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매력에 이끌려 설레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십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신명 26,16-19 참조)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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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 등의 일탈 행위가 뉴스에 종종 등장합니다. 잊을만하면 또 보도되곤 하지요. 사람들은 이에 크게 실망합니다. 사실 직접 만났던 사람도 아니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완전 남남인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실망을 표현합니다. 인터넷에 게시글을 올리거나, 기사에 댓글을 답니다. 또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실망을 널리(?) 알리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을 이상화하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만들어온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상대방을 내가 만들었고, 이에 혼자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런 사람을 공인이라고 하지요. 어떻게든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특히 조심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지금의 자리에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안 되는 일일까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모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어떤 죄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람 자체만을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이야기하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엄청난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따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밀 이삭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 손을 비빈 것을 타작 행위라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만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억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새 율법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율법 준수보다 현재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역할은 더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와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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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가장 큰 차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일수록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주장만 힘주어 이야기하는 편견으로 가득 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릅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입니다. 특히 새로운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느 동화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어른은 책 백 권을 읽어도 변할까 말까인데, 아이는 책 한 권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른의 생각으로 아이의 변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양한 변화로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데, 그저 물질적인 기준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포용의 마음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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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강호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강호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자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유학시절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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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지렁이를 잡으려는 새가 있습니다. 새는 지렁이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참새를 잡으려는 매가 있습니다. 매는 참새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매를 잡으려는 포수가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알라스카에서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당연히 한국 신자들과 지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사목하는 지역에는 한국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과만 지냈던 저에게는 신부님의 생활이 무척이나 힘들고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저의 생각과는 달리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아마존에서 주문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치도 담가서 먹는다고 합니다. 음식도 맛있게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용감하게, 기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도 서로의 입장이 다 다릅니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제재를 해제하기를 바랍니다. 종전선언을 바랍니다. 미국과 수교하기를 바랍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바랍니다. 일본은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와 더불어 장거리 미사일의 폐기를 바랍니다. 중국은 북한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러시아도 중국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바랍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바랍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갈등과 분쟁이 있었고, 화해와 협력도 있었습니다.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과 북을 서로 이용하려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남과 북의 문화 교류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서 중국으로, 러시아도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차로 유럽까지 가면 좋겠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긴장과 대립의 군사분계선이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뜨게 해 주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셨고, 나병 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헌신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안식일은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악한 습성을 고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쟁과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일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던 어리석음을 탓하기 전에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고 원칙적이셨습니다. 박사학위도 3개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의 모든 단체는 질서를 잘 지켰습니다. 본당의 모든 시설물도 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생활이 시계추와 같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존경하였지만, 신부님께서 엄하셨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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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승국신부-
내면이 텅 빈 사람들, 자기 성찰이나 영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특징이 있으니, 가장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식별력의 부족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혼돈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 체 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나 나환우들이나 그릇된 신앙인들과는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웃기는 짬뽕’같은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오 복음 12장 7~8절)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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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바리사이들이 트집 잡은 것은 그들의 배고픔이나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하였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차려놓은 제사 빵에 한 일을, 아직 빵이 되지도 않은 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뒤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2)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6)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리고는 모세가 안식일을 야훼께서 주님이심의 표시로 선포하였듯이(탈출 31, 13), 안식일을 당신께서 주님이심을 알리는 날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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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나 자신을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주무르길 기대하나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서로에게 철두철미하고, 사나워지지만 신앙인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대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나요?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날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안식일의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주님의 날에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용서,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성사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이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버릴 때’, 예를 들어서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때, 뒤에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런 거짓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이 더러운 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우리는 죽음의 가지들이 되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돕는 것,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성령의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오스티아 평화의 모후 성당, 2015,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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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1) 제자들은 ‘심심풀이’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배가 고파서’ 뜯어 먹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배가 고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굉장히 중요한 율법이고,
제자들도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한 말은 예수님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기들의 행동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무척 죄송스러워했을 것이고, 많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활이, 또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마태 8,20) 생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루카 5,11)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심한 배고픔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을까?
아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항상 굶주림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식사 초대를 받은 일도 많이 있었고,
예수님을 후원하는 신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8,1-3).
그러나 그 후원이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은 호의호식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고,
상황에 따라서 심한 배고픔을 겪는 일도 생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혹시 제자들이 마음속에 회의(懷疑)를 품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런 고생을 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유다의 배반은 그런 ‘회의(懷疑)’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여간에, 배고픔을 참고 견디는 생활도, 그리고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가 바리사이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당하는 일도,
제자들에게는 고난과 시련이었을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일과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도 겪을 수 있다.”,
또는 “그런 일을 겪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3)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면 예수님께서도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거나 함께 굶는 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을 때, 예수님도 함께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심정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고,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그 마음 그대로
제자들을 가엾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들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26)”
예수님께서 제자들만을 위해서 따로 ‘빵의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배고픈 제자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방치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신앙인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셨는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지 않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비난할 정도로 큰 죄인가?
