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7. 17. 07:53

2021년 7월 17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그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니.
(마태 12,14-21)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quenc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정말 억울해요. 왜 저만 희생해야 하고, 제 것을 양보해야 할까요?”


억울하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분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국어사전에 ‘억울병’ 또는 ‘억울증’이라는 단어가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고 신체에 피로감을 느끼며 불안을 느끼는 증상’

현재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 증상에서 더 나아가면 우울증이 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세 한탄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증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억울함을 느끼게 되면 더 큰 병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 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울함이라는 의미보다 지금 자리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찾으려고 집중을 하면 어디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똥도 약에 쓴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억울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주로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억울함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의 가치를 먼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억울한 사람을 따지고 보면, 예수님보다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한없는 사랑을 주었음에도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그리고 그 힘으로 편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을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신 자신을 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구원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예수님이 아닌, 진정한 구원자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 그 자체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향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사랑이신 주님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 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될 것입니다.
성공은 성공 지향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실패는 스스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버리는 사람에게 온다(나폴레온 힐

꼰대

아래의 항목에서 자신이 세 가지 이상 속한다면 ‘꼰대’라고 합니다. 자신이 꼰대인지 스스로 평가해보세요.

1)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2) 한번 이야기할 때 같은 내용을 세 번 이상 반복한다.
3)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4) 나의 경험을 일반적인 것으로 포장한 뒤, 상대방도 동의하기를 원한다.
5) 상대방이 나와 대화하는 것을 피한다.
6) 위의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어떠세요? 저도 꼰대인 것 같습니다. 최하 세 가지가 저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솔직히 저는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따져보니 꼰대가 맞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경청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중심에 내가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상대방이 중심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꼰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해 하는 말이 희망이 될 수 없듯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망’의 상징으로 나오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함구령’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함구령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분이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모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빈부격차가 심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빵을 구할 수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말로 평민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월세가 힘들면 전세를 살면 되고 전세가 힘들면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려거든 같은 처지가 되거나 더 낮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하더라도 그건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자께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신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너무 현실의 사람들과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이 더는 신자들의 희망이 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신임 총장이 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러운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 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 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정말 가난하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처럼 살지 못하는 저 자신으로서는 이분이 비판하는 모습이 저일 수밖에 없어서 또한 머리가 숙여지고 반성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코로나로 인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집에 흰 깃발을 내거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먹을 것이 남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인선 수녀님의 글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제가 흰 깃발을 내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후배 신부님과 알라스카에서 바다낚시를 다녀왔습니다다행이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바다낚시는 좋은데 파도가 심하면 배 멀미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어른들은 다들 조금씩 멀미로 고생 했습니다그런데 선장님의 아들 마이클은 전혀 멀미를 하지 않았습니다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는 6살가량 되었습니다능숙한 솜씨로 고기도 잡았고잡은 고기는 수족관에 넣었습니다마이클에게 바다는 마치 엄마의 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고기를 많이 잡겠다는 욕심도 없었습니다고기를 못 잡을 수 있다는 초초함도 없었습니다그저 바다와 한 몸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다행히 저는 한 마리를 잡았고마이클은 두 마리나 잡았습니다마이클이 청청한 알라스카 바다에서 아빠의 뒤를 이어 선장이 될 수도 있고다른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겁니다마이클에게 바다는 고향이자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입니다저는 태어난 지 2달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마이클에게 바다는 엄마의 품과 같았다면 신앙은 저에게 엄마의 품과 같았습니다학교는 가지 않아도 성당에 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일이 되면 시골에서도 어르신들이 오셨습니다저녁식사 전에 모두 모여서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그리고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오랜만에 친척들과 회포를 풀었습니다늦게 잠자리에 들었어도 다음 날 새벽미사에 모두가 참례하였습니다어머니는 한 달 전에 조상을 위한 연미사를 신청하였습니다친척들은 모두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 대신에 세례명을 불렀습니다할아버지는 손자들 중에 한 명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자연스럽게 성직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신학교에 가고사제가 되면 집안의 어르신들도 자연스럽게 말씀을 높이셨습니다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신앙을 생각합니다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학원에 가지 않고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그곳에는 성공명예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 밤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참된 행복은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그래야만 십자가를 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에게도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교회는 해 마다 성목요일에 밤을 새워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진리는 세상의 것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행복은 세상의 것에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것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양승국신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는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신 메시아,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오 복음 12장 19~20절)

  

