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30-34)
When he disembarked and saw the vast crowd,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잘 되는 지금 더 열심히 해야하고, 안되면 더 잘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휴식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지쳐가는 것을 알지만 쉴 수 없습니다. 육체가 ‘잠시 멈춤’을 하지 못하면 영혼도 쉴 수 없습니다. 달리면서 어떻게 영혼이 쉴 수 있겠습니까? 나의 영혼이 피폐해가는 동안 내 몸 안의 주님도 지쳐가고 계십니다.
바쁜 일상속에서 기도를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준비가 되지 않아서, 시간이 많지 않아서 미루고 또 미룹니다. 그러나 기도는 준비도 시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시간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주님을 생각하며 쉬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일치 속에 생각한 것을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우리가 보는 앞면이라면 기도는 그 이면입니다. 기도와 실천의 양면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인간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영육간의 조화가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인간의 활동은 가치가 있고 반석 위에 세운 것처럼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의 휴식은 그리 큰일이 아닙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잠시 기도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 하느님 곁에서 쉬며 육체와 정신이 회복될 시간을 갖는 것이 영혼의 휴식입니다. 나의 영육을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돌보고 주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선교는 주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대의 영적가치를 대변하는 군중들
한 마디라도 더 말씀을 듣고자 군중들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당신을 쫓으며 당신의 말에 귀기울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주님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채워 줄 영적지도자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아직도 그들처럼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인간에게는 영적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옛부터 수많은 지도자들이 자신만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우리는 그릇된 이념을 가진 지도자가 몰락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얼마나 많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파괴하는지를 보았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반듯한 길, 가장 빠른 길은 오직 주님의 길 하나뿐입니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와 유럽의 많은 교회들은 한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박물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지만 강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미사에 참석했지만 머리로는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 내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영적 에너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자신의 설교가 그 시대의 욕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실천으로 행하지 않고 입으로만 전하는 복음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겸손이 부족하여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로서 필요한 것은 겸손한 기도와 실천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아멘.
1.나를 위해 주님을 위해 얼마나 쉬고 있습니까?
2.지난 미사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3.오늘 기도와 미사는 머리의 세상사를 비우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미사가 되도록 노력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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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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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님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워낙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저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지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떡볶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떡볶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무슨 떡볶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제가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끼리 어떻게 파스타를 먹어요?”
남자가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고, 남자끼리 파스타를 먹으면 안 되는 법이 있을까요? 깜빵 갈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라는 식의 편견이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서 새로운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를 오히려 커다란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일상 안의 고정관념 탈피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그냥 좋은 구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들, 즉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또한 배부르게 먹여주는 등,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도 나고 미움의 감정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셨음을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떻게든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도, 다른 이유로 당신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주님의 뜻인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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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은 잔인한 킬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은 한 달을 굶은 사자가 있고, 세 번째 방에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위험한 방과 그래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방은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세 번째 방이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킬러라도 사람이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불이 났으면 자신이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말도 통하지 않는 배고픈 사자이기에 당연히 제일 위험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런데 제일 안전한 방은 한 달 굶은 사자가 있는 방이라고 합니다. 너무 긴 시간을 굶어서 탈수증세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혹은 죽은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의 결정은 대부분 이렇지 않았을까요? 깊이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빠른 판단을 신뢰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것보다는 빠른 판단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로 나아가는 것도, 섣부른 판단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죄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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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은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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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권력이 분산 되어 있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금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한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적었습니다. 기업의 독점을 막았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향상 시켰습니다. 특허를 통해서 창의성을 보장하였고,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집중된 권력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였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생기고, 세금보다는 뇌물에 익숙해졌습니다. 뇌물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뇌물은 부유한 이를 더욱 부유하게 하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신사가 독점하니 통신비가 비싸고, 핸드폰이 있어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으니 물동이를 들고 물을 얻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했던 나라가 추락하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질 때입니다. 소수의 탐욕이 사회의 조직과 질서를 무너트릴 때입니다. 공화정에서 황제의 통치로 바뀌었던 로마가 그랬습니다. 왕실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던 스페인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했던 베네수엘라가 그랬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탐욕은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다수의 국민들을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자원이 많아도, 국토가 넓어도 권력이 독점되면, 재벌과 권력이 유착하면, 소수의 탐욕이 기승을 벌이면 가난한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적어도, 국토가 좁아도 공정과 정의가 보장되면, 기회가 균등하면, 부정과 부패가 자리 할 곳이 없으면 나라는 부유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으로 충만하게 성장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름 날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처럼 생기를 잃어버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는 신앙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세상의 명예, 부, 권력을 향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영혼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이 독점되었고, 소수의 탐욕이 다수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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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영근신부-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로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과 <호세아서> 말씀의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 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몸살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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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송영진신부-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복음 선포 활동을 하고 돌아온 사도들은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마태 10,16) 것과 같은 상황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마귀들의 저항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겪은 일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새 힘’을 주기 위한 배려입니다.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은 오늘날의 ‘피정’을 풀이한 말과 같습니다.