안식일에는 그런 정도의 일도 하면 안 되는가?”를 따지는 것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안 보였을까?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무시했을까?
실제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바리사이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배가 고프지 않으면 남의 배고픔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자기 배가 고프지 않으면,
남의 배고픔을 모르거나 무시합니다.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사랑보다 율법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제자들은 ‘죄 없는 이들’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죄 짓는 자들’입니다.
이웃 사랑 없이 율법 준수만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라고 말합니다.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배가 고프지만 참고 있다.”는 뜻으로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아닐까?
만일에 실제로 그랬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율법 실천의 기준으로 내세운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일이 됩니다.
신앙생활과 율법 실천의 첫 번째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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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조욱현신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안식일도 그 깊은 의미를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점점 자기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이 주장을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물리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과 레위 지파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제물은 바로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8절)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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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 7)
-한상우신부-
성찰이
필요한
안식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질을
바꾸신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
가능성을
살리는 것이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길이다.
단죄와
사랑은 함께
걸어갈 수
없고 단죄는
결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사람은 안식을
향하고 안식은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낸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사랑은
안식일에
갇혀있는
우리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나게하신다.
안식일의 여정은
사랑과 인정이
필요한 사람의
여정이다.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고
하느님이
계시기에
신앙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삶이 빠져버린
안식일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사랑으로
쓰다듬어
주신다.
안식일의
발견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시 만나는
새로움의
발견이다.
그 새로움은
단죄가 아닌
축복이며
감사이다.
축복과
감사가
삶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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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변하자 그분께서 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에 비견하는 노동으로 비약해서 올가미를 놓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편협한 사고를 넓혀 주고 싶어하십니다.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기인합니다. 엿새에 걸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던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들도 그리하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도 이날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하느님과 더불어 거룩히 지냅니다.
아울러 안식일은 땅과 일꾼들과 종들과 가축까지 쉽니다. 쉼으로써 이 모두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겸허히 고백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처럼, 이날은 일상의 노동에서 잠시 놓여나 자신을 돌보고 회복시키며,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작은 파스카의 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부유한 지주라도 안식일을 통해 자기 조상이 노예였음을 기억하고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하느님 마음이 되어 보는 겁니다. 땅과 일꾼과 종과 가축의 안위까지 배려하는 안식일의 정신은, 그래서 "자비"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결정적 사건, 즉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기술합니다.
"그 피를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탈출 11,7.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린 짐승의 피가 발려진 집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합니다. 재앙은 하느님 백성의 자유와 해방과 안식을 거부하는 이집트인들의 교만을 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단 한 번의 희생제사를 바치신 영원한 사제인 동시에 아버지께 희생제물로 바쳐진 순결하고 흠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리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인간을 옭아매는 죄악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신 겁니다. 그분은 안식일이 자비와 사랑의 축제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남녀노소, 빈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의 쉼은 강요가 아닌 권리로 보장되고 축복받아야 합니다. 그날이 생명을 살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허겁지겁 밀 이삭을 비벼 입에 털어넣는 제자들을 보시며 "쯧쯧, 얼마나 허기졌으면..." 하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의 안식은 그런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시작할 것입니다. 다정한 눈길 한 번, 소박한 격려 한 마디로 형제와 이웃의 생명을 되살리고 회복시키며 안식일의 정신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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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다운
-김찬선신부-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예수님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일까요?
안식일의 주인은 우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알고부터 저는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꼭 주일이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이라고 하였던 것을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안식일 다음 날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거룩하게 지냈는데 그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성찬례와 말씀의 전례를 통해 주님을 기억하는 거였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니 주님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날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주일이 그런 날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룰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일을 그렇게 지내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말로는 주일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날들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고,
그리고 거룩히 지내는 것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 안에서 거룩히 쉬는 것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이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칭하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안식일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날을 주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이 날을
우리는 다시 주님을 위해 주님께 봉헌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주인다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식일의 주인다운 것인지 이제 봐야 하는데
그것은 우선 우리가 일의 노예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는 데 돈이 중요하고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내가 있어야 돈도 있고 일도 있는 것이라는 배짱으로
한 주일에 하루는 나를 위해 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어쨌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 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의 주인답게 안식일을 보내는 것은
일이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의미있게 이 날을 보내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이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생산적이라고 함은 내가 행복하자고 다 사는 것이니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인데
사랑만이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게 하고 날들을 의미있게 하지요.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안식일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거룩한 안식일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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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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