제 개인적으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라는 대목에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대대적인 창고 정리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서 여차하면 때려 부숴버리고, 산산조각 내버리고, 불태워 버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기다려주고 인내하기보다, 일벌백계가 최고라고 여기면서 얼마나 많은 여리고 약한 존재들을 단죄하고 기를 꺾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않으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는지, 이토록 관대하신 주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제 인생 여정을 돌아보니, 솔직히 제 자신이 부러진 갈대요,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저를 좋으신 주님께서 일으켜주시고, 깊은 상처를 정성껏 싸매 주시고. 치유해주셨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수시로 체험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 큰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면서 꺾인 갈대 같은 이웃들, 연기를 내면서 꺼져가는 심지 같은 동료들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굳건히 자리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들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여기고. 하느님 대신 큰 인내와 관대함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치유해주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닮아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이 말씀은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저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형제의 짐을 져주기보다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눌렀습니다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제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당신께서는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제가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여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결코 제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진정주님께서는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오히려 저를 택하시어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아멘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영억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용수철을 누르듯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나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때 침묵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영혼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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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복음: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들은 빛을, 바른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 한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한다.

 

그분이 물러가신 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으므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즉 당신을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지도자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나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이로써 모든 민족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이것들을 쉽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에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 21)

-한상우신부-


희망은
간절하다.

끝까지
간직해야 할
희망이 있다.

헛된 희망을
내려놓을 때
참된 희망을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삶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의
희망이란
예수님을
되찾는 것이다.

희망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살과 뼈가
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망은 절망을
이겨낸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은
만남이며
나눔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누는 삶이다.

희망이
우리를
이끌고간다.

오늘을
살게하는
간절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라는
이름에
삶을 건
우리들이다.

간절함이
희망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유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바리사이들이 말씀과 지혜로는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분을 없애려 모의합니다. 그들이 사사건건 예수님의 트집을 잡을 때마다 오히려 그들의 오류와 숨은 욕망까지 드러나 버리니 백성들 앞에서 영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율법과 더불어 자기들의 위상까지 위태해질 것 같아 불안합니다. 

이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없앨까" 그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지요. 율법에서 명분을 찾은 뒤 이민족의 손을 빌리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가능할 것이니, 신성 모독과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의 단초를 동시에 잡으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몰아세울 기세지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마태 12,14)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물러섬입니다. 그들과 대적해 맞서 싸우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며 오해를 풀려 하거나, 그들 편이 되려 돌아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이해 받지 못한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겁니다. 역사상 하느님의 참 예언자 중 누구도 제대로 이해받은 일이 없다는 걸 그분은 너무도 잘 아시지요. 군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 사람이라는 표지는 아니니 예수님은 조금도 조급하지 않으십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마태 12,19-20)
앞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양선하시어 당신을 미워하는 이를 적대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죄인을 무시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보면 참 약하디 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존중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주님의 종이십니다. 그렇다고 마냥 허약하신 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실천력의 소유자십니다.

그분처럼 온유하고 양선함을 지향하는 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은 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조롱하고 무시하며 함부로 대하지요. 사랑을 알아볼 눈도 없거니와 자기들의 이익에 솜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적으로 간주해 짓밟고 제거하려 합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예레 11,20)    
예언자의 기도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넘겨드리고 물러나 기다리지요. 자기 손을 떠났으니 분노하거나 저주할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손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탈출 12,42)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혹독히 이집트를 치십니다. 이미 노예살이의 억압과 착취로 지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믿고 따라나서지요. 모든 싸움은 하느님께서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한껏 고무됩니다. 사백삼십 년만에 자기들을 찾아오신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쓰라리고 서러웠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내셨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상의 땅에서 물러나오면 됩니다. "밤을 새워" 함께하시는 모습은 흡사 어리고 약하고 아픈 자식을 돌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심상입니다. 긴 세월을 거쳐 다시 하느님과 연결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들을 대신해 싸워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다에 막히면 바닷길을 열어 주실 것이고 광야에서 헤매면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같이 맞받아치고 공격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세상입니다. 손해 정도가 아니라 온갖 모욕과 공격을 감수해야 하고 선의조차 폄훼되고 조롱받는 걸 참아내야 합니다. 선함을 무능과 동일시하기도 하지요. 그러면도 끝까지 자신을 해하려는 이들을 존중하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몫입니다. 스승이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면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물러남은 패배나 포기가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의 결단입니다. 맞서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이기도 하지요. 공정하고 진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 모든 걸 맡긴 영혼의 온전한 의탁이고 신앙입니다. 그분이 바다를 열어 주시리라는 것, 길을 내며 이끄시리라는 것을 아는 이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물러나 아버지 앞에 머무르시며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분노, 서운함, 억울함, 두려움, 후회, 자책... 이 모든 걸 우리 대신 재판을 이끄시는 아버지께 넘겨 드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 허락하신 각자의 파스카를 경축하고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몰이해와 저평가, 불신 가운데서도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5주 토요일-기가 꺾여있다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