농담으로 청구서를 보내겠다고 하셨고우리는 농담으로 다음 세기에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예전에 읽었던 잠언의 이야기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 33)”는 말씀을 묵상 할 수 있었습니다바오로 사도의 이야기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코린토 1서 3, 6)”는 말씀도 묵상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능가하는 힘을 보여 주시겠다고 하십니다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공명예권력은 무너져 내리는 바벨탑과 같습니다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결국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우리가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굳은 날씨에 우리를 집으로 데려 온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경비행기가 아니었습니다안개에 무력한 경비행기가 아니었습니다강한 날개와 커다란 엔진을 가졌던 커다란 비행기였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라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그러나 보라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었습니다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율법과 계명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믿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시련 앞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두려움과 걱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그렇게 할 때 사랑이 꽃피는 것입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기적이란? 전에는 어리고 미성숙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터득하고 깨우치는 것!

 -양승국신부-

 

개인이나 소그룹으로 피정오시는 분들을 맞이하고 동반하느라 하루해가 너무 짧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침실 청소며 침구 준비, 빨래며 쓰레기 처리를 직접 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삼복더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힘들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오랜 세월 별 의식 없이 살아왔는데, 허리를 구부려 화장실 바닥을 청소할 때라든지, 냄새 지독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든지,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수거하고 분리하면서, 청소 노동자들께서 이 세상을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하고 계시는지, 그분들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온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은 그분들이 매일 흘리시는 땀방울과 노고에 비해 처우가 지나칠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힘들면 제 마음대로 시간을 조절하며 푹 쉬었다 할 수도 있는데, 그분들은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휴게 공간이라든지 근무 조건이라든지, 직무 구조라든지, 모든 면에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동시대,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통과 절규 앞에 너무나 냉담하고 무관심했던 지난날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제대로 된 표징을 한번 일으켜보라고 부추깁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 죽은 소녀를 살리는 기적, 불치병 환자를 치유시키는 기적...

  

그토록 수많은 기적과 표징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해놓고서도 또 다른 표징을 보여 달라는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장탄식을 터트리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2장 39~40절) 

 

기적과 표징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다른 게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전에는 어리고 미성숙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터득하고 깨우치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요?

  

전에는 극단적 세속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이웃들의 고통이나 슬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 참으로 놀라운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좁았던 안목과 시야, 인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 내 영혼과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 새로운 시선으로 동료 인간들과 세상을 바라볼 능력을 지니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의 마음을 지니는 것, 그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현실을 그저 감내하라고만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열악한 여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도록 힘을 합치는 일, 이보다 더 큰 표징이 또 있을까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자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며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여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개탄하시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마태 12,3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하느님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치달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세대”라는 말은 이백주년 성경에는 “간음하는 세대”라고 번역하였듯이마치 부부의 신의와 같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해 불충하고신의를 지키지 않는 절개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실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표징을 본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믿음이 없이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표징을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죽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30)라고 간청했을 때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믿는 이들이 표징을 알아볼 것입니다믿음으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1-3)

 

동시에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나보다도솔로몬보다도 더 큰 분이심을 계시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42)

 

그러나 요나의 설교만 들고도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평판으로만 듣고도 찾아온 이방인 세바의 여왕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건만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징을 보고서도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니오늘 우리는 굳이 표징을 보여주지 않아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실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들 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주님오늘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아멘.

 마음의 문을 열어라

 -반영억신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더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듣고 이제는 초연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 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라고 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이요, 절개 없다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선하고 절개 있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내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 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표징을 아무리 많이 보여줘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준비 없이 심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열면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

 -송영진신부-


“그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8-41)”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핵심 주제는 ‘표징’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 예언자와 니네베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은,

“너희는 왜 회개하지 않느냐?” 라고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를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1)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은,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라면 그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시오.” 라는 요구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한 것은, 회개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요즘 말로 표현하면,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을 내놓으시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신분증을 내놓으신다면,

그들은 그 신분증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또다시 요구했을 것입니다.>

 

2)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라는 예수님 말씀은,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의 신원에 대해서만 시비를 거는구나!”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이 말씀은, “회개하기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요한은 마귀 들린 사람(미친 사람) 같고, 예수는 시정잡배 같은 자여서

두 사람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했으면서도, 자기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요한과 예수님 탓이라고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첫 선포와 예수님의 첫 선포는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이처럼 요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회개 선포는 메시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예수님의 회개 선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떻든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죄가 없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을 모두

암시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의 뜻은, “나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회개하라고 그토록 애타게 호소했건만,

너희는 나의 호소를 듣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로

나의 재림과 심판을 맞이한다면, 그때에는 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입니다.

회개는 심판 전에 해야 합니다.

심판이 시작된 후에는 회개할 틈이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시작되는 순간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과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합니다.

<‘요나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는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이야기 자체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심판 때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이 세대 사람들’은 유죄라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다.”입니다.