피정은 세속에서 소모된 영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고,
또 세속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일 미사는 ‘작은 피정’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주일은 주말이 아니라 주간 첫날이라는 점입니다.
주일을 주말의 휴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신앙인에게 주일은 한 주간을 시작하는 날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는 날입니다.)
2)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
당신이 쉬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도 많이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는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의 뜻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요일과 상관없이 계속 일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가신 것은,
당신이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가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좀 뜸해졌을 때 가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사도들에게 휴식이 필요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외딴곳’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앞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말이 아니라,
뒤의 32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말입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적지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막연하게 짐작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먼저 가서 기다릴 수 있었는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다는 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로써
그들의 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보다도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있었던 그 사람들이
진짜로 휴식(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상황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과 함께(또는 성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언제나 항상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보호자 없는 고아 신세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빵의 기적’도 일으키신 것은,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들에게 참된 휴식(안식)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4) 그렇다면 사도들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일하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사도들만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그 사람들도 함께 데리고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들이 외딴곳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피정을 방해한 사람들이 아니라,
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참된 휴식(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안식을 함께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도들도 그 빵을 받아서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제자들이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했고(마르 6,35-36),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적의 빵’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마르 6,41).
그런 제자들의 모습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고,
또 피정을 하면서 동시에 ‘피정 봉사자’로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피정에 참여하지는 않고 봉사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피정하면서 봉사도 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이미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서,
목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 일에 정신을 빼앗기거나 한눈을 팔다가 목자를 잊어버리고,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양들을 찾으시고
지켜 주시고 먹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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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즉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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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어 그간의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보람과 아쉬움을 헤아리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육의 쉼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듯하지요. 그래서 일단 외딴곳으로 떠나서 쉬도록 배려하십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신 쉼은 안타깝게도 불발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쫓아온 군중이 먼저 그곳에 다다라 갈망 가득한 눈으로 예수님 일행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서 목마르고 허기지고 불안해하는 양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흡사 목자 없는 양들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예수님 마음을 움직여, 예정했던 쉼을 미루신 채 그들에게 다가가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제1독서는 거짓 목자에 대한 주님의 단죄와 참 목자의 도래를 약속하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예레 23,2)
사실 양들의 주인은 목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목자로 세우신 이들에게 당신 백성을 맡기신 것이지요. 하지만 목자들은 자기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양들을 제멋대로 다룹니다. 섬김은커녕 돌봄조차 소홀히 하면서 양들의 우유와 고기와 가죽과 털로 제 이익을 채웠지요.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자를 약속하십니다. 거짓 목자에게 시달린 당신의 양 떼를 다시 불러들여 참 목자 아래 모아주실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 아래서 양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길을 잃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번성하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평화의 주님을 선포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 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는 양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옛 목자 아래의 양들과 새로운 목자의 양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경계하거나 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참 목자께서 목숨을 바쳐 양 떼들 사이의 장벽이었던 계명과 조문을 율법과 함께 폐지하시고 적개심을 허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이 착한 목자의 섬김과 돌봄의 첫 수혜자가 바로 자신들임을 잊지 않았다면 불발된 쉼의 기회도 크게 서운하지 않았을 겁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격려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천방지축 미숙하고 부족한 자신들이었으니까요.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섬김과 돌봄의 사랑을 앞으로 만날 양들에게 베풀 것입니다. 스승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았고 또 목격했으니 영육에 각인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들은 군림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며 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착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머물러 그분 사랑의 눈길을 듬뿍 받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는"(영성체송) 참 목자이십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육의 생명을 떠받치시고 말씀과 성체로 영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니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를 것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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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제16주일-우리의 정의, 우리의 평화, 우리의 목자인 주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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