니네베 사람들뿐만 아니라, 회개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전부 다

그렇게 증언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는 회개해서 구원받았는데 너희는 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느냐?” 라고 안타까워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요나가 심판을 예고했을 때,

그들이 곧바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요나 3,4-5).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5)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요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나는 심판을 예고한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구원받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또는 회개를 급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 속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이 세대’는 언제나 항상 ‘지금의 세대’입니다.

‘나 자신’도 포함해서......>

 복음: 마태 12,38-42: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조욱현신부-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 12,24)라고 주님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38절) 하며 유혹을 한다. 이 두 표현은 아드님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하신 일을 마귀가 했다고 모독하고, 신성을 요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독하였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39절) 라는 말은 하느님을 유일한 신랑으로 알고, 사랑받는 배필로 사는 삶을 버리고, 즉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버리고 악과 거짓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간음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를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리를 꼬투리 잡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쓰러지고, 표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알려는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불신앙 속에 갇힐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4).

 

예수께서는 요나가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이, 당신이 고난을 받고 사흘째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시한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니네베 사람들에 비교되면서 책망을 듣는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기에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고 하신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2절). 여왕은 여인의 몸으로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하였다. 지혜를 원하는 것만큼 힘이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솔로몬에게 가서, 그의 말을 직접 들으려 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도 그를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지혜를 하찮게 여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느님한테서 멀어지니 주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떠나고 만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보아도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고, 두 사람은 종이기 때문이다. 이 종들의 말에 다른 민족들도 귀를 기울이는데, 주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의 말과 행위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삶을 노력해야 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 39)


주님의
가장 큰 은총은
우리자신을
알게하는
은총이다.

우리자신을
모르면

절절한
표징은
무능하고
뜨뜻미지근한
삶은 절개 없이
흘러간다.

주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쉽게
변절한다.

우리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단없이는
삶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믿음과 삶은
지속적인 회개로
서로를 일으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회개의 삶이다.

진정한 행복은
악하고
절개 없는
우리들의
참된
회개이다.

표징을 요구하고
길을 찾지만
회개보다
더 큰 표징과
더 빛나는
길은 없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회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회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참된 회개가
참된 행복이다.

회개로
질서와
절개를
되찾아야 할
우리들 세대이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에게서
답을 얻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과 기억에 대해 숙고하게 해 주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9)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청하자 그분께서 안타까워하시며 답하십니다. 이제껏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와 구마 기적들을 보아왔지만,  그들의 마음이 하도 완고하여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결정적인 표징을 자꾸만 요구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 예언자가 죽지 않고 사흘만에 육지로 뱉어내어져 결국 사명을 완수하게 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요. 이것이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실 예수님 앞날의 표징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요나 이야기는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우리에게 또 다른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의 명을 거부하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어 니네베를 멸망에서 구하신 것이 못마땅해 불평하던 완고함이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전한 이스라엘의 예언자 자신에게서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반면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예언을 듣고 임금부터 짐승까지 모두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섰지요. 말씀을 전한 예언자의 인격이나 됨됨이, 자격을 따지지 않고 전달된 말씀의 내용과 그 원천이신 분을 받아들여 겸손히 생각과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마태 12,42)
예수님은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왕궁을 찾아왔던 남방 여왕도 언급하십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었지요. 하느님 백성이면서 하느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은 완고한 이들과, 이방인이면서 하늘의 지혜에 활짝 열려 있던 이들이 크게 대조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표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대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갈대바다 앞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을 들려 줍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 울부짖으며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그동안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이집트를 호되게 치셨던 열 개의 재앙을 잊어버린 듯하지요.

아무리 놀랍고 신기한 기적도 기억하고 내면화해서 마음의 변화로까지 연결되지 않으면 그저 한 순간의 쇼로 잊혀집니다. 믿음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 닥쳐오면 그 기적이 진정 표징으로 남았는지 마술같은 깜짝 쇼로 끝났는지 드러나지요.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14,18)
하느님께서 갈대 바다를 둘로 가르시어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걸어 물을 건너고, 그 뒤로 물이 되돌아와 추격하던 이집트 군사들은 전멸될 것입니다. 이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을 위한 것도 됩니다. 결국 그들도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놀라운 일을 겪은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주님께 대들고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완고한 마음이 표징을 기억하고 내면화하지 못해서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과 백성의 기대를 충분히 받았을 종교 기득권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 죄인들, 이방인들이 먼저 예수님을 받아들여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역사적 진실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실 마음을 조금만 열고 보면 우리 각자의 삶에도 주님의 손길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저 우연이나 행운 정도로 지나갈 일들이지만, 믿는 우리들은 아무리 작은 일도 하느님 사랑의 표징으로 소중히 받아들여, 기억하고 내면화해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삶을 변화시키게 되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삶의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는 주님 사랑의 손길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영성체송)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